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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신학과 목회에 나타난 "인간 의"에 대한 집착성경신학로마서

신학과 목회에 나타난 '인간 의'에 대한 집착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신학과 목회에 나타난 '인간 의'에 대한 집착

Ⅰ. 서 론
증거해야 될 것과 증거되지 말아야 하는 것 사이를 결정하는 것은 복음 뿐이다. 비록 하늘에서 살고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복음이 아닌 것은 복음이라고 증거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갈 1:8)복음이 출현되는 현장에는 자동적으로 비복음들이 더불어 그 정체가 폭로된다. 비복음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은 자신을 무어라고 규정하는가? 로마서 1:17에서는 복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복음적인가? 이 '하나님의 의'를 대체하려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동안 인류는 이 '하나님의 의'를 무엇으로 대신해 왔던가? 그것은 '인간의 의'이다. '인간의 의'는 복음이 아니며 구원의 능력으로도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줄기차게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고 '인간의 의'를 끌어당긴다. 이것은 종교, 교회, 신학계 그 어떤 분야든 간에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이미 자리잡고 주도권을 행사해 왔기에 최후의 날이 되기까지 쉽게 양도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하수인들은 모든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의'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동원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소유할 수 있으며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느냐'에 사활을 거는 것이다. 여기서 학문하는 작업에 나서는데 즉 이 '무엇'이라는 자리에다 '어떻게'를 집어넣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수 있느냐'를 따지고 탐구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추상적이라고 느껴지는 그 '하나님의 의'는 자연스럽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유용성 있어 보이는 '인간의 의'로 대체된다. 이로서 증거되어야 할 것이 이미 인간의 것으로 전환된 상태이다. 즉 인간이기에 인간의 것으로 증거하여 타 인간간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쪽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친교와 교제에 바탕을 둔 목회술의 정신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부탁하기를, 이런 자신의 목회술과 인간의 것으로 전환된 인간의 의로움을 빼고 증거해보라고 한다면 이들은 어리둥절한다. '어떻게'를 빼고서 무슨 믿음과 목회가 가능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관심 두고 믿어 왔던 것은 자신에 관한 것과 자기와 같은 인간들에 관한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인간, 바로 이런 인간들에게 줄기차게 나올 수 있는 것이 무얼까? 그것이 자기 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복음을 대체한 신학과 목회술이다. 이제 그 신학적 뿌리의 퍼짐을 추적해 볼 차례이다.

Ⅱ. 본 론

1. '인간 의'를 믿는 자의 등장되는 동기
신학과 목회가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서 증거 될 때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면 여기에는 필히 기존의 아담의 인간성과 공통성을 삭제 시킬 수 없게 된다. 사회나 공동체나 타자와의 관계에서 '동일성' 문제는 참으로 철학자들을 괴롭혀 온 난제였다. 늘 고립적이고 개별성을 속성으로 갖는 자아가 어떻게 타자(他者)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자아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있어 그것이 타인과의 접촉점과 융합점 구실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아예 주체성은 없고 단지 타자가 상징화 되어 자아를 대체하여 자리잡고서는 지속적인 변화와 변천를 이르킨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은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전체성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원형적 틀에 구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일종의 '집단 정신'을 상정하며(게슈탈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있기에 얼마든지 타인과의 교류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서 개체적 '나'를 고집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라는 복수의식이 동시에 피어날 수 있는 납득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하나'가 그 절대적 '하나'라는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둘을 느낀다는 것은 그 '하나'라는 정체성마저 언제까지고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이미 주체가 '나' 하나로 고정된 입장을 구태여 타인과의 교류에 나서려고 한다면 여기에는 필히 주체의 중심 이동이 따르는데 여기에서 야기되는 주체 증발 현상을 수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아라면 여기 개념화된 '자아'는 새로운 '타자상'을 지닌 제 3의 실존 개념인 '자아'가 되어버려서 지금 자신이 느끼는 자아상과 차이성이 있을게 뻔하니까 조금 전에 상정했던 그 자아성이 진정한 자아성인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논리적 난맥성도 그냥 묻어둔 채 성급하게 신학 작업에 뛰어들면 그 허점은 신학 전개 과정에서도 계속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다.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언명에서 무엇을 이웃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이웃인가 아니면 나의 선택을 강요하며 접근해 오는 이웃인지를 불분명해지고 더 나아가서 타인이 점찍어 놓은 '이웃'(즉 이웃 당사자가 기대하고 있는 이웃관)과 내가 점찍어둔 '이웃' 사이에 차이가 날 때 과연 나의 이웃 규정을 어디까지 고집을 부리며 밀어붙여야 될지 모호하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놓고 보면 문제는 더욱 확대가 된다. 