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순수한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순수한 것이 없다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인간에게는 순수한 것이 없다
2000. 12. 20
순수하냐 아니하냐 하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봐서 판단해야지 자기 기분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나서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용납을 해 주지 않는 일이다. 소위 순수한 마음에서 뭔가 일을 시작한다고 여기지만 여기서도 욕심과 개인주의가 이미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구제 단체를 만들고 일하지만 혹시 자기 보다 더 열심히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꾼이 한 사람 들어오게 되면 주인은 은근히 화가 난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어떤 가정 주부가 진정으로 시부모님을 섬긴다고 칭찬을 많이 들어도 자기보다 더 주부 일을 헌신적으로 하는 사람이 새롭게 등장되면 부화가 슬그머니 치민다. 또 멀리 아프리카 오지에서 순교적 각오로 선교에 매진한다고 존경심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더 오지에서 그 어렵게 선교하는 자는 자가 새로 생기면 여기서 질투심이 발생되기 마련이다. 이런 부화(화 남), 질투, 시기를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자신은 분명히 선교나 구제나 이웃 사랑이나 며느리 아내 노릇 잘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요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이요 누가 봐도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슬그머니 표출되는 현저한 육체적 열매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린도전서 13:1-3에 한 번 찾아가 본다.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상식적으로 봐서 설교가 하나님의 일이요 믿음과 구제와 순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로 봤지만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정말 그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가 아닌가는 외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드러내면서 하느냐가 관권이다.
사랑이란 용서하심을 받은 자에게만 용서의 차원에서 등장되게 되어 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4:32, 5:1-2) 즉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로서 이웃을 찾아가는 자가 사랑이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죄가 이미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로 될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상대방이 죄를 죄라고 인정도 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덜렁 "용서하노라!"고 외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앞에서 자기의 정당성을 한껏 뽐내는 시위밖에 안 된다. 즉 "내가 할 몫은 내가 다 했음"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주님이 용서하시는 죄라는 것이 특별한 인간만이 자기만의 생애에서 개성 있게 짓게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전혀 예외가 될 수 없는 그런 죄에 대해서 특별히 선택된 자를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죄 행위이다. 그래서 성도가 죄라고 이야기하는 그 죄는 그 성도만이 짓게 되는 개별적인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짓는 죄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는 그들만이 지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 누구나 다 지을 수 있는 죄를 단지 그들이 대표해서 그 죄의 실체를 보여준 것과 같다. 따라서 성도가 "이것이 죄이다"할 때에 불신자가 "나는 그런 죄 안 지었다"라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구태여 지어야 비로소 그 때에 죄인 되는 것이 아니리 죄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죄 짓게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모든 죄를 다 지을 수는 있지만 아직 그런 기회가 다 똑같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 처지에 따라, 교육 수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 다르게 죄를 짓게 되면 결국은 오직 하나로 뭉쳐진다. "나는 누구를 의지하기 보다는 내 결심과 열심과 윤리로서 살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라고 참 성도만이 회개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불신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든다. "나는 누구를 의지하기보다는 내 결심과 열심과 윤리로서 살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가 죄입니까? 인간이 어디 로벗입니까? 인간으로서 당연히 이런 식으로 살 권리가 있는 게 아니예요?" 즉 이처럼 모든 죄는 이런 보편적 악마적 성품에서 뿜어져 나온 것들이다. 환경과 처지에 따라 마치 개별적인 죄가 특정 개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누구나 그런 환경이 되면 동일한 죄를 짓는데 그 이유는 바로 누구를 의지하기보다는 자력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는 보편적 죄성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 편이 된다. 결코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편들지 않는다. 