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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2성경신학창세기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2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계속)
3. 구속사 만들기와 인간 '행함'의 자리

인간이 범죄한 후에 모든 면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을 공격한다. 하나님의 율례나 법도나 말씀이나 언약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홀로 달성해 내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자들이 아니라 거침없이 대드는 존재로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런 바벨탑 건립으로 처음 드러난 성향은 '자기 이름 내기'이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자기 이름 내기'란 모든 의미성을 인간 존재성에 두겠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규정은 어떻게하면 인간의 존재함을 드높이 다질 수 있는냐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은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손심을 걸고 열심으로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수는 식으로 만물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현실로 보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피조물의 대한 권리 행세를 마음껏 하신다. 더 이상의 현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이름내기' 성향은 '구속사→역사→시간→인간→존재' 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내막을 쏟아내고 있다. 어쨋던 자기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 점을 현실 규정의 핵심으로 간주해 달라고 신에게 항변할 참이다. 인간의 존재성을 배제하고 하나님쪽에서 구원사역을 시도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영광을 위하든 무엇을 하든 사로의 존재를 피차 인정해주시면서 그로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인간들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서 그 인간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도록 하므로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의미를 갖추는 식으로 일을 하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나의 존재 증명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간 자존심 깨기도 '구속사→역사→시간→인간→존재' 라는 과정을 뒤덮으면서 따라오고 있다. 존재의 궁극적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다. 역사 속에 등장했다 점멸된 모든 존재의 재등장과 보존성은 구원의 내용이 아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소멸하고 사라지게 한다. 이는 시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계는 인간이 봤을 때 부정성(否定性)을 지니고 있음을 시간은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 구원에 앞서 '시간 구원'에 들어간다. 즉 시간 속에 살아진 것을 수집하여 구속사를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시간 구원'으로 삼게 되며 시간안에 있는 부정성을 제거하므로서 모든 시간이 인간에게로 의미있는 것으로 되돌아오게 만들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앞서 시간 구원이 우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에 직접 나서기에 앞서 '구속사'라는 명칭으로 시간 구원에 몰두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겠끔 한다. '구속사→역사→시간→인간→존재' 라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상은, 신의 구원성은 인간쪽에서 제시한 구원성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이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신성의 자리는 '존재의 보편성'으로 마감 처리된다. 존재의 보편성이라는 구원의 종국점에서 쏟아내는 각가지 개념들은 어쨋던 존재의 영원한 보장을 위해 부정성이 삭제된 개념들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해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므로 말미암아 만약 사랑의 대상 상실이 빚어낼 결과로 인해 자체적으로 이 결함적 소질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만능의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의 존재성 없이는 '사랑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사실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반발의 속셈은 따로 있다. 곧 구속사의 수립이 하나님 일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구속사의 도입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내막을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이 배제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더나아가서 인간들이 자기 존재성을 기초로 수립한 구속사와 크게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내용상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구속사를 구상하면서 첫 번 시작과 맨 마지막 목표를 의식하자마자 그 선들의 상호종속성과 통일이라는 사상을 물리칠 수 없게 밀어닥친다. 역사 경과 자체의 의미통일과 수평적 통일!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디서 가져오며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적 실재성을 위하여 따로 인식론에 요구되고 있다. 인식적인 것의 근거 설정과 규정과 변명을 존재적인 것에서부터 얻기 위하여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를 구별지우는데부터 시작한다. 즉 인간만이 역사를 만들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 역사의 부분으로 참여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바로 이런 연유로 객관적 자연 세계를 규명한 우주론과는 별개로 인간학 위주의 새로운 신화를 낳게 된다. 그런데 이 신화가 영원을 사칭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 실제 역사로 인해 보장받는 영원임을 증명해야 되는 부담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 등장되는 것이 소위 미래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한 '믿음'(신앙)이다.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에 직면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는 것은 역사에 관해서 뿐만아니라 자신에 관해서도 새로운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곧 '믿음'→'이해'로 바뀔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이다. 즉 임의적인 사건들을 한 통일성 안으로 묶어내지 못하는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하니 믿음의 내용에 관해 이해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물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물로 채우는 것이다. 그 이해 안에는 초자연적인 자리도 필히 마련한다. 즉 구속사 자체가 초자연적인 면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끊임없이 '이해'→'믿음'으로 나아가는 합당한 구원 요건이 구비되어야 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와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차이를 좁히고 극복하는데 '행함의 자리'가 부상된다. 만약 믿음에서 출발하면 '행함'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행함을 지속적으로 제거시키고 부인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고난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자가 자기 '행함'의 증인에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벧전 5:1/2:21) 만약 인간의 행함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은혜의 남은 자'는 발생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은혜는 고유 원칙에 따라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것은 '남은 자'는 원칙이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롬 9:27 참조) 은혜는 언약에 준해서 구원받기로 택함받은 자만에게만 적용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은혜의 온전함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믿음은 추가적으로 인간의 행함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믿음에서는 오직 믿음만 계속 나온다.(롬 1:17)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행함'이란,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이해성을 기본으로 하고 그 이해한 바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력을 발휘해 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요소는, 옆의 사람의 이해력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의 이해력이 아니라 행함의 당사자인 곧 '나'가 이해하고 있는 이해력이 곧 나의 '행함'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행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력을 그 인간 혼자서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에 휩싸이게 된다. 이 양보 못할 고유성 확보로 인해 그 사람은 극한 희열에 사로잡히게 한다. "보라, 목표는 섰다. 주의 명령을 행해보리라. 내가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행하는지…!"
