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새 생명의 삶"이라는 것의 허구성
소위 '새 생명의 삶'이라는 것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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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새 생명의 삶'이라는 것의 허구성
1. 육과 영의 만남
성경에 나오는 '새 생명'을 윤리로서 검증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순간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심지어 커피까지 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간음과 음란을 정죄하고 그것을 용감하게 거부했다고 그 사람 속에 새 생명이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자기 의지로 이런 결정을 과담성 있게 내릴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진짜 새 생명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모호하지 않으려면 참으로 섞일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다른 토대 위에 정의를 내려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새 생명이라면 옛 생명을 가진 자가 도저히 실천해 낼 수 없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그 때사 비로소 제대로 된 새 생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새 생명에 합당한 행위를 정의할 때는 우선 옛 생명이 할 수 있는 범주부터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옛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러 이러한 행위까지만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 이러한 행위란 너희 옛 생명을 가진 자는 도저히 못하겠지, 그지?"라는 식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야 된다. 예수님께서 제시한 예를 하나 들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같은 것이다. 이런 대화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무능을 유감없이 노출시켰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했다. 즉 옛 생명의 특징을 깔끔하게 보이고 있다. 뿐만아니라 윤리적으로 '새생명의 삶'을 논하는 사람은 아마 이런 식으로 예수님에게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다는 것은 윤리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것을 말하지요 그지요?"라고 답변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니고데모도 능히 이야기 할 수 있는 대답에 불과하다. 그 당시 유대인의 신학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율법을 따라 개같은 이방인들과 차이나는 거룩한 삶을 나타난다고 가르쳤고 따라서 니고데모를 비롯된 유대교 성직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 중에 가장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들은 그 질문은 단순히 윤리적 삶을 아직도 부족한 점을 들어 예수님이 새 생명이냐 아니냐를 확실하게 가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취지로 들린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가 들은 말은, 인간 기존의 육에 대한 전적 부정으로 들렸기에 과연 예수님께서 육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시는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제 나름대로 가상적으로 육 자체가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방안 하나를 가지고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즉 "어머니 뱃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구원된다는 그런 뜻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육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또 다른 깨끗한 윤리성을 한껏 품게 되는 다른 육으로 대체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엉뚱하다. 옛 생명을 가진 자로서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것을 던지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5-8) 이 본문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는 말씀이 나온다. 즉 육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육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옛 생명은 옛 생명으로 끝날 뿐이다'는 말씀과 같다. 옛 생명이 스스로 노력으로 토대를 아무리 쌓아나가도 거기서 새 생명을 꽃피울 수 없는 것이다. 새 생명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미 육의 손을 떠나있다. 따라서 새 생명이라면 그 토대를 결코 육적 행위에서 토대를 찾으려고 해서도 아니되고 결국 찾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어떤 비유를 들어 그 불가능성을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시는데 그것이 '바람의 자유함'이다. 외적으로 그 어떤 간섭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 어떤 영향력도 통하지 않는 것이 바람의 활동성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에 여전히 황당해 하는 것은 그가 나름대로 자신의 의지와 활동을 하나님의 일의 근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람'에서 그는 난감해 하는 것이다. 결코 인간의 육, 즉 옛 생명은 바람을 포착하여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생명을 가진 자로서 아무리 '바람의 자유함'을 흉내내며 살아도 얼마 안 가서 그 본색이 드러난다. 소위 지쳤다는 것이다. 옛날이 익숙하게 느껴져 옛 생명을 가진 자도 얼마든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능히 해낼 수 윤리성 같은 것으로서 자기 거룩함이나 뽐내는 그런 시절이 그리워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왜 '바람'에 걸려 넘어졌는가? 