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수정완료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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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2001년 11월 24일 이 근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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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04 19:27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2001년 11월 24일 이 근 호 목사
가. 서 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으며, 구약의 완성이 되며 택한 자에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메시야로서의 독창적인 사역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예사로 보아서는 아니된다.
혹시 예사로 본 그 점 때문에 지금까지 정립된 신학에서 난제로 제쳐놓을 수 있는 일들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제대로 납득이 안되는 문제를 앞에 두고 혹시 그 해결점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예수님 사역속에 잠자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메시야 자격으로 예수님만이 행해야만 하는 일들이 드러난다. 잉태부터 재림까지 메시야는 범인이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운명을 지니고 그 시대를 사셨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전 세계는 그분의 지배를 계속해서 받게됨을 보이는 일련의 사태를 접수하게 된다. 문제는 그분의 그런 일련의 운명이 어떻게 해서 구원의 사건으로 변하는가 하는 점이다. 즉 그분에게 한정된 일이 어떻게 해서 타인에게 전수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을 보다 확실히 하는데는 그분의 변신의 의의를 보다 밀도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 꼭 그러한 단계와 순서를 가져야 하느냐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구원에 관한 정보를 보다 확대시킬 것이며 산재한 어러가지 신학적 난제들에게 해결점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각 단계마다 분명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어느 것 하나를 소홀히 다룬다든지 그 가치를 약화시켜 놓는다면 그만큼 불실한 구원관이 제공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종전의 신학에서는 신약의 구속사 중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큰 값어치를 주었다. 십자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서로 대립되는 예수님의 형태에서 서로 대립되는 의미를 꺼집어 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기 이전에는 예수님의 비하라면 십자기 이후에는 예수님의 승귀를 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하강하는 메시야의 자세를 보여주고 십자가 이후에는 지상에서의 천한 생활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초월적 영광을 한몸에 받고 하늘 자리로 복귀하는 자태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하라든지 승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그분의 위상에 국한 하는 용어일 뿐이지 그분이 형성시킨 구원의 세계의 위상변위까지 담아내기에는 부족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으로부터 파생시켜 구원의 효과를 발견시키려는 발상은 존재로부터의 운동을 유도하는 철학적사고로부터 유래한다. 이는 조직신학이라는 이름하에 일정한 교리들로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담아 놓을려고 하는 시도이다. 성경의 불변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욕심을 내어 교리의 불변성을 노린 시도들인 것이다. 궁극적인 교리 창고를 지어놓고 그속에서 무엇이든지 구원의 필요한 것을 꺼집어 낼려는 것은 너무 안일한 태도이다. 존재론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그 어느 근거들도 불확실한 것이라는 기우는 철학에 깊이 의존한 편향된 사상이다. 즉 존재의 확실성에다 자기의 사상을 다 내맡기고 싶은 것이지 성경에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기에는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직접 성경에서 꺼집어 내면 될 것을 교리라는 철학체계를 중매로 하여 두단계를 밟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가 납득할만한 궁극적 존재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심히 강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믿기보다는 성경에서 한없이 따로 꺼집어낸 재로를 가지고 신이나 궁극적 존재를 새로 수립하여 그것을 의지할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철학활동의 습성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모두 예수님의 존재분석에다 촛점을 맞추어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되면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이 어떻게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안겨다 줄 수 있단말인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구원사역의 단계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추인하는 정도로 머문다면 이는 신과 인간과의 괴리는 여전히 남게 된다. 비록 예수님이 참인간임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참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특별한 구원사역을 수행했어야만 하는가? 메시야 역할을 안하면 인간이 못되시는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결코 예수님의 존재를 정립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전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찾을려고 하지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할때만 메시야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예수님 자신을 겨냥하기 보다는 중보자 입장에서 아버지와 죄인을 연계시켜주는데 촛점이 모아져있다. 중보자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인간앞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중보적 기능이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절묘한 결합이 해명되어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말씀과 육신의 인격적 교환이 결코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 교류와 결합을 만족스럽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옛언약 시대때의 제사장직이라는 기능은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화할 때 결코 제사장 자신이 신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자신의 목숨(피)를 바침으로 가능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제사장은 백성이 바친 제물 중 피만을 추려서 성소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행해졌던 첫 유월절 때,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집안에서는 양고기를 뜯어 먹음으로써 죽음을 요구하는 심판의 천사에게 충분한 만족이 된 것이다. 죽음의 천사는 그것을 양의 목숨으로 보지않고 그 집안에 들어있는 장자의 목숨으로 받아주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지상에서 구체화를 겨냥하는 과정으로서 희생제물과 인간의 일체성이 충분히 그 본유의 가치를 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물과 제물 드리는자의 동질성은 그 유월절의 의미를 늘 재현하고 반복시켜 언약의 최종상태까지 유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제사장의 고유한 어떤 신적인 요소가 제물 드리는 자에게 유입되어 제물드리는 자가 거룩해지는 것이 이미 제물을 바침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제물을 받는 자의 생명과 합일되므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편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하나님편에서 보게되면 하나님의 거룩성이 인간의 내부까지 모두 점령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거룩한 나라 곧 이스라엘의 본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의 부산물이 아닌 것은 모두 속된 것으로 보기 ㄸ문에 거룩이라는 개념도 "더이상 속된 것과 연관성을 갖는 것이 없다. 그런 것은 모두 죽었다"라는 분리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사역도 영-육, 말씀-육신, 신성-인성 이라는 이중적 도식을 해명하는 식으로 설명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과 죄인을 연결시켜주는 충분한 구원의 효과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 달리신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하셨다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지 말고 십자가가 달렸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서 구원의 상황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에 촛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단순히 신분의 상승으로만 풀이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양되어 고유의 체통을 유지하게 되었다에 촛점을 모아서는 아니되고 승천이 됨으로 부활 때와는 다른 어떤 구원의 분위기가 새롭게 형성되었는가를 승천신학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소위 추가된 구원의 비밀이 그 사건 속에 담겨있어야 한다.