나의 사랑이 타인에게 저주로 받아드려질 수 밖에 없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무작정 "나는 일단 사랑을 했으니 나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말라!"고 큰소리 칠 수만이 없는 노릇이다. 충동적 행위를 마치 이성적 동기에서 나온 사랑 행위인 것처럼 틈만 있으면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심적 횡포에 각자 각자도 늘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성 속에서 일정한 정형이 지닌 성격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뭔가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무슨 행위를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끊임없이 쳐다보는 구석이 있고 일정한 방향이 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꽂히는 그 방향성은 어디인가? 자연인가? 우주인가? 환경인가? 타인인가? 아니다. 인간은 보다 궁극적인 것은 지향한다. 신의 대체물로서의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자신됨을 수시로 확정하려는 것이다. 즉 세상과 자신의 가치를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롭게 정립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자로서의 안정성 확보이다. 이 지향성이 어떤 경향을 지니고 있는지는 로마서 1: 21-23에서 그 힌트를 준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성도라 할지라도 존재자인 이상 어느 한 순간도 지향성 자체가 소멸될 리가 없다. 그러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은 거듭난 성도는 매사를 통해서 어디를 지향하는가?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내세워 거듭난 성도의 모델을 제시했는데 그 아브라함의 믿은 것은 바로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약속(혹은 언약 롬 4:13)이었다. 그 약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따라서 거듭난 성도는 이 약속을 증거하는 자로 살게 된다. 즉 첫째,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둘째, 성도에게 주어진 의는 그 근거가 성도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내세운 화목제물인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을 같이 증거할 때에 그 어떤 것도 신의 대용물로 동원하는 행위를 정죄할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의 의가 영원히 예수님 것으로만 완성된 의로 남도록 지켜 준다. 만약 인간의 죄인 됨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거론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신처럼 완전자가 되는데 있어 자신의 가능성을 위해 이 하나님의 의를 조달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즉 예수님도 의롭지만 인간도 못지 않게 의로운 이유는, 그 예수님의 의를 용감하고 겸손하게 수용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스러우냐 하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인간에게 허술한 점은 있으되 전적으로 죄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 지향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타고 넘어 더 큰 진보의 발걸음을 떼게 되는데 이는 궁극적 지향성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미 출발부터 인간의 가능성에서 시작했기에 이 가능성이 유발한 지향성까지 모두 의로운 것으로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을 확보될 때까지 그 증거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의 절대성이다. 따라서 이 지향성을 만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는 가능성만큼은 순수하게 의로운 요소로 지켜주신 이유가 본래 인간이 그렇게 나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되니 완전한 의인되는 것도 여기에는 믿음 이외의 의롭게 될 추가적인 요건을 요청하게 된다. 즉 믿음으로는 의롭게되는 것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의 가능성까지도 아직 미치지 못하기에 그 가능성마저 현실로 나타나기는 결국 믿음만으로 역부족이 아니냐고 강변한다. 즉 믿음으로 주는 의는 '부족한 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애초부터 '인간이 죄인이다'는 의미는, 의의 불가능성에서 오는 죄인이 아니라 의의 부족분 때문에 오는 죄인으로 간주한다. 즉 의를 향한 가능성만은 안 죽고 살아남아 있기에 그 가능성에다 불만 질러주면 제대로 의의 주체자로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다. 예수님처럼 성령만 받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이 행했던 그 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성령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십자가를 의지한다든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마치 한 번 시동이 걸린 자동차가 되어 자체 내에서 얼마든지 의를 자꾸만 생산할 수는 채비에 들어갔는데 구태여 예수님의 의를 새삼스럽게 빌려온다든지 의존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라는 것이다. 부활의 영인 성령이 들어오면 누구라도 독립적인 존재자가 되어 제 2의 예수, 제 3의 예수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도의 모든 행위 하나 하나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아직 미흡하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생각하기를 성령이 성도에게 임한 것은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격자 내지는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기에 의인이라고 규정해 주자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의로 인해 완전한 의인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자신들도 이제 예수님처럼 의를 행사할 수 있는 요건이나 속성을 갖추었기에 의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이들의 주장을 옹호하는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 본문에 보면 '대신'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대신'이란 시범이 아니다. 즉 예수님의 일생은 교육용 궤도 걸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분의 일생은 능력이다. 