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심리
목회 심리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목회 심리
목회자는 기능인이다. 기능이 가치 있으려면 타인들이 그 기능을 필요로 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기능성을 지식을 필요로하고 인정합니다.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오"라고 되는 경우가 생기면 목회자라는 기능인은 살 맛이 난다. 그런데 만약에 " 딴 데 가서 알아보소. 나는 당신의 종교 기능을 원치 않습니다. 일없어요!"라고 매몰차게 외면하면 목회자는 당황하게 된다. 속으로 목회자는 다음과 같이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나는 당신들을 위하여 온갖 것을 다 준비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정말 당신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갖추어놓고 당신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의 이 간절하고 성의 있는 마음을 외면해 버리다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여기서 목회자라는 기능인은 순간 패배감을 느낀다. '졌다'는 것, 나라는 존재가 갖는 소중함과 귀중함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후퇴해서 물러나 버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참을 수 없는 복수심이 쉽게 유발될 수 밖에 없다. 흔히 이것을 '목회 오기'라고 좋게 표현하겠지만 실제로는 사회 전반에 대한 개인적인 강렬한 복수심이다. "하나님은 나를 주의 종으로 인정하는데 그 까짓 저 인간들이 뭔데 날 안 알아주는 거야.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인지 한 번 본 떼를 보여줘?"
그러나 사람 사는 것이 오기만으로 될 일인가. 오기로 버티다가 교도소에 간 자들이 그 안에 지금도 그득하다. 냉철하게 현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거린다. 도대체 민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내가 그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면 먼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내 쪽에서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목회자라는 기능인은 드디어 눈이 떠고 현실에 민감하기로 다짐한다. 그렇다. 그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주는 자가 되자. 목회 성공의 첫걸음은 '겸손함'에 있다. 이제 건방진 신학생의 티는 벗어버리자. 먼 장래를 위해서라도 잠시 고개를 숙여주자. 속으로 구역질나고 생리에 안 맞지만, 아무도 날 쓸모 있게 안 알아주는데서 오는 그 공포심보다 더하겠는가!
이렇듯 목회자라는 기능인의 공포는 사실 모든 무직자가 겪는 공포와 동일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일반 실직자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순수함은 애초부터 내 팽개 친지 오래이다. 그저 돈만 준다면 뭐든 한다. 그러나 목회자라는 기능인의 심성에는 하나님한테도 인정받은 그 놈의 순수함은 순수함대로 유지하면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도 부합되어야 한다는 모순을 떠 안아야 된다는 것이다. 즉 사회는 각자 자신의 성공을 원한다. 사회가 목회자를 원하는 경우는 오직 교인 각자가 종사하는 있는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목회자라는 기능인이 옆에서 신의 힘으로 보충시켜 줄 때 뿐이다. (구원이란 성경에 나와 있듯이 상식적으로 예수 믿으면 성사되는 게 아닌가? 예수를 모르고 천국을 모르고 구원의 방법을 새삼스럽게 몰라서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 문답을 할 때 보면 교인들은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한결같이 도사들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목적이 없는 교인들이 개인적 욕망 달성을 위하여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그 순수하지 못한 요구에 대해, 스스로 늘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자랑하는 목회 기능인들이 너도 나도 달라붙어 그들의 뺨에 뽀뽀하기 바쁘다.
자 그러면 아직도 종교인의 순수함을 순진하게스리 유지하고 목회 기능인들을 어디서 찾는가. 교인들은 수시로 노회 쪽의 소문에 귀기우리면서 수소문한다.
