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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총신, 칼빈주의 자들인가?성경신학미가

총신, 칼빈주의 자들인가?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키 크고 성숙미가 풍기는 한 아가씨가 구멍가게에 들어선다. "아저씨 담배 있어요?" 그러나 주인 아저씨는 침착하게 행동한다. "아가씨, 혹시 고등 학생 아니냐?" 그 순간 아가씨는 자기 행동에서 혹시 허점을 보였을까 싶어 안정을 유지하려 한다. "아저씨 무슨 말이에요? 이래봬도 저 대학생이에요. 알 것 다 알아요" 하지만 주인 아저씨는 빙그레 웃음을 띠면서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래 요즈음 아이들 모르는 게 없지. 그런데 말이야 너 고등 학생 맞지 그지?"

총신(신학대학원)이라는 곳이 단순 일반 대학교 같으면, 학문의 전문성만으로 충분히 교수 자격이 된다고 본다. 인격적으로 좀 문제 있고 성격이 괴팍해도 배우는 학생들이 이미 성인들이기에 그 판단은 학생 스스로가 내리도록 맡겨야 하며 또한 더나아가서 그런 사람, 저란 사람을 마주 대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사회를 알고 학문의 다양성을 알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경험을 쌓는 것이라고 여긴다. 학문의 발전이란 우선 발상의 자유를 충분하게 보장하고 그 다양함 속에서 새로운 혜성 같은 지혜를 생성시키는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가득히 부여하는데서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교수들 사이의 의견과 견해의 차이에 생기는 환경에 대해서 학생들은 오히려 반갑고 기쁘게 여겨야 되고 학교는 그러한 혜택을 베풂으로서 학생들에게 최대한도로 학문적 봉사를 할 의무가 있다. 학교는, 학생의 장래와 학문의 증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학교 그 존재를 위해서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바로 이러한 원칙은 신학대학원이라고해서 꼭 달라야 된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 물론 교단 목사를 배출해야 하기에 모두다 똑같은 교리를 답습하여 일단 교단 정체성을 유지, 보존, 전승해야 할 책임이 총신 신학원에 있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이 폐쇄적으로 답습만 거듭한다면 또한 그것을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식으로 시도한다면 이것 자체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된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말은 이 시대의 적합한 진리로서 쓸모 없다는 말이 된다. 영원한 진리가 참으로 진리 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어느 시대적 사조와 어느 문화적 환경에서 진리 값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에 깊이가 있어야 한다. 또한 목사는 이 시대의 진리와 복음의 최첨병이기 때문에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도 진리 자체는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충분히 전하는 자질이 준비되어야 하기에 이미 이러한 험난한 앞날을 위해서라도 총신에서 미리 다양한 신학 사조를 (기본이 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습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총신 신학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기본이 빠진 채 이질적 신학을 마구 배포해 버리게 되면 총신의 장래와 교단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해서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될 문제가 아닌가? 기본이 안됐다는 말은 다른 기본 정신을 유포시키고 더나아가서 참 진리라고 믿어 온 모든 개혁주의적 원리들의 추방을 자연적으로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해도 이 점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란 말인가? 총신이니깐 자유주의적 신학을 아예 배우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자는 말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목회자들이 대할 수밖에 없는 민중들의 사상 속에는 바로 자유주의적 사상들이 잠재적으로 함유하고 있기에 그런 사태에 대비해서 목회상 그 내막을 모르고 있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정체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목회자 자신들이 세상 형편에 대해서 무지몽매하고 학문적 증진에 게을리 하는 자신의 나태함을 적당하게 변명하기 위하여 "나는 보수주의니깐 그런 자유주의는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차라리 직무 유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진리에 관심이 두고 있는 목회자로서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의도와 학문적 틀 만들기에 환경 속에서 그런 발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냐 에 대해서는 꼭 정보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총신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바로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적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장래 목회자 될 사람들에게 이 사회에 만나게 되고 부딪치게 되는 온갖 위험한 신학 사조에 대해서 진리로서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다양한 학문적 체험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장로교 교리의 양보할 수 없는 기본 교리조차 되어 있지 않고 도리어 더나아가서 침례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CCC 선교 단체 사상이나 알미니안적 발상으로 충만해져 버린 것이 총신신학의 분위기라면 이 사태는 보통 위험한 지경이 아니다. 본 글 처음에 예화를 든 것처럼 "교수님은 알 것 다 알지요. 외국 박사니깐 어지간한 신학적 면모는 거의 검토하셨고 저는 교수님의 신앙 양심과 학문적 자질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한 번 물으봅시다. 