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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예수님의 설교와 십자가― 소위 산상 설교를 중심으로성경신학마태복음

예수님의 설교와 십자가― 소위 산상 설교를 중심으로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을 소위 산상설교라고 말한다. 나름대로 고유 신학을 품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누가복음 6장에 나와 있는 유사한 말씀과는 차별화를 만들어 해석하려고 한다. '누가 이야기하셨는가' 라는 점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가 어떤 자기 시각에서 편집하려고 했던가에 더 비중을 두는 신학이 된다. 이렇게 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고 가려질 것은 뻔하다. 정치인 연설장에서 갔던 여러 명의 기자들이 각자의 견해에 맞추어 신문 기사를 쓰게 될 때, 독자들이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그 신문기자의 사견이 아니라 그 정치인이 실제적으로 무슨 말씀을 했는가를 우선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독자 스스로가 나름대로 판단하고자 한다. 신문의 평들은 그저 참고로 할뿐이다. 이와 같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주님의 하신 뜻보다도 소위 성경 편집자들의 의도한 바에 더 신경을 쓰면서 신학을 전개하려고 한다면 하인과 주인이 뒤바뀐 셈이 될 것이다. 본 글은 예수님이 하신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우선적으로 관심 두면서 정리한 글이다.

마태복음 4:23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여기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전파해야 되는 이유는 마태복음 4:17에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복음 전파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회개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천국이 가까이 오면 그냥 기쁨으로 들어가면 될 터인데 왜 회개가 꼭 요구되어야만 하는가? 세례 요한에 의하면 이 천국은 심판주가 오셔서 심판 작업을 하시는 그 과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천국이란 심판 행위를 통해서 알곡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따라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심판, 즉 분리에 관한 작업이다.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제대로 분리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 분리 작업은 세례 요한의 능력을 능가하는 작업이다. 즉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러한 심판 작업을 하기 이전부터 인간 세계는 나름대로의 심판 작업과 분리 작업이 수행되고 있었다. 자기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분리 작업이다. 회개에 대해서도 잠시 비교해 보면, 세례 요한의 능력은 기껏 물세례뿐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의 능력을 능가하신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으로서 도저히 엄두도 못내는 능력이다. 곧 불과 성령으로 사역하시는 능력이다. 불과 성령을 다루는 차원은 인간에게 속한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의 설교의 해석 기준을 세례 요한의 활동과 설교를 기준으로 해서 결정지을 수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설교는 세례 요한이 보여주게 될 물세례의 능력을 위한 것이다. 자기 설교를 경청하고 추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물세례 받게 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 설교는 무엇이었던가?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세례 요한의 설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오실 메시아와 관련시켜서 그 성취성을 선포하는데 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와 주 사이에 끼어 있다. 또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적용시켜 주므로서 세례 요한 자신도 또한 말씀 성취의 결과 중의 하나로 삽입시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세례 요한이 자신의 능력 하에 실시하는 물세례도 말씀 성취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요한은 자신의 설교로서 모든 자기의 사명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물세례라는 회개의 능력이 보여주는 순간까지 자기 설교를 통해 계속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는 자들은 단지 동의한다, 회개했다, 각성했다는 고백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 앞에 나와서 물세례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물 세례자 ―물세례 받는 자' 이것이 한 묶음이 되어 선지자 입장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를 메시아의 불 세례와 성령 세례에로 계속 연결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어떻게 연결될까? 여기서 세례 요한이 의아해 하는 일이 일어난다. 회개나 반성이나 각성을 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 이 관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물 세례 안에서 자신의 불과 성령 세례의 의의를 찾아내셨다. '물→불→성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관계를 정립했다. 그런데 불과 성령 세례는 물세례의 능력을 능가해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바이다. 즉 인간의 육으로서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육신' 관계가 형성된다.