절대적 주체의식에서 유발된 투지성, 이것이야말로 생물체가 산 생물로서 가지는 존재성의 절정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기 행위함에서 나오는 이 환희의 맛을 잊지 못한다. 자기는 어디까지 기죽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이 되고 싶고 일종의 영웅이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내가 행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인간은 늘 이런 식이다. 중보자가 행하시는 대속의 의의(意義)가 무참하게 밟혀버리는 순간이다. 주님의 찔림과 매맞음(사 53:5)은 인간의 매맞음에 밀려서 그 가치가 어디론지 살아지기 일 수이다. 그리고 십자가(자기 부인)를 향하여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다음과 같은 주의 은사성은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인간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다. 인간을 죄인취급하면서 행하시는 대속의 기능도 그렇고 그 우연적인 적용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수 있나이까"(요 3:8-9) 이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태도를 눈여겨두자.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수 있나이까?"
예수님 당시 예수를 만난 대부분의 상식있고 건전한 인사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상종하지 않으려했다. 이 인간 나라에 불필요한 인물로서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로서 세상을 끝내야 했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고 "왜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도대체 그 때 그 인간들이 어떤 이해 구조를 갖졌기에 그 분을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밀쳤는가 말이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그 때 당시의 유대인과 동일한 이해 구조를 가졌기에 여전히 그분에 대해서 못마땅함이 신앙의 주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하반절)라는 말씀은 아직도 인간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이해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충돌한다. 인간들의 이해는 우연성을 배제하려든다. 우연성을 주류가 되면 이해성은 와해되고 이해성이 모호하면 행함의 궁극적 의미도 흐물흐물해진다. 자기 행함이 허무로 끝나면 곧 자기 행함에 대한 처리 능력도 신뢰치 못한다는 말이 된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바로 이점은 산 생물체가 근원적 생의 희열이 빼앗기는 경우이다. 따라서 신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한다. 전적인 믿음도 아니요 그렇다고해서 전적으로 행함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이해의 폭을 초자연적인 것까지 넓힐 용의가 되어있다는 고백을 늘어놓게 된다. 어쨋던 이해의 범주 안으로 신앙을 아우려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행함'의 유효함은 유지될 터니까. 그런데 이러한 타협책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다가오셨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 상반절)
'이해' 상태는 자연적인 것이기에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애쓰고 노력하면 처분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이해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에 처분불가능한 대상(신)이 내용으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같은 역사를 놓고 이중 역사관이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이해의 범주에 합류시킨다. 역사는 역사로서 이해하고 초역사는 과잉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로되 자연적 역사로서 보는 안목과 초자연적 역사로서 그 역사를 받아드려야 하는 이중 안목은 '행함'에 있어 신에게 기도로서 달성해야 될 역사와 자체적인 힘으로 이끌어갈 역사로 갈라지게 된다. 어쨋던 '행함' 그 자체는 부정(否定)당하지 않는 장치가 된다. 즉 실역사의 안목에서는 인간은 가치 생산의 주체자가 되어 완벽함에 도전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발생되는 실수나 잘못한 면에 대해서는 즉시 초역사 성향으로 안목을 바꿔 신으로부터 그 때 그 때마다 자비와 용서를 구하면 된다고 여긴다. 