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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십자가 앞에서의 인식 전환성경신학로마서

십자가 앞에서의 인식 전환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십자가 앞에서의 인식 전환
2000.9.23

Ⅰ. 서론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정상적이지 못한 것은 이미 창세기 3장부터 나온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이러한 뱀의 말에 인간은 동의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은 자신에게 수치를 느끼고 그것을 가리려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었지만 그러나 죽음으로 가는 길을 되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운명이 아담과 하와라는 한 쌍의 운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대해 예외없이 적용되는 동일한 운명이 되었다(창 6장).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비정상인이 스스로 알아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스스로의 능력으로 정상적으로 되돌아간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완전한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온전한 요소가 남아 있은 것이 된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으로 온전한 것까지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처분하신다면 이는 스스로 선한 것까지 악한 것으로 여겨서 심판하고 저주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 속에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한 것이 없이 비정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4 하반절-15). 즉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원하는 바, 선한 것을 행위로 나타낼 수 없다. 원하기는 율법의 요구대로 선을 행하고 싶지만 나타나는 행위는 악이다. 이미 비정상속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정상으로 돌려 놓을 수 있는 어떤 묘책이나 대책이라도 있는가? 불행하게도 없다. 인간이 곤고한 이유가 여기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즉 인간 자신말고 다른 분이 와서 건져 내어주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 이 말은 곧 자신으로서는 구원에 대해, 그리고 구원적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식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행여나 만약 구원이 된다면 이것은 자신 외에 온전히 구원자 되시는 분의 행함 덕분이지 자기가 행함은 아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모든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만이 내용이 되어야 하고 또한 그 분의 행함만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그 증거가 로마서 8:3-4에 나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본문에서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미 율법, 즉 하나님 쪽에서 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요구'가 아니다. 인간이 선을 원해서 자청해서 율법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선에 대한 요구는 인간 선에서 떠나 하나님 선에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책임추궁을 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이는 악한 행위에 대한 그 어떤 추호의 변명도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완전한 선, 완벽한 선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이러한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인간의 형편은 어떠한가? 인간은 이미 '육신'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죄로 규정지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 육신의 질(質)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결과로 나타난 십자가 저주를 통해서(갈 3:13 하반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미 죄로 규정된 바 있다. 따라서 이제 율법의 요구 달성은 누구의 몫으로 남아 있는가? 하나님에게 돌려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 영' 즉 아들의 영을 쫓아 행하는 자녀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만족케 하시는 것이다. 즉 율법의 요구를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이 구절처럼 '하나님은 하시나니'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니'로 오해하면 아니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라는 의미 속에서 '결코 다시는 인간의 육신은 못하나니'가 이미 함유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영을 쫓게 하실 때'에 성도의 육신적 가치에 의미에 두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의미를 두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야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 어느 옛 아담에 속한 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은사로 주어져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성도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고유한 육신의 열매가 되지 않고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영의 열매', '의의 열매'가 된다.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하반절).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의 인식이란, 왜 하나님의 의의 열매가 인간의 육신에 의해서 맺히지를 못하고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Ⅱ. 본론
1. 십자가와 성령과의 관계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보내어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 1:32-34).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기능 중의 하나는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8:14-16에서는 양자의 영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을 받아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양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맏아들' 되시는 분의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즉 성도의 존재 위상은, 어째서 예수님만이 참 아들이요 장자가 될 수 밖에 없는가를 증거하는데 있다. 이것을 가지고 '의의 종'이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성도의 임무도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기에 속에서 날마다 예수님만 더 알면 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벧후 3:18). 그러면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과 장자되시는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는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가?
