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을 통해서 본 "행함"의 정신
유전학을 통해서 본 '행함'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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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을 통해서 본 '행함'의 정신
Ⅰ. 서 론
인간의 행함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과학은 인간들이 고대했던 진리를 눈으로 본 바에 손으로 만진 바 되게 제공하므로서 인간 행함과 진리와의 연결성을 확고히 해주었다. 진리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행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아예 행함이 삭제된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몽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로서 "진리는 나의 손과 나의 힘으로!"라는 정신 하에 현대를 살도록 해준 것이다. 나의 손과 나의 힘으로 달성 가능한 것만 가치있는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나의 손과 나의 힘으로 달성 불가능하다고 분류되는 것은 아예 돌아볼 생각을 품지 않는다.
즉 '될 수 있도록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 것을 통해 구원 되는 쪽으로 살아 가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진 바 된 교회는 아직도 가치 있는 것으로 남아 있지만 복음은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해 버린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기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쉬워 하지만 복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 호감이 없다. 인간 행함을 신봉하는 정신자세는 '교회 사수하기', '내 교회 지키기'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미 과학적 사고 만이 진리로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심지어 천국 가는 방식도 눈으로 확인되고 손으로 만지 바 된 '교회 있음'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인 것이다.
겉으로는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지만 실상은 '오직 믿음'을 주창하므로서 얻을 수 있고, 생길 수 있고, 남길 수 있는 그 무엇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총체적인 '행함 신앙심'이다. 진정 은혜로 사는 자라면 은혜 이외는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보게 되고 그리고 그 은혜성이란 하나님이 죄악된 세상에 던져주신 것이기에 은혜성과 더불어 필히 죄악성도 같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본 글은 유전학에 담겨 있는 현대 과학의 죄악성을 인간들의 '행함 추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보고 그리고 이러한 정신 상태가 오늘날 교회 행정이나 성경 이해에 있어 본질면에서 상호 통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본 론
1. 유전학이 보는 생명
뭐든지 좁게 생각하고 더 깊게 들어가지 않고 자족하려는 것은 자신의 위로처 역할을 할 한 뭉텅이의 신비로운 세계를 계속 남겨 두려는 시도일 수 있다. 혹은 신앙이란 이름으로 신비 세계에 대한 존중심을 유지하므로서 최후의 도피처를 미리 보장받기 위한 자기 절제일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계기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이미 갖고 있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그 새로운 계기를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만약에 설명에 모순이 생기고 억지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는 새롭게 수정된 세계관, 즉 발전된 세계관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설명도 못하면서 고집스럽게 기존의 세계관을 고수하는 것은 비겁한 위선적 행위에 불과하다.
망원경으로 알게 된 우주적 체험과 경험은 기존의 지구관으로 지구의 상태를 설명하는데 충분치 않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미경이다. 현미경으로만 만날 수 있는 작은 생명들로부터 인간이란 이름의 생명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체는 세포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독립적 생명체의 집합으로 조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사람을 해명하려면 먼저 세포라는 산 생명체부터 해명하는 것이 순리였던 것이다. 세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기존의 인간관으로서 인간에게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했다. 그것은 인간 안에는 다른 동물에게 없는 것이 추가적으로 덧입혀졌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미경으로 상세하게 들여다보니 추가적인 것은 없었다. 인간 옹호 위주의 일방적인 생각 속에다 모든 자연물을 윽박 지르듯이 쑤셔 놓고 설명을 강요했던 식으로 하자면 자꾸만 바깥에 남아 버리는 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외곽에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이 남아 있는 한 그 누구도 온전한 진리라고 주장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는 그 자체에 종속되게 되어 있다. 모든 가설과 이론은 늘 미래의 나타날 새로운 발견을 기준점으로 삼게되면 항상 유보적 입장에 지나지 않고 한시적인 변통일 뿐이다. 더 이상 사람이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과학적 사실에 종속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영혼만큼은 아무리 새로운 과학이 사실이 등장해도 하나님 몫으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만약 영혼마저 인간 행위로서 조작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면 그야말로 그동안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신의 것마저 사실상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며 신이 존재한다는 그 어떤 증거도 인간 자체에서는 찾을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순간이 오고 말았다. 1866년 멘델이라는 수도사는 완두콩 부모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예측된 완두콩 후손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생명체 후손에 있어 신이 더 이상 관여할 필요도 없이 후손은 완벽하게 아버지의 것과, 어머니의 것으로만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외에 다른 요소는 일체 후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신의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자식이 어떤 형태의 자식이 될 것인가를 초자연적인 하나님보고 물을 것이 아니라 부모 안에서 이미 결정 나 버린 상황이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있는 혈액형 이외에 다른 혈액형을 원하기 위해 신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자식은 부모의 것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않는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 아니다. 생명은 부모로부터 반반 물러 받아 결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체의 생명체 다움이란 이미 그 부모 안에서 결정 나 버린 상태이다. 즉 멘델이 발견한 것은 한 생명체의 모든 것을 운반하는 운반 물질이 있음이 생명체 안에 따로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 될 때마다 새롭게 선사하는 영혼 선물이 아니라 그냥 부모가 갖고 있던 물질이었던 것이다. 생명체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 유전물질이 곧 생명의 실체를 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련된 진리를 찾기 위해 우선적으로 복음서나 성경책으로 다가설 하등의 필요가 없다.