나. 본 론
1. 메시야직에 있어 부활이 갖는 의미
메시야직에 있어 왕직에 앞어 제사장직에 먼저 중점을 두어야 될 이유는 창세기 12: 1- 3에서 "선택된 국가"의 수립자로서 아브라함이 뽑히고난 뒤, 아브라함은 복의 원천이 하늘의 왕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 지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라고 소돔 전쟁에서 체험하게 된다 (창세기 14:18). 아브라함의 나라는 멜기세덱의 반열의 제사장의 축복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자기 몸에서 뒤이어 나타날 왕들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진 언약의 한계속에 있다. (창세기17:6 참조) 정말 이스라엘이 왕같은 제사장나라가 될려면 (출애굽기19:6 참조) 멜기세덱이 지상에 관여한 사역을 재현해야 한다. 여기에 제사장직의 원형이 도입된다. 그 사역이란 바로 "여호와 전쟁"이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신에 의해서 세상은 침노를 당하고 궁극적으로 정복을 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이 제사장을 통해서 지상에 내려오고 그것에 대해 유일하게 반응할 줄 아는 지상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존재하고 사역해야 한다. 이것이 메시야직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 자리잡은 것은 필연적이다. 제사장국가란 제사장이 국가의 중심이 되어 모든 백성들은 그 제사장의 운명에 복속되는 형태를 뜻한다. 제사장이 실패하면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덮쳐진다. (레위기10:6) 제사장의 바른 처신을 위해서 선지자가 존재한다. 제사장은 예하에 있는 모든 백성의 목숨을 거두어서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여호와의 등장으로 전세계가 여호와전쟁에 휩싸여 있는 판국에 제사장에게 자기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이미 저주가 임하고 있다고 봐야 하나다.
생명이 있는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제사장직의 효능을 말하고 계시다. 그것은 여호와 전쟁에서의 제사장직의 효능을 말하는데, 제사장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거룩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여호와 전쟁에서 저주가 면제된다. 여호와 전쟁은 속되고 죄악된 것에 대해서만 공격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사장에게 목숨을 던져버린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나? 창세기 15:1에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나는 너의 방패에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이 친히 방패가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오는 공격과 저주를 막고 계시는 것이다. 그 방패 속에서 수많은 후손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번식된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믿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죄악된 국가들이 이 약속의 땅에서 징벌하겠다고 하신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는 의라는 의미는 여호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뭔가 도중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차단해 주는 방패역할 하신 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런 결과가 의로 주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계약을 수립하는데 그 형태는 서로 마주보며 쪼개져 있는 제물 사이로 하나님이 친히 통과함으로 수립되어 진다. 이 뜻은 이제 아브라함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언약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한 통속이 되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반열이 제사장적 일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그 이후에 아브라함은 그 동네에서 "하나님의 방백"노릇도 하며 (창세기23:6) 심판에서 빼내어주고 저주도 풀게하는 중보자적 기능을 갖고 있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창세기 19:29/ 20;17-18). 이 중보적 기능으로 인해 하나님 자체 즉 거룩의 상급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계약된 대로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메시야직능도 이러한 구약의 계약차원에 국한해서 실현되어져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십자가 죽음이 제사장직에 의거한 하나님의 계약의 성취임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다. 이는 여호와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는 아직도 수구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본격적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국소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의 행정관이 직접적으로 관여됨에 따라 여호와 전쟁은 전 세계를 상대로 진행이 된다. 십자가사건이 과연 계약대로의 메시야직의 성취로서 이루어진 사건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옛 계약에 의하면 확인해야 될 점이 있다. 그점은 상급(전리품)이 생겨나야 하고 이 전리품은 여호와 전쟁의 유발요인이 이미 극복되어 다시는 여호와 전쟁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되는 내용을 담게 된다. 종전의 신학은 부활한 그분이 십자가에 달린 그 당사자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촛점을 모아 해석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가신 운명과 동일한 운명의 코스를 밟게하여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소위 대리죽음이 갖는 구원의 효능의 근거를 확실하게 해주기 위함이다.