물 세례를 겨냥하여 세례 요한의 설교가 선포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원칙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즉 예수님의 설교는 곧 예수님의 물과 성령 세례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불과 성령 세례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능력인 것처럼 예수님의 설교 또한 인간의 한계 밖의 사항을 가지고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다가서시는 것이다. 그래야 '성령↔육신' 관계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신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성령으로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육신을 죽이는 세례가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불 세례이다.

세례란, 세례자의 세계에 세례 받는 자가 연합해서 참여되는 것을 뜻한다. 세례 요한의 설교가 물세례로의 참여를 요청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설교는 그 설교에 추종하는 자로 인해서 불세례와 성령 세례에 참여토록 조처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설교 해석에 있어 이 세례 참여의 의의를 빠트리고 해석되면 옳은 해석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 받은 것은 ' 물세례 주는 자 ― 물세례 받는 자'의 묶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야 '불 세례자 ― 불 세례 받는 자'와 '성령 세례자 ―성령 세례 받는 자' 라는 묶음 안에서 주체와 대상간의 상호 일치성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주는 자로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는 자의 입장에서 시작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는 자들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이 확립된 세계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 1:32-34)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세례 받는 자'가 곧 앞으로 성령 세례 줄자인 점을 세례 요한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만 그렇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 자신의 물세례는 바로 '성령 세례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상을 구현하는데 있어 도리어 참여한 셈이 된 것이다. 즉 물 세례식에 뛰어든 예수님은, 물 세례식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하나님의 성령 세례식이 벌어지는 그 현장에 뛰어든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 설교의 결정체인 물세례가 예수님의 성령 세례와 불세례로 참여하게 되었다면 예수님의 설교는 바로 세례 요한의 물세례의 의의를 담뿍 함유한 채 온전한 불과 성령 세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의 설교이다. 즉 단순히 물세례를 지향하는 회개의 설교가 아니라 불 세례와 성령 세례를 지향하는 회개의 설교가 된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세례를 위한 설교가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능력(세례 요한 능력) 밖의 세례를 지향하는 설교이다. 육신 적인 반성이나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가 결코 아니라, 과연 인간의 육신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성질의 의(義)요 말씀임을 자각하게 한다. 육신적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을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말씀에 의한 불 세례로의 인도함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불 세례는 무엇인가?

마가복음 10:3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마셔야 되는 잔'과 '세례'를 동일한 것으로 같이 언급하고 계시다. 이미 이 당시 예수님 물세례, 성령 세례 다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또 무슨 세례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쓴 잔과 관련 있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주어진 세례는 바로 심판과 관련 있는 세례였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분이기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분이신 것처럼 심판의 세례를 받으시게 되는 분이기에 모든 심판의 기준으로 작용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세례 요한의 선포가 세례 요한의 물세례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예수님의 산 위에나 산 아래의 설교나 아무런 차이 없이 모두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받아야 될 심판의 세례로 인도하기 위한 설교가 된다. 성령의 세례란 바로 이런 불 세례로 가는 와중에서도 그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육신으로 감히 할 수 없는 구원에 있어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28-32) 이 본문에서 인자와 성령이 서로 대비를 일으킨다. 육신으로 대변되는 '인자'가 못하는 것을 성령이 해내신다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십자가라는 심판의 고난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육신으로서의 인자됨과, 그런 가운데서는 인자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을 행사하는 성령님의 활동을 서로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설교도 이 양면성을 다 내보이는 내용으로 담기게 되는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예수님이 병고치신 권능과 병행해서 행하신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 설교의 전반적인 속성이 드러나게 된다. 즉 인간의 육신적 능력을 초월하는 결과가 남겨진 것이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 23-27)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니시면서 설교와 권능을 행하신 후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보고하신 보고서이다. 즉 누가 진정은 하나님 백성인가를 드러내는 작업은 온전히 하나님과 주님의 선택에 국한해서 구원된다는 결과로 집약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오실 메시아의 활동에 대해서 예언한 그대로의 결과이다. 