교수님은 칼빈주의자 아니지요 그지요?"라고 내뱉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이러한 수상한 총신 교수들은 (다는 아니지만)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고 모색하고 있다. 답답함과 조급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전통적 칼빈주의의 틀을 훌렁 벗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다 소위 '개혁주의'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새로운 신학을 삽입시키겠다는 것인데 그들이 내세우는 '개혁주의'라는 것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아니라 '신칼빈주의' 혹은 '신개혁주의'인 것이다. 신칼빈주의나 신 개혁주의의 모토는 바빙크 사상이다. 즉 기독교 이상으로 지배되는 신세계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이데오르기로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들의 십자가 복음은 출발선에서 조금 필요한 뿐이고 곧장 자연 계시를 주된 핵심 계시로 등장시켜 만인 통합주의로 나아간다. 사랑 윤리 지상주의, 도덕 지상주의 환상을 실천에 옮기는 그런 신학에 심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작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 교리이며 더구나 가장 눈의 가시처럼 버티고 있는고 여기는 것이 바로 '선택론'이다. 왜냐하면 '바빙크 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인간 긍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과 불의 심판이라든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제거시켜 주고 대신 초인적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이상적 문화 건설을 달성할 위대한 영웅상으로 인간을 대체해서 세뇌시켜 나간다. 왜 선택론이 그들에게 최대의 적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시켜 놓고 택해 버린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버리면 평소에 자신들이나 긍정적 인간론이라는 취지 하에 벌려 놓은 전도와 선교와 훈련과 교육의 가치성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요 더나아서 결국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 사역과 연관성을 일단 단절시킨 채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긍정적 인간론이라는 논조에서 모든 일을 해석하게 되면,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예정하신 대로 행하시는 구원 사역과 절단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정론에 의하면 구원 상대로 지정된 그 인간이 지상에서 그 어떤 행위를 하든 상관없이 창세 전부터 이미 확정된 약속에 의해서 임의로 어떤 이는 필히 구원하고 어떤 이는 필히 지옥 가는 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롬 9:11-18/11:29-32)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 복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복음적 사실을 긍정적 인간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증언하지도 못한 채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따로 내세우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복음을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켜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 나중에는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라는 두 그룹을 따로 날카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되기 때문이다.(이미 신학 작업의 기초 자체가 인간의 행위를 긍정하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했기에 필히 결론도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신학의 출발선을 무엇부터 잡아야 합니까" 물음부터 하나님의 예정론에다 묻지 않고 그 노선에서 이탈 된 채 제멋대로 인간 구원의 궁금증과 인간 자율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는 과잉 봉사 정신(?)에 의해 시작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구속사적인 관점의 계시를 피해 버리고 비구속사적인 지혜 전승이나 다른 쪽에서 응원을 받고자 하는데 특히 바빙크의 자연 은총, 일반 계시 쪽의 학문적 도움을 간절히 지원 요청 받고 싶어한다. 그래 놓고서는,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라는 두 그룹을 '조화', '균형' 이라는 어설픈 용어들을 동원해 대충 꿔매놓고서는 자신을 겉으로 여전히 칼빈주의자인 양 행세하고 있다.
어떤 교수님은 97년 여름호 신학지남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을 양립시켰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생활에 있어서 이 둘을 다 실행에 옮겼다. 내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하나님의 주권)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인간의 노력)(골 1:29)" (P 57) 필자는 이 문장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교수님의 논리적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개념에 대해서 가치를 둘 다 인정해 주려면 같은 동질의 요소가 구비될 때 대비가 가능한 일이다. 바나나와 사과 중 어느 것이 맛이 있나? 라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러나 기차와 사과 중 어느 것이 맛있나? 라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이 원리에 의해서 본 구절이 교수님처럼 결론에 도달되려면 '따라'라는 말이 사라질 때 가능한 결론이다. 