성경 구절에 담겨있는 종교적 위로나 교훈으로 근원적인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유전물질을 규명하는 것만이 진리요 생명의 원천이다. 설사 유전물질을 발견한 이가 그 공로는 신의 은혜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신의 계시가 생명 규명에 있어 개입할 여지를 따로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해명을 인간의 과학적 지혜에 일임토록 혜안을 열어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만 신께 감사할 뿐이다. 진리를 다루는 실무자는 어디까지는 인간의 행함으로 넘어왔다. 생명을 이제 눈으로 본 바에 손으로 만지 바가 되는 경지까지 과학적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다가 1950년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학자에 의해서 DNA라는 유전물질이 확인되었다.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으로 들어있다는 점이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이 물질 없으면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새끼를 까고 생명체를 번식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특별한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생명체의 탄생을 가져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었다. 세포 핵속에 들어 있는 DNA라는 물질은 자체적으로 후손의 정보를 갖고 있어 모든 생명체의 그 어떤 후손이라도 이 정보의 범주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 정보가 지시하는대로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단백질이 모여서 된 것이 바로 현미경 없던 시절, 흔히 신의 특별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 생명체라고 불렀던 바 그 '개체'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DNA 안에 품고 있던 정보를 분석하고 조작하는 수완에 따라 원하는 생명체 출현이 예측 가능해진 것이다.
생명은 곧 '인간의 행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겉에서 인간을 보면 경이롭고 고귀하고 존엄하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성격과 인품과 인격과 신앙심까지 조작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인간을 다시 보자.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으로 변형 가능하다고 자기를 여기게 되면 인체의 신비로움이란 한낱 우연적 조화로움에서 오는 미에 불과하다는 느끼게 된다. 마치 원하는 색깔로 머리 염색하는 것과 같다. 자연이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움과 경이롭다 할지라도 이미 인간 손 안에 있다. 미생물 개발을 비롯해서 노력 여하에 따라 반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다고 한다면 생명체란 유전 공학 전문가에게는 지루한 일거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실제적 생명의 본질을 모르는척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생명의 경외를 논한다면 이는 횡설수설에 해당된다.
2. 생명과 에너지
생명이 물질에 담긴다는 말은 생명이란 결국 에너지의 결집으로 집약된다. 인간이 불이라는 에너지를 다루면서 문명이란 급속도로 진전했다. 그 뒤 새로운 에너지를 다루어질 때마다 대규모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석탄과 석유와 원자력 에너지가 계발 될 때마다 문명이 달라졌다. 왜 인간의 생존은 에너지에 의존되어 있는가? 그것은 인체의 구성 자체가 에너지화 된 것과 관련 있다. 식물은 햇빛 에너지에서 포도당을 만들어내고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그 식물들이 축적해 놓은 포도당 에너지를 산소를 받아 호흡해서 자기 신체를 유지하는 에너지원으로 삼게 된다. 에너지가 빠져 나가면 생명체는 주저앉는다. 생명은 에너지로 지탱된다.
