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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소위 "기독교 윤리"에 동원된 그릇된 성경 해석학들성경신학미가

소위 '기독교 윤리'에 동원된 그릇된 성경 해석학들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칸트의 철학은, 이성의 승화가 곧 윤리임을 알려주었다. 이성적인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윤리와 도덕을 제시했다. 따라서 윤리 안에는 인간이 자신을 초극하려는 몸부림이 담겨 있다. 이 선한 세계에 잠입하고자 하는 해탈을 위해 이성을 모든 기와 힘을 모아 준다. 어쨌던 선하고자 하는 이 목표를 놓고 인간은 자기와의 궁극적인 승부를 벌린다. 선을 향한 끝없는 도전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거기서 발견하고자 하는 집념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도와주는 디딤돌이 필요한데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남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집요한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나름대로 법칙을 세운 바 있다. 여타의 문학 서적과 다를 바 없이 성경도 이성의 빛으로 일관되게 이해하기 위해 언어 해석법이 이성적 논리 작업으로 꾸진히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언어학이요 기호학이요 또한 현상학적 해석학이요 구조주의 철학이다.

이들은 주석과 해석을 분리시키고 있다. 주석이란 일방적으로 성경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수납하는데 치중하지만 해석학이란 일단 그 주석에 근거해서 나름대로 의미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행동하는 인간상'이 정립된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즉 의미라는 것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을 대하는 인간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적 사고를 늘 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 활동의 내면에는, 문학 작품에서의 저자의 의도와 단지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저자와 공통적 인식을 갖게 되는 해석의 장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역사적 속성이 투입된다. 역사가 곧 계시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더 이상 계시에 머물 수 없고, 성경 저자와의 역사적으로 공감대를 갖는 인식의 장에다가 계시의 자리를 내어 줄 판이다. 이제 더나아가서 과거 성경 저자와의 만남이 아니라 현 시대를 사는 인간들끼리의 공동 인식의 장까지 하나님의 계시가 확정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란 곧 독자가 느끼는 의미론으로 전락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책이 아니라 성경 필기자 자신의 신앙 체험을 기록한 문학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공통적 언어 사고에 준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들추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계시를 의존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자처해도 그 계시를 이해하는 틀이, '행위 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해석 기준이 있는 이상 해석 주도권은 여전히 독자에게 돌아가겠금 허용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은 성경의 내용과 배치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믿음이 발생되는 것이 결코 인간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있다. 그러나 이들 해석학자들은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인간 이성의 나타남과 해석 능력으로 바꾸어 치기를 하고 만다. 왜 이런 발상에 만족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성을 자신의 존재함에 근거해서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있다. 따라서 모든 의미는 나에게서 나와야 되고 그때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생기고 따라서 가치 있는 것이다"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 결국 현상학적으로 봐서 해석학이란,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인간이 자기 존재를 합리화하고 긍정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성경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의 이름'을 드높이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주석이요 의미 생성인 것이다. 이 점에 윤리요 도덕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최종적으로 자기 존재의 괴력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긍정되어야 돼. 나는 끝까지 살아 있어야 돼. 나는 가치 있는 인간임에 틀림없어. 봐 나는 이런 선한 일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쓸모 있는 존재 맞잖아!" 하는 이 심보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허망함이 들어 있다. '기독교 윤리'란 사실상 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기독교적 윤리'이다. 즉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태를 빌려 왔지 사실은 인간의 자기 영광성에 집착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이교적 사고 논리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겔 39:25)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열심적 사역은 오로지 하나님 자기 이름을 위함이지 인간의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이 열심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된 자들은, 구원되고 난 뒤에 도리어 자신의 죄지음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다.