우선 요한복음 15:26를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성령의 역할은 '나' 곧 예수님을 증거하시는데 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하신 것 외에 더 보태서 말씀하시는가? 아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 본문에 보면, '자의로 말하지 않고'라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즉 활동은 성령이 하시지만 실상 모든 지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 지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 보좌 우편은 여호와께서 구약의 언약대로 활동하시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3-36). 이 본문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성령을 부여하시는 자리인 것이 나타난다. 즉 성령을 논하는데 있어 성령 사역의 모든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야한다. 성령의 사역 결코 성도의 행함을 부각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증거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도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성령의 은사를 자기 사람에게 선물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증거 사역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해놓으신 업적의 전부, 곧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혜의 총체가 얼마나 거짓 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동시에 오직 택한 자에게만 돌아가는 사죄의 대속 기능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이 둘을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고발하고 정죄하고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고 기능과 동반해서 오직 택한 자에게만 알려주는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감추어놓은 비밀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7,9-10). 이 본문에서 '예비하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고린도전서 2:11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따로 예비하는 성령을 제공하는 자에게만 알게 되는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숱한 종교도 많은 하나님에게 숱한 찬양과 전도와 예배와 헌신과 기도와 금식도 봉사와 교제와 사랑과 교육과 윤리와 도덕적인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데는 결코 사람마다 차이나는 지식 정도나 학식이나 신에 대한 경건성이나 열심 정도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이 본문에 따르면 이 세상에 망해야 될 자가 따로 있으며 그들에게 아무리 바른 복음으로 설교를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악한 신의 위력을 그 당사자가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력이다. 십자가란 꼭 구원받아야 될 자를 구원해 내는 능력 뿐만아니라 지옥가야만 될 자를 필히 지옥 가도록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사도 바울이 자신있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다음과 같은 소신하에 복음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본문에서 '외 에는'라는 표현을 가볍게 보면 안된다. 사람들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납득시키기 위해 복음을 극히 간소화시키고자 이것만 외치는가? 아니다. 성령께서, 아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뜻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자신의 당했던 그 일로 표준과 능력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인간의 노고와 수고도 달음박질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으로 충분하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이로서 십자가의 능력이란 하늘 보좌에 계신 분과 지상에 있는 인간들과 대비시켜서 발생된 능력으로서 지상에 있는 어떤 인간의 능력도 배제시키는 능력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오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은사로서 작용할 뿐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만을 주님으로서 택한 자들에게 등장시키므로 말미암아 그들을 철저하게 주님에게로 예속시킨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위해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치심'의 작용이 일어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0-11,13). 구약에서도 '인치심'이란 '소속' 내지는 철저히 '예속된 운명이'의 표현이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인을 새김 같이 그 열 두 지파의 각 이름을 새겼으며"(출 39:14). 즉 대제사장인 아론의 옷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보석이 되어 인박혀 있어 대제사장의 운명과 함께 하는 것이다. 결국 '인침'이란 더 이상 개별적인 입지는 허용될 수 없이 이미 확정적 운명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바로 구약의 언약한 대로 참 대제사장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며 참 아들이며 참 의인이며 참 약속된 기업이며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에 언약의 완성된 분으로서 자기 운명안으로 '성령의 인치심' 사역으로 인해 택한 자를 확정지으시고 끌어오시는데 이것이 바로 그 분 자신의 영으로 수행하시는데 '그리스도의 몸' 세우기이다. 예수님이 말고 다른 분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언약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이 본문에 따르면, 아브라함 언약이 완성되었을 때에 예수님 안에 있는 '인치신' 자에게 주어지는 기업의 축복은 바로 성령이다. 그래야지만 언약의완성태 안에서(천국=아들의 나라, 골 1:13) 유일무이한 언약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성령을 통해 영원히 찬양받고 높아지기에 성령님은 이 점을 놓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딴게 아니라 이 아들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므로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따라서 성령의 내주나 임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치성을 지향한 사역으로서 내주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이지 성도의 개인적인 구원 그 자체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임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언약이 성취자로서 지향되시는 분은 여타의 인간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께 유일한 영광이 되기 때문에 성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그런데 만약 성령의 내주와 임재를 인간들이 개인적인 '구원 확보성' 용도로 생각한다면 어떤 문제가 야기될까? 