신는 어떤 보완적 기능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안목 변경과 관련된 '행함'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의 심성으로 넘겨주신 자유의지에 해당되기에 영원히 인간의 몫으로 잔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역사쪽으로 안목을 바뀌었다는 그 '행함' 자체는 하나님쪽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의롭고 정당한 행위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은 아직도 신뢰할만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해도 내 길을 갈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기획하고 결단한 행위가 전제되어야지만 정당함이 가능하다는 정신 자세가 본유가 되어 있기에 이것을 기초로해서 보면, 초역사적으로 눈 돌린 것 뿐만아니라 실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모든 인간의 행함도 원칙적으로 정당한 일임을 자부하고 확대할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공인하는 의인'으로 자처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내부 속성상 처음부터 의 지향적으로 살아왔음을 공언하면서 그 증거로 율법화된 자신의 인식의 틀을 폭로한다. 아무리 율법 시대가 지나가도 준율법적 조항을 뇌리에서 떨쳐버리지 않는다. 어떤 식이라도 율법과의 관련을 맺지 않고서는 의(義)라는 것은 아예 생겨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의 행함이 가미되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의가 나를 향해 날라오는 그런 어쩌구니 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어이 거룩한 법과 자기를 결속시키는 모사적(模寫的) 행위를 보이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 타인의 의(義)와 격차가 지는 나만의 고유의 의(義)를 위하여 여차하면 무기로서 써먹을 종교 기능을 품어도 된다고 여긴다. 이는 명백하게 다음의 성경 구절과 격돌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코 앞에 두고 기어이 차별지는 자기 소유의 의(義)에 전 자존심을 걸고 대결에 나서는 그 심보는 도대체 배후에서 누가 조종하기에 발생되는 악인가!
이런 정신이 거대한 인류 역사를 떠바쳐왔다. 이로서 인류의 의(義)는 궁극적인 손상이 없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거뜬하게 장만되었다. 이 판단은 실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이 세상적으로', '피안적인 것'을 '차안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사고 방식을 취한다. 인간들이 초역사적 결단으로 내리는 의미의 본질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고 싶을 때는 인과적 도식이나 종국적 도식으로는 결코 정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더 높은 층위의 연관 속에 넣어서 논술한다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더 높은 연관 속에 있는 개체가 역사 안에서 나타날 때면 그 높은 연관의 법칙에 준한 필연적 질서를 나타내면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역사로서 총체적으로 그 의미를 정립하려 할 때에는 그 독자적인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즉 고립을 인정해 주지 않고 어쨋던 그 나름대로의 연관성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구속사에 있어서 겉으로는 역사학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결국 불가능한 것이므로 역사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내용에 맞도록 재편성된 모습이 된다. 일차적으로 우선 역사 속에서 자리잡게 해 주자는 것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 양식과 초월적 표상은 상호 합치되지 못하면서도 마치 합치된 것처럼 해놓고서는 그 다음으로 해석과 이해의 과정에서 특수한 초자연적 체험을 지닌 자만이 새로운 이해의 특성을 갖자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는 실제 역사와 초자연적 해석의 역사는 상호 일치될 수 없는 두 개의 역사관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다. 이 현상은 성경에 나오는 구속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도출되는 현상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초자연적인 사실을 주장하는 데는 원칙적으로 충분한 근거 설정이 가능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초자연적 해석적 역사가 도입되어야 될 그 정당성과 그 정당함을 확신해 줄 수 있는 근거는 또 어디서 끌어와야 한다. 그곳이 어딘가?