요한복음 3:36에 확실한 규정이 나와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성도는 왜 그분 만을 평생이 다 가도록 의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분에게 있었던 모든 것은 우리의 일생 전부를 대신 할 만한 '대신과 대속의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행하신 의로 인해 성도가 의인이 되는 것이지 그분의 일생을 따라잡아 완성시켜야 비로소 의인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자기 의' 챙기기에 관심 있는 자들은 자기 의를 위한 변호를 삶을 통해 보여준다. 성경에 근거해서 만약 죄악 된 점을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변명과 핑계로서 계속 자기 의를 변호하려든다. "내가 뭐 신인가?", "나의 성격이 본디 이러니 이해해 줘", "이건 죄가 아니야 그냥 실수한 것이고 부족한 것이고 미흡한 것이지 어떻게 죄라고 규정할 수 있어? 앞으로 점차 나아질거야. 그래도 나는 네 수준보다는 낫다"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의를 남들이 무시할까봐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전적 믿지를 못하고 독자적인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 나서야 안심하는 이 불신앙적 상황을 메우는데 있어 따라오는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미숙성에 대해 남들이 행여 무시할까봐 날카롭게 공격의 날을 세우고 다닌다. 무엇을 증거하고 다니는지 너무나도 명백하다. "혹시 남들이 나보고 기도 적게 한다는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혹시 남들이 나보고 성경 많이 읽지 않는다고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면…", "혹시 남들이 나보다 사랑이 부족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구제를 많이 하지 않고 돈을 사랑한다고 해서 참된 주의 사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혹시 나보다 더 예수님처럼 성화 된 인물이 부교역자로 오게 된다면 나와 차이진 나의 부족분이 윤곽을 드러낼텐데… " 이런 저런 상황까지 사전에 철저하게 대비해 놓기 위해 항상 마음이 무겁다. 의인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는 의인, 의인이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의인인 그 인간 자체를 그들은 복음이라고 여기고 남들에게 전도하러 다닌다. "여러분 예수만 믿으면 여러분들도 완전한 의인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늘 미흡함이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저에게 배우십시오. 제가 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날마다 증가시킬 수 있는 멋진 자아상을 구축 될 수 있단 말입니다. 기도하시고 성경 보세요. 이미 의인이 되어 충분히 의로워질 가능성이 있던 여러분을 더욱 더 고양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제시하는 소위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저지르게 되는 로마서 1:21-23의 행세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들의 대용물 찾기는 우선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를 파악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행함을 믿는다. 그렇다면 그 행함의 결실물을 쏟아놓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은 더 나아가 자신의 행함의 결실을 믿음의 대용물로 믿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들이 세운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 단체이다. 그들이 애쓰고 땀흘리고 재정적인 희생과 마음 고생으로 얻어진 것이기에 사투를 다하여 믿고 소유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대로 자신 있게 교회를 믿는다고 우쭐댄다.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니 매주 참석하는 교인 수를 믿으면 매주 들어오는 헌금을 믿고 그렇게 사 모아놓은 부동산을 믿는다. 그리고 목사는 자기가 애쓴 신학교 시절을 믿고 거기서 얻어진 목사직을 믿는다. 교인들은 자기가 애쓴 교회를 믿고 그렇게 얻어진 장로 직책을 믿는다. 이들은 의식은 믿음에서 행함이 아니라 행함에서 믿을 만한 결실을 영글어내어 고수하자는데 있다. 어쨌던 예수님의 일을 안 믿고 자신들의 종교 노역과 실천력을 믿는다. 그리고 이것 전부를 '의'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인된 자신의 노동의 결실이니까 의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 행함을 믿는 자들이다. 그들이 증거하는 것도 이것 뿐이다. "내가 이렇게 행했더니만 이런 참한 교회라는 보물이 나왔습니다"라는 식이다. 드디어 로마서 1:21-23의 지적대로 자기 자신이 곧 예수의 대용물로 등장된 것이다. "나는 나 외에 아무도 안 믿고 오직 나만 믿었다"라는 고백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때는 주저 없이 터뜨릴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일생과 사도들의 일생에 조금도 부럽지 않다. 단지 목회에 성공했다는 동료들의 안정감이 부러울 뿐이다. 동시에 이들은 불안하다. "만약 교회가 산산조각 난다면 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의인임을 증명하고 규정했던 증거물이 날라 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것을 내세워 아직도 내가 믿음으로 의인됨을 선전하지?"
이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교회를 믿기에 교회의 흥망성쇠를 따라 자신의 의인됨의 수위가 조절되는 사태에 늘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불신앙을 메우기 위해 열정적이고도 광적에 가까울 정도로 교회 안정과 자립과 발전에 나선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가치로서 맺어진 우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만한 힘과 노동이 실린 가치이며 그것이 곧 '자기 의'의 열매이다. 따라서 예수 믿지 않는 자는 늘 우상숭배자로서 산다.

2. '인간 의'가 중심이 되어 나타난 각가지 종교적 형태들
인간의 심성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위엄과 시들지 않는 장엄함과 전지전능함과 완전함을 두루 갖춘 분으로 인식한다. 최고의 선(善, the Good)라는 개념으로 연결되는 신적 매카니즘은 이미 인간 심성에서 선에 대한 열등의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한다. 선에 대한 열등의식은 갑작스러운 불상사나 저주가 자기에게 작렬할 것 같은 심적 불안감의 소산이다. 개별적인 인간에게서만 아니라 종족이나 가계(家系)가 표출하는 집단 표상에서도 동일하게 이 불안감이 머물고 있다.