대리희생자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어놓고 있는 추종자의 관계에서 비록 죽음의 단계라고 이 관계가 단절되어서는 아니되고 그 죽음의 벽까지 넘어서서 이어져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리죽음의 본래의 가치가 살아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22/ 고린도후서 5:14-15/ 사도행전 2;30-36).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약점이 있다. 십자가 사건이 그 자체로서 어떤 메시야직 사건으로는 부족하고 부활사건까지 연결해야 온전한 메시야사건화 된다는 점이다. 즉 부활사건은, 십자가사건이 정말 메시야직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과 결합하고 난 뒤 그 두사건을 결합해야지만 제대로 메시야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메시야직의 중심사건이 되지 못하고 "죽음-다시 살아남" 이것이 중심사건이 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사건은 단순한 통관절차에 불과하고 결국 부활사건이 최종적 의미까지 다 함유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야사건으로 비중이 어쩔 수 없이 쏠리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최종적 부활의 영광을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나 지나간 아찔했던 추억거리로 남게 된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 이 부활의 즐거움에 도취되자는 식이다. 어쨌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이 마당에 있어 그 전과정인 십자가의 죽음이 지금의 우리의 신분에 무슨 관여가 되겠는가 말이다. 다만 십자가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부활의 고마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과거의 비참했던 일을 회상하는 구실밖에 못하는게 된다.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라는 말로 십자가의 의미를 다 말했다고 할 수 있을까?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퍼부어진 혜택에 너무 치중을 하다보니 부활사건 그 자체가 기독교의 중심사건의 자리에 앉게 된다. 부활 그 이후가 기독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2: 2) 갈라디아서 3: 1에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드냐"고 말했다. 그리고 세상과 신자와의 칸막이가 아직도 부활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사건으로 치여진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에 의한 전리품은 십자가의 경험을 안고있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출현이다. (출애굽기 15:17-18 참조). 이런 자들의 등장이 바로 메시야직이 온전히 수행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종전의 부활개념은, 자기 백성을 메시야가 자기존재 속에 담아가지고 처리한다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파악했었다. 그렇게되니 이미 부활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과거의 예수님을 신학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즉 마지막 사건이 그 전의 사건의 취지를 다 포함하여 우위에 설수 있다는 사고는 역사적으로는 가능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특히 신약시대에는 용납될 수 없는 견해이다.
오히려 부활사건과 승천사건과 재림사건을 십자가사건의 부산물로 봐야한다. 이미 완성된 메시야직의 적용으로 봐야 한다.
특히 대리속죄 사상에서도 존재론적으로 파악해서는 아니되고 관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이미 구약의 "언약 안에서" 해석에 준해서 풀이되어야 한다. "언약 안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아브라함 품속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동일하게 지금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단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에게만 한해서.
그렇게 볼 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2:20에서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라는 말은 실제로 사도바울이 십자가에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연이어 나오는 말에 따라 "그를 믿는 믿음"이 그런 효과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즉 그의 사건이 옛 계약안에서의 메시야직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럼 부활의 의의는 무엇인가? 부활과 십자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요한복음 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썩으면'이 아니다)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또 요한복음 15:1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제자들을 열매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안붙어있는 열매에게는 나중에 멸망이 따르게된다고 언급하면서 농부되시는 분의 기본 방침을 소개해 준다. 그런데 십자가사건이 지사에서는 죽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달리 이야기하고 계시다. 즉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흔히 말하는 죽음이 안다. 죽음이란 생명의 종언인데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확산이 된다. 십자가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잠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무대 뒤로 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역사의 현장에 다시 나타날 때는 전에는 없던 것을 대동하고 나타나시는데 그것이 보혜사 성령이시다. 왜 성령과 함께 나타나시는가?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비록 한분은 하늘에 계시고 한분은 지상에 계셔도 조금도 분리됨이 없이 한 처소에 계신 것으로 만들어 주는 영역이다. 성령께서는 생명과 생명사이에만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뿌린 그 자리에다 아버지와 연결시켜 주기 위해 성령을 모시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요한복음에서의 부활이란 십자가사건을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동거할 수 있는 창구로 열어놓은 사건이다. 이는 이미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된 십자가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단순한 소생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십자가사건을 무로 돌리거나 취소화 시키거나 십자가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사건 안에 놓여있으면서 그 십자가를 본격적으로 생명의 창구로 널리 전파하는 사건이다. (요한복음 16:7-12) 결국 부활이란 추가된 메시야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십자가사건이 부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이 십자가사건에 흡수된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야직의 최종 모습으로 부활이 설정될 수 없고 계속해서 십자가사건이 중심이 된다. (요한복음은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묘사에서도 못자국과 창자국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20:25, 27)