이러한 교인들의 움직임을 눈 독이 바짝 오른 목회 기능인들이 놓칠 리 없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묘안을 짜 내어야 취직되는 그 기쁨의 날을 대비한다. 뭔고 하니…
자신의 순수함을 자신의 숭고함으로 끌어 올려 놓는 것이다. 즉 '순수함→숭고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고 난 뒤 그 숭고함에 도달된 자에게만 나오는 신의 놀라운 축복의 능력을 교인들에게 필요한대로 팔아먹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교인들의 미신 구조는 이렇다. 사업 성공에 나서려는 자기가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도 많다. (사업상 먹어야 될 술과 담배와 그리고 골프 치기, 룸 살롱 가기, 뇌물 바치기, 세금 횡령하기, 장부 조작하기, 종업원들 봉급 삭감하기 등 등 ) 따라서 사업을 성공해야겠고 양심상 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입장은 못되고, 그러니 윤리적으로 어떤 숭고함에 도달한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술도 안 먹고, 맨 날 성경만 보고, 맨 날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경내에 어려운 이웃과 가난한 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동정심으로 가득 찬 영과 육이 다 정숙한 어진 사람을 앞 장 세우는 방식을 구상해 보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목회자라는 기능인들이 바로 교인들이 이런 의식으로 인해 자신을 찾아주기를 내심 손꼽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제발 절 찾아주세요. 저는 죄를 몰라요. 요조숙녀보다 더 한 사람입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약 5:16) 저는 이 때를 위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유지시켜 왔습니다. 제발 절 써주세요."
목사 개인의 숭고함을 밑천으로 하여 그 숭고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각가지 능력들을 기대하고서 교인들은 목회자를 이리 저리 탐색한다. "어디 당신이 발휘할 수 있는 그 신의 능력에 구경이나 해봅시다."하면서 기웃거린다.
목회자는 초조해진다. 무슨 수로 날마다 신의 기적을 야기시킬 수 있단 말인가? 별 시시껄렁한 것까지 다 신의 기적으로 둔갑시켜 자신의 훈장처럼 자랑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살펴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반응이 시큰둥하다. 목회라는 것이 날이 갈수록 무서워진다. 지속적으로 밑천이 든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공부해서 될 일도 아니요 기도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런 것으로 채워질 밑천은 얼마 안 가서 바닥을 드러낸다. 따라서 밑천 떨어지기 전에 무조건 나에게 호응해 줄 열렬한 팬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는 것을 감 잡는다. 어렴풋이 이 목회 동네의 분위기가 파악된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내 사람 만들어야 나는 목사로서 계속 살 수 있다는 점에 확신이 선다. 내가 무슨 진부하고 무성의한 설교를 하더라도 아예 개의치 않고 그저 자기 교회 만들기에 매진하는 그런 철저한 교회맨이 필요하다. 목사한테 관심조차 안 가져다주는 것이 도리어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 그들의 교회 만들기에 나는 그저 호응만 해주면 되는 거야. 나만 교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평교인들도 목사 못지 않고 교회 만들기에 신명을 바칠 줄이야 정말 예상 밖이다." 속으로 흐뭇하다. 목사라는 자격증이 이렇게 좋아 보일 때가 또 없다. 목사가 이미 되었기에 계속해서 나를 목사라고 후하게 대우하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지날 날의 쓸데없이 걱정과 기우가 후회스럽다. "아, 교인들이 처음부터 나의 설교나 심오한 복음의 비밀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바보같이! 나는 그들이 진짜로 예수를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줄 알았잖아. 괜히 주눅들었네 그려. 그동안 순수하고 숭고한 신앙을 소유한 목사로 행세하는데 너무 진을 뺏다. 그러나 이제 교회의 실상을 알고 나니 아, 이렇게 홀가분 한 걸 가지고 말이다." 교인들은 그들이 귀한 돈 내서 세우는 교회 유지나 번창에만 관심이 있다. 