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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46;1-7 /아버지와의 재회강의창세기

아버지와의 재회 2003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6;1-7 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46: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46:6 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46: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약속한 분량에 대해서 일하십니다. 그 외의 것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외의 인물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물어야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런 식으로 제한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입장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만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특히 이삭의 경우를 보게 되면, 그는 인간의 예상에 의해서 출현된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세명의 천사가 와서 이 집에 아들이 생긴다고 말을 하자, 사라는 도리어 장막 뒤에서 몰래 웃었습니다. 그만큼 이삭이 태어난다는 것은 평소에 아브라함 부부가 간곡하게 기도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그들에게 안겨준 아기가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없는데서 생겨난 이삭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시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이삭의 하나님에서 나오는 모든 일들은 모두다 전혀 인간들이 예상치도 못할 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알고 있습니다. 이삭을 낳는데 있어서 자신의 부부가 아무 행한 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야곱도 또한 단지 그 이삭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 안에서 놓여 있을 때만 구원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삭의 출현처럼 야곱도 그런 식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도 성도에게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결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난데없이 그냥 우리 앞에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지시고, 허리에 창에 찔리기까지 하시면도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또한 부할, 승천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야곱쪽으로 돌려봅시다. 그동안 이야기의 대부분은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들은 요셉이 의도적으로 기대했던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기대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서 당사지인 야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그저 요셉이 고생을 통해 얻어진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행한 것도 없이 참여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남으로부터 공짜로 얻는 것이 있다면 대단히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간절히 얻고자 원했던 바가 공짜로 생길 경우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가 원했던 바가 아닌데로 불구하고 뭔가 공짜로 생기게 되면 과연 그것을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다 가차없이 내다버릴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을 때, 그의 소원은 과연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것이었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는 도리어 예수님을 원수같이 대했던 사람이라서 감히 예수님의 사도가 된다는 것을 언어도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중에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당하는 그 모든 시련과 험난한 인생 그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상이요 축복으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한 바도 아니요 그저 준다해도 거부하고 싶은 상황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축복이라고 하시면 주시는 겁니다. 요셉 뿐만 아니라 야곱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원했던 바는 빼앗아 버리시고 그가 원치 않았던 것을 주시면서 그것은 은혜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달라고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설마 시련이나 고생을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겠지요? 우리 인간들은 왜 인생이라는 세월이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60평생, 70평생, 80평생을 우리에게 부여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시간을 떼우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평생을 빈광주리로 간주하고 그 빈광주리를 자신의 야심이나 야망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귀한 보물을 담으라고 접시를 주니까 자신의 더러운 배설물로 그 접시를 담으려는 식입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라고 하면서 자신만의 "My Way(나의 길)"를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 접시에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원하셨던 열매는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 접시와 함께 그 내용물로 지옥에 버려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결코 내 인생의 빈광주리를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이 광주리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빈광주리로 보이는 그 광주리는 사실상 비워있는 것이 아니라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것으로 이미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비워있는 광주리로 보는 이유는, 우리의 탐욕된 마음으로 보게 되면 평소에 원했던 바가 거기에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쉬지않고 후회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가 혼자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러시아에 선교를 갖다오면 일가 친척, 친구,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본국에서 나에게 적당한 목회자 자리를 마련해 주실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국에서의 당회장 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이국 땅에서 무진 고생을 하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과연 정해진 선교 활동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한국 땅을 밟았으나 그에게 당회장 목사님으로 모셔가는 교회는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힘든 선교일을 마다하고 부목사로 눈치보며 살던 동기 목사들이 자신이 가고 싶은 교회 당회장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 목사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왜 나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느냐"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타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간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출세길을 더욱 더 지연시킨 바보같은 짓처럼 여겨졌습니다. 열심히 일했다고 본국의 교회 장로님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실망을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하늘에서 보기에 어떤 자가 알곡이고 어떤 자리가 가리지입니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을 쓰레기통에 차버리고, 자신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아직 못받았다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목청을 높이는 것이 과연 알곡다운 모습일까요? 지금도 예수님께서 이 지구상의 골목골목을 다니시면서 전도를 하셔도 누구하나 알아 모실 사람은 없습니다. 전도 많이 한다고 누구 하나 물 한그릇 떠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때, 그 사람을 우대하는 법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음흉한 야망과 꿈을 가슴 깊숙이 숨기고서 교회에 나타나서는 하나님께 아부의 몸짓을 해봤자, 그 가라지가 알곡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본성을 결국에는 계속 감추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마귀는 너무나도 인간에 대해서 잘 압니다. 따라서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을 해도 마귀로서는 하등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가슴 깊숙이 숨어있는 그 소원거리를 제공하면 금방 그 사람은 복음을 버리고 자신을 추종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야곱은 자신의 모든 기대치는 하나님에게 깡그리 빼앗긴 상태입니다. 야곱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그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과연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태를 되기를 진작 원했던 바입니다. 물론 과거에 야곱이 열심히 하나님 곁은 떠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을 근거로해서 지금의 야곱에게 그런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잘나갔던 못나갔던 상관없이 지금 야곱을 데리시고 해야 할 일이 또 남아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고 애굽까지 동행하시겠답니다. 그 일은 곧 야곱보다 먼저 앞장 서서 선발대 형식으로 요셉을 다루시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야곱과 함께 동행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알곡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알곡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립하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결코 그 사람이 평소에 원했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다 장만하시고 완성해 놓은 그 은혜의 세계로 초빙되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상상한 바를 초월할 정도의 세계입니다. 지금 야곱이 요셉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상상도 잘 안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동행했던 요셉의 여정을 야곱에게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바로 야곱의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된 축복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그가 사랑했던 자식 요셉이 얼마나 힘든 희생과 수고의 인생을 보내었는지 다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영이 성도에게 임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성도와 동행하셔서 그토록 힘들고 힘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로 초빙하시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도는, 자신이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꿈꾸는 가라지같은 포부나 비젼같은 것들은 다 포기하게 만드시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함에 경탄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교회라는 종교단체가 풍성하다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나름대로 조립하여 그것을 탐하는 식의 기도와 목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가라지를 전문적으로 요리하고 유혹하고 지옥으로 빼돌리는 악마의 주특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내가 원하고 주위 일가 친척들이 요구가 있었다고해서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차라리 악마의 종으로 행세하는 편이 솔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도 성도는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모릅니다. 결코 우리가 남은 여생이 빈광주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따로 채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은혜로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우리에게 날마다의 광주리를 우리에게 넘겨주십니다. 우리는 그 광주리 안에서 예수님의 시련과 아픔과 승리하심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거의 십자가로 기억되지 말게 하시고 지금 나의 현실 속의 십자가로 살아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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