세포내의 에너지 저장과 전달은 ATP라는 물질이 담당한다. ATP가 ADP로 바뀌면서 쓸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에너지 세계는 나름대로 철칙이 있다. "에너지
는 항상 일정하며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철칙이다. 비록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더라도 에너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하게 되면 그 잠재된 에너지는 일 에너지로 변한다. 에너지의 세계는 또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이것은 높은 수준의 에너지는 낮은 수준의 에너지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무질서의 도가 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체가 일정한 조직체로 안정을 계속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유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생존이다. 생존이란 에너지를 유입하려는 노력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행함'이다. 즉 '행함'이란 인간이 자기 주체성을 계속 지탱하고 유지하려는 생물적 본능의 발로인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행함'을 육에서 나오는 것이다고 단정하는 연유가 여기 있다.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올 수 밖에는 없는 것은 곧 '행함'이다. 배가 고프다면 사랑과 번식도 가능치 않다. 에너지 충족이 우선이다. 이 에너지는 자신의 존재를 더욱 다지기 위해 소비되는 에너지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여력이 우선되어야 신앙 생활도 비로소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미 에너지의 충족 작업에다 우선권을 넘겨주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가치는 에너지 충족 작업, 즉 생존 문제가 선점하게 된다. 결국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지켜내는 것을 근거로해서 하늘의 축복을 받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러한 신앙적 행위, 즉 기도나 전도나 설교나, 선행이나 기타 신앙적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떡 확보가 우선인 것이다. 과학은 신이나 종교에 관계에서 항상 이 점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즉 신앙 행위나 종교 행위나 예술 행위나 선행 같은 것을 무가치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은 바로 그런 가치를 유발하겠금 하는 인간 행위에 주목한다. 그 에너지는 어디선가 제공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학이라든지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이라든지 경영학, 혹은 인류문화학 같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대해서도 같은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저소득국가에 까지 골고루 제공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곡물 공급, 즉 에너지 원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담당하는 경제학 분야도 자연과학과 더불어 발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 곡물을 먹고 교회나 성당 안에서 예배 참석하여 찬양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의 곡물이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아프리카 국가의 열차나 철로의 노후로 인해 제 때에 그 나라에 전역에 수송되지 못하면 어느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의 그 날 예배 참여는 주님들의 배고품 때문에 차질이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말씀 듣고 은혜 받는 신앙적인 일도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과학자들의 의식이다.
따라서 과학자에게나 혹은 과학자들의 의식으로 전도하라고 한다면 이들은 필히 양식 제공이나 의료 서비스 제공을 통해 종교 집회에 참여 할 수 있는 에너지 제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난 뒤 복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서 그들로 하여금 생존에 여유가 생길 경우에만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식이 될 것이다. 만약 선교 사업을 벌리는 도중에 생존에 위협받는 경우가 생기면 말씀 전파는 접어두고 그 생존의 여건 조성에 앞장 서는 것이 선교사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여길 것이 뻔하다. 예를 들면, 선교사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다든지 아니면 유기농법을 전파한다든지, 아니면 해외 근로자 권리 찾아주기 위해 법적 변호인단을 구성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들 과학자의 입장에서보면 성직자들이 해야 될 지극한 당연한 일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행함'이란 구원론이나 신학해석적 논리에서만 다룰 때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모든 교회 활동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행함'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행함'과 다른 '거룩한 행함', '말씀 실천 차원의 행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행함'인 것처럼 오인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자신의 교회나 신앙 자체가 기껏해야 과학처럼 인간 이 행함에 토대 위에서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인문과학에 속한 일개 한 분야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결코 이런 식의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성경의 뜻도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죽자고 교회만 붙드는 것이다.
교회 붙들면 마치 하나님 발목이라도 꽉 잡은 착각을 하고 있다. 정말 성령을 받고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그 교회라는 것을 놔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말이지 없는데서 있게 하심으로만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때문이다. 과학은 아직도 이런 점을 흉내조차 못낸다. 따라서 과학의 발달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신에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열등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점이 무엇일까? .
