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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악마가 제시한 메시야관과 성령관성경신학로마서

악마가 제시한 메시야관과 성령관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악마가 제시한 메시야관과 성령관
2000. 11. 10

Ⅰ. 서 론

성령을 논하면서 악령과 대비시키지 않고 인간의 영과 마음과 정신과 곧바로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되었던 무엇이되었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일 거라는 선입감 때문에 생긴 경솔한 태도이다.

선과 악의 구분은 존재하느냐 비존재하느냐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 중에는 하나님께서 악이 무엇인가를 일부로 보여주기 위하여 만드신 것도 엄연히 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 이 본문에 나오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계시적 환경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비록 구원된 자라고 할지라도 그 계시적 환경은 악령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진정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애굽의 실체를 자자손손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칭 확실한 이스라엘 정체성을 지녔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애굽의 힘에 의지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사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사 31:1-3)

하나님은 비애굽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성령)도 비애굽적 요소를 나타낸다고 한다면 악령에게는 필히 애굽적 요소가 있음이 분명하고 더나아가서 구원이라는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애굽적 성질을 갖고 활동하는 악령의 정신 세계와 보편적 인간과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확신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Ⅱ. 본 론

1. 성령은 어떻게 악령과 연관되어 있는가?
왜 인간들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악령의 세력에서 못 벗어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출애굽 정황으로 표현하자면 왜 히브리인들은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탈출이 불가능했던가 라는 질문이 동일하다. 이 논조 전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성령과 악령 사이는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구조로 유지되면서 사역되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

즉 모든 정치적 술수나 제스쳐에다 '성령의 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구술리고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어주어서 내 세력권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이 본문에서 '먼저 강한 자를 결박…결박한 후에야'라는 표현을 통해서 밝히 알다시피 천국 성취자께서는 인간들에게 소위 '강한 자'라는 대우를 받는 악령에 대해서 정치적 타협을 봐서 포로 송환 하는 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단연코 아니다.

성도의 구원 이전에는 먼저 '강한 자의 결박'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강한 자' 체포는 성도의 몫이나 여타의 인간 영웅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성령받은 자로서의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 활동의 결과이다. 악령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연이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자'와 '성령'을 구분지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인자라고 스스로 호칭하시고 활동에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인자 차원에서 보지 말고 성령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다면 결국 인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인자께서 하시는 일을 가지고 악령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4) 인자가 되는 내가 용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일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그런 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일은 인자로서 이루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하여 악령에 속한 자인지 아니면 성령에 속한 자인지를 구분 짓는 작업으로 진척된다. 인간들이 스스로 내리는 판단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 기껏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인자의 일로 보지 않고 더 근원적인 차원까지 동원시켰는데 이처럼 예수님을 악령들린 자라는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악한 세력을 배후에 깔고 있음을 결국 들통나게 만드는 것이 인자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인자의 일로 보이는가 아니면 성령의 일로 보이는가"라는 방식으로 바리새인의 공박하고 있다. 인자의 일을 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을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격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히 성령 아니면 악령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노출시키시고 그 배후세력이 더 이상 숨지 못하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강한 자의 결박과 그 이후'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성령 사역을 예로 들어신 것이다. 악령받은 자는 악령받은 자답게, 성령받은 자는 성령받은 자답게 나타나게 하셔서 명백하게 구분지으신다. 악령들린 자는 예수님을 도리어 악령들린 자로 비난하게 만드는 결과를 겨냥하면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로 본건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개념 정리와 의식은 모두 악령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된 의식에 의해서 등장되고 있으며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만이 제대로 악령받은 자와 성령받은 자를 구분지울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악한 세력 하에 놓여 있지 않다고 여기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성령의 건져내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악령의 생각이요 반면에 자신의 힘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자만이 성령받은 자이다. 이것을 출애굽 정황으로 설명하자면,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자는 악령에 속한 자요 이에 반면에 하나님이 미리 내세우신 자신의 언약 성취 과정에서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믿는 자가 성령에 속한 자이다.