현실 판단과 그 해석에 대해서 확정 지울 기준은 역시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 구속사가 더 깊은 책임소재지를 요구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인간 행함의 자리'가 구체화 된다. 구속사는 인간들과 인간들 간의 어떤 차별성과 결부되어진다. 즉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차적으로 어떤 초월적 세계라는 장소를 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리가 따로 있다든지 하여 인간적 처분에서 벗어난 존재 즉 초월자 내지 처분불가자(신)의 존재 방식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어 놓는다. 그런 무리들의 이해 및 인간의 실존은 결국 인간 밖의 문제이다. 반면에 언어 표상은 언제나 처분이 가능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학적 현상인 신앙 표현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기 해석으로 머무는 것으로 귀결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는 이 이중성향이 바로 이중적 역사 개념으로 말미암아 규제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중립적인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능력들로 말미암아 같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 그 역사 속의 신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 동시에 역사를 의미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얻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새로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아니라 이해가 되고 만다. 신앙이 인간적인 결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이 신앙의 구성적인 특징이다. 그것을 표현해 줄 역사적 바탕이 성립될 수 없다는데서 구속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은 정당한 것이다. 고백되어진 신앙인들의 표현들이 그 고백의 순수성을 제대로 전달해 주고 있느냐는 것은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신앙 속에 놓여 있느냐와 관련 있다. 성경 해석은 다른 문헌 해석과 다른 이해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계시는 인간의 말로 인간에게 전파되었고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성경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 자체에 대한 인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내용과 부합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인간의 말씀'의 취지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말씀/인간의 말씀' 즉 상호 배치되는 관계 속에서만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론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시도는 기껏해야 동일한 이해의 원래의 자리를 들추어보기 위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참 신앙에로의 접근이 전혀 가능치 않다. 시간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해의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립된 신앙 세계의 변함없는 환경 속에서 시간이란 더 이상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관이나 역사관에 있어 타인과의 미묘한 차이성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신앙이 타인의 신앙보다 옳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무리한 논조에 불과하다. 사실 모든 이해는 권력 관계 안에서 피어난다. 권력은 임의적으로 형성되어 사람들에게 덮쳐진 허리케인과 같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꾸 필연적인 진리체계로 오해해 버린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0-21,25-27) 제자들의 의식은 그 당시 권력 구조층을 쳐다보면서 살아온 결과였다. 개인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권력에 의해서 영향받지 않는 이해력은 없다. 일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어떤 낯선 사건이 새로움 경험으로 나의 삶과 연결되었다고 여기고, 따라서 그 시점에다 역사적 의미를 주고 그것이 신의 계시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하게되었다고 자부해 보지만 이것이 낯선 것에 대한 맹목적 환대인지 아니면 지난 날에 대한 반감으로서 이번 체험에다 깊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갈망의 표출인지 어떻게 확인 될 수 있는가? 즉 인간 고유의 거부권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특정 계시 부분에 대해서 선택적으로 행사했는지 아니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말이다. 인간은 자기 관심사 결정에 관해서도 자유롭지 못한다. 관심 끌만한 것을 개인이 임의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좁혀진 그 사회 전체 관심사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형성된 것이다. 관심사에 대해 인간은 초월이 허용되지 않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유행이란 그 사회가 유포하는 무의식적인 사주요 훈육이다. 개인은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해 왔기에 처음부터 자유와 전혀 무관한 자유 개념을 갈망하는 본능의 소지자가 되었고 전혀 주체성이 아닌 주체성을 희망하게 된다. 자신의 거부와 자신의 수용 사이에서 달리 결과를 확정되는 운명 같은 것은 아예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여 자신의 선택이 자기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그르치게만들지는 않을까해서 자기 실수와 실패에 부담을 느낀다. 이런 폐쇄성에서 내려지는 그 어떠한 판단도 진리 이해에 도움이 안된다.
