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1-7 /축복과 저주
축복과 저주 2003년 5월 25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1-7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찌어다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49: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49: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성경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소개하는 식이 됩니다. 인류의 최후는 축복된 상태, 즉 천국과 저주의 상태, 즉 지옥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두 갈래의 길로 빨려 들어가면서 마무리됩니다. 장래 일이란 인간에게 늘 궁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개인이 장차 만나게 되는 일이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개인이란 축복을 내려준 당사자와는 영원히 떠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원줄기에서 계속 작은 뿌리가 밑으로, 밑으로 새로 생겨나듯이, 아무리 뿌리가 나무 본체에서 멀리 뻗어 나간다 할지라도 결국에서 원줄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분은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상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바로 멜기세덱 계열에 속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무리해도 멜기세덱의 축복의 권한 밖으로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받지만, 그러나 이삭과 아브라함의 만남은 이삭의 입장에서 볼 때, 장차 오실 축복의 메시야를 아버지를 통해서 미리 만나는 격이 됩니다. 이것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에게 내려온 축복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받은 축복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그 범위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서 지금 12아들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그 장래 일을 자식에게 언급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이 전수해 준 축복으로 완결되지 않고 새삼스럽게 야곱이 나서서 또 아들들에게 축복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날이 갈수록 장차 만나게 되실 메시야의 모습이 보다 많이 후손들의 일생을 통해 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22에 보면,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속성이 지난 이스라엘 역사를 지배해 왔다는 것입니다. 축복이든 저주이든 결국에는 축복과 저주를 하신 당사자를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 분께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의 속성을 실리면서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 설계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종교 생활이란 자기 생활에 활력을 부어넣기 위해 취미생활을 하는 것으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집에 애완견하나 키우듯이 참한 하나님 하나 재미삼아 키운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여전히 자기 것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인생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기를 멋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라는 가정이 나옵니다. 이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오직 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 방식을 보다 효과있게 위해 떠돌아 레위 지파의 한 소년을 데리다가 사적인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당시 신앙이 파산상태에 있기에 자기 부동산을 갖고 있지 못한 레위지파들은 어떤 식으로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 살아남는 방식이 사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댓가로 상계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마저 자기 소유물로 삼아서 보따리 들고 돌아다닐 뿐이요 하나님마저 개 목걸이 걸어서 달고 다닐 것이 뻔합니다. 이처럼 실제로 축복을 받지 못하고 마치 축복받은 양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여전히 자기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고정되고 확정된 운명을 그들이 부담 된다고 자기 위에서 철거하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자기 마음 먹은대로의 인생을 따로 설계해 나가려고 합니다. 여전히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무엇인가를 한 번 엿 볼까요? 즉 우리의 미래상이 무엇인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21:32-35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류의 미래가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게 하실까요? 창세기 49:2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여기에 보면,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축복의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즉 어떤 마음 상태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유사하며 어떤 마음 상태가 예수님의 마음과 거리가 먼 것인가가 소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의 장래에 대해서 야곱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요, 둘째 아들은 시므온이요, 셋째 아들은 레위입니다. 과연 이들은 얼마만큼의 축복을 할당 받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장차 오실 심판주의 마음을 표현해 줄까요? 르우벤에 관해서 창세기 35:22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빌하라는 여자는 야곱의 아내인 라헬의 여종입니다. 이 빌하라는 여종은 야곱과 동침하여 단과 납달리라는 자식을 낳은 적이 있습니다. 즉 야곱의 자식을 낳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 르우벤은 이 빌하라는 여종과 통간해 버렸으니 이는 야곱의 아내를 뺏은 것이 되고 야곱의 침상을 대신 차지한 셈이 됩니다. 이것은 자식을 하나님이 축복으로 여긴 야곱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노선에 인간의 죄악이 침범한 바가 됩니다. 과연 이런 짓을 한 르우벤에게 어떤 식으로 심판주의 모습을 보일까요? 오늘 본문 3-4절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에 나오는 '초등'이라는 어려운 말 뜻은 '드높다'는 뜻입니다. 성서 공동번역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라, 너무 우쭐하고 세차구나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 걷잡을 수 없는 홍수 같아. 끝내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 결국 예수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정력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르우벤을 지적하시면서 나타내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이런 성품이 영웅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축복에서는 너무나 먼 품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넘쳐나는 힘으로 사는 것이 장자다운 모습이라고 보십니까? 그것은 야곱이 축복받기 전의 심성입니다. 이것은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될 성품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아들에 대해서는 야곱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5-7절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34:25에 보면,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의 잔인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복수에 나섭니다. 과연 이러한 심성이 예수님의 마음일까요 아니면 정의로움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분노한 성질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즉 이 순간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조절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질대로 상대방에서 퍼붓는 것입니다. 참음이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면이 예수님과 많이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의 축복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심성을 닮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축복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