본 구절은 뜻은, 사도 바울 자신이 하는 모든 수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교수님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지 억지라도 보통 억지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교수님같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를 양립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질적상 대비시키거나 비교하거나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주권이란, 단순히 '일 추진에 있어 주도권'이라는 개념보다는,(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의 일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도급 내지는 하청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에 약속된 바 필히 그것을 일방적으로, 홀로 (이점이 중요하다) 수행해 내신다는 의미가 구약에서의 여호와 하나님관에 맞다. (사 14:24/출 6:2-5) 사도 자신의 행위가 곧 하나님의 행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는 것이다. '따라'라는 말이 본문에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께서는 '따라'를 '따로'라고 잘못 이해하고서는 다시 '조화'라는 말을 동원시켜 억지로 결합시키려 한다. 도대체 그렇게 하시는 심보가 무엇인가? 왜 자꾸 주님의 능력으로 환원시키기를 거부하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그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예는 같은 페이지에 중간에 또 나온다. "은사에 있어서 은사의 선물성과 추구성은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은사를 나눠주시는 역사를 하시는 성령의 뜻, 즉 성령이 역사 하시는 방법에 순응할 때에 은사를 실제로 받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교수님을 말씀하셨는데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 의도는, 교수님처럼, 성령을 받기를 추구 안하면 아무리 선물이라도 주어질 수 없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기에(즉 값을 받고 주는 것이 아닌 은혜로 주기에) 그냥-이점이 중요하다-받아라 하는 취지이다. 이렇게 해석해야 교수님처럼 '조화'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을 꼭 안 집어넣어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교수님은 96년도 4월에 나온 [교회사역연구소]라는 사설 단체에서 발간하는 [행하는 자라야] 잡지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하셨다. "믿음을 위하여 혹은 믿음 때문에 행위가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P 28) 이 말씀 속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믿음 때문에 행위가 제약받는다" 도대체 이 희한한 제안이 신약 성경에 어디에 있는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교수님의 취지는, 현 한국 교회에서 내세우는 믿음을 일단 주님도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과 같은 종류라고 간주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논리이다. 하지만 신학교수라는 위치에 있는 분은 주님의 개념에만 종속되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순종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했을 때는 결코 믿음 때문에 행위가 제한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단순한 종교적 지적 수납에 지나지 않는 개념을 거론하면서 '믿음'의 정의로 삼는다는 것은 교수님 자신의 그 다음 작업, 즉 믿음의 합당한 열매, 혹은 행위를 추가시키면 (믿음+행위라는 도식은 실제로 교수님의 [열매로 알리라]라는 저서에 나온다) 비로소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너무나도 작위적 발상이 지나쳐서 나온 결론이다. 교수님의 이런 주장 배후에는, 너무나도 타락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신학자로서 개혁에 일익을 필히 담당해야만 한다는 소박하고도 낭만적인 사명감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교수님은 큰 실수를 하신 것이다. 믿음+ 행위이라고 말씀할 것이 아니라 그냥 간단하게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열매가 없으면 엉터리 믿음이요 구원 못 받습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교수님이 과감하게 이런 발언을 하시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믿음의 정의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아예 아닌 것을 믿음으로 일단 간주해 주고서 그 다음 인위적인 설득 공작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생각이다. 교수님의 이런 틀에 의해 졸지에 십자가 달린 강도는, 행함 없이 구원받은 비표준적인 신앙자로 몰리고 말았다. "그는 믿음 때문에 삶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즉 이 강도의 경우를 믿는 자의 표준으로 삼기에는 뭐 하지만- 앞 뒤 문맥의 흐름을 보아서 필자의 의견을 임의로 삽입한 것임-) 주님은 그에게 필요한 분이었다."(p 28 중간쯤) 쉽게 말해서 강도의 믿음 자체를 순종 행위로 보지 못하고 아예 강도는 행함이 없는 자로 만들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되니 도대체 교수님의 행함에 대한 정의까지 모호해져 버린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예정론에 연관시키지 않은 채 믿음과 행함을 서술해 나가신 것이다. 주께서 택한 자는 반드시 순종 행위라는 믿음만으로 구원받게 되어 있음을 교수님을 믿지 못하고, 도리어 이 많은 한국 교인들을 어떤 식으로 설득하면 살릴까 라는, 한국 교회라는 집단 이데오르기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택한 자임을 자인하신다면, 믿음+행함이라는 도식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구원은 오직 행함이 아니라 다음 성경과 같이 은혜로 됨을 순수하게 외쳐야 될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정말 이 말씀을 하나님의 종 사도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신다면….