좀 더 진전된 예를 들어 보면, 이미 사랑 받은 사람만이 신뢰의 대상이 되고, 헌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해방되어 있다고 고백하지만, 욕심이 권력화되어 작렬하는 죄인 주제에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을 보고 그것을 과연 사랑이며 하나님의 헌신이라고 느낄 위인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임의로 지정한 그 시점과 상황은 차후에 다른 특별한 경험에 의해 언제든지 자리 바뀜의 위치에만 놓이게 된다. 임시적인 상황을 억지를 부려서라도 역사적 상황으로 조작해 내기 위해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지금의 결단에 준해서 책임지겠다는 나설 수도 있다. 그 어떤 일이 닥친다할지라도 지금의 결단을 후회하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는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의지로 조성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결심에 동원된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미래에 자살까지 감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도 자기 만족의 일종이 되어 버렸다. 소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형태의 자존심을 일일이 의미있는 것으로 줏어담아서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와 그 유구한 역사', '내가 행한 목회', '노회법이나 총회법', '내가 행한 전도나 선교', '내가 행해서 효과 본 기도와 금식', '내가 실시한 제자 훈련'이라는 등 등의 모든 자충족성 개념들) 그림자의 색깔은 어디서나 암울한 법이다. 세월이 가도 환영과 우상들은 어디까지나 얇은 껌같은 그림자이다. 인간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찌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독자적인 차원에서의 권리나 의무가 아예 주신적이 없다.(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독자적 위상이 허용될 수 없다.) 또한 자신만의 체험을 가지고서는 보편적 하나님의 뜻에 그 어떤 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하나님의 뜻은 단지 그리스도의 그 한 몸에 매여있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하나님이 일률적으로 내려주신 세례를 무색케하지 않으려면 성도의 개인적인 인생관을 특정 인생관으로 긍정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도리어 예수님 체험과 경험만이 몸 전체에 확산될 뿐이다. 이러한 몸의 종속을 유지시키는 실정에 대드는 사태에 대해서 성경은 단호하게 대처한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2)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어떻게 작동했기에 성도가 주님의 몸이 될 수 있었던가를 염두에 두고 살겠느냐는 반문이다. 만약 성도의 개체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과 신앙의 세계를 분석하려는 자는 '주님의 강함'을 모독하는 자이다.
타락성 속에서 하는 인간의 모든 운동은 타락한 인간의 운동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경성은 내가 애써 결단한다고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경성은 나의 존재 방식이고 죄를 지향하는 쪽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예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 본문에 의하면,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실존성이 필히 합당치 못한 행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재가 행위 속에서 구성되는 때에도 존재가 행위에 준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행되어 있다. 인간에게 있어 '행함'의 자리가 애초부터 상주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행위에 의해서 존재를 재구성할 때에도 삭제될 수 없는 이유는, 행위를 평가하기 위한 존재성 그 자체가 죄에 어떻게 기울어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함을 내세우지 않고 존재에 있어서는 이 확인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이미 인간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애써 다른 가능성 있는 추가적 존재적 모습을 동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위로 인하여 인간은 죄인이라고 새삼스럽게 규정해야만 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어떤 죄악된 행위를 뿜어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을 다루어나가야 한다. 이런 논점에서 봐서 '믿음',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행함'을 거론하는 것은 그 '행함'의 진리성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정할 입장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복음 증거가 될 수 없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고 하신 하나님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라는 말씀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자기 증거로 귀결시키고 마신다.
구원론에 있어 시간개념에다 의존하고 그 토대를 고수하려는 이유는, 성경에 있어 이러한 하나님으로의 귀결성 표현을 핵심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경대로 모든 하나님 위주가 되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실을 인간 자신 안에서 포괄하는 역사관의 가능성이 상실된다 반대로 인간의 자기 역사관이 붕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객관화 작업은 자기 구속사관 안에서의 객관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곧 자기만의 신앙이다.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 신앙 아닌 것은 무엇인가? 없다. 모두 다 자기 구원사를 의지하는 근거에서 나오는 신앙 행위이다. 따라서 자기 신앙의 타당성은 각자의 구속사관 안에서만 유효해지고 더나아가서 여느 인간의 고백조차 진리 아닌 게 없는 것이 된다. 모든 이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도 그 대신 뭔가 자기 신앙성에 부합되는 절대적 시간의 틀을 장만하고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게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구원 사실의 바른 순서를 설정하려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자기가 그렇게 해서 정말 신약성서와 그것의 증언에 대하여 봉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 나름대로 신약성서의 말씀과는 상관없는채 세속적인 시간 이해를 섬기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사역은 그 어떠한 인간의 구원적 요구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터져 버린 상황에서 성령이 하실 일은 십자가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과 더불어 벌어지는 구원의 기적에 관한 일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그 어떤 인간의 지혜의 협조(칸트에 말에 의하면, 다양한 외부 계시를 접수하여 하나로 표상으로 파악해 내는 '직관의 통일능력')도 필요치 않고 고려해 줄 수가 없다. 오직 구체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겨냥할 뿐이다.(요 16:13) 오히려 보편적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계시는 늘 위협과 공포와 절망을 안겨다 준다. 시내 산을 내려온 모세가 함부로 일반 대중들 앞에서 서서 말을 할 수 없어 수건을 얼굴에 쓰고 나타나는 입장이 된 것과 같다.(고후 3:12-18) 성령에게 구원이 일임되어 있다는 것은, 허구 안에서 변별적 기능을 하는 기호로 통해서만 실제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의 구원적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영의 차원으로 육의 차원을 정죄하면서 일하심을 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영으로 난 것만 영이다. 이것도 실제다. 따라서 영으로 난 것에 육이 개입될 수 없다는 실제적 내용을 가지고 성령께서는 나타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성령은 육에서 나올 분이 아니다. 육은 육만 배출한다. 영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다.