신약의 정황은 이렇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6,12-13)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죄를 사하시는 능력자이다.'고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 분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내려진 능력말고 그 이외의 것으로 구원된 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는 죄인이고 병든 자이기 때문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한다. 물론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 받은 자에 한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기 힘으로 제사드려서 구원된 자는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로지, 오로지 외부에서 주어지는 긍휼 일변도 뿐이다. 이런 긍휼을 입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간다. 그리고 이 권한은 순전히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기에 그 누구도 이러한 예수님의 일방적 권력 행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협박이나 회유도 할 수 없다. 바로 인자되시는 그리스도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이 일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이고 반면에 예수님이 행하실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수님 자체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전력을 다하여 가로막으려는 일이 바로 악령의 일이다.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 26-27)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무슨 일을 실시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없애는 일이다. 즉 사단의 일란, 생명의 원천 되시는 분을 제거하므로서 사람들과 예수님을 아예 차단시켜놓고 현재까지 인간들이 스스로 살아온 그 힘으로만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2. '산 영'과 '살려주는 영'과의 차이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들을 끌어온 그 힘은 무슨 힘인가?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에 보면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의 차이점을 표현해 주고 있다.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산 채로 계속 살면되지 않겠는가? 구태어 또다시 살려주는 영이 필요로 할까? 그 이유가 그 앞의 나오는 본문을 보면 아담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여기에 보면, '죽은 자', '썩을 것', 또는 '욕된 것', '육의 몸', '약한 것'이라고 묘사한 것은 전부 산 영이라고 지칭되는 아담에게 해당되는 것들이다.

거기에 비해서 마지막 아담에 의해서 새롭게 부여받을 형편은,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산 영'인 아담에게는 '강한 것', '신령 한 것',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이 함유되어 있지 않고 있다. 살려주는 영이 이 산 영을 살려주어야만 이런 영광적 요소들이 제공받는다. 이처럼 마지막 아담으로 인해 아담이 도리어 살림을 받아야 될 처지에 놓여 있다면 아담의 후손은 더 이상 죽음과 썩어짐에서 자체적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영광스러운 산 영이 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산 영이 된 아담과 그 후손의 삶이란 그저 지금 자신을 지속적으로 후패하게 만드는 그 힘을 의지해서 계속 살아있는 산 영으로 유지해 보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바로 악마가 노리고 있는 바가 이점이다.

죽음으로 내몰림을 당하고 있으면서 죽음으로 내려가지 않을 방도를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이미 자신이 지금 신으로부터 살아 있다는 이 '산 영'의 현실성을 부정하지 말고 집착을 가지고 매달리므로서 해결의 근거로 삼지 않으면 달리 해결책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현재 지금 살게하는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 하지만 그 힘은 인간이 저질은 죄를 제거하거나 용서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으로 데려가서 그 죄의 실체를 결정짓기 위한 힘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이 본문에 보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심판받기 위해 살아야하는 산 영이 바로 인류이다. 하지만 그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심판과 구원의 증거자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을 믿는 수 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체적인 힘의 한계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적 힘을 고발하고 지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자되시는 예수님이 와야만 하셨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구원의 힘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인간이 되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호흡으로 인해 산 영이 되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린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8-30) 이 본문에서 주의 영이란 단순히 살아있는 선지자들에게는 환상과 영감을, 살아있는 예술가의 작업에는 능숙한 재주를, 살아있는 시인이나 영웅들에게 찬양의 힘과 이스라엘을 구원 할 수 있는 용기를 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미 죽어서 흙에 묻혀있는 있는 자기 백성들까지고 새롭게 창조해 내는 힘이라는 것이다. 또 에스겔에 보면 이 하나님의 계획이 보다 노골적이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37:1-7) 이 본문에 보면 새 삶 과 생명의 주도권이 하나님의 신에게 있다. 그 신에 의한 생명력이 바로 성전 중심에서 흘러 나와 온 이스라엘을 적신다는 것이 유대교인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이 생수의 강물은 만물을 살린다. 그래서 초막절날 유대인들은 실로암 호수에서 물을 가져다가 성전 제단에서부터 흘러 내려가도록 행사를 벌렸다.

이미 예루살렘에 헤롯 왕에 의해 성전은 장만되어 있고 메시야가 와서 이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성령이 온 이스라엘을 살린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달리 이야기하신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에게서 생수의 강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나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영원한 물을 그 여인에게 주려고 찾아드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13-14)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고 친히 성전되시는 예수님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자기에게 이야기걸고 있는 얼마나 엄청난 분인가를 알아야 했다. 자신의 과거가 다 들통나고 난 뒤에 사마리아 연인은 말하기를 메시야가 와야 모든 내막이 드러나고 영이신 하나님께서 진리와 성령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로 그로다"하셨다. 요한계시록에는 장차 들어갈 천국의 모습이 미리 나오는데 이런 모습이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 본문에 보면 생명수의 근원지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이다.