여기에는 죄와 육신이 서로 연결되면서 심각한 혼란이 발생된다. 왜냐하면 '개인적'이다는 말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육신(몸)과는 별도의 구원 구심점을 지상의 각개인적인 육신으로 상정해야겠다는 의도하에 논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 있는 각자 자신들의 육신으로 행하는 행함을 통해서 '죄 씻음' 받았음을 확인해 나가는데 있어 성령의 내주와 임재가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느냐를 따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생각하기를 성령 세례를 개인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주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중생해서거듭난 자의 육신은 전의 육신과는 뭔가 다른 행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하면서 자기 행위와 마음 가짐에 주목을 한다. 초점이 이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육신으로부터 행해지는 약속된 성취성에서 이미 벗어나 버렸다. 개인적인 행위의 전환에다 확실성 있는 구원의 증거를 찾고자 한다. 성령 세례 받아 이미 구원에 들어서게 되었다면 이미 죄로부터의 구원이기에 더 이상 전혀 죄를 짓지 않아야 행위적으로 봐서도 "과연 내가 구원 받았음"이 확인이 된다. 이런 식이 되어야 논리귀결상 맞는 말이다. 하나님쪽에서 일단 죄 문제가 해결되었노라고 천명해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성도에게는 죄라는 조차 흔적으로 사라져서 아예 나타나지도 않아야 한다. 죄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기에 성도의 이제 남은 몫은 하나님이 행하신 죄 소거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자신이 자기를 들여다 보면서 과연 나 자신이 전혀 죄 안짓는 희안한 피조물이 되었기에 마음 속으로 피어오르는 그 어떤 생각도 죄악된 것이 올라오지 않아야 타당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각종 생각들을 성경으로 점검하여 참으로 말씀 그대로 완벽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간주된다면 비로소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의 경우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가 그대로 올라오고 있다고 어떻게 되나? 여기에 세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첫째는 죄로 보이지만 실제로 죄가 아니라고 하는 얼버무릴 수 있고 또 다른 방식은, 실제로 죄가 되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없이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알라서 완벽한 행함으로 전환시켜 줄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 실행 책임을 성령에게로 떠넘겨버리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첫째와 둘째 아이디어의 장점은 어쨋던 이미 구원이 완성되어 버렸다는 점을 설명하는 가설이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너무 억지며 무모하게 보이는 가설이다. 그래서 세 번째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즉 구원론 밑바닥을 시간론을 깔아넣는 방법이다. 즉 성령 세례 받는 순간, 구원이 다 완성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구원이 본격적으로 시작에 나선다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점차 점차 조금씩 그 사람을 완벽하게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는 완벽한 사람으로 긴 시간을 두고 조처해 주신다는 것이다. 많은 고통과 징벌과 훈육을 시켜서 그렇게 하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인식과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어떤 자에게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 왔다고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타인이 함부로 이야기할 사항도 아니며 만약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다음 말씀에 위배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의외로 밖으로는 마치 징벌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대변해 주는 경우가 바로 욥과 그 세 친구와의 논쟁이었다. 한쪽은 욥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징벌받는다고 우기고, 욥과 하나님쪽은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이 그냥 찾아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징벌받는 경우를 따져서 그 사람의 믿음의 진보나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이 아이디어는 자체적으로 모순점이 배태해 내게 되는데 그것은 징벌이 전혀 안따라올 정도로 높은 차원의 성화가 실제로 존재해야만 빛을 보는 아이디어이다. 즉 '진보' 또는 '보다 더 성숙'이라는 것이 성립하자만 전에 뭔가 차등적으로 차이나는 현상이 있어야 하고 그 현상이 죄을 검증해 주는 현상이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성화될도록 징벌받는 회수가 점차 줄어들거나 징벌의 정도가 약화되고 있다는 실제적 사항이 일어날 경우에만 이 아이디어는 인정받고 좀더 더나아가서 말하자면 나중에 너무 높은 차원으로 성화되어 그야말로 죄지은 적도 없게 되고 따라서 징벌은 단하나도 없을 최고의 수준이 이런 어떤 표준적 육신이 실제로 등장되어야 이론과 실제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어도 징벌의 수위가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과 지은 죄도 생각나지 않는데 전에 죄 지었던 경우에 받았던 그 징벌이 내용이 찾아들때 징벌의 개념 규정이 불분명해 질 것이 뻔하고 동시에 신앙 성숙에 따른 진보 여부도 불분명해진다. 이렇게 되다보니 어디까지 신앙이 진보해야 징벌의 내용이 아예 찾아들지도 않는 이룰지 아무나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보기에는 신아의 초보인데 그 사람 본인은 더 이상 성숙될 필요없는 정도로 완전자 경지에 돌입했다고 굳게 믿을 경우에, 목사는 속으로 "어서 징벌이 떨어져서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지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식으로 기도하게 되고, 그 사람 본인은, "하나님, 이 후 부터의 모든 어려움은 징벌이 아니라 욥에게 찾아든 시련이요 고난으로 저는 확신케 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찬양합니다. 하나님 제가 아마도 최고 경지의 신앙수준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르친 이론에 그대로 부합됨 삶과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앙과 너무 격차가 나니까 저를 이해 못하고 신앙의 초보라고 비웃는 저 목사의 영혼을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즉 한쪽은 구원의 미완성으로 보고 있고 다른 한쪽은 신앙의 완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육신의 행함으로 일률적으로 점검하거나 판단할 것을 요구한 첫째, 둘째, 셋째 아이디어 모두가 실제로 전혀 실효성도 보편성도 성립되지 않는 아이디어라는 뜻이다.