인간 육의 특징은 구원에 있어서도 그 육을 발판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인간 육을 향하는 모든 '가르침'은(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의 명령적 가르침과 권면이든, 목사의 설교이든, 구속사이든, 복음이든, 율법이든, 일반적인 에티켓이든, 학문에 관한 것이든, 윤리와 도덕과 법이든 상관없이) 오히려 욕망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 육이 품고 있는 성질이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8) '가르침'이 어떤 내용을 가졌던 간에 현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굴된 욕망을 확인케 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가르침'을 물고들어와서 자신의 욕망이 제거되었음을 변명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여러 개가 아니다. 다른 욕망을 정죄하지 못한다. 변신되어 대체될 뿐이다. 인간은 어떤 '가르침'에 마주치기 이전부터 이처럼 제멋대로의 힘 아래 사로잡혀 있다. 율법은 누가뭐래도 선하다. 원인은 '육'에 있다. 인간이 그 어떠한 이론과 신학으로서 구원 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육의 소산물로서의 구원 욕망이 자기의 육적 행위에 의미둔 구원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 하나 하나마다 나름대로 구속사적 의미로 정렬시켜놓고 그 다음에 외부적인 신과 거래 내지는 언약적 흥정에 나선다는 말이다. 이러니 신의 존재성은 일종의 인간들의 자기 변명이며 도피처이며 구색에 불과하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점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구원과 무관함을 더욱 더 확고하게 다지는 증거로 삼으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의 만남에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 없이 만나지는 경우는 없다. 구약 때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19:12-13/20:19/고후 3:6-11 참조) 신약에서도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이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심판이란 곧 인간으로부터의 구원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가 자신이 구원되도록 노력을 안하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 또한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구원되고자 시도하는 것을 용납해 주신 경우도 없다. 인간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의도적으로 차단시키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은 자격이 처음부터 주어진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차단을 돌파하고 구원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은 본질적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하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천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롬 11:32 상반절) 하나님의 가두어 두심에 대들면서 자기 힘으로 돌파해서 생명 나무 과실이 있는 곳에 접근이 가능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센 구원의 힘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창세기 3:24의 생명 나무 지킴을 무효로 만드는 이런 경우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왕노릇을 유명무실해진다. 왕이란 자기 통치력에 한치의 하자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구멍이 뚫린 줄도 모르는 그러한 왕은 정말 온전한 왕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이 가두심을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 예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의 여호와 전쟁은 '진멸'을 그 특색으로 한다. 불쌍히 여기지 말고(신 7:2)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하셨다.(신 3:6/삼상 15:3) 결코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수 11:20)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구원은 순전히 언약에 의해서 자비를 받는 자에게만 국한되고 나머지는 언약에 의해서 진멸당하도록 맹세되어져 있다. 이게 구원의 전모이다. 인간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긍휼함을 입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도들의 순종과 의로운 행위가 칭찬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위가 결국 본인으로 영광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활동하시는 주의 몫으로 돌려져야 마땅하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시 89:1-4/110:1-4)
신약에서의 종말이란, 언약에 의하여 나타난 종말이다. 이 종말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 앞에 선 인간은 그 순간 영원한 자아성만 덩그러니 남을 뿐이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자 택일의 결단을 내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신앙의 결단을 내리면 자신이 내린 그 결단의 시점을 중앙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 질서 편성된다. 이는 없던 과거와 미래가 새롭게 발생되는 것을 뜻하고 자아의 진정한 평가는 그 미래의 끝으로 유보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었다는 지금의 자신이 내린 신앙의 선택만큼은 의로운 편에 속한다고 스스로 간주하기 때문에 궁극적이고 전적인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체험은 다가오지 않았다. (만약 영원히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 이렇게 되면 구원이 취소가 되나 아니면 아예 구원된 적이 없음을 뜻하는가? 이런 체험에 운명을 맡기는 자는 결국 체념으로 끝난다.) 즉 하나님이 뭐라든 나 자신은 예수를 믿기를 결단 내린 선함만큼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만약 내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악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 드릴 마음 자세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면 자기 결단에 대한 의미나 가치도 없어지고 그와 동시에 그 결단의 시점을 중심으로 잡는 새로운 구속사가 생성될 수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말 구속사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만의 구속사이지 인간들의 구원사가 아니다. 즉 예수님의 결단이 확대 적용된 구원사 속에 성도가 놓여 있고 인류가 놓여 있는 것이지 개인의 신앙 행위에 의한 구속사는 성립될 수 없다. 주님의 구속사 자체가 인간의 구속사를 정죄한다. 그것은 단 한번이 아니라 매번 늘 정죄한다. '때가 찼다는 것'의 의미는. 역사 자체가 정죄를 받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연장시켜 추가적 비밀을 얻어 낼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종말은 더 이상의 시간 연장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세계시간 상의 끝부분이 아니다. 