이처럼 성령의 출처가 인간들이 요구하는 바가 아님으로 인해 그동안 인간들이 고대했던 생명은 다른 출처에 근거를 두고 이해되었음이 드러났다. 즉 인간은 꾸준히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이 본문에 보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인간 육신의 생명력은 멈추지 않고 유지되었다. 바로 여기에 그들은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비록 죄인이기는 하지만 아직 뭔가 버리기에 아깝고 잘날 구석이 있기에 하나님이 살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일방적인 태도를 갖고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지금 자신들을 살리고 있는 그 힘이 악령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언질한 바 그 성령의 힘이라고 여겼다.

만약 악령이 역사한다면 자신들은 늘 병약하고 괴롭게 인생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오해는 욥기를 통해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욥은 바로 이런 와중에서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은 잘나고 착하고 신앙이 좋기에 아직도 건강하고 힘차게 생의 활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고 거기에 반해 욥은 죄인이기에 (그것도 더구나 자기들의 신앙적 충고를 듣고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할 줄 모르는 극도로 교만한 죄인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차마 눈뜨고 못볼 병마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 11:6 이 말씀은 소발이라는 친구가 욥보다 하는 이야기)

즉 제대로 언약 안에 존재했던 신앙인은 삶의 희열보다 죄로 인한 갈등을 느꼈으며 주위의 오해과 곡해로 인해 억울하고 애매한 어려움이 늘 따라왔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힘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원판에 따라 제공된 것임을 알았다. 노아가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고 요나단이 다윗이 그러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그러했고 솔로몬이 그러했고 요나 선지자가 그러했고 이사야, 예레미야 뿐만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다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들 속의 죄로 인해 죽음으로 이끄는 힘을 알았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생명의 힘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말살시키는 또다른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만드는 그 악의 힘에 대해 처음부터 그들은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동시에 주변에 있는 악신 들린 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들이었다.

다윗은 평생 악신 들린 사울 왕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아벨이나 스가랴 선지자나 미가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나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죄가 왕노릇하는 환경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여기서 그들은 생명력의 목표점을 죄악에 물든 자기 자신에게로 삼을 수가 없었다. 생명력의 지향점을 따로 있었다. 자신들은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었기에 생명은 처음부터 자기를 위함이 아니었고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언약의 완성, 곧 여자의 후손이자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를 기어이 탄생시키자는데 있었다. 신앙인 안에 흐르는 생명력은 바로 이 메시야 탄생을 위한 모형이었고 그림자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서 하나님의 신은 어디까지나 사람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위주로 인해 활동한 것이다. 이 하나님이 이름을 가진 분만이 '살려주는 영'이지 다른 이는 기껏 옛아담의 속한 인물일 뿐이다. 이것을 신앙인을 통해서 증언된다.

그저 자기네들을 살리고자 주신 생명은 자기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완성태에서만 비로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이고자 하나님은 자신들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신앙인들 뿐만아니라 불신앙인들도 무엇인가 증거한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에 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19-23)의 말씀은 빈틈없이 현실과 딱맞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가롯유다보다 네 할 일을 하라고 떠나 보낸 것도 빈틈없이 계획잡힌 일 중의 하나이다. 악령도 사단도 자기 할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을 자신의 운명을 겨냥해서는 해석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한 대리 기도와 제사라는 점을 두고 볼 때에 욥의 고난은 곧 장차 나타날 메시야 고난의 그림자요 모형인 것이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죽을 때에 성령 충만했다고 했다. 아마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의 힘이 그를 죽음 앞에서도 자기 죽음에 개의치 않게 만들었다. 오히려 생명의 근원을 최종적인 양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바로 이러한 인도하심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해골 골짝기의 해골 소생 장면은 하나님이 영원한 왕으로 다윗을 친히 세워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24-27) 이처럼 성령은 메시야를 겨냥한 영이시다. 살려주는 영으로서의 메시야 위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이런 사역을 위한 성령이 요단강에서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하며는 바로 예수님에게 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과연 이로서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등장했지만 악령은 예수님의 이런 등장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 사는 원리와 이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과의 광야 시험에서 드러났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의도에 의해서 마귀에게 시험받으려 광야로 가신 것은 악마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성령의 관점에서 봤을 때 무엇이 악마적 성향인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악마는 나름대로 세 가지 메시야상을 내놓았다. 그것은 곧 경제적인 해결책과 종교적 기적과 현 세상의 찬란한 영광성이었다. 그런데 마귀가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해서 제시했다는 이점을 봐서 악마의 의한 인간 세상 지배는 지금 종교적 성향으로 굳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그들도 나름대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가 심어놓은 정신 바탕 위에서의 메시야 상이다. 여기서 에베소서 2:2의 말씀이 합당하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본문에서 '이 세상 풍속'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이 세상 풍속의 실제성을 악마가 심어진 심성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데 그 악마성이 최초로 구체화된 것은 예수님과 악마의 단독 만남, 즉 광야 시험에서이다. 따라서 그 때 악마쪽에서 예수님에게 제의한 나름대로의 메시야상은 바로 현 인간 세상의 실제 정신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다. 이 세가지를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3. 악마가 제시한 메시야관