원시 종교에서는 신들의 힘이 계속되는 위협으로 느껴졌다. 재수 없는 악마라고 규정해보기는 하지만 환상적인 신상이라도 만들어주어 그들을 달래 줄 필요는 늘 있었다. 즉 악마적 위협에 시달린 이들은 악마적 숭배 제의로 이어지고 이 악마숭배가 곧 신들 숭배로 바뀐 것이 희랍의 신화들이다. 각가지 신들도 결코 도덕적일 없는 것이 이런 경유에 의해서이다. 신들도 인간들과 같이 죄를 범한다. 그런 악마적 신들로부터 인간들이 당하는 것은 인간들이 비도덕적이라서 아니라 그들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신(家神)이 있고 매일 예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나름대로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 경 희랍지역에서 서서히 이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인간의 나약성과 허무성을 자발적으로 항복하고 인정한다고해서 모든 두려움이 달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체념이라는 항복 선언을 하기 전에 먼저 이성적으로 영원한 질서를 구축해 놓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 세계의 악들은 모두 신들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기에 신 자체를 능가하는 새로운 세계 합일의 질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질서와 법은 독재자 제우스 신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법이라는 말은 원래 '분배 해주다'에서 나온 말이다. 땅 분배자와 땅 분배받는 자의 돈독한 관계가 법이 되고 질서의 원천이다. 정해진 바를 넘어서면 그것은 곧 질서 파괴자로서 징벌이 떨어진다. 신들 사이에 규정된 이 원칙은 사실은 고대 사회의 집단 체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 경, 플라톤에 와서는 이 제우스의 자리를 이성이 차지한다. '이데아'라고 불리우는 절대적 신은 그의 이성을 낮은 단계로 향해 점차 분배해 주는 것이다. 인격적 신의 의지는 절대적 안정권인 이데아 세계에서는 소멸된다. 거기에는 비인격적인 영원한 운명이 있다.(모이라). 아니 그냥 완전한 정숙이 있을 뿐이다. 어떤 것으로도 영향 받지 않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세계이다. 운명과 법은 희랍 종교의 체질이다. 신이라는 적어도 절대적으로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었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신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관계 맺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혼자서 살아가고 혼자서 독백하는 신의 이미지를 그들은 하늘에다 걸어놓았다. 운명과 법은 이처럼 자충족적이다. 거기서 분배해주는 신적 이성은 이 지상에서 어떤 효력을 나타내는가?
플라톤 철학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 이중 과정에 놓여 있음을 밝혀주는데 있다. 인간의 혼 속에는 신성에까지 닿도록 끌어올리는 요소가 있는가 하면 육신의 더러움으로 끌어내리는 힘도 같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죽지 않는 성분이며 후자는 비합리적이고 죽는 성분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보기에 인간의 영혼은 되어감(Becoming)이라는 낮은 세계와 영원히 있음(Being)이라는 높은 세계에 함께 예속 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4세기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식을 최고의 덕목으로 본다. 감정은 이성적인 삶을 위하여 훈련받아야 마땅한 요소로 본다. 어쨋던 기원적 4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철학 사조인 스토아학파에 이르러서는 영혼의 이중성을 굳혔는데 윗층에는 이성이 살고 아래층에는 감정이 산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감정은 인간의 동물서에 속하고 이성은 인간의 신성에 속한다. 감정은 제멋대로이고 악과 재앙의 근원이며 반면에 이성은 질서요 빛이며 인간을 동물이 차원보다 더 높은데로 끌어올리는 힘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을 선호하므로서 희랍 철학은 신의 본성으로 모든 감정을 몰아낼 수 있었고 동시에 사유(思惟)와 명상을 신의 것으로 돌릴 수 있었다.