사도바울에 있어 부활은 십자가사건을 넘어서서 미래의 영광의 광경의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9)".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을 승천 전까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 사셔서 40일간 계신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5:8에 보면 맨 나중에 자기에게도 부
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때 나타난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신 예수님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부활을 승천사건까지 포함하고 심지어 재림까지 포함하고 있다(고린도전서 15:23 참조). 이는 예수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의 부활까지를 내포하여 일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수님의 승천사건의 효과와 그 결과를 부활로 간주하고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승천사건의 의의를 따로 빼내어 설명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부활을 예수님의 단독 희생사건으로 사도바울이 보지 않는 것은 사도바울 이 주님을 만나서 이해한 부활이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서 썩지않고 다시 십자가 죽음 전의 몸으로 회복되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영광스러움까지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부활의 최종상태를 주님을 믿는 신자의 최종상태로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이 갖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 속에,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목표점을 발견한 어떤 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 되신다면 구약에서 이미 거론한 메시야와 그 백성들 사이에 연관된 모든 신학적 주제들이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최종 수준이 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부화로 40일 동안 재회한 후 예수님의 승천으로 예수님과 헤어지게 된 제자들과, 이제는 승천하신 분으로서 직접 특별한 사역과 사명을 부여해준 제자 사이에는 추가되고 새로이 정립된 신학적 내용으로 인해 복음의 폭이 확산되고 세밀화될 수 있다. 물론 더 세밀화된 내용은 구약의 메시야직의 구체적 완성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았으면 메시야직에 어떤 점이 감추어질 수 있으며 어떤 점이 미완성으로 남는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죽음에서 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간의 지상 부활을 거쳐서 승처너에 이르시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사도 바울의 승천 신학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의 승천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단순히 그리스도 사적신분의 변화에서만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영향이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직에 관한 제대로의 위상과 사역이 본격화됨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승천 신학은 반드시 그 다양한 효과와 영향을 구약의 메시야직의 특성을 고려해서 생각해야 한다. 구약에서 무엇이 언급되었으며 그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얼마만큼 실효성을 갖게 되었느냐가 탐구되어야 한다. 만약 승천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소생으로 부활의 의의가 다한다면 구약에서 밝힌바 있는 그리스도로서의 자격에 미흡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구약의 메시야직의 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1) 아담의 육체성과 메시야직의 기반
죄의 삯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죽움이라는 독특한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과 죽음 아닌 것을 구별짓는 형태가 있어야 한다. 그 형태가 바로 신체성이다. 아담의 신체성을 두고 그 신체가 흙으로 와해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형상이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신체성은 어디서 왔는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성의 환원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으로 붕괴해 가는 아담의 신체성 대신에 새로 등장한 그리스도의 신체이다. 그런데 그 신체는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을 입어써기에 영원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영광된 신체성을 가져야만 하는가? 바로 여기에 대한 해답이 메시야직의 근원이 된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의 신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하신다. 흙이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기 전의 상태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미처 닫기 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번한다. 흙에서부터 생령으로 탄생되는 순간이다. 이 생령은 인간이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태이다. 아직 죄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하나님의 형상"다운 그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몸이 죄로 인해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다면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 형상"은 죄의 유무를 가름할 뿐아니라 죄라는 것이 무엇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죄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은 동시에 존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에 아담이 가졌던 그 신체성이 영원히 죄로부터 극복된 형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단순한 소생에 부활의 의미를 두지 않고 영원히 영광스러움을 부활의 진정한 모습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신체성의 대변혁이야말로 죄로부터 완전한 격리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 것같이 이제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유는,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소는 그 신체성의 영광으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늘의 형상을 소유했고 죄로부터 완벅한 승리를 가지게 되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은 바로 신체의 고양에 그 기초를 깔고 있다. 육신의 재생뿐 아니라 다시 가지게 된 신체가 영화롭게까지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메시야성이 확인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체성이 없는 소위 영적인 부활은 당연히 사도 바울로부터 거부당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에게 있어 최종적인 부활의 가치는 영화된 신체성으로 인해서 마음놓고 다음과 같이 외쳐보는데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고린도 전서15:55"
(2) 아브라함의 메시야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아브라함의 위상은 약속을 함유한 최초의 인물이라는데 있다. 약속을 함유했다는 말은, 지상에서 자기 약속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가 어떤 경로로 아브라함에게 떨어졌는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보이는 메시야성이 밝혀질 것이다.