그 '바람'은 예수님에게만 있고 그 어느 인간에게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옛 생명을 가진 자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예수님의 계시가 이 니고데모를 만난 이 때만 옛 생명 가진 자를 당황하게 하는 성질을 가질까? 아니다! 예수님의 연 이은 계시나 더나아가 사도들의 모든 계시도, 옛 생명을 가진 자들은 그 어떤 이들인지 간에 도저히 상상치도 못할 내용으로서 이 걸림의 속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제 딴에 홍해 기적까지 서슴없이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이 '바람'의 기적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모른다. 예수님은 이 '바람'의 걸림돌 작용을 자신의 십자가로서 사건화 시켜 버린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유대 학자들은 자기 땅에서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기적들은 고스란히 믿고 있는 바이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땅에서 일어나 새로운 기적 하나를 준비하셨다. 육에 의존하는 자는 도저히 못 믿을 그런 기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적 사건을 중심으로 여호와 종교 세상을 다시 그들의 신앙과 거룩과 예배와 여호와 종교는 몽땅 죄악, 그 자체였고 감탄 할만한 경건성도 모두 고도도 훈련된 사탄의 작품이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의 정면 반박이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능히 알 수 있다는 모세의 놋뱀 사건을 예로 드신다. 그들은 놋뱀을 유발시킨 장본인은 자기네들이 아니라 그 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안 믿고 모르던 일부 불신앙인들의 소행이라고 여긴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는 그들과 이 놋뱀 사건의 주모자와 직접 연결시켜 버리신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이다. 만약 아직도 육에 속해 있는 자가 있다면 이 말은 이해되지 못한다. 그들은 독생자라는 영보다, 자기라는 이름의 육을 더 신뢰하는 쪽으로 결국 되돌아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최종 믿음의 근거로 육 된 자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성은 곧 세상에 대한 심판성도 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니고데모는 인간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어머니 뱃 속까지 집어넣어서 다시 끄집어내는 방안까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 몸에 토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바람'에 있었다.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다. 옛 생명으로 할 수 있고 흉내 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만 일어나게 되는 일이 곧 중생이며 구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생명에 속한 자는 단 한번도 자신이 육이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옛 생명 안에 놓인 자들의 특징이 이것이다. 어쨌던 현재로서는 이 육신과 정신을 열심히 종교적으로 훈련하고 달구어야 뭐가 되도 되지 않느냐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육으로 난 사람은 결국 육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 육은 그냥 가만있지 않고 육을 부정하는 모든 것을 반발한다. 즉 유일하게 영이 되시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배격하는데 있어 악마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 인간이 육이 없으면 애초부터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기에 십자가는 세상 끝 날까지 인간의 육 됨을 놓치지 않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유일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새 생명은 놋 뱀, 즉 십자가로서 이 땅의 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니고데모나 옛 생명의 차원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평할 기준은 예수님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행동하느냐 이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의 정리해 놓은 새 생명, 곧 거듭난 인격이란 곧 윤리적이고 거룩한 새 생활로 이어지는 생활이라고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딴 삶을 생각할래야 할 수 없는 그 범주 안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으니 이런 결과에 대해서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하고 난 뒤 그들의 인식의 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단아이며 모세의 율법 준수와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성경에서 요구한 거룩과 경건은 지금까지 모두 자기 몸으로 능히 해왔다고 자부해 오던 터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은 새 생명의 씨가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씨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정죄해 버렸다. 사실 그동안 성경 말씀 따라 잡기에 동원되는 것은 고작 자기네들의 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육의 실효성은 예수님에게는 안중에도 없다. 동시에 그들도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 마찬가지 관계였다. 그들의 눈에 뜨인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주장은 도저히 수용 할 수 없는 낯설고 앞 뒤도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던 니고데모까지도 이 정도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육으로 발산되는 윤리성에 도대체 무슨 문제와 허점을 지니고 있다 말인가?