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겔 39:26) 구원된 자는 결코 자신의 윤리적 향상과 도덕적 함양을 증진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구원해 주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에 붙잡혀서 날이 갈수록 자신의 죄악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깨달아 갈 뿐이다. 이런 점은 초보 신앙이 분명히 아니다. 첫 사랑은 영원토록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계 2:4) 어떤 행실이 나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털에 향유를 부었을 때, 윤리적으로 도덕적 기준으로 해서 비난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러한 죄용서 함의 사랑이, 성령이 오시고부터는 십자가 사랑으로 획일화되면서 기존의 모든 윤리적 도덕적 기준을 철폐해 나갔다. 참된 신앙 행함은, 도덕적 행실이 아니라 그 신앙 대상을 위해 과감히 죽는 결단을 두고 말한다.(고후 5:15/롬 14:8) 이것이 바로 라합의 거짓말 예와 아브라함의 이삭 바침을 예로 들었던,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0-26) 결국 이러한 계시 해석을 유발시키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분석 능력인 언어 해석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시작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시대에 있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사건이란 지금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늘 죽어 있는 자임을 증거 하는 사건이다. 이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전 성경을 해석해야만 한다. 과거의 모든 이성적 사고는 배설물로 여기고 ….
이제 인간 긍정과 인간 영광을 위해 신과 흥정에 나서는 불신앙적 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기호학에 의해서 모든 것이 흡수되는데 이는 기호학이 단순히 해석학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전 계시 매체를 종교적 상징물처럼 간주하여 새로운 신비성 해석을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기존의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 스타일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인간들의 신비성이 총동원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호학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학문으로 거듭난다. 모든 대상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변별적인 관계 체제를 통해서 이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언어를 기호 체제로 보는 기호론 과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기호학은 의미 생성에 대해서, 저자가 의도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 의미 부여를 의미라고 보지 않고 오직 구조 분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구조 분석의 환경은 사회 관습이나 그 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믿음과 감정인데 기호학은 이것들의 내용을 발견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 의미를 생성해서 드러나는데 까지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즉 기호 설화 구조와 담화 구조와 텍스트 구조가 그것이다. 기호 설화 구조를 거쳐서 담화 구조로 나아가는데 담화 구조란, 기호 설화 구조를 조립하고 적당하게 배치하여 보다 큰 의미가 전체적으로 윤곽이 잡히고 현실화시키는 단계이며, 기호 설화 구조는 이러한 주제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단계이며, 텍스트 구조는 의미가 표현면과 결합하여 발현됨으로서 실제로 실현된 구조이다.
기호 구조에 있는 의미 생성은 소위 '기호 사각형'이라는 도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기호 사각형'은 분절의 의미들의 변별적인 위치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의 의미 범주 안에는, 서로 병존하면서 변별력을 갖는 관계와 그렇지 않고 상호 공존 불가능한 관계로서 변별력을 갖는 이 4 가지의 유형이 있다. 우선 상호 공존 가능한 변별 자질은, 반대 관계이다. 남자라는 의미가 일단 주어지면 이 남자라는 의미의 범주 안에서 남자와 반대되는 여자라는 의미가 변별적으로 생기는데 남자와 여자는 상호 공존 가능한 변별 요소이다. 그런데 남자라는 의미 범주에는 비남자라는 하는, 남성 요소가 소실된 의미 자질을 변별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남성과 비남성은 반대 관계가 아니라 모순 관계로서 공존 불가능한 사항이다. 여기서 공존 불가능한 모순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이 모순 관계를 도리어 긍정적인 관계에 이를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즉 여성과 모순 관계에 있는 비여성을 위치해 놓고 이 비여성을 도리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비여성이기에 남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남성과 비여성의 관계를 상보적 관계이며 또한 함축 조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호 사각형이 논리학과 다른 점은, 개별적 사항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변별적 관계에 우선한다는 점에 있다. 이 변별적 관계성에서만 의미가 비쳐 나오기(생성)되기 때문이다.(발생하고는 다르다) 이러한 기호 사각형이 하나의 담화가 실현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제공한다.