또 어떤 교수님은, 97, 10. 7 자 총신 원보에서 [지혜를 모르는 한국 교회] 제목의 논문을 개재하셨다. 거기서 이 교수님은 대담하게 발언하셨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고 했다.…인간은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견해만을 양산하였고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중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서술해 놓았다. 필자가 정말 이 교수님에게 궁금한 것은,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 자에 대해서 왜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지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한국 교인들도 이제는 신앙의 사람으로 믿음과 은혜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동시에(이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문화의 사람으로서 자유와 책임을 외치면서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 교수님은 본 글에서 '동시에'라는 말씀을 아무런 장애 없이 쉽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시는 것같다. 한국교회의 현 실정을 곧 칼빈의 생각과 같은 것인 줄 오해하시는 것같다. 즉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보수, 칼빈, 개혁을 부르짖고 칼빈의 교리에 나오는 이신칭의,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니깐 곧 칼빈주의 진수가 한국 교회의 현 모습과 일치된다고 단정하신 것 같다. 차라리 참된 복음으로 칼빈 생각으로 돌아갑시다 라고 말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하자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다. 이 교수님이 칼빈주의에 얼마나 곡해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는 바로 인용된 문제에서 '동시에'라는 말씀을 허용이 되는 것처럼 오류를 범하는데 있다. 이 오류는 이 교수님의 다음 글에서 잘 나와 있다. 이 주장은 평소 선교 단체에서 늘 주장했던 이교적 신학이다. "물론 개혁파 교회가 늘 주장 한대로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중생한 후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할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 인간의 미래는 인간이 자신의 책임을 행사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어 성공하게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총신의 모든 교수님의 의견이 여기에 동조하신다면 총신을 순복음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로 바뀌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순복음교나 감리교나 침례교 신학은 '동시에'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단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님은 은혜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인지, 예정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완벽하게 무지한 채 (알고 있다면 완벽하게 거부한 채) 논리를 펴고 계시다. 중생된 자의 위상이 어떠한지 전혀 감 못 잡고 있는 분이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된 후에도 (현 한국교회들은)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가 해야 할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세상 여러 문제들은) 선택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본 교수님의 의견은, 종교학에서 대 환영을 받을 주장이다. 왜냐하면 종교학은 하나님의 간섭을 철저히 무시하고 모든 것을 인간 행함의 원리 안에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본 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학문적 권위로서 세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97. 11. 6. 7 양일간에 총신에서 학술 특강을 준비해 두었다. 여기에 등장되는 교수님들은 한국 해석학과 현상학을 전공하는 분들로서, 성령 하나님만이 하실 복음의 이해를, 인간의 이성적 언어해석력으로 대체가 가능함을 논리적으로 소개하시기 위해 계시는 분들이다. (강영안, 신국원, 최태현, 김영한 교수님들) 쉽게 말해서 사람도 하면 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자신들이 공부한 철학을 스스로 배설물로 여기고, 부정하고 곧 자기 전체를 부인하고 오직 성령님께만 의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학문이 곧 성령의 뜻이고 주님의 사역이라고 간주할 요량으로 나서시는 분들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비십자가 정신인 '인간 긍정'으로 나타날 판국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제 더 이상 '은혜'라는 개념도 '인간 노력'으로 대체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후원자 되기 위해 십자가 지신 것이 된다. 정말 이렇게 되면 이것은 기독교가 다 무너지고 남는 것은 '다른 종교' 뿐이다.
실제로 이 교수님이 총신원보에 주장한 지혜 운운은, 그 동안 구약을 구속사적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보던 것에 틀을 벗어버리고 창조적 관점에서 새로이 봐서 모든 인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자는 종교 다원주의들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동시에'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실은 동시가 아니라 종교 다원성과 다양성의 일부로서 기독교를 귀속시키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기독교를 아예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하나의 건전한 아이템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결 론

기본이 안 되어있다. 왜 기본이 안되었는가? 그것은 애초부터 복음과 진리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국에도 십자가가 있었다. 복음에 마음만 있었으면 얼마든지 그 십자가를 위해 순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태어 해외로 나갔는가? 그것은 분명 딴 것을 얻기 위해 나갔음에 분명하다. 처음부터 기본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저 이 거대한 종교 시장을 겨냥해서 하나의 전문 기능인으로 고국에 돌아가서 그 기능에 걸맞는 직장 생활을 구하겠다는 의식하나로 비전삼아 해외로 나간 것이다. 이분들에게 있어 젊었을 때에 한국 교회라는 것이 큰 우상 덩치로 다가왔음에 틀림없지만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한국 교계를 적당히 비판해 보지만 다른 한편은 자신들의 생계와 존재의 발생시켜 주는 고마운 터전이 되기도 한다. 이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는 솔직하게 복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또한 제 전공도 아니고 저는 단지 학문적 도움은 제공하기 위해 총신에 재직해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시는 것이다.
처음 예화를 다시금 거론해 본다. "교수님, 예정론이 어떤 이론인지는 알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 예정론에 매이고 싶지는 않지요. 그지요?"
그러면 이들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신학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이것 하나 확실히 배워 왔습니다."
"그러면 교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에게 기대를 더 걸고 싶지요, 그지요?
"…."
과연 사도 바울이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을까? 인간의 다양성 있는 이성적 지혜를 의존해서 복음을 증거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2,6-8)
이처럼 십자가 앞에서도 인간 긍정 운동을 펼치는 교수님들을 재교육 시키는 무슨 방도가 없을까? 한 사람씩 붙들고 성경공부를 같이 하고 싶은 심정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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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