목사는 그저 보리단모양 갖추어놓기만 되는 구색에 불과하다. 목사가 위대하면 교인들은 도리어 싫어한다. 그만큼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단지 몇 발자국만 앞서자. 이 숭고함을 적당 선에서 조절을 잘하는 것이 목회에 있어 성패를 좌우한다. 교인들 너무 숭고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서는 그들 앞에 권위가 안 선다. 적당히, 적당히만 앞서자. 어떤 때는 댕겼다가, 어떤 때는 놨다가 말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목회 수완에 차질이 있을 때가 있다. 다음의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괜찮은 부교역자가 새로 들어 올 때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복음 듣기를 원한 평교인이 들어올 때이다. 그런데 부교역자 일 경우에는 별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목사 장래에 대해 협박만 하면 그 부교역자는 지레 겁을 먹고 고분고분해지기 때문에 예상 외로 간단히 해결된다. 진짜 문제는 복음 듣기를 원하는 교인이 설교 문제를 들고 나올 때가 문제이다. 그동안 교인들은 전혀 설교에 관심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사가 듣기에 고맙게도 아예 설교에 대해서 기대를 안 하기 때문이다. "목사도 인간인데 어떻게 맨 날 복음만 나올 수 있는가? 그들은 우리가 같은 사회인이고 직장을 가졌기에 이것 저것 신경 쓰다보면 따로는 설교 준비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설교 들어봐도 나쁜 소리는 안 하더라. 착하고 바르게 살아라 는 식으로 설교하는데 사실 내가 설교해도 그 정도는 하겠다. 하지만 나는 신학교 안나오고 저 목사만 신학교 나왔기 때문에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이 현실을 이제부터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우리 교회에 붙어 밥먹고 살도록 봐주자. 우리 교인들이 목사를 이해 안 해주면 누가 이해해 줄까. 괜히 교회 이미지만 나쁘게 만들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저 교회만 안 건드리고 안 부수면 그냥 넘어가자. 너무 설교 강도가 높으면 늘 사회에 나가 돈 벌리 먹고 살아야 될 우리 평교인들은 어떡하란 말이야. 그러니 적당한 윤리선에서 목사와 교인은 타협을 하는 거야." 그런데 복음을 요구하는 새로 온 교인은 그게 아니다. "목사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이 시간 나타나는 그 강단에서 설교해도 그런 식으로 설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십자가를 늘 내다보며 사시던 그 예수의 심정을 담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살기보다는 죽기를 원했던 사도 바울의 정신이 왜 목사님 설교에는 최종적,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는 것입니까?"
목사는 우선 교회 내에서 이 교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살핀다. 동조하는 자들이 많은가 작은가를 교인 집에 전화 걸어 탐색에 나선다. 그래서 만약 이 교인에 대한 호응도가 별 볼일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고 여기면 강하게 나온다. "집사님, 집사님과 나 중에서 누가 신학을 많고 공부했습니까? 나도 신학교 때는 집사님 못지 않게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적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썩었다고 이야기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집사님 교회가 되는 것은 복음 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의 한 많고 세파에 찌든 삶을 위로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집사님은 은혜를 아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누구한테 배우고 들은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도 우선 교회부터 사랑과 정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게 아닙니까? 집사님은 어떻게 하나만 알고 둘을 모릅니까?"하고 마땅히 책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목사가 당신을 지금 책망한다는 투로 엄포를 놓는다. 즉 평교인은 당연히 책망 받는 것이 도리이며 목사는 당연히 평교인을 책망하는 것이 주께 받은 사명이라는 점을 은근슬쩍 부각 시키는 효과도 함께 가미한다.