창세기 14장 소돔전쟁에서 아브라함은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이번 전쟁의 성겨거에 관한 것이다.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소돔전쟁에 관여하게 된다.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두개의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왕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세속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돔왕이요 다른 한 사람은 천상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살렘왕이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이 하는 말이 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지금 이 가나안 땅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에게 승리가 온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란을 떠날 때, 이 땅을 제공하고 큰 국가로 탄생시키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바로 이 전쟁을 처음부터 주도했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승리는 결코 아브라함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그 지극히 높으신 약속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수준으로 아브라함 자신을 이 전쟁에 투입시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적은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적도 동일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떡과 포도주가 들려있다. 떡과 포도주는 이 가나안 땅이 축복상태에 놓일 때의 산물이다. 아브라함은 그 받은 떡과 포도주에서 10%를 취하여 도로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이는 이 가나안 땅의 모든 소유는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며 진정한 소유쥬인 이번 전쟁의 승리자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복속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그리고 소돔왕이 가지고 온 전리품을 아브라함은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아브라함의 행위는 가나안의 정복이 단순한 자기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신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가 있어야 한다. 그 의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의 축복으로 제공된다. 아브라함은 그 멜기세덱에게 예속됨을 고백함으로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편에 속했다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한다. 아브라함의 분명한 태도가 있은 후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상급이요 방패가 된다" 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급"이란 바로 여호와전쟁의 전리품을 말하고 방패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값어치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 하늘의 별같이 자손을 확장시키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받아드렸다.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번 소돔전쟁에서 일어난 모든 과정이 진정한 약속의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왕이면서도 제사장 신분을 지닌 그 위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 하나님의 전쟁에서 보호받고 안전을 확보하는 의에 속한 자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돔와의 승리도 아니요 아브라함 자신의 승리도 아니다. 오직 승리자는 살렘왕 멜기세덱의 승리이다. 왜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이라 그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여호와 전쟁에서 가지는 제사자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천상의 제사장은 지상에서는 왕직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세속왕도 그 자체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오직 의를 소유한 자를 빼놓고서는 그 이외의 인물들은 모조리 하나님의 대적임을 밝힌다. 동시에 의를 소유한 국가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전쟁의 군대가 되어 악의 무리를 부숴야 될 사명을 지닌다(창세기15:16).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 내려가서 하나의 여호와 군대로서 4대만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형식을 통한 구원, 이것이 여호와 언약의 유일한 성취방법이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밤에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갔다. 마주 쪼개진 제물의 사이로 하나님이 통과하심으로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은 곧 여호와 전쟁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언약이 아브라함과 약속의 하나님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갈라진 제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동급동종 속죄 원칙에 따라 이 언약의 제물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점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잡을 때 밝혀진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을 존속시키는 책임에 들어서 있다. 사랑하는 독자, 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바로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자식이다. 그 자식이 제물이다. 언약이란 바로 언약의 인물이 제물이 되어 희생됨으로 제공된 새로운 상황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치이다. 이 장치에서 죽음이 극복되는 것을 아브라함은 보았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제물의 실체를 믿음으로 이삭은 그 믿음에 의해서 되살아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되살아난 자식으로 인해 원수가 정복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죽음이란 이삭안에서 이제는 극복된 것으로 간주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정의를 특정 인물에게 발생된 사건으로 국한하고 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일관된 방침이 믿음의 최종내용에서 확인되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4-25).
여기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옛 모리아산 위에서의 희생제물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사도는 아브라함 자리에 신약 성도를 놓고있고 이삭 자리에 예수님을 놓고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사역으로 정리했다. 사도는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구원이 가능한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아브라함 언약과 연결을 지음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아브라함에 있어 메시야직이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가능케한 그 "희생의 제물" 되시는 그분의 활동이다(로마서 4:14-16).
그러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거론되는 쟁점은, 율법이 없어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무엇때문에 율법이 왔으며 예수님은 어찌하여 율법에 의해서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것이다.
(3) 모세 율법에서의 메시야직과 그리스도의 승천
모세가 받은 율법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원칙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해주기 위해 주어진다. 믿는다는 것이 과연 희생 제물되시는 분과 어떤 연결성을 지닌 모습인가를 보여주게 된다. 모세가 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장자" 생산에 그 동기에 있었다(출 4:22-23). "하나님의 장자"란 아브라함 언약에 따르면 언약성취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지는 인물을 말한다. 희생제물 안에서 하나님은 사역하신다. 그 장자가 되는 자격은 아브라함 언약에 따르면 "할례" 행한 자에 한한다. 난지 8일만에 하례 힝한자는 최초로 이삭이라는 인물이다. 그 인물의 희생제사 안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언약의 원형을 보게 된다. 그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장자의 생산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제공된다. 애굽나라의 장자를 죽이는 와중에서 애굽의 장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장자가 "하나님의 장자"라는 명분으로 애굽에서 밤에 탈출해 나온다. 애굽의 장자와 다른 점은 그들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심판을 면했다는 경험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되기를 요구하셔ㄸ다. 그리고 이 유월절 축제는 오직 할례를 행한 자에게만 해당되도록 제한하셨다(출12:44) 할례와 어린 양의 희생과 연결을 지어서 "장자"의 본질을 형성시키기 위함이다(출13:1-3) 어린 양의 희생으로 심판의 밤을 넘긴 무리가 애굽에서부터 벗어나자 마자 애굽은 전쟁을 걸어온다.