첫째, 배고품을 해결해 주는 메시야이어야 참 메시야답다. 즉 사람은 떡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그런데 마귀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전적으로 거부하자는 생각에서 (말씀은 일체 우리 생활에 필요 없다는 식으로) 돌이 떡되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거론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엉뚱하게 떡과 말씀을 상호 대비되는 개념 인 양 거론하시는가? 그것은 떡으로 사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사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옛날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은 배고품의 위기에서 벗어나고파 모세에게 떡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준 것은 떡이 아니라 만나였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여기서 떡과 만나가 같은 양식의 차원에서 비교될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에 대변해주는 물질로 등장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마음이 낮추기를 원하TU서 떡 대신 만나를 주신 것이다. 하지만 떡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는데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떡은 이미 그들이 원하고 있던 바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바를 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식으로 구원을 진행시키기는 분이 아니다. 되는게 아니다. 기존의 그들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과는 위배되는 교만성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 떡을 달라는 식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를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는 역할로 담당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떡이라는 양식이나 만나라는 양식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취로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양식을 취하므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취차원에서 살려주는 방식으로 그들은 살게되는 것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삶을 방식으로 고집하고자 하나님께서 떡을 달라고 항변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미 사람 사는 방식이 기본 양식의 제공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믿음 하에서의 떡이기에 양식은 인간의 마음을 낮추는데 있어 부적절하다. 양식 아닌 그 무엇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광야에서 극한의 배고픈 상황 속에 놓여 있어야만 했다. 마귀가 모든 인간을 지배할 수 밖에 없는 그 근본 토대가 되는 지점까지 예수님은 다가서시고 계시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비정상인가?
인간에게 있어 배고품이 비정상이 아니라 배고픈 처지에서 떡을 요구한다는 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 요구성 속에서 악마의 목소리는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먼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들 본인이 익히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자기를 구원하고자 했을 때 인간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보다 떡이 우선이다. 떡만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이라도 얼마든지 수단으로 동원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 부합되는 성령받은 메시야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데 있다. 바로 이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예수님에을 악마에게 시험받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즉 인간들이 악마에게 붙들려 있을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근본적인 지점까지 같은 배고품으로 다가서신 것이고 마귀는 그 근본적인 지점에서 메시야마저 유혹하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이로서 인간 세상은 결국에는 말씀보다 떡이 우선일 수 밖에 없는 체질로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가 되었든, 신학을 하든, 성경 공부를 하든, 인간이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떡이나 돈을 토대로 사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 죽어버리는 그런 삶으로 사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에게 "너도 살아야지?"하는 식으로 첫 번째 유혹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말씀 성취, 그것 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있어 죽으시는 것이 진정 영생이었고 삶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둘째,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예수님께서 말하자 악마는 이제는 말씀을 들고 예수님에게 찾아들었다. 육신의 죽음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말씀 자체가 과연 인간을 살리는지를 시험하러 왔다. 즉 육신이 부스려져서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삶을 보장해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말씀을 직접 예수님 육신에다가 적용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그 여부를 보고 과연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악마는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시편 91:12에 있는 말씀이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이 본문에서 '저희는' 천사를 의미하고 '너'는 메시야를 의미하고, '돌'이란 직접 사물체로서의 돌을 의미하고, '부딪치지 않는다'는 말은 메시야의 물질적 육체가 돌이라는 물질과 아예 충돌하지 않고 공중에서 멈춘다는 식으로 악마는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메시야의 육신이라도 돌과 강하게 부딪치면 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놓은데서 메시야의 육신을 떨어뜨려도 돌과 강하게 부딪히지 않으면 그 때사 비로소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악마의 이러한 말씀 해석의 토대는, '산다'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산다'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 육신이 어쨋던 유지되는 것이 '산다'의 기본이 아니냐고 여길 때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해석이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의미하시는 '산다'는 개념은, 말씀이 살아있는 그런 존재로서 인간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인간에게 있어 말씀이 그 어떤 식으로도 시험당하지 않고 말씀대로 유지됨을 보여주는 그런 인간이 바로 제대로 사는 존재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다른 성경 말씀으로 악마의 허점을 공격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7) 즉 인간이라면, 그리고 제대로 산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는 말씀을 드러내놔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생존을 우선으로해서 '산다'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악마의 발상에서 못 벗어난 것에 불과하다.

