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복음적 바탕에서 나온 죄와 교회와 성령 개념에 대한 간단한 논평
비복음적 바탕에서 나온 죄와 교회와 성령 개념에 대한 간단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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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복음적 바탕에서 나온 죄와 교회와 성령 개념에 대한 간단한 논평
Ⅰ. 서론
죄니 교회니 그리고 성령이니 하는 대한 개념 접근에 있어서는 그 어떤 인간적인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우리는 용납해서는 아니됩니다. 결국에는 인간 만세! 로 끝납니다.
예를 들면,
1. 죄에 대해서는, 죄에 대한 개념을 알아서 본인이 그 죄를 안지을 수 있는 나름대로 범주와 한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 참고로,
윤리와 도덕은 다음과 같이 구분되는데, 윤리란 개인적 주변 상황에 따라 적응해야 될 개인의 변화된 행위를 말하는데 주로 에티켓 같은 것이며, 도덕이란 그 시대가 형성한 삶의 공간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요구한 규범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개념이 윤리와 도덕 속에서 각자 나오게 되는데 그 기준으로 동원하는 신의 계시는 개인적인 상황과 그 시대적 상황의 규범과 접합하면서 합리적으로 해석을 요구받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 국가를 이루었던 유대교에서 최고조로 성숙된 것이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라는 십계명 말씀이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간음지 말라'라는 계명이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 같은 것을 해석하면서 어디까지를 탐심으로, 어디까지를 거짓말이나 간음이나 사랑 안하고 있음으로 규정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신자 개인의 경건성을 훼손하는 수준임을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나 개인이 처한 윤리나 도덕 규정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특별히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인간복제 문제, 사이버 기자재를 다룰 때의 윤리성, 흡연 문제, 동물 실험에 관한 것, 헌혈 문제, 미생물 공학에 있어 미생물 취급에 관한 규정정리, 안식사 문제, 피임문제, 비종교적 직업에 전문가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일, 사이버 공간에서 전쟁 윤리, 국제적인 인풀레이션에 의한 약소 국가의 상대적 빈곤 문제, 우주차원에서 정보 공유문제, 거국적인 복지 정책을 혼란을 야기시키는 무모한 선교적 차원의 구제 활동 문제, 에너지 소비에 따른 환경 보호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인간의 생존권 문제, ) 이 십계명이나 사로 사랑하는 계명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의 비약적 해석을 허용할 것이냐에 대해 성경은 자꾸만 그 관여도가 자꾸만 옅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전문 분야에 있어 문외한인 목사가 무리하게 자기 의견을 절대적 계시라고 우기면서 윤리적, 도덕적 규정을 임의로 만들어 줄 때 그 심리적 폭력성과 협박성은 거의 가공할 만한 정신질환적 수준이다. "내가 내린 이 윤리적 해석만이 만인이 지켜야 될 성령받은 이 주의 사자가 제시하는 절대윤리이다. 여기에 무조건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 이단이다. 모든 상황 윤리 마귀는 물러가라!" 라는 식 - '상황윤리'란 성도라 할지라도 그래도 윤리를 행하는 조건 하에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사상의 한 경향임-) 그리고 인간의 자율 판단 부분의 많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죄 개념이 정돈되게 되는데, 이 미관여의 폭이 날이 갈수록 또 사회가 현대화 되면 될수록 그 영역이 점 점 확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죄 개념에 대한 임의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징조인데 그런데 이러한 윤리, 도덕적 성경 해석은 항상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경주하면 언젠가는 그 노력 여하에 따라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만은 놓치지 않는 범주를 유지하려는 의도 아래서의 죄규정입니다. 즉 교회가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내놓은 해석이라는 것이 결국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의와 같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전체적인 해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즉 예수님은 윤리, 도덕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죄관을 알리려 오셨습니다.
2. 교회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알아서 유지하고 존속시킬 수 있는 교회 개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 덩어리로 개념을 잡아나가는 것이 인간적인 관점이기에 우리는 정죄해야 합니다.
