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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의 형상과 거룩성경신학[신학]

하나님의 형상과 거룩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하나님의 형상과 거룩
2000. 11. 18

Ⅰ. 서 론

성경을 보면서 무슨 괜찮은 용어가 나오면 곧 자기 속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대변한다고 반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 당사자는 지금 죽어가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허술함과 비정상적임을 솔직하고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여쭈어야 마땅하지 아니한가? "하나님, 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까?"라고 말이다.
성경은 인간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 취지를 존중할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인간에서 출발 할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뿐아니라 거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참 거룩자이시고 유일하게 거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함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거룩 개념의 지향성이다. 예수님에 기초한 그 거룩성이 어떻게 자기 사람인 성도의 거룩으로 이어지게 되었는가 이 점을 파악해야 제대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바가 된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러한 발상이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본질로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너만 거룩하냐? 나도 지금이라도 거룩을 회복할 수 있어!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우리 인간들도 도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가질 수 있단 말이야!"라는 심보이다. 이 더러운 심보를 기점으로해서 신학을 전개하면 결국 예수님 증거가 아니라 인간 증거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즉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간들의 위대함을 보라. 너무나 훌륭하지 아니한가!"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최종 기착점이 된다. 하나님을 마음껏 영광돌리고 찬양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어떤 식으로도 자기 구원을 필히 확보해 놓는 것이 시급하다는 '구원 채산성'에 역점에 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인간이 스스로 취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확보하는 원칙이 이들에 있어서 유일한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이들에게 없다. '내가 한 행위로서 내 구원 내가 얻는 것' 외에의 다른 진리를 이들은 알지 못한다. 성경의 그 어떤 개념 정리에도 이 원칙을 피해가지 않는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얻어낸다! 남이 거저 주는 구원은 싫다!" 이러한 정신상태는 '거룩'에 관해서 논할 때도 마찬가지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얻는 거룩이 신나지 아무 것도 안 했는데도 거저 주는 거룩은 싫다는 것이다.
자, 이런 악마적 심보 때문에 이 땅에서 피 흘려 죽게되신 분이 계시다. 모든 성경적 개념은 이 '죽으심'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참 '하나님의 형상'이며 무엇이 제대로의 거룩인지 밝혀진다.