신명기 6:16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생존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를 느끼고 원망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따라서 악마의 견해는 이미 모든 인류의 보편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틀로서 자리잡혀 있음을 예수님의 광야의 시험에서 다 들통나고 있다. 이미 인간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음이 확연해졌다. 스스로 '산 영'으로서 살아있다고 여기고 있으나 그러나 전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상은 죽음을 드러내는 죽은 자들이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한다고해서 그 해석으로 그들이 살겠는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살려주는 영'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4-5, 9)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감히 시험하거나 검토해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이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째, 악마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굴복하기를 예수님에게 요구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악마가 예수님에게 두 번씩이나 다가와서 행한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 이외에도 이 악마의 가치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며 그 근거로서 하나님이 행한 것 이외에 악마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이 분명히 있지 아니한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얻어진 업적에 대해서 악마 자신의 공로로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만국과 영광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는 구태어 하나님께 경배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 악마에서 경배해도 얼마든지 성취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 말씀만을 거론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만이 메시야로서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무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인간들은 이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해석 자체가 이미 정답과 정반대로 토해내어진다. 그것은 예수님 입장이 아니라 이미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입장에서 자연적으로 악마가 제시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에 익숙해져 있기 마련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보는 세상 입장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 본문 말씀은 그동안 인간이 엉터리 같은 하나님을 참 하나님인 양 신봉한 그 원인을 지적한 것인데, 인간들이 악마를 숭배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숭배할 것이냐에 대한 결정을 하면서 자신들이 원하고 있는 바를 어느 쪽에서 수월하게 제공하느냐로 좋으신 하나님인양 여긴다는데 있다. 즉 악마냐 하나님이냐라는 구별은 자기의 원하는 바를 제공하기 바를 말씀 성취로 받아들여지느냐 여부로 결정하는데 인간의 소망 자체가 이미 악마의 소망 쪽으로 선회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이라고 결정하고 경배하는 바가 곧 악마 경배로 이어지며 반면에 참 하나님은 항상 악마로 보이기 십상이다. 인간들이 구태여 악마를 좋아서 이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찾고자 했던 그것이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왜곡된 인식에 의해서 항상 악마편을 선택할 수 밖는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은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의 현장에서는 드디어 밝혀졌다. 인간이 그동안 악마에게 어떻게 속아왔느냐 하는 것은 악마와 예수님의 맞닥뜨림에서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인간들이 그토록 확보하고자 애쓰고 있는 생명과 목숨은 온 천하를 얻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목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메시야의 언약 완성에서 비롯되는 은혜의 선물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악마가 쌓아놓은 세상의 영광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결국 악마가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굶고 있는 예수님에게 세 번씩이나 다가와서 계속 들쑤신 바는 다름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에 관한 공포 조성과 협박과 회유였다. 이것이 평소에 악마가 인간에게 다가와서 쏙삭이며 발휘하는 최고의 통치 무기였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그래서 예수님도 인간들이 이런 취약점에 노출된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주의를 당부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또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이다.

이처럼 진정 '산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부귀 영화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늘 대든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 성취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말씀 성취에서 얻어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義)'이다. 이점은 이미 요단강에서 성령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언급하신 바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령 세례 받으심은 오로지 말씀 성취에 의한 의를 이루기 위한 사명감당을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의는 예수님만 간직하자고 얻어지는 의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의가 되기 위해서 성령받은 자로서 성령 세례를 선물로 주신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 1:32-34) 그런데 성령에 의한 말씀 성취에는 필히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명령과 동반하면서 이루어지기에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악령과 악령의 사주를 받는 사람과 끊임없는 충돌이 야기된다.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8-29)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뭔가 떨고 있다. 죽음과 파탄을 예감하고 부들부들 내심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위로나 칭찬의 말씀보다 오히려 매정하게 책망하셨다. 이것이 오늘날의 성령님의 동일한 책망이다. 즉 인간의 생각 곧, 악마의 생각을 괴롭게 하지 않고서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3-24)

즉 성령의 일은 반드시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의'를 앞세우시면서 '자기 부인'을 촉구하는 방식 실행된다.