남성 --- -- --- ---- --- 여성 --- --- --- 반대 ------▶ 부정

------------- 모순 ------▶ 긍정

………………… 함축
--- --- --- --- ---

설화란 일종의 에피소드, 즉 짧은 이야기이다. 설화에는 나름대로 체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체계는 어떤 인물이 계약에 의해서 조종 받으며 또한 그 계약된 대로 수행하는 행위와 능력을 묘사한 것을 기본 모델로 한다. 계약된 대로 완수하게 되면 끝에는 상이 주어지고 못하면 벌이 제공된다. 이 모델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역시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다. 기본적으로 네 가지 행동자가 나오는데 첫째 관계는 주체/대상의 관계이다.(Subject/Object) 이 관계는 목표와 추구로 표현된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이야기 연결에 필요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관계이다. 두 번째는 발령자/수령자 관계로서, Object, 즉 목표물이나 추구해야 되는 것을 지시하고 결과로 제공받는 자를 나타내는 관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발령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서로 대칭 되나 반대되는 관계가 아니라 발령자가 수령자에게 대상(행위 목표물)을 주더라도 발령자는 여전히 그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델에는 주체를 도와주거나 반대하는 자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1-13에 나오는 예수님의 귀신 쫓아내는 설화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발령자 → 대상 → 수령자
(예수님) (시민으로서의 복귀) (귀신 들렸던 사람)

↑

협력자 → 주체 ← 반대자
(돼지들) (귀신 들린 자) (귀신 부대)

그런데 마가복음 5:14-20의 내용은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발령자 → 대상 → 수령자
(예수님) (자비) (귀신들렸던 자, 친척, 데가볼리 주민들)

↑

협력자 → 주체 ← 반대자
(주님과 이별) (예수님의 대리자) (거라사 주민들의 옛 사회질서)
(감탄)

이제 담화 구조 단계에 와서 보면, 이 두 가지 에피소드를 연이어 놓고 보면 전체적으로 점차 일관성 있는 내용을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앞의 설화도 도착-만남-대화-간청-분리-떠남/죽음이라는 내용 구조를 가지고 있고 두 번째 설화도, 도착-만남-소문-간청-분리-떠남/생명의 내용 구조를 갖고 있다. 같은 동위성 위에서 등장 인물과 바뀔 뿐이다. '동위성'이란 아무리 행동자들의 행위가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도 토대가 되는 하나의 개념이 어떻게 계속 연장되어서 한 편의 설화의 동질성을 확보해 주는지를 이해시키는 속성이다. 아무리 점차 복잡해진다 할지라도 의미 생성은 일관되게 나온다. 예를 들었던 마가복음 5:1-20의 의미를 '기호 사각형'에다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사회성,전체성 고립성,특수 개체
생명, 도시 대 시골 ,지역 사망, 육지 대 바다
산과 무덤

비고립성, 비사망 비사회성
육지+바다, 바닷가, 벼랑 비생명, 산

이처럼 기호란 그 시대의 사회가 안고 있는 기호들의 변별적 선택 사용으로 인해 의미가 주어지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기호학의 의미는 그 시대 사회의 의미이다. 사회의 구조가 곧 기호학에서 말하는 관계성이다. 여기서 문화인류학적으로 봐서 사회에서의 구조 파악은 그 사회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라는 인류학자는, 인간 두뇌는 이항적 대립의 법칙에 준해서 기능 한다고 보았다. 이 대립과 차이성과 변별성에 의해서 그 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두뇌로부터 비롯된 무의식 상태인데 이러한 무의식이 모든 인류의 친족 체계를 이룬다고 보았다. 상호 대립되었기에 여기서 교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환 현상은 대립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 속에서 화평을 추구하고자 매개물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교환되는 것이다. 이로서 질서를 잡아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 사회만이 문화 현상이다. 여기에 금지 규정이 생긴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이 인간 종족끼리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도 이루어지다. 여기서 신화적 무의식이 그 형태를 드러낸다. 자연의 무서운 재앙과 장래의 질서 붕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중간 매개물이 투입되는 것이다. 이 중간 매개물은 실제적 위험 상황을 유사한 위험 상황을 연출하여 대신 치환하므로서 하늘의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신화를 구성하는데는 기능적 의미와 상태적 의미가 결합되어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농업이란, 식량을 수집하는 일이다. 수집하는 일은 기능-행위이고 식량은 상태-행위이다. 또한 전쟁이란, 적을 살해하는 행위이다. 살해하는 일은 기능- 행위이고 적은 상태-행위이다. 농업과 전쟁은 서로 과잉적으로 대립되는 행위이기에 신화를 이 둘 사이의 대치를 화해하기 위해 사냥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사냥이란, 초식동물을 죽이는 행위인데 죽인다는 것은 살해 라는 기능-행위에 속하고, 또한 그 고기는 식량이기에 식량이라는 상태 행위와 동일하다. 따라서 이상의 의미 요소를 기호로 표시하면, y는 수집하는 기능-행위, x는 살해하는 기능- 행위, a는 적이라는 상태- 행위, b는 식량이라는 상태- 행위이다. 이런 등식이라면 사냥의 대상이 되는 초식동물은 수집되는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에 y 되고 그 기능- 행위는 적의 반대이기 때문에 -a가 된다. 이상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Fy(b) 농업
Fx(b) 사냥
Fx(a) 전쟁
Fa(y) 초식동물