스토아파는 열정, 충동, 욕망 -넓은 의미의 감정들-을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우며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런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리고 의지(意志)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열정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느냐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충동을 정복하는 것이 곧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영혼 안에는 이성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한계 안에서만 살면 바르게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감정은 악한 것으로서 이처럼 철저히 근절되어야 대상이라는 것이다. 놓은 지혜의 경지에 이르고 싶으면 냉정해져야 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자는, 화를 내지도 않고 겁을 먹거나 심지어 불쌍한 마음까지도 품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행복이란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온갖 동요로부터 무관심하고 외부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면역이 되어서 마침내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의 상태라고 보았다. 눈 앞의 쾌락을 물리치고 자기 절제나 통제 능력에 숙달된 자가 참된 덕이라고 여겼다. 절대 신에게 사유하고 명상하는 것 이외의 모든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 최고 지혜라고 그들은 가르쳤다. 만일 이성을 따르기에 너무 힘들면 자살을 감행하므로서 충동과 욕망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정도로 세상을 관조하는 금욕주의가 바로 스토아 학파이다. 이성을 무시하고 오직 충동과 애증에 따라 산다면 그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육체는 영의 사슬, 영의 감옥, 즉 정신이 벗어나고 애쓰는 짐이다. 몸을 '육체'라고 표현한 것은 멸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정신은 '거룩한 영'으로 불렀다. 개인은 세계 로고스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성까지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본래적 본질을 무시간적인 로고스에서 보고 철두철미 로고스 존재에만 자신을 집중시키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미래, 현재, 과거가 갖는 시간성 자체를 탈취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현재는 미래 앞에서 결단을 모르기 때문에 참 현재는 아니다고 한다. 지혜자가 내리는 결단은 순간의 무의미성을 위한 동일한 결단의 반복일 뿐이다. 과거에 의해서 현재에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인 로고스 인간이기 때문이란다.
기원전 3세기에 접어들면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신을 일자(一者)라고 했는데 신은 무한하므로 만물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모든 것을 산출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진, 선, 미를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함부로 신을 향하여 선하거나 참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직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므로서 신에 관해서 말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신으로부터 나오는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정신이며 그 다음이 영혼이며 가장 마지막의 것이 질료이다. 이 정신적인 신 자체가 흘러 넘쳐서 세계 만물이 형성되었으므로서 모든 것이 신적이고 그러나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 재료와 영혼이 결합해서 형성된 것이므로 완전하기 위해서는 신의 단계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이나 용기 또는 정의와 같은 일상적인 현실의 덕을 실행해서는 완전한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충동이나 욕구를 억제한다고 해서도 완전치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영혼은 먼저 감각과 충동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 다음에 이성적 사색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아직 신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 사색은 신을 사색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영혼이 자신의 사색을 초월하여 신의 영혼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영혼은 신과의 황홀한 합일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황홀한 합일이란 모든 실천과 이론을 초월한 수준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주의 경향은 오랜 전통 속에서 싹터 온 것이다. 희랍인들에게 있어 신적이란 곧 불사(不死)적인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가? 여기서 환생의 교리가 성립된다. 죽음은 해체가 아니라 재생이라는 것이다.
집단이나 종족을 지배하는 운명적(모이라) 생명은 살아있는 집단 구성원들 뿐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 연속성을 갖고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아직도 산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집단의 일부이다. 영원히 새로워지는 이 생명은 '죽음'이라고 불리는 그 반대의 상태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부활은 죽음과 만나고 다시 죽음의 세계로 스며든다.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사이클은 원래 신적인 상태로부터 영혼의 타락, 그리고 이 현상의 지하의 연옥에서 영혼이 지은 죄를 정화시킴, 그리고 영혼의 고향인 하늘 나라로의 귀환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야 종교에 의해 영향을 받은 환생 종교가 희랍에 등장하는데 이 종교의 이름은 오르페우스 종교이다. 이 환생을 서클에서 도덕적 생활은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가?
영혼은 신의 세계로부터 떠나 온 유배자이자 방랑자이다. 영혼은 그 위대한 해가 끝날 때 이 지상으로부터 완전하게 탈출하므로서 신과 재결합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오르페우스 교는 정화의 의식을 통해 그의 개인적 영혼을 구원하는데 집중한다.