여기에 반해 본인의 자기 부인이 병행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두고서도 그 의에다가 자기 행함의 공로를 첨부해서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악령의 작품이다. 이러한 악령을 악령이라고 지적하게 되는 사명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입은 참된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현상이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왜 인간들은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려 할까?

4. 악마가 심어준 성령관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그 자체를 두고서 하나님 창조 질서의 근간을 확보해 있다고 여기고 이 창조성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터보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순히 지음 받은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속성 자체를 공유하여 나름대로 이 창조성을 가지로 우주에 마음껏 펼칠 사명을 부여받은 독특한 피조물에 속하기에 인간에게도 분명 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 자체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죄가 인류 위에 왕노릇해 왔어도 이것 만큼은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은 부인되어야하고 부정되어야 하지만 창조질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갖는 긍정적 의미로 한시라도 부정되어서는 아니된다 것이다. 때가 되면 활짝 긍정성이 펼쳐질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이 논리에 의해서이다. 즉 죄인으로서 인간을 부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받기 이전까지의 잠정적 평판일 뿐이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인간을 부정에서 부정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정에서 제대로 된 긍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론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데 예를 들면, 처음 창조 때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죄를 범했을 때는 그 본래의 내용이 상실했지만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형식은 죄 이후에 계속 유지되어 왔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이 그 죄악된 육신에 담길 때 그 육신은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 와서 그 때부터 그동안 죄로 인해 미쳐 못하고 달성하지 못한 창조의 사역을 전 우주를 향해 사방팔방 제대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분으로 얻어져서 이제 마음껏 제대로 발휘된다고 여겨지는 창조 질서는, 교회 사업에 관심 쏟는 목회자들에게는 교회 설립의 정당성을 위하여 활용되고 있고, 반면에 평소에 교회 사업에 불만이 많은 평신도들은 문화 사명 쪽에 활용되는 여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쨋던 양쪽 다 공통적으로 외치고 있는 바는 이렇다. "이제는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해야지만 언제까지고 예수님이 다 해 줄 것이라고 기대서는 아니된다. 즉 언제까지고 십자가의 그늘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거듭난 자기 육신에 성령으로 가득 채우고 그렇게 얻어진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선한 창조 질서와 문화적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사역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는 오로지 예수님만 증거하다 죽었다.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4-55) 그리고 그 스데반 집사를 돌을 쳐 죽인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유대인들은 스데반집사를 죽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성령관과 메시야관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에 희망적인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대했고 동시에 예수님을 불필요한 인물을 간주해서 일찍감치 제거한 것도 그들이었다.

즉 바로 이러한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악마가 심어진 성령론이다.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성령론을 신봉하는 자들이 이해하는 예수의 존재 역시 인간이 죄인에서 의인 될 때까지의 잠정적으로만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십자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나타낸다. 더 이상 인간에게 죄로 인해 저주나 재앙이 들이닥치지 않도록 외곽을 은혜로 커버해주는 보디가드 역할이 불과하고 실제로 본론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은 거듭난 인간 자기 자신들이다는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은 마치 몽학 선생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즉 인간이 자체적으로 품고 있는 신의 속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만 해주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관여하지 않는 취학적 아동을 위한 가정 교사 구실만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는 어디까지나 아담의 후손은 자기 자신들 뿐이다. 마지막 아담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는 자신들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어주는 역할만 하고서는 하나님과의 계약에서 제 3자가 되어 뒤로 물러나 버리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끝까지 첫 번째 아담성을 포기하지 않고 고이 유지해야만이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게 된다고 이들은 알고 있다. 이들이 성경을 보고 신학을 전개하면서 단지 아는 것이라고 이것 뿐이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야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이다. 이런 정신 상태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여전히 못버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지막 아담의 의의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들에게는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이 걸림돌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왜냐하면 이 본문에 보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대목이 엄연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지도 않는데 무슨 나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따로 추려내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내가 살지않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마지막 아담의 가치만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충분한 법이다.