결국 농업과 전쟁의 대립은, 초식동물을 사냥한다는 치환으로 인해 해소가 되는 것이다.
Fx(A) : Fy(b) = Fx(b) : Fa(y)
전쟁 : 농업 = 사냥 : 초식동물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0:30-37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적용시켜 본다.

종교적 신화는 하나님: 인간 혹은 생명: 사망의 날카로운 대립이 있다. 이 대립이 어떻게 해소될까?
우선 기능적인 행위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뉜다.
x y
(사마리아인의 기능) (강도들의 기능)
자비심 폭력심

이 x의 기능- 행위를 보여주는 자는 사마리아인과 예수님(하나님) 뿐이다.
반대로 y의 기능-행위를 보여주는 자는 강도들이다.
그리고 자비심과 폭력심도 보이지 않고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다. 이들의 기능- 행위는 반자비심이기에 y에 해당된다. 그리고 강도 맞는 자는 폭력을 당했기에 -y가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상태- 행위를 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위치를 b로 간주하면,
a b
(지나치는 자) ( 길 위에 있는 자)
제사장, 레위인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이상을 정리해 보면,
Fx(b) 선한 사마리아인
Fy(a) 제사장, 레위인
Fy(b) 강도
Fa(y) 강도 만난 자
Fx(a) 예수님(하나님) ?

Fx(a) : Fy(b) = Fx(b) : Fy(a) = Fx(b) : Fa(y)
풀이하면, 자비로운 하나님의 자비가 이 땅에서 서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자신의 자비심을 실행하여 악하고 패역한 세계를 사랑으로 바뀌어 나간다는 뜻이다. 즉 A/non A = B/non B 인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1:1-10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단계 하나님(생명) -― 인간(죽음)
2 단계 주 예수 그리스도 ― 죽은 예수
3 단계 바울 사도 ― 바리새인들
4 단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갈라디아인 ― 이교도였던 갈라디아인
5 단계 가르침으로서의 복음 ― 가르침으로서의 다른 복음

결 론
이처럼 기호학적 구조 해석법이란, 이미 해석자 자신이 머리 속에 품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내뱉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동어반복이라고 한다. 같은 개념을 되풀이한다고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인간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적으로 구원되겠다는 종교적 욕구이다. 이 욕구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차단하신 바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바로 인간들의 구원 욕구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말리신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비신앙인 신학자들은 도저히 그럴 리 없다고 아예 돌아볼 생각을 안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많은 자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교의 접촉점을 삼아 조금만 이성적으로 도와주면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체가 바로 자신들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다 무지와 불신앙과 패역적인 마음에서 나왔다. 진짜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구원받은 자신의 구원 요구와 전혀 상관없고 오히려 자기 방식대로 구원을 생각했기 때문에 죄없으신 예수님이 공로가 무시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늘 가슴 아파하는 자이다. 참으로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은 오직 선택된 자만을 찾아가도록 주께서 배후에 역사 하셨을 뿐이다.(행 18:10/28:25-28) 성령을 받지 못한 비택자들은 이런 안목이 없기에 그저 자신들의 구원욕을 치하하고 믿을 만한 자료와 지식과 정보 제공을 해주는 자를 주의 종인 줄로 알고 있고 또한 종교적으로 구원 서비스를 해 주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교회에 대한 임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누구만 구원받는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이 세상 모든 자를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이게 사실이다. 그리고 오직 긍휼을 받을 자에게 구원이 돌아간다. 그 자들이 누구인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결국 선택론을 거부하는 이단들이 오늘날 해석학 철학을 가지고 이교적 종교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고 자신의 학문적, 이성적 자존심을 다 걸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거부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직 가짜 메시아, 가짜 하나님, 가짜 교회, 가짜 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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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