개인의 영혼에 대한 강조는 빛의 원리와 어두움의 원리를 대비시키는 달성한다. 선과 악을 나란히 놓는 우주적 이원론은 인간의 이중적 본성, 즉 흔히 '죄 의식'이라고 부르는 본성을 우주에 투영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에 대한 자각이며 이는 재결합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동반한다. 죄와 양심의 소리 사이의 갈등은 실체와 영혼 사이의 갈등과 연관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체의 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은 감각들과 욕정들이고 이들의 반란의 인간의 내적 심성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오르페우스 교도들은 제사의 무아경 속에서 신과 직접 결합하므로서 얻을 수 있는 완전한 만족감에 이르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종교 집회가 주는 만능주의의 폐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도덕으로 전환했다. 옳음의 길이 길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결국 신에게도 인도한다는 것이다. 오르페우스 종교 밖의 희랍 세계에서의 도덕이란 모이라, 즉 운명이 정해진 그 한계 밖으로 넘어서지 않는데서 분수와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 교단을 달랐다. 이 사회에서의 수평적인 한계 지키기와 균형 맞추기가 아니라 내가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수직적인 '옳음의 길'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있을 뿐이며 여타의 생명은 찰라적으로 수면 위에서 터지는 물거품이라는 것이다. 영혼은 한 흐름을 따라야 하며 그 생명을 위해 저급한 단계에서 고급 단계로 이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을 믿고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삶을 정화하는 종교인 것이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므로서 대지에서 천상으로 영혼을 옮겨놓도록 해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가 기원전 6세기 초, 피타고라스에 와서는 생명의 길이 '지혜의 추구'의 종교로 개혁된다. 생명의 길은 아직도 동시에 죽음의 길이긴 하나 이제 그 죽음은 이 더러운 육신의 정서들과 욕정들의 죽음이고 그리고 이성은 그 안에서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동양 종교에서도 이성적 종교에로의 전환은 예외가 될 수 없다. 노자의 도(道) 사상은 이름지어 부를 수도 없고 규정할 수 없는 현묘한 어둠이다. 도는 영원한 침묵, 끝없는 고요, 역시 희랍 사상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변함 없는 질서 그 자체이다. 따라서 도를 따르는 자는 욕망에서 벗어나 동요와 경망함에서 벗어나는 자유함으로 최고 경지의 수행자에 이른다고 본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는 행위의 부재(不在)이다.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유교의 최고 존재도 절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함을 지닌다. 그러기에 하늘과 인간간의 교제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신이란 본질적으로 우주의 도리(道理)이다. 그 도리는 비인격적이다. 하늘은 말하지도 않고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그들의 행실에 따라 정확하게 결정된다고 본다. 하늘에다 대고 운명을 바꿔 달라고 조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인도 철학에서 보다 확실히 해두고 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복락은 전생에 행한 행실의 결과로 보고 있다. 업(業)이란 고통의 양인데 거듭되는 윤회 전생을 통해서 저지른 잘못의 양과 똑같다는 응보의 법이다. 업은 스스로 효능을 발휘하겠금 되어 있어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자동적으로 징벌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어떤 신도 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조절 법칙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와 그 열매는 철저하게 얽혀있어 무관한 것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에는 (이것은 행위라고 함) 필연적인 결과가 반드시 따라 올 뿐이다. 범죄에는 형벌이 따르고 선행에는 보상이 따른다. 이 모든 일이 신의 간섭 없이 이루어진다. 은총도, 자유도, 회개도, 속죄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비인격적인 질서와 불가피한 자동 응보 밖에 없다. 인도 철학에서의 업 사상은 기원전 1500년 시기에는 없었다. 그 시대에는 신에게 제사 드리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제사 의무와 맞물리면서 규정된 제사는 더욱더 풍족하고 맛깔스럽게 잘 지내는 자가 극락에 간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였던 것이다. 당연히 제사를 제대로 못드린 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시대에 접어들어서 타자, 즉 타인으로 만나던 신을 자아의 내면으로 만나는 자아와 함께 있는 신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는 삶이 곧 고통이라는 철학적 자의식의 발달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 양식이다. 제사나 예배의 굴레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자기 행함으로 자기 구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표출이다. 업을 쌓는 것도 업을 멸하는 것도 자기 행위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과의 투쟁에 나서게 된다.
욕망이란 어느 한 구석을 포기할 때 포기되지 않는 다른 구석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욕망의 부재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욕망이란 실현 가능한 대상만 발견하면 손 쓸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오기 때문이다.) 욕망을 한데 모아 한가지 방향으로 집중할 때 욕망이 더 이상 이것 저것 옮겨다니지 않고 안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평정에 찾아든다. 이 수련을 반복하는 것이 요가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인도 철학을 수정해서 나름대로의 복음을 만들어낸 식이다. 즉 거듭되는 윤회 전생(轉生)을 통해서 지루한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하지만 해탈을 하기 위해서도 또한 지루한 전쟁을 따로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자아를 해체시키므로서 성공하려고 한다. 욕망 문제를 자아 소멸 문제로 전환해서 해결지우려고 한다. 그래서 불교는 무아윤회이고 힌두교는 유아윤회이다. 그러나 해체된 자아는 또 어디서 떠돌게 될지 그 뒷 처리가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자아의 무한정 변신을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아 변신'이라 할지라도 결코 절대적 무아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처럼 인류가 수 천년 흘려오면서 '인간의 의'를 가지고 실험한 각종 정신적 실험들은 이성적 형태로 귀결된다. 과연 이러한 수법을 교회가 마다할 리 있겠는가. 지난 날 교회들마다 세 확장을 위한 승부수로서 '성화론'에 열중하고 매달리는 것도 이 실험의 연장선 위에 있다. 어떤 인간들이든 거부감 없이 접합시켜 자기 교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시도를 이 실험을 통해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를 빼놓고서는 신학이나 목회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의 지혜 능력에 관한 실험'이다. 그런데 이 지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20)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유일무이하게 인정하시는 지혜가 신학인가 아니면 목회술인가? 신학도 아니고 목회술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즉 하나님이 인정하는 지혜는 '십자가'뿐이다. 그러니까 '십자가 시간'까지도 들먹이면서 인간을 긍정하는 그런 지혜가 아니라 '하나도 알지 못했다'는 거부적 속성의 능력이 지금도 활발하게 발휘되고 있는 그런 십자가이다. 이런 십자가에 지혜를 포기하고 그 대신 윤리로서 그 공허를 채우려는 의도로 새로운 율법들을 조장해 내고 있다. 그 실태를 살펴 본다.