인간의 능력이나 세례 요한의 물세례의 능력을 능가해서 불 세례나 성령 세례의 차원에서 일하셨던 그 결과로 알곡과 가라지가 제대로 분리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리 작업에 동원된 설교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 기준이 세워져야 하는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행했던 회개의 기준이라든지, 심판의 기준 그 자체를 공박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 여기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는 것은 바로 세례 요한 자신의 물세례를 겨냥한 요청이었다. 즉 일단 자신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는 오실 메시아의 처분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은 세례 요한의 '유보적' 속성의 능력이 아니다. 즉시로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신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2-6) 보다 노골적으로 세례 요한과의 차이를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마 11:12-13)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은 이제 실현 단계라는 것이다. 분리 작업의 완성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마태복음 5:20-2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0-22) 이 본문에서, '서기관 바리새인― 옛 사람―심판―지옥불'이라는 고리가 분명히 형성되어 있다. 즉 예수님은 심판하려 오신 것이다. 옛 사람 정신을 가진 자와 새 사람 정신을 가진 자를 분류하려 오셨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의 작업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 차원처럼 회개한 합당한 열매를 맺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주님 고유의 능력이신 불 세례와 성령 세례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실현될 수 있는 결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고침이나 귀신 추방이나 설교는 늘 같이 동반되는 심판 행위일 수밖에 없다. 즉 병고칠 만한 자질이 있어 병고치시는 것도 아니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에 병고쳐 주시는 것도 아니요, 물세례 받은 자에 한해서만 구원해 주시는 것도 아니라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알곡 같은 백성이 새롭게 등장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도리어 주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의 역사요 능력이다. 이것이 병고치심이요 용서하심이요 그리고 귀신 추방이요 그리고 바로 설교이다. 따라서 설교는 동일한 주님의 능력의 행사이다. 인간들에게 뭘 하라 는 것이 아니다. 필히 그렇게 해 내시겠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살도록 해내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기존의 바리새인들이 제시한 의의 기준과 지옥의 기준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그 누구도 인간적인 열성과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또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는 설교이다. 인간들에게 크나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자신의 자질로서 예수님의 설교에 나타난 요청을 달성하리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는 마태복음 7:2의 말씀에 저촉된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누가 비판하는 그들을 비판한단 말인가? 따라서 남을 비판하는 자를 또한 비판하실 수 있는 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심판에 유일하게 먼저 참여하신 예수님 뿐이시다. 여기서 예수님의 설교는, 그 심판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인간들에게 다가서시기 위한 설교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말씀에 관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는 곧 이들의 세계에 동의하고 그 기준에 준해서 생활하겠다는 결단을 드러낸다. 그런데 바로 이들의 기준이 잘못되었고 오히려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말랐다. 왜 그럴까? 그것은 주님이 제시한 새로운 기준에 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줄 몰아서 그런 것이다. 기도라든지, 구제라든지, 금식이라든지, 살인이라든지, 간음이라든지, 맹세라든지 하는 모든 생활면에 있어 그들은 주님의 기준과 일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23) 여기서 말하는 모든 '좋은 열매', '나쁜 열매', 혹은 '참됨'과 '거짓됨', '불법'의 판단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뿐이다. 왜냐하면 '찍혀 불에 던지우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앞당겨 선포해 줄 수 있는 분은 심판의 불 세례 받으실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이로 본건대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예수님이 자신이 받으실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미리 알리기 위해 선포된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심판성에서 자기 심판을 인식하는 자만이 구원되는 자이다. 거짓 것과 참 것이 벌써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분류되는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심판 세례에 참여케 된 자들에게는 이러한 설교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인데 그러나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에 한한다. 그렇지 않는 자는 주님이 제시하는 심판 기준을 거부할 뿐 아니라 이로서 하나님의 심판 기준마저 회피하고 여전히 자기 기준성 안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이처럼 예수님의 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설교이다. 설교 안에서 비쳐 나오는 저주나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맞으신 저주나 다 같은 저주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단순히 인간 행위의 한계성과 실현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과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주어질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적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 설교를 음미해 보면,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4-26) 이 본문에서 '화 있을찐저'라는 말이 반복된다. 과연 부요한 것이 죄악일까? 과연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죄악일까? 