Ⅱ. 본 론

1.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형상을 가질 수 있는가'와 '무엇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형상인가' 하는 질의 사이의 차이점은?
"내가∼" 질의로 출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치 인간인 내가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선입감을 못버리는데서 야기된 질문이다. 거기에 반해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나의 잠재성에 기초해서 이미 하나님 형상이 무엇인가 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는 라는 이런 건방진 사고 방식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더나아가서 나말고 다른 존재자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형상론을 새로이 제시되어야 마땅하다는 겸손한 자세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가지 질문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를 우선 알아서 그 다음 그 형상을 내 힘으로 기이어 회복해서 가지겠다는 각오 하에 이런 두 가지 질문을 연이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느 쪽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의 떠 밈에서 야기된 사형 형벌사건이다. 자칭 하나님이 형상을 지녔다는 자처하는 자들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죽어 없애버린 사건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죽게 된 사실로 통해 드러난 진리는, 두 가지의 죽음이 상호 화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에 속해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 그대로 있고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9) 다른 하나의 죽음은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평소에 인간이 어떤 오해를 속에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론도 이런 비부활 죽음이 부활의 죽음을 떠밀게 된 그 오해의 대립된 환경 안에서 전개되어야만 한다.
창세기 1:26-27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자기 의견이나 소망하는 바를 가지고 하나님 형상 창조에 관여될 입장에 놓여 있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앞으로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 관여하거나 모방하거나 소유하거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그 인간(남자와 여자) 이외에는 없는 것이며 이 하나님 형상에 의해 '창조' 작업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인 하나님 형상에 의한 창조에 대해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형상 창조에 나서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이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 32:4)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 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3-24) 즉 소멸하시는 불의 기능을 작렬하시는 그 하나님을 무슨 수로 형상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산천초목을 바라보면서 신의 형상화 만들기를 쉬지 않는다. 십계명은 이러한 죄악된 본성을 겨냥하여 원천적으로 정죄하려하신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즉 인간이 죄인 되고 뒤에 어떤 행세를 할 것인가 이미 하나님을 읽고 계셨다. 즉 하나님의 창조술을 모방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 창조에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 정당성을 내세우는 그 근거가 무엇인고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인간 내부에 삽입해 들어왔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 속에 있는 것 중에 다른 동물에 없는 우월하고 고상한 특징들은 분명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남겨진 그 하나님이 형상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흔적을 발판으로 삼아 다시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그런 차원에서 구원 활동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이 창세기 1장의 사실을 놓고, '창조'라는 하나님의 고유 활동에 관한 언급을 마치 인간이 이 창조에 관여할 수 있는 속성이 창조된 순간부터 부여받은 식으로 창조된 것처럼 해석하고 싶어한다.
간편한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는데 어떤 학생이 숙제가 제대로 안 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책망했다. 그런데 이 학생은 그 때부터 크게 오해하기를 자신이 숙제 안 해서 책망 받은 것을 생각 못하고 자신의 숙제 안 했음이 도리어 선생님과 자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수적 요소라고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말 기가 찬 노릇이지만 이러한 기가 찰 노릇이 소위 신학계에서 도리어 바른 진리로 수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죄지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인간 창조를 무로 돌리시는데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9)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바득바득 우기고 덤벼들기를 "그래도 당신이 우리를 창조할 때 남겨준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아니 그것마저 부인할거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져 다시는 인간 창조 못할 근거를 마련 못하실 걸 …"라고 말도 안 되는 여유를 부리고 있다.
창세기 1:24-26의 말씀은, '하나님이 (다른 도움 없이 친히) 인간을 창조했음!' 그 내용 뿐이다. 그래서 창조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취지의 말씀은 창세기 9:6에도 나온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즉 내가 만든 사람은 다른 인간이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사람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고유한 창조성이 후에는 '언약에 의한 창조'로 구체화되고 신약에서는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선택' 된 자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 새사람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사실로 통해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가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여기서 다시 숙제 비유를 거론해서 설명하자면, 그 숙제 안 해 온 학생은, 선생님이 자기를 보고 책망하겠끔 한 것에 대해서 죄송스럽고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죽이든 살리든 그 이후의 모든 처분을 선생님에게 일임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선생님이 누굴 보고 잔소리 하지? 나하고 선생님은 언약 파트너야.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선생님으로 하여금 선생님 되게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거야. 이러한 관계성은 아마 선생님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일 거야. 곧 나 없이는 선생님도 학교에서의 자신의 일이 심심해서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찾지 못할걸?" 라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나 펴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해 놓으셨다. 즉 언약 달성에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도 일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단호한 징벌과 영원한 저주의 세계를 장만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2. 죄짓고 난 뒤에는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거룩
구약은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데 그 전쟁의 내막은 힘과 힘의 우열이 아니라 거룩과 비거룩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를 받은 민족이었는데 이 할례는 거룩 발생의 증거이다. 즉 없는 거룩이 언약이 개입된 특정 민족 안에서 거룩이 새로이 발생된 것이다. 그 거룩으로 비거룩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자 중의 한 사람이 소년 다윗이었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이 본문에서 '할례 없는 불레셋'이라는 표현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할례 언약을 주므로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사이를 원수 관계로 형성시켜셨다. 이는 이스라엘이 기존의 나라와는 달리 혈통적으로 조성되거나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만 생성되고 존재하는 특수한 나라인 동시에 기존의 모든 나라의 비거룩을 고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 이 본문에 보면, '모세에게 명하신대로'라는 말이 나온다. 즉 이 모세 율법대로 망할 민족은 필히 망하도록 만들고야 말겟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세 율법의 세계 개입은 이 세계를 거룩과 비거룩으로 둘로 나누어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세계를 비거룩과 거룩으로 나눈는 기준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피로서 완성이 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1-16) 즉 율법을 통해서 세상의 비거룩이 규정되는 것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거룩과 비거룩이 규정되게 되었다. 이는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마저 영원히 거룩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 인류의 전 민족이 비거룩이다. 바로 그렇다 거룩은 그 어느 역사 어느 민족에도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거룩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위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데 그 근거가 히브리서 10장에서 나온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4-5) 여기에 보면, 구약 율법으로 온전한 거룩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예언되기를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몸이 주의 뜻을 다 이룬다면 율법은 불필요하지 않는가? 그렇다. 히브리서 10:9에 그 내막이 나온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즉 한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이 담당했던 거룩과 비거룩의 규준 정하기는 끝났다. 그래서 에베소서 2:15에도 같은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그렇다면 거룩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히브리서 10:10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고백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진정 이미 거룩을 거저 얻었기에 거저 갖게 된 자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행위로 거룩하게 되려고 애쓴 사람에게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그 거룩을 온전히 유지 못할 수가 있지 아니할까? 성경은 그럴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7:24-25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 보면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라고 말씀이 나온다. 구원에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인간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으로 발휘되는 온전한 능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다시 히브리서 10:16-17을 찾아간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본문에 보면 한 몸으로 오신 그 분이 달성하신 언약의 내용 안에는 예수님의 마음까지 택한 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새기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즉 예수를 받아드리고 아니 받아드리고도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모든 율법을 끝내 끝내시려 오신 그 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까지 임무가 마무리 될 때야 비로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예언 따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7)
이렇게 볼 때, 어떤 자가 거룩한 성도가 되고 아니되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달성하신 그 결과로 인해 주어진 그 선물의 제공 여부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이러한 원리는 구약에서 벌어지는 여호와 전쟁에서 하나님의 이름되시는 분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루어놓으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 구원 얻게 된 것과 같은 법칙이다.