3.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율법적 동기들
(1)인간도 따로 절대법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주장
성경에 나오는 법 조항들을 보다 철저히 이행하기 위한 조치로서 교회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 실천에 옮기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을 곧바로 성취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법은 자신들이 만든 법을 발판으로 삼지 아니하면 달성되기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기 위해 '주일 성수'라는 법을 만들어 낸 것을 대단히 장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또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는 성경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목사에게 대들면 저주받는다'는 내름대로 법을 만든 것은 놀라운 성령의 지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절대적인 것처럼 자신들이 만든 법도 역시 절대적일 밖에 없는 것이라고 우기는 이유는, 절대적인 성경 말씀을 준수한다는 거룩한 목적에 토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2, 제 3의 후속 '절대법'이 번식되기 마련이다. 즉 '주일 성수'라는 절대법을 또 효율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실천할 항목과 세칙들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일 날에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든지, 직장 일로 인해 사람을 만나 업무를 보지 말아야 한다든지, 가축들에게 사료를 전 날에 미리 준비한 것으로 해야한다든지, 오후 예배 이후에 T V 시청이 과연 옳은가 그른 가에 관한 규칙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세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확정된 해석도 아울러 제시하는 것으로서 다른 해석을 법적으로 아예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 후속 법으로 이 말씀을 지키는 것 방도 외에 다른 방도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법 조항에 걸려서 예수님이 사형 당했다는 점은 말 할 나위도 없다.
이들에 평가에 의하면 보다 많은 후속 절대법과 규칙에 정통하고 그것에 스케쥴을 맞추어 사는 자를 '신앙이 좋다' 혹은 '성화' 된 자라고 규정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인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각가지 지방 자치법이라든지 상거래 법이라든지 조세법과 법률들은 그것도 또한 나름대로의 사회 정의와 이웃 사랑을 규정짓는 규칙으로 등장했기에 동일한 윤리적 가치성을 놓고 법적 기준 적용에 대해서 경쟁이 일어난다. 즉 교회법과 예배법에 누구보다 철저한 어떤 교인이 세금 내기에 인색하고 폐기물을 불법으로 처리했다면 과연 이 사람이 많이 성화 된 자이며 이웃 사랑하고 정의로서 채워진 있는 사람일까 모호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헌혈 채집과 장기 이식에 남보다 더 헌신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일요일 날 오후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고 제자 훈련에 소홀히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의 인격에 아직도 사랑과 신앙과 정의감이 남아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을까?
결국 교회 내에서 자꾸만 법을 따라 표현하고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 질서를 잡으려는 것은 그들이 두 가지 목적 때문인데 그 하나는, 신앙을 법이라는 틀로서 측정을 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측정 때문이라도 교회라는 조직을 절대적으로 굳건하게 보존해야 하고 확장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종사하는 성직자의 권위와 위상도 같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고정적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심어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자진해서 '영혼 재판관'으로 나설 것이니 법적에 준해서 그 권위성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권위는 인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 측정을 법에 준해서 처리하겠다는 것은 신앙과 무관한 근원에서 나온 철학적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철학적 지혜에 따르면, 최고 윤리의 끝은 곧 최고 신앙의 목표와 하나가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윤리적 잣대를 가지고 신앙 있음과 없음을 윤리 측정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고선을 지향하는 계열과 같은 계열에 속해 있다. 이런 철학적 성향을 질서 잡힌 교회라는 조직체로서 각 영혼을 덮어 씌우려고 나서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회 말 들으면 곧 신앙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서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식이요, 더 나아가서 아무리 이 자본주의 사회에 불황이 찾아와도 교회 금고는 결코 마르지 말아야 된다는 점을 아예 거룩하고 절대적인 법에 의지해서 진리인 것처럼 호소하겠다는 사업성 안목의 표출이다. 교회가 굳건히 설 때에 하늘 나라 법정 역할을 이 땅에서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수행하면서 숱한 법을 벌려놓고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처럼 신앙을 모르는 자들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법을 지켜야 얻어내는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신앙은 법에 갇히지도 않고 법으로 전환될 수도 없고 법에 담기지도 않는다. 공기를 채로 걸려 낼 수 있을까? 신앙도 이와 같이 법과 무관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2) 인간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해 내겠다는 주장과 신앙
요한 1서 2:27-28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기름 부음'이 성도들에게만 분명히 있다고 되어 있고 따라서 이런 이유로 인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 두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는 바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그 인위적 능력에 따라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성도 안에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된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법이라는 채로 걸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거짓 종들은 법에 담긴 가짜 신앙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기에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26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거론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성도는 세상이나 교회에 대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부여 받은 자이지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남을 구원해야 될 입장에 놓인 자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임무도 법을 제정해서 그 가르친 법대로 교인들을 교육해서 실천시키는 데가 아니라 복음만을 증거 하여 각자의 성령의 도움으로 각자 주님의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에 구원된다는 이 점을 또한 증거 해야 될 사명에만 놓여 있다.