그러나 평교인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라는 높은 자(?)에 대한 예우는 다 차린다. "목사님, 이 교회의 머리가 누구라고 보십니까? 신학을 저보다 더 공부했다니까 잘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목사님의 임무는 교회의 머리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바른 복음과 말씀을 증거하는데 있는 게 아닙니까? 목사님은 예수님이 자리를 뺏아 놓고서도 주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목사는 속으로 이 교인의 한심함을 비웃는다. "이 사람아 예수를 의식하며 살 것 같으면 아예 목사 짓 하지도 않네. 요즘 세상에 어느 목사가 예수님 의식하며 사는 목사가 어디 있어! 교인들 이동 상황에 신경이 곤두 서 가지고 판에 말이다. 어느 교인이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올 거냐 그것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 이게 아직도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네, 이러니 아직도 복음 운운하지. 고리타분한 옛날 인물인 예수한테 돌아갈 신경이 어디 있어. 지금 산 사람도 신경 못 쓰는데…" 그러면서도 목사의 품위를 흠집이 안되도록 말과 처신에 주의하면서 다시 대꾸해 준다. "집사님 말씀대로 물론 교회의 머리는 주님 한 분 뿐입니다. 저는 이 점을 누구보다 더 철저히 믿습니다. 그런데 집사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던가요? 사람을 통해 일하시지요? 이것 인정하시지요? 제가 지금 목회하는 모든 것이 다 복음만 전파하기 위한 일념에서 일하는 겁니다. 어디 제가 제 배 채우려고 목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목회자들이 다 그러합니다. 평교인들은 목회자가 안되 봐서 몰라요 목회자의 아품을 모른다 이 말입니다. 어느 목사가 자기 살기 위하여 목회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 아니라도 얼마든지 밥먹고 살 수 있는데 이 힘든 목회를 구태여 하려고 나서겠습니까? 저도 제가 이 목회를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안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주의 종으로 시켜주니까 이 교회에 와서 이렇게 교회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다 주님 좋아라하는 일이고 결국 그것이 교회에 대한 유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다시 속으로 교인을 비웃는다. "짜슥아 목사가 말 잘하는가 평교인이 말 잘하는가 우리 시합해 볼까? 내가 이 바닥에서 말로 남에게 안 지고 산 놈이야. 내가 너 까짓 같은 놈은 한 트럭이 와도 겁 안나 알겠어? 어디 목사라는 것이 신학교만 나오면 목사되는 줄 알아? 너같이 건방떠는 인간 다루는데 도사들이 바로 목사야. 이게 목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말이야."
그 교인은 말한다."지금 목사님은 본인이 목사라고 목사편 드는 겁니까?. 목사라고 해서 다 목사다운 목사입니까?" 이 말을 듣던 순간 목사의 눈은 반짝 빛난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정치적 성격의 논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유 계속 말씀 이야기했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죄인입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내 술책에 말려들어 스스로 자기 자존심을 최종 무기로 덤벼드는 구나. 드디어 때가 왔다. 일격을 칠 때가 말이다." 하고 속으로 흐뭇해 하면서 최종 반격에 나선다. "집사님은 복음을 거론하고 주의 종의 순교를 언급하면서 왜 목사편과 교인편으로 패가름합니까? 하나님 백성에 무슨 패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놓고도 지금 복음을 안다고 저에게 덤비는 것입니까? 집사님이 정말 복음을 안다면 이 목사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배척을 받아도 먼저 자진해서 순교할 각오가 있어야 진정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순교를 논하면서 왜 본인은 순교를 안 하려고 합니까. 패싸움에서 승리하겠다는 것입니까 이래도 집사님은 이중 인격자가 아니예요!" 목사의 예리한 공격에 순간 그 교인을 비틀거린다. 속으로 뭔가는 모르지요만 '아차 실수했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예 제가 그 점을 목사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먼저 목사를 옹호하니까…" 목사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인다. "아하 그래도 변명입니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세요. 저는 정말 집사님을 속으로 존경합니다. 오늘날 이런 훌륭한 교인들도 있구나. 정말 목사라도 이런 분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큼 합시다. 저는 집사님의 충정을 십분 목회에 잘 반영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황당해 하는 교인을 보내놓고는 목사는 속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저런 귀찮은 인간을 우리 교회에 보내십니까. 저도 좀 편하게 삽시다. 더 이상 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던 말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가 난 그 교인이 교회 장로를 만나려간다. 이러킁 저러킁 이 장로도 혹시 목사편이 아닌지 눈치를 살피면서 목사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는다. 다 듣고 난 뒤 장로는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여유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즈음 목사들 다 그렇잖아요. 어디 우리가 목사를 존경해서 데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저도 집사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학교 나왔다고 목사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장로들은 새로 교육을 시킵니다. 요즈음 다 그렇게 합니다. 권위를 내세우다가는 가차없이 잘라 버립니다. 그러니 목사 가지고 노는 재미도 의외로 솔솔해요. 자기 딴에 목사랍시고 까불지만 노는 가락은 이미 우리 장로 손 안에 있습니다. 장로 어디 한 해 두 해 합니까. 그냥 밥먹고 살게 놔 두세요. 요즈음 목사 같은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다 고만고만한데 말입니다. 그래도 월급 올려달라고 땡깡 안 부린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세요. 목사 잘못 건드려가지고 노회에서 장로치리 한다고 나오면 곤란합니다. 또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퇴직금 많이 달라고 사택 안 비워주면 그것 어떡합니까? 심지어 재판에 져도 안 나가는 목사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있다가 다른 교회하고 바꿔치기 하든지 아니면 다른 임직을 찾아간다고 할 날이 오면 얼씨구나 보낼 참입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주의 종입네'라는 버티는 것이 목사로서 최후의 무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안되었어요. 오직 가진 힘이 없으면 '나는 주의 사자다 날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라는 무기하나로 배기겠어요. 그 심정 우리가 너그럽게 이해 안 해주면 누가 이해해줘요? 저는 생각하기를 그저 우리 교회만 조용하면 최고입니다."