종말은 세계의 일부도 아니며 세계 안에 아무런 병행항도 갖지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서는 그 어떤 특정한 상태로도 표현할 수 없고 연장을 은근히 고대하는 세계의 눈으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비록 세계 및 세계시간의 지양으로서 세계 및 세계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직관적 형식을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제나 마치 '아닌 것 같은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아의 존재성은 이 역사의 터전을 부정못하는 그런 방식이기에 겉보기 종말론 상정하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 종말을 현재화할 수 있는 그 어떤 바탕의 설치도 용서하지 않는다. 본인의 존재의 밑둥치마저 공격하고 제거하는 종말론을 누가 상상하고 싶어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이 세계의 겉보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을 뜻한다. '옛날에' 있었던 창조의 역사와 '장차' 있을 종말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내게 아무 상관도 없다. 주님과 상관 있다. 그러므로 바른 의미의 창조와 종말론은 다만 내가 내 자신이 늘 창조되어지고 세계의 종말과 마주보는 위치에서 대결하며 서 있다는 것이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6:19-20/7:29-31)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있는 그대로 보존해 보려는 여망과 또 죽음을 쥐고 있는 미지의 세력에게 미리 동정이라도 얻으려는 식으로 살게 만든다. 이러한 역사적 자기 이해가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 구원을 우선하지 않는 신앙과 신앙적 이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죽음은 모든 역사 의식의 파괴이다. 자기가 죽어 없어지는 심판의 마당에 와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을 포기 못하고 구속사에 다 끝까지 기대를 걸어보는 이런 자신을 자기에게서 추방시킬 수 있는 힘이 과연 성립할까?

4.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성도를 구원받은 인간으로 본다면 이미 출발점이 잘못된 것이다. 성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따로 빠져 나올 수 없고 빠져나올 때는 '죄인'이라는 개념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즉 '인간'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부가할 때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자+인간≠성도'이며 곧 '하나님의 구원자+죄인=성도'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의 관권은 죄인인 성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상반절) 그런데 문제는 죄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인간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비로소 밝혀진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인간은 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즉 예수님 앞에서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죄를 더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아래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기를,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치 않는 바로 그러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궁극적으로 모르도록 되어 있는 존재인 것을 주님은 일러주려는 것이다. 즉 죄 아닌 것이 없으면서도 죄 인것과 죄 아닌 것을 임의로 구분하는데 율법까지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근거해서 그 규정에 의해 죄와 의를 구분지을 수 있는 판단력이 우리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율법에 자칭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37-3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셨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7:45, 47) 즉 바리새들은 누구보다도 모세 율법을 철저하게 따랐고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전혀 믿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그 어떤 능력으로도 모세의 율법은 이해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극한 대치를 보였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자는 너희들 중에 없다는 주장을 하신다. 즉 죄가 전혀 없는 자만이 말씀의 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죄 있는 자는 율법을 해석할 능력 조차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못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보기에 죄가 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새로운 규정의 죄 규정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죄를 사해주시는 자비이다. 즉 주님에게서만 나오는 그 자비를 믿지 아니하는 바로 그것이 궁극적 '죄 규정'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당부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죄 규정에 근거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새로 규정한 죄 규정에 의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다음 구절이 그 해답이 된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와 같은 동행의 원리는 멀리 출애굽 시작부터 있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즉 히브리인들이 결코 애굽인들보다 더 의로워서 그들에게 10가지 재앙이 안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신 9:5) 하나님은 치료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셨다.(출 22:27) 만약 이런 자비성을 잊는다면 가차없는 진멸과 멸망이 이스라엘에게도 떨어진다.(신 8:20) 자비로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하는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 위에서벗어나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죄의 관점을 가지고 타인과 자기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그 죄 규정 자체에 대한 회개이다. 유대인들은 가혹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율법으로 들볶았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있는가. 참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을 알게 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인간들이 스스로 이런 자기 죄를 알아서 회개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무효가 되기에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일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1-16) 이 본문에서 '허락'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는 선포가 담겨 있는 대목도 있다. 이런 복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구원의 근거를 '빼앗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고서는 '넉넉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래서 '복'이고 '허락'이 되는 상황이 유지된다. 즉 이사야 6:9의 말씀이 인간의 겸손한 회개나 경건성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말소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말씀의 성취는 필히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만 성취되어진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0-11)