그런데 교회가 법을 자꾸만 생산하여 그 법의 테두리에 교인들을 감금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버리고 인위적인 군기 잡기와 교육 효과에서 구원의 능력을 짜내어 보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것은 불신앙적이다. 법의 준수나 실천으로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의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 예를 들면, 물이 H2O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법으로 제정했다고 해서 그 법을 지키면 물이 새로 생rusk지 않는 것과 같다. 성령은 괜히 계시고 괜히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이 하시고 있는 일은 '법 준수'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렇게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으로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실제 활동은 인간의 '법 실천'으로 대신하려는 의도는 어떤 정신상태에서 나오는가? 사무엘상 8:7-9에 그 실체가 드러나 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그렇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는 그 순간에서도 실은 '인간 왕'을 그리워하고 있다. 믿음이 없기에 '인간 왕'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라는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 자기들 위에서 군림해 줄 '지도자'라는 '인간 왕'을 민중들이 원하고 있고 또한 성직자들도 교인들이 그런 쪽으로 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자'라는 것은 없다. 지도자는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 성령이라는 기름부음으로부터 이런 사실을 현재 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만이 오로지 성도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니다.

Ⅲ 결 론

다니엘 6:8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 조차도 변개치 못하는 법령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한테는 아무런 겁도 주지 못하는 법이었다. 법에 개의치 않고, 즉 불법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그 당시 법 제정자들과 달랐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에 보면 다니엘이 무죄하다고 되어 있다. 다니엘은 무죄했던 것이고 다니엘 세 친구도 세상이 주는 불의 형벌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어디 다니엘 뿐인가? 자기 아들을 죽일려고 한 아브라함도 의인이요, 자기 가정의 구원을 위해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거짓말을 한 기생 라합도 의인이요, 자기 민족의 멸망과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도 당대에 의인이었다. 특히 예수님은 아예 십자가에서 사형 당해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의의는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의를 고발하고 동시에 그 의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해 내시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처럼 신약의 성도들이나 구약의 성도들이나 오로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들인데 이 점이 성도의 성도 됨의 기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의 말씀 성취라는 공적에 근거해서 넘겨져 온 것이다. 언약이 약속 한 바가 바로 이 약속이다. "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6:50-51, 53)
이 새 언약을 최종적으로 붙들고 증거하지 않는 자는 성령이 아직도 없는 자이요 결국 성도나 교회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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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3 성경신학 예수님의 설교와 십자가― 소위 산상 설교를 중심으로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6-11-28
3,132 성경신학 『인간의 질병과 예수』- 욥기를 중심으로 해서 - 최고관리자 06-11-28
3,131 성경신학 총신, 칼빈주의 자들인가? 미가 최고관리자 06-11-28
3,130 성경신학 소위 "기독교 윤리"에 동원된 그릇된 성경 해석학들 미가 최고관리자 06-11-28
3,129 성경신학 "행하는 자라야"라는 자료집을 읽고 [신학] 최고관리자 06-11-28
3,128 성경신학 과학적 창조론의 허구성 - 최고관리자 06-11-28
3,127 성경신학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3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6-11-28
3,126 성경신학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2 창세기 최고관리자 06-11-28
3,125 성경신학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6-11-28
3,124 성경신학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수정완료090204) [신학] 최고관리자 06-11-28
3,123 성경신학 "비윤리"와 "비신앙", 어느 것이 죄인가? 로마서 최고관리자 06-11-28
3,122 성경신학 유전학을 통해서 본 "행함"의 정신 - 최고관리자 06-11-28
3,121 성경신학 타락후 선택설과 타락전 선택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1-28
3,120 성경신학 이웃 사랑과 윤리 - 최고관리자 06-11-28
3,119 성경신학 현대의 종교 생활과 교회 생존책 - 최고관리자 06-11-28
열람 ➜ 성경신학 신학과 목회에 나타난 "인간 의"에 대한 집착 로마서 최고관리자 06-11-2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