이제부터의 전쟁은 노예와 원주인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와 장자가 아닌 자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장소는 홍해바다이다. 인간이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바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장자"를 모집하러 왔을 때 가지고 온 지팡이를 들고 모세는 바닷가에 서 있다. 그 지팡이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장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의 신분으로 갈라진 바다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여호와가 싸우는 모습을 관람했다. 자신들이 무사히 통과된 그 바다는 이번에는 애굽의 바로 군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바다물은 사정을 보지않고 뒤따라 전쟁터에 들어온 그들을 몰살시켜 버렸다. 주께 거스리는 자들의 종말이다. 일관된 하나님의 "장자만들기" 사역은 신적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가? 하늘의 별만큼 모래만큼 하나님의 장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처음 출애굽의 경험을 가진 자드러에게 유월절을 축제일로 정해 지속적으로 반복하기를 오청하셨다. 첫 번 유월절 그 경험에 동참하지 못하는 후손은 하나님의 장자가 아니다. 장자됨의 의미를 모른 자는 애굽에게 내린 재앙들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진다(출15:26). 이미 할례된 자로서 유월절을 지키게 되어있으므로 자신이 받은 할례의 진정한 뜻을 희생제사와 연결지어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연이은 율법을 제시하심으로 유월절의 의미를 보다 세밀히 하시고 확대하기를 원하셨다. "맏물"이나 "맏이"이 대하여 계속적으로 이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속에 희생개념을 담아 두신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식으로 희생제물과 일체성을 가진 장자가 되는가 하는데 있다.
광야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모세와 하나님께서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희생의 뜻을 품고 있는 만나나 생수를 공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애굽지향적으로 움직인다. 급기야 모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그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형상을 통해서 여호와를 섬길려고 한다. 금 송아지 형상은 그들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총동원해서 성의를 가지고 제조했다. 마침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려오던 모세는 그것을 보고 들고있던 말씀판을 깨뜨린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정없이 깨진다. 모든 언약이 무로 돌아갔을 때, 모세는 자기를 담보로하여 다시 한번 언약이 회생되기를 기도했다. 그후에 모세가 산위에서 가져 온 돌판은 단순한 돌판이 아니라 "증거판"이다(출25:22). 그 증거판은 인간의 범죄로 깨어진 말씀을 증거한다. 인간의 죄악을 지속적으로 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회복되는 것은 일년에 한차례식 온 백성의 죄를 홀로 책임지고 나서는 대제사장이 증판궤 위에 뿌리는 희생의 피 때문이다. 그 뚜껑을 시은좌 또는 속죄소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그 말씀의 깨어짐과 다시 회복됨은 그 모두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바로 이 증거궤를 모신 성막을 중심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차례씩 절기를 지켜야 한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그리고 대속죄일 중심이 되어버린 수장절은 맏물과 장자의 본질을 인간에게서 출발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희생제물에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10번째 재앙의 반복이며 홍해전쟁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첫번 유월절의 연장으로서 죽음의 의식이다. 자신들의 죽음을 안수를 통해서 희생제물에게 넘길 때, 그 희생제물은 자기가 넘겨 받은 죄인의 죄 때문에 죄인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번제단이 바로 화목제단이 된다. 번제로 드린 재위에 바로 화목제물이 얹힌다(레위기 3 : 5). 오직 장자만 만들기를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화목으로서 응답하신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는 회개했다는 조건하에 속죄제를 통해 번제에 참여할 권리를 얻는다(레위기 4 : 14, 23, 28) 사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달아 그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 밑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ㅎ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하며는 바로 진정한 할례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로마서 2 : 25 - 27에 보면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라고 되어 있다. 사도는 할례와 율법을 직접 만나게 연결시켜 놓고 율법이란 할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보고있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고것이 진장한 할례를 아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할례란 무슨 뜻인가? 자기를 죽여 언약의 희생제물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혈통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 는 사도의 주장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진정한 할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할례가 제대로 성사될려면 실제적으로 그 죄인이 희생제물에 동참해서 죽어져야 한다. 과연 그 할례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도는 그 실현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골로새서 2 : 11 - 12를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을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모든 할례를 대신하기 때문에 무할례자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는 말이다(골 2 : 13).
그러면 그 진정한 할례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사도는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는 것이 참된 할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례가 인간에게 어떻게 가능한가? 사도는 세례의 원형을 홍해사건에서 찾았다(고린도전서 10 : 2)
사도가 이해하는 메시야직에서 자기 백성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사시키는 것은 존재론적 내부의 일치성이나 동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같이 동참한 사건에 근거한다. 여호와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전한다. 홍해전쟁은 애굽과 모세의 지팡이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움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참을 해야한다.
그래야 [군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태도이다(출 6 : 26 / 12 : 17).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다속에 육지를 만들었다(출 14 : 16). 거기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친히 용사가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출 15 : 3).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전쟁]이다. 그 전쟁은 오직 하나님이 홀로 용사되시어 혼자의 힘으로만 승리을 낚아챌 수 있는 전쟁이다. 그 분 혼자의 힘때문에 얻게 된 모든 탈취물은 같이 참전한 자기 군사들의 몫으로 돌아간다(출 15 : 9).