2. 낯선 '사랑'으로 벌리시는 심판과 구원
요한복음 3:16에 보면 '사랑'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그 사랑은 희한하게도 심판 자체를 취소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심판을 확정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는 심판의 대상을 확실히 가려내기 위한 기준이 들어 있다. 즉 독생자이다. 독생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심판의 대상이 가려진다. 독생자에 대한 사랑이 구원을 위한 사랑이라면 그 외의 사랑은 구원을 성사시킬 수 있는 그 독생자에 대한 사랑을 대체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없는 사랑이다.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독생자만이 해 내신 특별한 그 사랑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육도 이 사랑에 견줄 수 없다. 마태복음 7:12에 이런 말씀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에서 눈이 띄는 것은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대목이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를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일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남을 대접하라'는 달리 표현하자면 마태복음 22장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장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5절-40절) 여기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서를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간단하게 요약하셨다. 이와 같은 구약 전체가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음은 누가복음 10장에서도 나온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5절-28절) 여기서도 영생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인정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자기 딴에 이 율법을 달성해 보겠다고 '이웃'에 대한 정의(定義)를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하는 이웃은 진정 자신이 강도 만난 자라는 인식을 가진 자에게만 보이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만이 자비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즉 이웃은, 자비를 가진 자가 새삼스럽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자비는 인간 고통의 근원을 알고 있는 자를 통해서 나올 수 있다. 인간의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 자는 자비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율법을 논하고 그 율법을 지켜 낼 수 있다고 마음 먹는 자는 아직 자신의 밑바닥도 눈치 못 채는 자이다. 자신이 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인간은 율법을 아예 지킬 능력조차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자이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서도 인간은 저주받은 자, 죽은 자가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십자가 앞에서도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이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그런데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당사자이신 예수님을 부활시킴로서 인간의 현 처지를 예수님 앞에 새롭게 규정짓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10:37-39과 비슷한 말씀인 누가복음 14:25-27의 말씀을 본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본문 말씀에 보면, 천국이란 인간이 새삼스럽게 무엇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따르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 결정도가 어느 정도로 절대적인가 하면은 그 따름을 가까이에서 방해하는 이 세상의 그 모든 세력과 대상을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극단적으로 미워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기에는 우선 가족도 해당되고 그 뿐아니라 직장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소위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사업체나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도 그 대상으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서 요한 복음 3:16 말씀과 연계해 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영생이란, 율법을 준수하는 방식에서 인간에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시고 자비를 유일하게 베푸실 자격이 있는 그 독생자를 믿고 따르는 것만이 주어진다.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이 성사되기까지의 논리 과정 속에서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사랑의 부실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육적 노력으로 얻어진 모든 종교 단체와 종교적 실적이 결코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신 것과 전혀 관련지을 바가 못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홀로 하셔사 얻어진 의(義)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못하시기에 그 뒤에 인간들이 나서서 그 미흡함을 보충해 줄 필요가 과연 있는가? 성경은 도리어 이미 완성한 것을 믿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이 대목에서 '값없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값없이'라는 표현은 인간 쪽에서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필히 대가나 보상이 제공되어야 이유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표현이다. 어째서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인간이란 경건치 않는 자들이요, 죄인들이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롬 5:8-10) 동시에 참된 사랑이란 이 땅위에 애초부터 나올 수 없고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사랑뿐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여기서 '내어주심'이라는 표현도 '값없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모든 율법과 선지서의 완성 속에 인간의 그 어떤 행위의 흔적도 첨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하나님 쪽에서의 일방적으로 제공된 최종적 '대접'이요 '자비'이다. 이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하나님한테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에서 '믿음'을 요구했을 때는 믿음의 내용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에서 제시한 이 믿음의 내용에서 이탈하여 믿어야 될 사항을 행해야 될 사항으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의도가 무엇일까? 도대체 믿음으로만 성립되는 하나님의 모든 일이 인간의 행함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에 대한 큰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4:13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오해하고 지적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개념 하나를 거론하고 있다. "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여기서 '언약'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언약'은 놀랍게도 '율법'의 행함과 연계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즉 인간들에게 행함을 요구했던 그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하는 주류가 못된다는 것이다. '∼이 아니요'라는 표현은 율법 행위를 직접 거론해서 거부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사 표시이요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의 의'라고 표현된 하나님에 의해 따로 마련된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즉 언약은 그 속성과 율법의 행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의 행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단지 하나님의 행위, 예수님의 행위만 있으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은 너끈하게 성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너희들이 믿겠느냐라고 따지고 드시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믿었는가? 