같은 노무자들은 한 목소리를 내는 노동 쟁의와 비슷하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그 전능하심으로 좀 봐주소!"라고 자신들의 본질적 죄에 대해서 눈을 찔끔 감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용서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미흡함을 좀 못 본 척해서 그냥 넘어가 달라고 기도한다. 결코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 차이나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회개를 하려면 스스로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해야 하고 그 죄가 일시적으로 실수해서 나온 세속적 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자립해서 살고 싶은 그 교만한 마음이 곧 죄라는 점을 인정해야 그 때 비로소 회개가 회개답게 수용된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근원적 죄를 기피한다. 그 대신은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사람마다 각자 차이나는 그런 행위들을 죄하고 규정짓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해야지만 타인이 차마 이룩하지 못하는 나만의 의와 나만의 순수함도 훈장처럼 오래 동안 즐기며 따로 간직할 근거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 의란 있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순수할 수 없고 예수님처럼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꾸 에수님의 십자가 이야기하면 그 앞에서 자신들의 순수함의 빛이 떨어지기 때문에 순수함 경쟁을 부추기는데 동기 유발에 있어 십자가가 거추장스럽다고 여긴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만들고 세운 교회에서는 수님의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얼른 그것을 치워버리고 그 대신 자기가 행한 도덕적 업적을 그 제단 위에 차려놓고 그것을 신봉하려한다. "봐라. 나는 저 세리와 같이 안잖아. 그 정도로 나는 성화 된 자 맞잖아" 바로 이런 즐거움에 탐닉하는 재미로 교회에 출석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설립하는 교회는 회개하는데가 아니라 자기 의를 각자 끄집어 내어놓고 시합 붙이고 경쟁해서 상대를 꺾는 그 재미에 만끽하고자 하는 단체로 변모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아예 말살해 버려야 한다. 자기 신앙 좋다는 간증 이야기만 유행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예수만 믿자!"라는 복음보다 "성경 읽자, 무작정 읽자"가 신종 복음으로 등장된다.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을 믿자!"라는 복음보다 "누가 누가 기도 많이 하나 한번 시합해 볼까?"가 주요 흥밋거리로만 교회 내에 등장된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으로 욕심 많은 우리에게 십자가 도를 전하셨는가?"가 주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회 회원수를 많이 확보할까?"가 전도라고 가르치게 된다.
이처럼 불신자들의 교회는 용서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용서가 성립되려면 죄를 늘 새롭게 규정해 주어야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늘이 내리시는 용서의 속성상 그 용서 균일성 때문에 진정 용서받은 자 끼리는 상호 대결 경쟁 구조로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성사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쟁 구조가 없는 공간에서는 나만을 기대하고 나만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나만을 그동안 사랑했고 나만의 개성을 고이 품고 한평생 나만을 가꾸고 온 이 소박하고(?) 순수한(?) 이기주의가 영글어 내는 행복감마저 그것도 죄로 드러난다는 것이 못 견디도록 불신자들에게는 괴로운 것이다.
좋든 싫든 시합이 있는 곳에 사는 맛이 나게 마련이다. "자 누구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누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인지 각자 한 번씩들 내 앞에서 붙어봐라!"라고 자리를 주선해 주는 자가 목사로 있는 곳에서 비로소 불신자들은 얼굴에 생기가 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은사도 아니다. 물론 설교도 아니요 선교도 아니요 순교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2) 왜냐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과 그 분은 용서해주시는 은총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짓밟고 기 위에서 한껏 설쳐 되는 종교 축제요 사교 친목 단체의 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제 알았다. 문제는 간단하다. 십자가만 지워버리자. 그리고 난 뒤 그동안 닦아놓은 각자의 개성과 신앙 솜씨들을 마음껏 빛내자! 이것이 불신자들의 구호이다. 이로서 자기의 순수함이 이 동네에서는 여전히 대접받기를 원한다.
결 론
교회는, 그 교회를 붙들고 유지하라고 모인 곳이 아니다. 회개하라고 모인 곳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종교 단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그 변화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려면 우선 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용서해 주신 주님의 시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그 충만함을 알게 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대하면 대할수록 더욱 더 근원적인 죄에 대해서 알고 거기에서 그 세력에서 건져주신 십자가의 피를 감사하라고 있는 책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 뭐라고 기도했던가? 바로 이런 점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 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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