사도 바울은 세례의 원형을 이 홍해전쟁사건에서 찾으므로 세례가 가능해질 만큼 완벽한 구원사역에는 반드시 최종 승리자의 최종 업적이 수반되는 경우에 한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근거로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든 참전자와 용사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공간을 마련한 것을 이스라엘 구원의 최종 모습으로 간주한 출애굽기 15 : 17 - 18의 [성소] 개념이 그 사건을 통해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도는 현재 예수님의 위치를 [주]의 위치로 보고 있다(빌립보서 2 : 11). 그 주의 위치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적들을 결정적으로 물리친 업적이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이다. 사도는 정말 궁극적인 구원의 최종 모습을 갖추려면 백성들과 주님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즉 성소가 마련되어 있어야 된다고 본다. 따라서 홍해사건을 세례사건으로 이해한 사도의 신학적 선입감속에는 이미 예수님은 주의 영광된 자리를 확보해 놓고 있기에 제대로 된 세례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구원사역의 과정으로서의 연합이 아니라 마지막 승리를 축하하고 영광돌리기 위한 최종적 신분으로서의 연합이 이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홍해사건에서의 전쟁의 마당은 구름기둥과 바다속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의 전쟁의 장소는 어디인가? 이 물음은 곧 성도는 어떤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삶을 승리자와 힘께 공유된 체험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과 같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성령]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백성들과 자기가 연합하도록 보낸 [주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여호와 전쟁사역]으로 각인된 그리스도적 인상을 성도 그들의 모습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일하신다. 그래야 예수님이 하신 기능이 단지 예수님만이 하신 메시야적 기능이 아니라 이제는 전쟁에 참여한 성도들의 기능이 되어서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의 부산물을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활동범주를 흔히 종전의 신학자들의 의견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론적 유기적 연합에 두지 않고 메시야적인 지속적 활동성과 기능성에 두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존재론적 완성체라서가 아니라 구약에 언급된 하나님과의 계약활동의 최종적 성취성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활동은 항상 계약중심이다.
구약에 언급된 그 사실들이 신약에 와서 실제적으로 그 성과를 보여야 한다. 구약이 존재론적이 아니라 지상과의 부단한 관계속에서 여호와되심을 보여주었다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 : 8 - 10에서 신약에서의 성령의 위상 기능을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보고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한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 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끝부분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실 수 있다]는 그 구약적 근거는 무엇일까? 홍해전쟁의 끝부분과 비교해보자. 출애굽기 15 : 17 - 18에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홍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리다]. [영원무궁]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 전쟁]의 부산물인 [주의 성소]뿐이다. 성령께서 주께서 애써서 일구어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원무궁한 성소를 만드는데 참여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은사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엡 2 : 22). 그 속에 이미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리시고 이미 승리한 댓가가 위력과 능력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모든 것이 이것을 중심으로 통합될 뿐이다(에베소서 1 : 10). 모든 것은 그 교회의 머리되신 분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에베소서 1 : 20 - 22). 그 복종시킵으로 인해 교회는 만물안에 충만케 된다(에베소서 1 : 23). 사도 바울이 보는 부활이란 단순히 나사렛 예수님의 소생이 아니라 승천까지 되어 주의 자리에 등극된 그 상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런 구약적 근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 안에서 반드시 주의 능력과 위력과 메시야적들 기능들을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성령의 세례]라는 용어만 채용하다가 덧붙인다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세례]란 세례주는 자와 세례받는 자의 존재적인 구별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그 둘이 함께 하여 어떻게 구약의 언약을 성취시키고 있느냐가 본질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라는 개념을 기능적으로 파악한다. [성소] 또는 [거룩한 성전] 개념을 언급할 때도 반드시 십자가 사역을 거론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을 때에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다. 그들이 할일은 무엇일까?
뭔가 더 거룩한 일을 추가하는 일인가? 아니다. 오히려 [지킴] 에 관한 일이다. 이미 완성된 것에 대한 지킴이다. 모세가 받은 사회법이 [이웃환대법]이나 [약자보호법]이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게 아니라 [너희들이 어디에 있었다가 어떻게 이곳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의 형태로 실시되어야 될 법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2 : 21 - 24). 따라서 국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그들을 이끌이 내신 여호와의 자비]를 쳐더 보는데서 신앙적 구원의 의의가 있다.
