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8-11 /유다 지파
창세기 49:8-11 /유다 지파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유다 지파
2003년 6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8-11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49: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사람이 아무런 걱정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일까요? 그것은 장래를 보장받은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장래를 어떤 식으로 보장해 주실까요? 그것은 예언으로 보장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다행스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이 몽땅 그 사람의 장래의 복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다지파에게 내린 축복이 결코 유다지파에게만 국한 될 사항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지파의 축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1-12절에 보면,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통 포도주, 포도밭 천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의 상태로 본다는 뜻이요, 땅이 축복받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복받을 만한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왜 유대지파의 거주하는 땅이 축복을 받을까요?
그것은 그 지파에서 누군가 특이한 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홀리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홀'이란 임금이 갖게 되는 지팡이를 말합니다. 즉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원한 왕'이 있는 이상 그 지파는 영원한 축복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왕은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왕이 나타나는 지역을 오늘 본문에 보니 '실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지파가 나중에 진정한 장자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지파에만 최후의 장자가 돌아가야 합니까? 시편 78:55-72에 보면,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그럴찌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자 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 같이 일어나사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요셉의 장막을 싫어버리고 오직 유다 지파를 사랑하시로 마음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런다음 왜 유다 지파 외에는 장자가 아니되는가 하는 점을 나타내보이시기 위하여 그들의 육적인 행위를 허용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을 증거들이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왕을 세우실 때까지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성과 인간들의 죄악성이 병행해서 다 함께 대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죄악성이 확연하여 드러나는 지점이 '실로'라는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막이 처음으로 세워졌던 장소입니다.
예레미야 7:12에 보면,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78:60에 보면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실로라는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고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치 '실로'라는 것이 지명이 아니라 어떤 인물의 이름으로 거론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다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진정한 지도자가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실로'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최초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인물에 담겨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의 역할을 유다지파에서 나와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올바른 속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르우벤은 탈락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유다 지파를 논하기 전에 첫째 아들 르우벤,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에 대한 예언은 르우벤이 행한 행동과 연관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에 내린 하나님의 예언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행동과 관련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침상에서 아버지의 처와 통간했습니다. 그래서 장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자인한 본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온 이스라엘 전체에다 뿔뿔히 흩어져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지난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과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 예가 창세기 43:9에 보면,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지금 그 자리는 , 막내 동생을 인질처럼 애굽의 총리대신 앞에 데리고 가야 될 시점에서 유다가 아버지 앞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 막내 동생을 무사히 아버지 야곱 앞에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이 동생 대신 죽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장렬한 생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존이 우선입니다. 우선 자기가 살아남아야 그 다음에 타인도 도울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자신은 죽고 대신 남을 살린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지간이요 부모지간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마음 자체는 야곱의 육적인 본성의 열매는 아닙니다.
분명 이 마음의 근원은 딴 데 있습니다. 그곳이 어딜까요? 사실 유다라 할지라도 다른 형제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9장에 보면,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로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유다는 자기 기분대로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들이 죽자 그 죄악의 책임을 며느리인 다말에게 뒤집어 씌운 사람입니다. 희생 정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피해가 엉뚱한 자에게 가도록 하나님은 조치했던 것입니다. 다말은 이 시집의 잘못된 생각을 바뀌축복의 가정이 되기 위해 자기가 희생하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머느리 다말은 창녀의 모습으로 시아버지 앞에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소 그 유다가문은 죽음의 가정에서 축복의 가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축복 방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자로 인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원칙 아래 이미 자기와 자신의 집안 전체가 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이 원리를 적용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형제들 간의 차이점입니다.
이 정신에 입각해서 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야가 오십니다. 실로에 오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갖는 왕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 축복은 우리의 덕택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오신 왕의 거룩한 희생의 열매인 것을 잊지 맙시다. 이럴 때 우리는 이미 장래가 보장된 자들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릴 축복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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