여기서 단지 윤리적인 차원에서 죄이기에 '화 있을찐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 자체 내에서 구원이 스스로 조성되는 경우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주를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신 심판적 사역과 결부시키지 않은 채 구원을 구상하는 것에 대한 저주 선포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인간들의 구원을 막으시는 것이 된다. 아무도 기존 구원 개념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사전에 철저하게 차단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아무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준수해서 제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정신 구조 안에서 관행적으로 살아오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삶의 기준은 참으로 낯설고 납득이 되지 않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19)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율법 전체에 대한 포괄적 강좌를 개설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를 할지어다"라는 의무 조항을 추가적으로 첨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를 하지 말지어다"라는 강한 부정적 요구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앨 수 없다는 전제로 시작되지만 사실상 유대교 사회가 적용시키고 있는 율법을 전부 버리는 쪽으로 설교해 나가신다. 도대체 무엇으로 인하여 율법이 완전케 되는 것인가? "…를 하지 말지어다"라고 해서 이미 관습적으로 해오던 율법적 관행을 전부 차단시켜 버린 이 마당에서 율법의 완성을 어떤 식으로 남김없이 완성되는가? 마태복음 5:11-16에 보면 여기에 대한 대책이 나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본문에 보면, '나―너희'라는 관계가 나온다. 여기서 '나'되시는 예수님 없이는 '너희'라는 제자가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는 마치 옛날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더나아가서 옛날 선지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 자체가 그들이 율법의 완전함을 그 시대에 거론했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었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유대 사회의 잘못된 율법관으로 말미암아 역시 같은 차원의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 선지자들이 율법의 완전 실천자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일 그러하다면 그들이 메시아 이어야 한다―단지 하나님과 그 복음과 의를 증거하는 일을 제대로 했다는 점에서 핍박을 받았다는 점을 예수님은 부각하신다. 이 시대의 잘못된 율법 정신으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난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곧 예수님만이 율법 완성을 이루어 낸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자기 제자들로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율법 미완성 세력과 완성 세력 사이에 필연적으로 투쟁이 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투쟁의 모습으로 봐서 예수님 편이 이미 율법 완성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실천을 요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이미 완성되었음을 증거하는 차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결과적 열매들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8-20)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의 기준은 결국 그 기준을 제시하는 당사자되시는 예수님 이외에 아무도 실천자가 되지 못했음을 통보하는 설교이다. 이 실천 기준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향해 새로운 심판의 권세자가 나타났음을 알린다.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의 설교가 전달되는 상황에서는 이미 심판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을 통해서 세상은 둘로 분리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그 표준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 흔히들 산상설교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인간의 자질로서는 예수님의 표준적 의의 기준을 도저히 실현할 수 없으니까 그것이 안타까워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 죄 용서하는 것으로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와, 혹은 구원받기 전에는 옛 성품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순종 못했는데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고부터는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을 하는데 이 모두가 다 예수님 설교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설교는 인간 구원에 위한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역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누구도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설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선택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를 확연하게 구획하시려고 한다. 비선택된 자들은 완악함으로, 선택된 자는 겸손함으로 주님이 하신 설교를 접하게 된다. 설교 자체가 그 누구의 삶과 행위를 옹호하거나 긍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처음부터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도 온전한 율법을 이룰 수 없어 할 수 없이 예수님이 택한 자를 위해 대신 나서시는 것이 아니다. 택한 자든 비택한자든 모두다 오직 예수님이 하실 그 십자가 세례의 배경으로 동원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설교의 완성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뿐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한 구절 한 구절은 십자가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에 해당된다. 