그 교인을 장로에게 대꾸한다. "글쎄 그 '교회 조용하기'를 가지고 도리어 목사가 최대한도로 이용해 먹는다니까요." 장로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다.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고 어쨋던 우리가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저의 기도를! 지금까지 이 교회가 이만큼이라도 부흥 성장해 온 것도 목사가 설교 잘해서 된 게 아닙니다. 우리 평신도들이 기도 많이 하는 덕분입니다. 저같은 경우에도 새벽 기도 한 번 안 빠지고 진정으로 주님께 기도했더니만 이 장로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다 기도 덕분이니 너무 걱정말고 기도 열심히 합시다. 우리 목사님 귀한 복음만을 전해 주기를 말입니다."
그 교인은 답답하다. 예상은 한 바이지만 실제로 부딪쳐보니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느 교회가도 다 마찬가지 아니야.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도 이 시간부터 포기이다. 나도 내 마음대로 살거야. 주여 용서하소서. 교회 목사부터 제 모양이고 장로라는 작자들도 저렇게 무식한데 저들 어떻하겠습니까! 이제부터 제가 교회 꼬박꼬박 안나가도 저에게 징벌 내리지는 마소서. 마음 붙이고 영혼을 안심하고 맡길 교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저 주님의 선처를 바랍니다."
그 이후 목사는 그 교인의 형적을 살피지만 이미 그 교인은 교회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약간의 겁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내용의 편지를 속으로 그 떠나버린 교인에게 보낸다. "성도님, 교회라는 것이 원래 이렇습니다. 저도 어떻게 흘러 흘러 오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목사 갓 되고 난 뒤에는 어쨋던 한 자리 꿰차고 싶어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키워놓어야 내가 전하려는 복음도 먹혀 들어간다 싶어 그 귀한 청춘을 열심히 쏟아 부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먹혀 들지 않고 그저 교회 키우는 것만 이 시대에 먹혀들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님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지금 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음 같으면 오로지 복음만 외치다가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점점 커가는 자식과 그리고 같이 고생한다고 늙어버린 제 아내의 주름진 모습을 애써 외면할 수가 없네요. 용서하소서. 성도님. 저는 이대로 살다 죽을터이니 제발 다른 훌륭한 목사 만나서 복음대로 사세요. 저보다 이단이니 사이비니 거짓 선지자니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도 확실히 구원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대로 이 직업 고수하다가 그냥 늙을 때까지 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성도님. 그리고 점점 갈수록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과연 살아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워집니다. 이게 제 솔직한 신앙 고백입니다."
결 론
언제까지 감추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누군가에 의해서는 솔직하게 목사의 심사를 뒤집힌 채로 드러나야 한다. 목사한테도 차라리 이 점이 낫다. 그래야 매 주일, 위선에 위선을 덧칠하는 그 저주스러운 작업에 한 번쯤을 스스로 존재됨에서 나오는 더러운 그 존재성에 회의를 가질 게 아닌가! 이 회의가 제대로된 구원에 이르는 조그만 씨앗이 되었으면 같은 목사로서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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