3 과학의 저의와 노리는 것
그것은 따로 외부에서 진리와 비진리, 선과 악의 기준을 가하는 것을 거역하고 싶기 때문이다. 과학은 악과 선의 구분을 개념을 존재된 것으로 존재성을 기준으로해서 끄집어내려고 한다. 즉 자신의 존재가 원활치 못하면 자신에게는 악하고 나쁜 것이 되고 어떤 종족이 전쟁에서 패배해서 포로 잡히거나 말살 당하면 그것도 악하고 나쁜 것이고 혹은 어떤 개척 교회가 운영이 원활치 못하여 그 교회가 사라질 운명을 처하면 그것도 종교적으로 그것도 악하고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이런 식의 악의 개념으로부터 모든 진리를 새롭게 규명하고 출발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 히브리서 1: 10-11에 보면 상당히 낯설어 보이는 내용이 나온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이 내용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이 피조 세계는 낡은 옷처럼 삭아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이 에너지의 세계는 멸망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자기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이 만든 세계를 하나님 스스로 부수시려 하시는가? 왜 모든 존재가 거하는 이 세계가 멸망당해야 하며 옷과 같이 낡아져야 하는가? 그것은 아들과 다른 존재와 하나님이 달리 취급하려 하시기 때문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히 1:9) 즉 하나님은, 과학자들이나 인간의 여망처럼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옛날 이스라엘에게 계시한 대로 오로지 메시야에게 입 맞춤으로서 유지되는 나라만이 인정하시려 하신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2-3,12)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악은 따로 있었다. 물론 과학이 알 리가 없고 인간의 행함으로도 도저히 파악안 되는 면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기보다 앞서 이 세상에 해결해야 될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정복이다. 이 전쟁의 수행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만 인간을 상대하신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종인 자에 한해서는 인간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이다. 그 안에서 구원받은 자는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자신과 대비가 된다. 그러나 지상의 인간들은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존재의 영원한 확보와 구축에 나서겠다는 의식을 발휘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이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 바로 '교회주의'이요 자신들의 '교회주의'를 토대로해서 기독교로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발상들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께서 현재 피조물들이 사는 세계 자체를 아직도 유지시키는 의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조 세계를 영구히 하지 않고 옷과 같이 낡게 만들고 멸망시키겠다는 의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 하여금 기존 피조 세계를 유지의 목적을 피조 세계의 존재에 있지 않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파악했느냐를 따지고 계신 것이다. 현 피조 세계의 멸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함과 대비시키는 차원에서 존속될 뿐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존 세계의 번영이나 영존을 꾀한다면 이는 전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들이다. 또한 없어질 세계에 대해서 '없어짐' 그 자체만을 봐서도 아니 된다. 왜 없어져야 마땅한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존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신앙이 요구된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러한 마음 자세를 신앙이라고 했다.
즉 신앙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히 11:1) 이 세상은 단지 떠나보내어야 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학은 바로 이런 점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에 벗어나지 않는 진리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에너지였다. 에너지 제일 법칙에서 에너지란 영원히 새롭게 창조되지도 아니하며 단지 모습만 변형될 뿐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 주장이 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 난데없이 멸망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과학은 새로운 진리체계를 요청했다. 외부의 계시나 외부의 평가를 거역하고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의 출발지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되고 보면 기독교계에서 무엇이 진리가 되는가? 곧 '교회 있음'이 진리 그 자체가 된다. 즉 교회가 잘되고 계속 존재하면 선이요 그렇지 않고 흐지부지 사라지면 악이라고 간주된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그런 진리의 기준을 제시한 바 없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일이 터지더라도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Ⅲ 결 론
왜 '행함 신학'이 이단인가? 그것은 존재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지상의 찬란한 문명으로 전환시켜 드리겠다는 종교심읠 발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은 세상의 교회 사업이나 과학의 번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들은 여전히 믿음 없는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이 구체화 된 그 무엇을 가지려고 한다. 하나님을 믿을 만한 것을 자신의 행함을 동원해서라도 없는데서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참 신앙인은 그렇지 않는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이 본문에서 볼 때 모세의 행함은 가짐을 위한 행함이 아니라 오히려 버림을 위한 행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결코 '자기 행함'을 가치를 두지 아니한다. 그래서 '행함'의 신학은 이단 신학이다.
왜 이 과학시대에서도 오직 약속과 언약만을 고수하고 증거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행함이신 새언약 빼놓고서는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에 저주와 멸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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