십자가라는 실체에서 이어져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 안에는 사랑도 있고 심판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함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잘못된 기준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기 기준에 준한 행위로 제자다운 제자는 단 한 명도 등장될 수 없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만 비로소 죄로 밝혀진 사항들이 예수님의 설교 안에 소복이 담겨 있다. 기존의 인간 행위가 품고 있는 죄악의 본질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조명으로 다 들통난다. 살인죄는 다름이 아니라 화목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요, 간음죄도 다름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하여 희생하려 오신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드러내기 위해 시행된 십자가를 모르는 기도와 구제와 금식은 그 안에서 인간의 더러운 의만 과시될 뿐이니 하나님의 이름은커녕 자신의 이름을 위한 죄악된 행위로 드러난다. 맹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씀 성취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 홀로 이루셨다는 자체를 모르는 증거이며, 율법을 가지고 타인을 비판한다는 것도 최종 심판주가 오직 십자가에서 공개됨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재물을 땅에 쌓는 것도 십자가 의의를 모르기 소치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은 더 이미 소중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범죄한 손과 발과 눈을 뽑는 정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셨다. 오른 뺨을 칠 때에 왼 뺨을 돌려 대는 마음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셨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은폐성을 품은 채 다가서게 한 것이다. 너무나도 낯선 심판의 기준이며 또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세계를 지탱해 온 모든 기준을 와해시켜 버린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나 들 풀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심정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사랑과 희생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 자신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비로소 해석을 얻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설교는 전부다 인간에 대한 심판 선포였다. 행위의 변화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심판 그 자체였다. 새로움을 사람들에게 기대한 심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새로움을 창조해 나가는 말씀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주님 자신의 기도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자이다.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뿐이기에 예수님의 바로 이러한 온전한 능력에 의해서 제자된 자들만이 창수에 의해서도 무너지지 않는 구원에 참여될 뿐이다. 바로 이러 이러한 점들을 설교로 통해 확인 받고 온전히 예수님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 예수님 설교의 취지였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지 않는 그 분의 능력으로서만 살게 된 자만이, 음욕을 품지 않는 진정한 이웃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 분만을 해내셨다는 점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다. 양의 탈을 쓰지 않은 목자 즉 거짓 선지자도 아닌 목자에 관해서도 역시 예수님 뿐이다. 다른 자들은 모두 강도요 도적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8-9) 그러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정한 저주를 맛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설교의 준수자라고 자청해서는 아니되고 안다고 말해서도 아니된다.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이해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설교에 실천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미 확정지어졌기 때문이다. 성도는 설교의 실천자가 아니라 설교의 내막을 아는 자이고 예수님을 아는 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실천자는 예수님에게 거부당하기 때문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예수님의 설교가 십자가 사건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은 온전한 의인으로 예수님만을 홀로 내세우고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세상은 심판 받은 것이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세례 요한 행위가 자신의 물세례 행위를 겨냥한 것인 것처럼, 예수님의 모든 설교도 자신이 심판주로 이미 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시키지 못하는 모든 해석은 그 자체로 소경이며 계시와 무관한 자이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설교하신다. 누구든지 나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하면 천국에 합당치 못한 자라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인간들의 자기 사랑으로 야기된 모든 하나님 말씀 풀이는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말씀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몫이기 때문이다. 육신― 성령의 대비는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만 것이 아니라 사도 서신서 까지 계속 이어진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주님만이 성취 할 수 있는 것을, 인간들이 자신의 육신으로 이루려고 하는데서 숨겨져 있던 인간들의 무지성과 패역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계속해서 문자에서 문자로 제공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단지 문자로만 이해할 능력밖에 없다는 사실로 통해 이미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 됨이 드러난다. 오직 택함 받은 자에게는 문자의 한계로부터 주님에게로 자유 시켜 주는 영이 임할 뿐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바울 서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설교도 오직 문자로 자유케 된 십자가의 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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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