바로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언약이나 언약 완성은 놀랍게도 인간의 행함과 무관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런 믿음을 견지했다. 만약에 이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품을까? 그 때는 필히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거기서 얻어진 결실로 성전 중심의 이 여호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이것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바로 정신이 유대교의 실수였고 죄악이었다. 그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성전 종교 중심이나 오늘날 교회 중심의 기독교를 유지하겠다고 인간의 행함을 거론하는 의식이나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을 모르는 처사이며 악마의 의식구조에서 야기된 것들이다. '∼이 아니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은 자신의 행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의 내용에다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내용까지 집어넣어서 함께 언약의 실내용으로 우기고 싶어한다. 그렇게해서 자기 열심과 행함에 의해서 얻어졌다고 여기는 결과물, 즉 교회나 자신의 착함 성품과 행실로 변화되는 것까지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소위 종교 사업이 사업의 일종으로 가능케 되는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도 언약을 상품화 하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들의 교회 됨과 자신의 '자기 됨'을 얻는데 있어 인간들의 행함이 필수적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욕구에 편승해서 등장되는 것이 소위 '새 생명의 삶'이라는 구호이다. 즉 '새 생명의 삶'은 믿음으로 그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나 은혜로 보지 않고 무엇과 결부시키려고 하느냐 하며는 인간의 행함 없이 결코 새롭게 생겨 날 수 없는 그 새로운 무엇으로 간주케 하겠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는 결코 '새 생명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흡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생명의 삶을 그냥 주신 적이 없기에 따라서 그것을 얻고자 원하는 자는 새삼스럽게 단호한 결의에 찬 행동에 나서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결코 얻어내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더 논리적으로 들어가서, '새 생명'하고 '새 생명의 삶'하고는 같이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받게 되지만 '새 생명의 삶'은 그 '새 생명'을 인간이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생겨질 수도 있고 아니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는 결코 '새 생명의 삶'은 절대로 만들어 질 수 없고,(새 생명밖에 안 생기니까) 오직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만 '새 생명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믿음 안에다가 행함까지를 흡수 시킬 수 없는 딜레마를 자진해서 짐지고 있다. 만약 믿음에다 행함을 흡수시켜 버리면 행함에 대해서 집중적인 강조의 근거가 상실되기 때문에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들은 차라리 행함에다 믿음을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즉 "이런 이런 말씀을 스스로 행함으로 성취시키지 못하는 인간은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최종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위의 이 말은 "이런 식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믿음이 아닙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니다. 즉 '행함으로 비로소 성취해냅시다'라는 말과 '믿는 자는 필히 이런 행함의 모습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 사이에는 그 바탕에 있어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표현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면이나 지시들은 성령에 의해 믿는 자에 한해서만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소위 '새 생명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예 인간 행함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어떤 말씀도 성취에 부합되는 의를 산출할 수 없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만약 믿음이 생긴 자 신자로서 나타나는 마땅한 특별한 삶이 있다는 식으로 이들이 주장한다면 이들은 궁극적으로 행함을 강조할 스스로의 바탕을 철수해 버리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삶'이란 오직 하나 주 예수를 믿는 것, 그 자체가 옛 생명 소유자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을 수용할 만한 신앙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 있고 없고를 일반 윤리로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라고 보여지는 어떤 종교 단체가 형성되고 거기서 윤리적 티가 나면 곧 그것으로 구원받는 성도의 집단이라고 쉽게 그저 편하게 간주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그것으로 성경에 나와있는 골치 아픈 계시 공부를 대신하려고 한다. 그래서 뭐든지 일반 대중들에게도 조금도 걸림돌 없이 쉽게 쉽게 목회하고 쪽으로 비중을 옮겨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주장하는 것하고 정면으로 배치된다. '율법의 행함이 아닌 믿음만이 믿음'이요 이것만이 언약이 유발시킨 참 믿음인 점을 그들은 거부하고 있다. 즉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이란 그 믿음으로 인해 언약이 성취가 되므로 더 이상 율법적 행함이 추가적으로 필요치 않는 결과로서의 믿음이다. 이 때부터의 신앙인의 태도나 삶의 자세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고나 절망하거나 혹은 교만하거나 하게 만드는 자기 행함을 아예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내가 행함으로 이만한 윤리와 인격을 유발했다든지 발전시켰다든지 아니면 훌륭한 목회를 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며 이런 모습은 옛 생명을 가진 자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바이다. 만약 참된 신앙인 있다면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나 아브라함 같이) 이들이 자기 행함으로 언약을 성취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주장할까? 성경은 도리어 반대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 이 본문에서 왜 사도는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문구를 꼭 고집하려 하는가? 왜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왜 그 말을 구태여 언급하려하는가? 혹시 혹자들이 듣고 "아, 이제부터 내 욕심대로 살아도 무방하겠지"라는 식으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있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하나님도 필요한 분이지만 우리의 노력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후대 목회자들이 목회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긍정적인 목회관을 가게될까 왜 이런 점을 사도는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이런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도는 행함의 '새 생명 삶' 주창자들처럼 교회 사업에 독이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가 증거하겠다는 것은 어디까지 복음이지 교회라는 이름으로 벌리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관심사가 아예 다른 것이다. 이처럼 관심사가 아예 다른 이를 신앙인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능까지 복음 전파 과정에서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요소이다.