3. 성령에 대해서는, 자신의 선함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성령론과 자기 구원을 확정시켜주려는 식의 성령 도입을 추진하기에 결국 성령님은 인간 영의 일종이 전환되어 그 인간의 체험을 합당한 체험으로 증거하는 도움자이기를 기대하는 성령론이 인간적인 성령론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기에 그 보내신 분만 증거하지 사람 증거하기 위한 영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1,3) 이 본문에서 신령이란, 체험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일입니다.
Ⅱ. 본 론
1. 죄에 대하여
그러면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죄는 무엇인가? 언약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은 다 죄가 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말씀에 지키지 못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완벽하고 항상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죄 개념을 견지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상설교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항상, 모두 지키지 않는 것도 죄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자의 입을 막고 모두 심판 아래 있게 함입니다.(로마서 3:19) 그런데 이 말씀 보다 더 놀랍고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롬 11:32)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순종치 않음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12:28에서 이렇게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즉 이 본문에 보면, 강한 자가 나오고 그 강한 자 속에 사람이 갇혀 있는 꼴로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그 강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이 성령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고 싶다고해서 구원되는게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차질없이 구원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어떻게 살리는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오직 긍휼로 인한 구원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순종치 않음에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것은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성령이 오셔야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이 오직 예수님을 드높이는데 있어 그 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죄를 예수님의 완벽한 의에 준해서 지적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
이처럼 죄냐 아니냐의 기준은 예수님의 완벽성 뿐입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2,24) 이 본문에서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라는 대목에 하일라이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다는 점, 바로 이 점이 죄냐 아니냐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이란 다른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일의 성사는 오로지 예수님 뿐임을 믿는 그것이 성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바로 이점을 가지고 요한복음 15:24에서는 죄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죄를 가지고 불신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6:23) 물론 이러한 믿음은 성령을 통해서만 전달됩니다.(갈 3:5)
2. 성령의 내주와 교회 유지에 대해서
성령의 내주나 임재는 성령을 보내시는 주님의 뜻에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내주와 임재는 오직 구원받기에 예정된 자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경로를 유발시키면서 임재할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라는 경로를 밟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미리 정하신'이라는 그 결정이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조직신학에서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견인(堅忍)이라고 합니다. 이 견인은 오직 '미리 정하신'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미리 정하신자'가 아닙니다. 즉 "나는 선택되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한번 임재한 성령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니 나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 백성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쓰여진 것인데(요 5:39) 마치 자기를 겨냥해서 혹은 자기 교회의 가치와 의미를 겨냥해서 쓰여진 것처럼 착각하고 더나아가서 자신을 하나님의 일의 주체자로 간주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체험담과 경험담을 새로운 구원의 계시로 첨가할 의도를 갖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새 종교 교주의 등장은 늘 이런 식입니다. 자기를 증거하는 것을 보조 계시 내지는 보충 계시로 삼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에게 그 사람이 체험한 절차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로 복음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주님께서 최종 판단하십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물론 성도 본인이야 구원의 확신이 확실하지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그러나 이러한 확증을 남을 구원하는 계시로 첨가하려는 자는 아직도 구원이 성경에 기록된 계시만을 성령께서 사용하신다는 점을 못믿고 자신의 체험을 성경 계시를 대신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체험을 운운 하면서 남보다 신앙적 월등함과 우월함을 내세우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아까 죄의 항목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의 이런 주특기적인 목회 정신에 의해서 예수님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바로 성령이 계시는 참 교회란 이 하나님의 피에 의해 나타나는 교회뿐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교회 기초부분만 '하나님 피'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치세하는 여타의 정신도 오직 '하나님의 피'라는 사죄의 정신이 계속 살아있어야지만 참된 교회입니다. 그 어떤 인간들의 노고가 섞여 들어가서 유난을 떤다면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너와 나의 피나는 기도와 사랑과 교제와 선교와 노력에 의해 이만한 교회로 성장했다고 자부한다면 그곳은 사이비 교회입니다.