사도 바울이 밝히는 성령의 교회를 향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종의 형체]로 인해 야기된 [약함]속에서(고린도후서 13 : 4) 어떻게 해서 주의 자리까지 등극하셨냐에 대한 그 증거물로서 지상에 세우는 데 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는 국가 이스라엘처럼 [부르심을 입어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고린도전서 1 : 2). 교회가 환란중에 기뻐해야 하고 자기를 비워야 하고 육체의 소욕을 죽여야 하고 어찌하든지 십자가로 자기를 몰아넣어야 하는 이유가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기 때문이요 땅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 : 1 - 3).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냥 종교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버텨내는 능력을 덧입혀주고자 하는데 있다. 꺽어도 꺽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내용으로 하는 지상의 [아들의 형상]이다. 따라서 성도가 지상에서 겪는 고난이나 환란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거나 추가하거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것]이 구분되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것]의 사역도 구분되어야 한다. 성도의 사역은 계속해서 하늘의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이미 완성되었음을 누리는 신앙고백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 높이를 날마다 더해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거기에다 더 보태는 것은 허용되지 안는다. 여기서 사도가 보여주는 독특한 죄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죄란 자기 의를 고집하는데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지 않게 하는 행위이다(로마서 1 : 21 / 10 : 1 - 3).
그러면 성령께서는 뭐하시는가? 따로 임의의 추가할 메시야적 사역이 있는게 아닐까? 왜 성자만이 독보적으로 승천할 자격이 있는가? 성령님은 하나님의 고유 계획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완성된 것으로 보고 계신다. 따라서 성령님이 지상 사역에 개입하신 것도 독자적인 입지에서가 아니라 메시야적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성도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런식으로 고집하고 간구하고 또 활약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 그 형제들로부터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을 받는데 있어 그 [아들됨]의 근원을 예수님의 사역에 두고 있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보고 합세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목표로 잡은 그 [아들의 형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두고 말할까? 나사렛 예수님이 사셨던 사회적 환경을 두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문화적 배경속에 그후의 인간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아들의 형상]을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이미 승천하셔서 주의 자리에서 영광을 지니신 [그 아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영광스러운 하늘의 육체성]이 성령활동의 목표이다. 하지만 성도는 [종의 형체]를 지니고 땅에서 산다. 어떻게 이 지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실마리가 고린도후서 3:1-18에 나온다. 내용인즉, 복음이 갖고 있는 영광을 옛 율법기능의 영광과 연관시켜 밝히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는 기능을 지닌 것은 모세가 들고온 율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런 기능을 하기 위해 내려온 모세를 사람들은 마음놓고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찬란한 빛이 반사되어 비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모세는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얼굴에 수건을 쓰야만 했었다. 사람을 정죄하는 소극적 기능을 하는 율법의 영광도 이정도인데 만약에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려내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복음을 만약에 직접 하나님께 받아 인간앞에 등장시킨다면 누가 과연 그 앞에 설 자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미 자신의 복음사역의 영광성을 승천하신 주님의 영광성 그 자체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3:1-3). 마치 모세 경우처럼.
그러나 해결책이 있다. 그 해결책은 다름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때는 모세가 수건을 벗었다는데서 핵심이 있다. 만약에 성도가 주께로 돌아선다면 꼭 수건없이도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의 영]이 수건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성령의 역할을 사도는 [자유함]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죄악된 육체가 받는 영광에 대한 피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를 말한다. 율법안에서는 이런 자유함이 없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비천이 영광과의 접촉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도는 자신과 성도 전부를 모세와 그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렇게 끌어올릴 수 있는것도 주의 위치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바로 성령이 하는 일은 모든 방침이 주님 선에서 이미 결정된다는 그 흔적과 증거를 지상에 남기기 위해 열매를 맺히는데 있다. 사도는 [첫열매]라는 구약표현을 서슴치 않고 도입한다.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사역은 반드시 첫 열매가 있기 마련이다. (예레미야 2:3). 첫 열매란, 여호와께서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필연적 귀결이다. 사도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면서(고린도전서 15:20) 동시에 우리가 거기에 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고린도전서 15:23). 주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린도후서 1:22/ 5: 5).
위와같이 성령께서 자체적으로 어떤 메시야적 삶을 제공하지 않고 이미 메시야되신 주님께 성도들이 철저하게 귀속되도록 조치하는 일만 하신다. 이것을 봐서 성령께서는 오직 [주의 영]으로만 일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에 더 보탤 그 어떤 메시야적 기능을 성령을 비롯하여 다른데서 또 찾아서는 아니된다.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은 성령론적 그리
스도론을 배격하고 있으며 성령의 존재 의의도 메시야적 활동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사도가 밝힌 성령의 처신이며 그 모든 처신은 이미 구속사역의 완성체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4) 다윗언약에서의 메시야직과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가 반드시 [다윗혈통의 자손]이어야 될 필요성이 어디 있을까? 아브라함 혈통들 가운데서 유독 유다혈통만이 메시야 혈통으로 결정지어진 것은 다윗 개인의 운명이 아브라함 언약의 모든 진수를 집약되게 한 시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가나안 땅 10족속에 대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아브라함 언약은 성취가 된다(창15:18-21). 예루살렘성이 여부스 족속의 중심지임을 감안할 때(사무엘하 5:6) 이들에 대한 정복은 결코 다윗의 자질에의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