3. 하나님의 형상과 거룩과의 관계
로마서 8:29-30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그 아들의 형상'이 나온다. 그 아들의 형상은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인간의 노고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될 수 있는가? 하늘의 은사로만 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그렇다면 그 은사가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해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가? 그것은 그 누구도 성도에 대해서 정죄하거나 송사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용납하지 아니하게 하신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렇다면 소위 그 '아들의 형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마서 8:17-18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즉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그 영광체가 바로 '아들의 형상'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보다 길게 언급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42-43, 47-49)
사도 바울은 그 형상을 직접 보았다. 그는 세 번째 하늘에 올라 가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그래서 그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이처럼 거룩이란 아예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의 사람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이 본문에 보면, 성도는 오로지 위엣 것만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도 영광 중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의 영광체를 입으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그 형상이다. 여기서 로마서 8:30을 다시 음미해 본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곧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의 하늘 영광성이 곧 거룩의 본질이었다.

Ⅲ. 결 론

성경에서의 거룩이란 이 세상의 모든 가치와의 구별되는 하늘의 뜻이며 예수님의 마음이다. 에베소서 4:23-24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본문에 보면, '거룩함으로 지으심'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즉 창조 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모든 이 거룩의 모델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바로 이 그리스도의 빛을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만 은사로 주시는 것이다. 그 안에는 용서가 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 용서는 곧 비거룩에 대한 거룩한 분의 지속적인 용서하심이다.
이처럼 성도 안의 거룩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은사로 입혀진 거룩이지 자신의 행위로 새삼스럽게 만들어나가는 거룩이 아니기에 땅에서 새삼스럽게 만들어질 거룩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주입된 거룩이다. 따라서 그 거룩이 유지되기 위한 은사 또한 함께 계신 예수님에 의해서 계속 주어지게 되어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이 본문에 보게 되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분명 남이 보기에는 성도가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으로 인한 일이기에 성도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 하에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은 뜻은 다음과 같이 '거룩'이라는 한 말씀으로 규정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3-4) 예수님이 영이 계신데 어떻게 이 더러운 땅의 사람들과 같은 비거룩의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자는 애초부터 거룩한 성도라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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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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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