성경은 모든 초점이 오직 '하나님 피'만 증거되기에 감히 여타의 인간의 신앙 경력이나 고백서 같은 것은 포함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성경 66권 어디에 "이근호 구원받았다!"라는 것이 나옵니까?"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몸, 즉 교회가 구원받았다고 되어있지 어디에 "나 이근호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따라서 영원히 선택된 구원자"라는 내용이 나옵니까? 안나오지. 그 이유는 "예수님은 택한 자만 건지자"라는 것이 복음이지 "예수님은 이근호를 건졌다, 박사 교회를 건졌다"라는 것이 복음의 내용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담입니다마는, 제가 무교회주의라는 주장하는 것들을 달가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하기를 무교회주의자인 자기 네들은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제가 듣기 싫은 거예요. 왜 예수님의 복음만을 이야기해야지 복음에 해당되지도 않는 '무교회주의는 모두서 거듭난 자들이다'라는 주장'을 복음에다 섞어 넣는가 말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이단이라는 말은 주장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좀 듣기에 거슬린다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한시라도 저 이근호를 강퍅케 하여 버리실 수 있고 지옥보내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애초부터 선택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은 빈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짜가 아무리 그럴사하게 천국민에 붙으려고 온갖 신학을 나열해도 하나님은 빈틈없이, 차질없이 골라내어 잘라버리십니다. 마치 가롯 유다 잘라내듯이 말입니다.
처음에 누가 봐도 12제자 만큼은 천국에 간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귀신도 물러가게하는 사역에 동참했고 병마도 쫓아낸 권세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막 6:7) 이 본문에서 가롯 유다 만에 전도대 편성에서 빠졌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막판에 와서 보니 가롯 유다는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는 마귀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다른 제자들이 몰랐지요. 우리도 그 현장이 있었으면 아마 몰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만 아신 사항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초대교회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경우에도 해당되고 나중에 사도 바울에 대들었던 구리 장색이 이에 해당된 자요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또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위 정상적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유기체 교회라고 장담하는 것 속에 이런 현상이 있다면 이 현상을 더불어 설명하는 이론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는 유기체 교회자라는 주장을 늘어놓으면 이런 현상을 아울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한번 유기체 교회는 어찌 되었던 하나님께서 영원한 유기체 교회되게 한다 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이 판에 교회는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그 때 그 때마다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 보다 근원적으로 합당합니다. 즉 늘 무에서 유로 새로 발생시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발생론적 교회'라는 것을 유기체적 교회보다 선행되어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유기체 교회를 뒷받침하는 바탕은 유기체 교회라는 그 상태가 담당해야 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임의적인 활동에 아직도 (아니, 지속적으로) 종속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하면 "하나님, 왜 우리는 유기체 교회를 저희들을 지옥 보냅니까?"라고 항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교회 세워라고 할때는 언제이고 교회를 텅텅비게 하시는 연유는 또 무엇입니까?"라고 교회의 주님에게 대들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즉 '한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3장에서 7 촛대의 수는 7로 변함이 없지만(주님이 변함없이 쥐고 계시니) 그 해당 교회나 교인의 자리 바뀜은 항상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요한계시록 20:15의 말씀처럼 생명책에 명단이 기록된 자만 구원받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그래서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만을 증거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를 구원된 자라고 장담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증거하고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부인이 병행되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실재적 현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자기 부인이 안된 주의 따름은 주의 따름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위험한 지경까지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붙이고 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순교적 각오를 발설했다할지라도 그 순교적 결심이 결코 자기 부인을 대신할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7-38) 인간의 최선은 항상 악이 또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지 않는 인간이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피나 은혜로 십자가의 사죄로 그 의미가 이어지지 않고 자기만의 신앙 체험으로 머무는 그 어떤 체험이라도 비복음적 것으로 정죄당해야 마땅합니다. 인간이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물론 자기 속의 성령님을 못믿고 기껏 자기 교회 목사한테 자기 신앙을 인정받아 비로소 구원에 안심하려는 그런 자가 있다면 그도 신앙인 범주에 넣어주기에 곤란합니다.