결 론
행함을 '새 생명의 삶'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순교라든지 고난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게 살자는 식의 복음 전파는 일반 대중들의 거부감을 유발하기는 커녕 도리어 호응 얻을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나아가서 전혀 그들의 윤리성에는 타인을 걸고 넘어질 가시같은 걸림돌 요소는 건덕지조차도 없다. 그래서 새 생명을 받은 자신들은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오래 이 땅에서 살아남아서 새 생명의 삶을 증거하는 일을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봐서도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각색 종파나 종단이나 종교들로 인하여 수난과 핍박을 받았고 어떤 이는 일찍 순교를 당했다. 이는 순수한 복음 때문이었다. 즉 착하거나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행함이거나 어쨋던 인간의 그 어떤 노력에도 구원은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았고 애매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이 사실이 두드려진다. 예수님 자신 이외에 그 어떤 자도 구원시키거나 스스로 구원될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은 필히 지옥에 가야되지 아예 천국에 갈 자격이 못된다. 영생을 얻고자했던 부자 청년이 이런 유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 자신이 그동안 사람들에게 던진 모든 입장과 주장을 한꺼번에 십자가상에서 거부당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도들의 신앙은 이 십자가의 의미로부터 시작이 된다. 즉 인간의 실상이 십자가 사건으로 다 드러났기에 더욱 확실히 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자 이외에 택한 자도 아니요 천국과 관련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서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옛 생명에 속한 자의 제시하는 바와 새 생명에 속한 자가 제시하는 바가 확연하게 갈라진다. 옛 생명에 속한 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만을 최종 증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 육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새 생명의 삶'은 행함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만을 믿음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새 생명의 삶'은 새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자기 행함과 맹세와 언약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함이 차고 들어야 한 뼘의 여지도 남게 두신 적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믿음이 없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윤리로서 신앙을 새삼스럽게 점검하고 확인하려 드는 자에게는 과연 이 말이 이해되겠는가? 그들은 '믿음 만으로'에 대해서 대단히 불안해 한다. 본인이 믿음 없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도리어 인간들이 하나님의 제대로 안 받쳐주어서 그런 줄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믿음 만으로 언약이 완성됨'을 못 믿으니까 결국 '믿음' 없는 자로 판명나게 또한 믿음이 없으면 궁극적으로 기대는 것인 유대인들처럼 인간의 행함만에 기댈 수 밖에 없지 아니한다. 이들은 여기서 머물 수 없는 운명에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러한 불신앙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순수한 복음을 변개하고 핍박하는 편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옛 생명에 속한 사울 시절 때와 동일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로서 옛 생명에 속한 자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새 생명 받은 자는 없고 반면에 옛 생명에 속한 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충분히 이해 못해내는 그런 새 생명 받은 자도 있을 수 없다. 새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은 옛 생명을 가진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아, 이들이 저래서 예수보다 다른 것을 찾는구나"하고 말이다.
따라서 새 생명 받은 자도 죄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죄는 따로 있음을 안다. 이것이 새 생명 받은 자와 옛 생명에 머물러 있는 자의 차이이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면 여기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그래서 성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인도하신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14)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즉 인간의 육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을 의지하게 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성도는 영원토록 십자가 속에만 들어가 있다. 쭉∼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오로지 십자가만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가 참 복음 증거자요 '새 생명의 삶'을 나타나 보이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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