창세기 45:1-8 /주님
주님 2003년 4월 1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5:1-8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45: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성경에 누군가 인물이 등장되면 우리들은 쉽게 신앙적인 라이벌로 상대하고 픈 생각이 들 것입니다. 즉 "야, 대단한 신앙가가 등장했구나 하지만 나도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신앙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옹호해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요조조모 탐색해도, '주님'으로서 예수를 모르면 지옥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지 말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누구를 주로 모신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면 자신은 그 예수님의 들러리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을 자기 인생의 주인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주인공으로 써서 자기만의 인생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내 인생은 어디까지나 내꺼야"라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떤 훌륭한 인물이 등장하면 곧장 흉내내면서 그 신앙을 따라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란 인간이 따라잡을 대상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행전 2:29-35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하면서 다윗과 예수님을 비교하십니다. 왜 비교할까요? 다윗이 잘만하면 예수님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해서 비교하시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지금 다윗은 죽어 그의 묘지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묘지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어디가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주'가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그많은 위인이나 영웅이나 현자들이 많더라도 그들의 뼈들은 그들의 묘지에서 썩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2:5에서는 '중보자도 한 분이시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중보자가 되시면 더 이상 추가될 중보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냥 지상의 움직임을 공중에서 관찰만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 설교에 보면, 주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비로소 성령을 보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야지만 나사렛 예수님이 '주님'이 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며 삽니다. 이 주인이라는 자리를 함부로 누구에게 그저 넘겨줄 위인은 없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기 때문에 아부하는 형식으로 이용하려고, 약한 자에게는 약자이기에 억압해서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생이 주인공이라고 자부합니다. 이런 속성을 지닌 인간이 새삼스럽게 주인을 원하고 자기는 그분의 소유물로 전락할 리는 만무합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일이 성령을 받음으로서 비로소 기적처럼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형들의 입장을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대단히 불행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자신들을 불행한 자라고 여깁니다. 딸 둘을 가진 가정은 아들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을 불행한 자라고 여깁니다. 불행이란, 자신이 예상한대로 일이 안 이루어지기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신의 예상치일 뿐입니다. 매일 아침에는 조그마한 포부라도 상상하지만 밤이 되어 집에 와보면 모든 것이 자신의 예상치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불행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음날 새로운 가능할 법한 상상의 나래를 치게 됩니다. 한마디로 실망과 실망으로 이어진 하루이지요. 그런데 이런 하루가 쌓이고 쌓여서 한평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평생 실망으로 이어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불행이라고 말들입니다. 하지만 이것 가지고 하나님에게 대들거나 불평하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내 아들 예수는 인간 세계에서 머리 둘 곳도 없었다. 죽을 때에도 누가 위로해 줄 사람도 없이 다 떠나고 말았다. 수치의 극치를 맛보면서 죽은 이가 너희들의 구세주이다"고 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하고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도 그러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부터 모든 사도들이 다 그러했고 스데반 집사님도 그러했습니다. 애초부터 이 세상에 기대를 갖는 것조차 문제가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일생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자기 원대로 되어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을 휘젖고 다니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요셉에게 사명을 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말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요셉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면이 나옵니다. 하나는 형들이 요셉의 정체가 드러난 마당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후회하면서 거기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또 새로운 예상치도 못한 일로 인하여 형들은 불행을 느끼면서 동시에 공포에 직면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습니다. 요셉은 도리어 형들을 위로합니다. 단순히 위로차원이 아닙니다. 실제 차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입니다. 형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고 그리고 누구 못지 않고 자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세요. 형들의 생명은 형들 본인들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형들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나요?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만인의 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왜 요셉이 만인의 주가 되어야만 일이 되는 걸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둔 행복의 요건을 찾아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명이 아니라 불행의 씨앗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구원에 성공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해서 주가 되고, 예수님이 오늘날 모든 자의 주님이 되시는 것은, 그 어느 인간도 인간의 자기 관리로서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란 오직 위로 오신 성령님에 의해 나사렛 예수님을 각자의 주인님으로 반가워하면서 생활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개인적인 재산이나 능력 가지고 비교해서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는 주 예수님 때문에 여기 왔는데 당신은 어떻게 왔습니까?"라고 물으면, 다른 교인들도 말하기를, "그래요? 저도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되어야 정상입니다. 헌금을 해도 각자 주님으로부터 받은 성령님이 계시니까 그분의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교인이나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는 아니됩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되시고 주인이 되십니다. 다른 인간들은 결코 주인노릇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차라리 예수님을 추방해버리고 그들만의 놀이터를 만든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주가 되는데 있어 형들의 교만과 질투가 원인제공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일단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담아둡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주위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짧은 한계성으로 인해 그 사람을 욕하고 핍박하고, 구박해서 배척하게 만드십니다. 이럴 때 그 주위의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사람을 그 사회에서 강제로 제일 천한 자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적인 힘으로도 본래의 상태로 회복이 불가능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난 뒤 주위의 어리석은 자들은 만사가 O.K 된 것처럼 안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세상 일이 갑자기 예상치도 못할 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을 사람을 성공리에 제거했다는 자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하지만 뜻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 이상을 찾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버림받은 자를 세상에 등장시켜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한해서는 생명과 축복을 주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원래부터 이 세상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요, 그리고 주인공도 아님을 확실하게 해 두자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소유된 자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놓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소원대로 안된다고 짜증내지 말게 하옵소서. 어차피 우리는 주님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로 인해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