만약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하나님의 은혜가 이어지는 것이고 그런 증거를 하고 고백을 나타낼 동안만 형제라고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판단력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마련인데 그 판단 자체가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체험을 근거로 한 조작된 죄관이나 유기체 교회관이나 성령의 임재에 대해서 단호하게 구분지어 대처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너의 체험이나 나의 체험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계시에만 의존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교주의 성향은 강렬한 '자아 집착증'을 버리지 못하기에 최종적으로 자기 부인이 되지를 못한 자기 체험을 계시로 선포하게 됩니다. 성경 안의 온갖 내용을 다 뒤집어쓰고서는 최종 자기 영광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요삼 1:9-10)
그래서 설교자는 늘, 자기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하심과 그 복음만 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박사교회에서 우리 박사교회를 증거하면 그 교인들이 어떻게 탈락할지 제가 생명책 명단의 인을 뗀 자도 아닌데 어떻게 다 구원될지 장담하겠습니까? 또 다 맞다고 한들 제가 그 다음부터 복음 안 전하고 딴 것 전해야 할까요? "자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거듭나는 구원받은 자이기에 이제부터 구원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지 않겠습니다. 슬슬 교회사업이나 크게 번창시켜 볼까요?"라는 설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짓 교회의 대표적 양상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구원되는 순간, 주님 손에 있지 목사 손에 놓여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목사 자기 사람으로 삼을 수가 결코 없습니다. 목사는 십자가 진 적도 없고 목사가 그 분에게 구원의 성령을 준 적도 그럴 위인도 못됩니다. "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7-28)
그래서 건방지게 장담하는 것 대신 모든 일은 주님께 맡기고 설교자는 복음만 증거해야 종노릇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복음을 영접하면 그저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양 여깁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사람의 내일을 제가 또 어떻게 장담합니까? 내일 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그 분을 향해 "당신은 성도입니다"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일와서 그 분은 복음을 거부한다면, "아, 원래 택한 분이 아니었네요"하다가 다시 그 다음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드리면, "역시 성도인 것이 확실하군요"하다가 다시 그 다음날 딴 소리하면 "성도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변화된 경함을 근거로해서 성령 임재의 신학을 구성하려는 것은 참으로 경솔하고 무지몽매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괜히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부활될 성도이기에 그 부활의 보증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보증으로 성령이 임재하신다고 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5:5)
참된 성도, 참된 교회는 이 원리원칙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38-40은 인간이 행함에 의한 구원을 불식시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목사는 늘 회개하는 자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주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생생하게 감지하는 가운데서의 회개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Ⅲ. 결 론
어떤 질의나 질문을 하든지 또는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든 먼저 예수님이 피를 쏟은 것에 대해 서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질의와 답변을 주고 받는가가 논쟁의 참 가치를 결정하는 점입니다.
소위 목회자라고 나서는 종교기술자들이 남(예수님)이 쏟아내어 놓은 귀한 생명을 자기 종교사업의 핵심적 상품으로 전면에 등장시키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얼마든지 이런 관심사를 늘어 놓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피를 쏟은 것은, "너도 같이 죽어라"고 쏟아놓으신 피입니다.(고후 5:15) 그런데 피를 안다면서 죽을 생각안하고 살 생각을 하고, 더나아가서 이 십자가 피를 이용해서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전문직업인이 되었다는 의식으로서 자기 교회 사업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타인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기 위해 논의한다면 그렇게해서 정리된 죄관, 성령관, 교회관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일까요? 주님만이 이룰 수 있는 언약 달성을 교회라는 사업체 속에서 활동하는 자기네들이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은 신학의 보수성과 정통성 시비와 관련없이 그것은 신앙이 아니요 저주스러운 유사 종교에 불과합니다.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십자가 피만을 증거하다 죽고자 하는 일입니다. 가롯 유다를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본인이 회개라고 준 성경을 마치 목회하라고 준 성경인 줄 알고 착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만이 목회자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양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 성도 중에 설교의 은사를 받은 자는 흔히 말하는 목회자, 혹은 설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앞에서 회개 안하는 참 목회자란 있을 수도 없고 교인 위에 군림하는 목회자가 되라고 해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섬기라고 붙어준 자기 양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섬기라고 붙여준 똑같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단에 설교하면서 설교자는 늘 자책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지옥이 최종 실체가 얼마든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예수님의 죽음 정신'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쉬운 발견입니다. 심판은 교회라고해서 비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7-18)
교회를 다니는 것이 곧 지옥에 다니는 식이 아니되려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유지해야 될 줄 압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물론 이 말씀은 다음의 말씀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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