그리스도의 가치 말고 따로 나의 가치를 가져야겠다는 것은 이 의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비그리스도적 발상이다. 첫 사람 아담을 마지막 아담으로 인해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첫사람 아담의 가치를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 도리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 5:15에 명백하게 위배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본문에 명백하게 나와 있듯이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도 나와 있고 '다시 사신 자를 위한 살게 하려 함이니라'도 나와 있다.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또다시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도저히 복음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로마서 14:8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이다. 이것 때문에 십자가가 사건이 일어났다. 즉 십자가 사건은 첫 사람 아담을 독자적으로 온전하게 독립해 주기 위해 생긴 일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종이 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제 첫 번 아담의 가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창조 질서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신 예수님(골 1:15)에 의해서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따로 첫 번 아담이 행할 창조 질서의 사명과 일은 아예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 아담이 하신 일이 그렇게 어설프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일이 창조적 질서에 온전치 못하고 미흡한 점이 남아 있다면 예수님은 자기 자녀에게 성령을 보낼 실 자격자가 되지 못하신다. 만약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실 수 있다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이것은 이미 창조 질서와 하나님께서 만족한 상태에 돌입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즉 성령의 오심과 증거하심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 우주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찬양하는데 있다. 그래서 이제 성도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 뿐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온전한 첫 번 아담이 되어 새삼스럽게 창조 질서적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들은 자꾸만 성경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광야 때 예수님 앞에서 악마가 보여준 그 죄악된 속성 그대로를 노출 시키기 때문이다. 거짓 메시야관이 거짓 성령관의 토대가 되어 계속 이어진다. 즉 악마가 요구한 메시야성 속에는 인간의 죄악성이 고스라니 녹아져 있다. 즉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행함의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본인께서 인간의 존재와 생존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집어넣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죽어버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창조적 가치와 의미를 넣어주신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모순이고 앞 뒤가 맞지 않는 처사라는 것이다. 죽일 존재를 무엇 때문에 창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피조성이 자신들 존재 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 형상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위해 피조물이 된 점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가 죄짓고 그 순간 바로 성령을 보내어 새로운 아담으로 만들지 않는 이유를 이들은 모른다. 아담과 하와를 기어이 흙이 되도록 죽이시는 그 연유를 모른다. 그저 일시적인 고생 기간으로만 여긴다. 이들은 또 다같이 피조물을 지옥에 넣어 영원토록 저주의 형벌로 다스리는 이유를 모른다. 이들은 아예 지옥은 없거나 혹시 있더라도 견딜만한 곳이라고 여긴다.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가 통일되라고 창조한 것이지 (엡 1:9-10) 피조물 고유의 권한을 확보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데 악마가 에덴동산에 들어오고부터 인간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창조성과 독자적인 존재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악마적 메시관과 성령관을 도리어 참 복음적 메시관과 성령관을 아는 인간들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신학 토대를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내어 달성하려는 자발적 구원에 관심을 쏟고 있다. "스스로의 신앙을 믿으세요" 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말씀 해석과 해설은 필히 인간이 성취력을 발휘되는 방향으로 개방된 해석을 내어놓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던져준 그 의의가 없어져 버린다고 걱정한다. 즉 인간이 직접 행위를 해서 나올 의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태여 말씀을 줄 리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확고한 신앙이다. 이들의 의견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이 말씀을 '안' 지켜서 성취를 못한 것이지 결코 처음부터 '못'지킬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5. 악마의 성령관을 공격하는 성령관 성령관

성령이 공격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메시야의 십자가 지심의 결과로 이 땅을 방문했기에 그 결과성을 알리려 오신 영이시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8-10)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일, 즉 십자가에 관한 지혜를 가르킨다.

성령은 왜 십자가만을 고집하는가? 그것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고 동시에 멸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능력이나 기준을 하나님은 제시한 적이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사도 바울은 이제 거듭나고 성령받은 자니 그의 거듭난 이성과 거듭난 자신의 감정과 거듭난 자신의 의지와 지혜와 권하는 말이 성령을 대신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2-5)

끝까지 인간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다! '살림을 받은 영'(성도의 영)이 남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려주는 영'(성령)만이 자기 백성을 살릴 수 있다. 성령 자체가 하나님 말씀 성취 차원에서 결정판이기 때문에 끝까지 인간은 개입하지 못한다.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8)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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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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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