말씀 성취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행위뿐인데 이 행위에 인간들의 시간 의식에 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 의식이 적용된다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표현을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이삭의 자식들이 이 지상에 태어나서는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를 각자 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운명대로 실시된다. 따라서 하나는 사랑 받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는데 이는 그들이 이 지상에 남긴 자신의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식으로 인간 행위를 제 근거로 수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은 인간들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죄라고 규정한 터전 위에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든 것이 죄라는 범주 안에서('아담 안에서' 로마서 5장) 출발하면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성만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성은 자기 백성의 행위 여부를 보고 후차적으로 추적하듯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구약에서 각가지 인물들이 나타나서 사태들이 일으켜도 그 모두는 종말 때 보여지는 실체를 위한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히 1:1-2/8:5/9:23) 이처럼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창세 전에 누구 안에서 선택함 받았느냐에 증거하기 위해 이미 확정되어 창조된 자들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5,11) 그런데 이러한 일의 실천자는 오직 바로 예수님 뿐임이 요한복음 6:39에 나와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예수님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 상반절) 따라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원 사역에 있어 하나이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대"(요 10:28-30) 즉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빼앗기거나 혹은 얻게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하시는데 있어 행위의 연쇄성에 하나님이 일체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기에 은혜만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이러한 구원의 상황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 행위에 관한 시간적인 요소는 철저하게 외면 당한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분명 구약이 신약보다 시간상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먼저 구원되고 나중 구원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같이 시간과 무관하게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성 안에서 비로소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실 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예수님은 인간들이 얼마나 시간의 흐름에 얶매인 구약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경을 단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을 때에 먼저 말을 걸으신 적이 있었다.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주' 개념과 '자손'개념을 대비시켜 바리새인들을 당황케 하시고자 하셨다. 즉 '주'되시는 분은 시간상 시작에 해당되는 자리이기에 결코 '자손'의 자리에 서 계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윗은 '주'가 자신의 '자손'이 된다고 했느냐라는 것이다. 시간의 역류인가 아니면 시간과의 무관성인가? 그 당시 바리새인에게만 묻는 물음이 아니라 구원을 고대하고 모든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질의이다.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의 시간론 자체를 두고서도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내신 것이다.
결국 성경 전체는 성도의 개인적인 일생을 초점을 두고 추적하듯이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구별성을 가지고 구원을 소개하신다.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상에서의 출생 순차와 같은 그런 차원 속에 놓여 있는 출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몸에게서의 출산은 세례 요한보다도 오히려 늦기 때문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 출생의 창조적 근거자 위치에 홀로 계신 분이다 는 뜻이다. 즉 '태어날 모든 이'는 그 분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를 보여주기 위한 목표로 출생되어진다는 말씀이다. 이 목표 앞에서는 그 어떤 시간적 요소도 이해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시간상으로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해서 시간적 요소를 구원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시간성을 지닌 표현 방식을 동원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참되게 증거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론될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며 비성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한 '이미'와 '아직'은 개인들이 하나님에게 궁금해 하는 자신의 구원의 진척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있어 그 결과로 인해 구원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이 서로가 대비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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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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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