그리고 더욱더 난처한 점은 정말로 모든 상도가 죽을 때에는 과연 한점의 실수나 마음 속의 한톨의 죄악된 마음도 남아있지 않는 완벽한 자로 변모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점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에다 차등 성화론을 주입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성화되어 되어야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상태에 만족된 상태가 되느냐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원수를 사랑못하는 것(마 5:44),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는 일을 아직 실행에 못 옮기고 주저하고 있는(요일 16), 오른손이 하늘 것을 왼손이 그만 알아 채는 것(마 6:3), 나 자신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심에도 불구하고 엉겁결에 그만 그런 내용으로 기도했던 일(마 6:7), 땅의 것을 생각한 일(골 3:2), 마음 속으로 음욕을 품는 것(마 5:28), 형제를 보고 욕하고 싶은 충동(마 5:22), 순간순간 이방인들 같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아직도 염려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마 6:31-32), 먹는 것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돈을 소유하면 괜히 좋아지는 마음(딤전 6:7-10), 남의 것을 보고 탐을 내는 것(십계명),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못하고 있는 것(요 12:25), 사도 바울처럼 지금 당장 죽는 것 자체가 지금의 나의 최고의 소망이 되지 못한 것(빌 1:23/고후 5:8),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마 10:37), 오른 눈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른 눈을 도려내는데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것(마 5:29),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나 쉬지 않고 기도하거나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와 기도와 기쁨거리가 생길 때만 차별하여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는 마음(살전 5:16-18), 성내는 일("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약 1:20), 눈 흘리는 것(잠 6:17) 등이다. 과연 아직도 자기 육신의 행함과 마음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남에도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세 번째 아이디어의 관점에 국한하면 말이다. 과연 묘책도 없이 이대로 생을 마감한다면 과연 구원도 성화도 제대로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죄에서의 구원"이 행함에 의해 실제화를 보여주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9-10)라는 것이 성경의 외침인데…. 이뿐만 아니라 아무리 과거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율법대로 꽉찬 상태에서 살아왔다 손치더라도 그 많은 주의 명령과 율례에 대해서 "아차"하는 한순간에 놓친다 하면 그 인간도 역시 저주의 대상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런데 정말 죄와 전혀 무관하게 구원된 자라면 이런 경우조차 발생되지 않음이 그 사람의 평소의 행함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이처럼 과연 성화가 마무리 되지 않더라도 구원되는 수가 있느냐 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어떤 신자가 성화가 마무리 되었느냐 아니되었느냐를 평가할 기준이 되는 인물이 그 누구인가? 한경직 목사? 그 신자가 다니는 본 교회 당회장 목사? 도대체 그 누구인가? 예수님의 육신 이외에 마귀를 이긴 육신이 없는데 말이다! 모두다 다 같은 죄악된 육신의 한계를 갖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나름대로의 자기가 살아온 형편과 처지와 인생 경륜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 영글어진 차이나는 윤리적 해석을 갖고 있으면서(이 윤리적 판단도 시간따라 처지따라 계속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지속적으로 번복이 된다) 하는 말들이 "지금 제가 이해는 바는 결단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에서 나오는 참 성령님의 판단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딜레마를 무마하기 위해 첫째 아이디어, 둘째 아이디어, 셋째 아이디어를 한꺼번에 섞어 버린다. 과연 논리적으로 섞음이 합당한가를 따질 경황이 없다. 즉 구원받은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첫째, 둘째 아이디어로서 안심시켜 주고, 행동을 제멋대로 한다고 여겨지는 교인에게는 세째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비록 신자라도 구원이 미완료된 상태에 있기에 중도 탈락할 수 있다고 위협한다. 신학이 뒤죽박죽이라고 누가 비난하면, 그것은 하늘의 신비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논리적으로 이해안되는 것도 믿어진다는 눈가림한다. 이게 소위 말하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신학이다. 어쨌던 '실제적 행함'에 의해 신앙이 검토되고 점검받아야만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의식은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세 번째 아이디어에서의 공통성이다. 이 실천적 행함에 토대를 둔 뒤죽 박죽 신학이 교회 내에 가져다준 작태는 다음과 같은 '육신끼리의 경쟁장'으로 변모시키고 있음을 여러 경우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성화라는 구원 코오스에다 소위 거듭났다는 신자들을 다 집어넣어 놓고서는 그 안에서 상호 행위 경쟁을 붙여서 성경의 각가지 많은 항목 가운데서 남보다 더 많은 항목을 성취한 자에게 하늘에서 더 큰 보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즉 반대로 말해서 차등 성과급 제도에 의하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신자에게는 천국에 가서 신분상 상대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라고 협박할 근거로 삼겠다는 것이다.
교회 봉사 일을 많이 자가 더 훌륭한 신자라고 일러준다. 이렇게 되니 평소에 자기 직장 일에 열중하는 참 성도는 행위적 차원에서 뒤떨어진 비성화된 신자로 규정당하기 일 수 이다. 이렇게 되면 평생 딴 직업없이 교회 안에서 교회 일에 열중하고 개인적인 종교 생활에 탐닉할 수 있는 목회자 자신이야말로 그 교회에서 가장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자로 자동적으로 등극하게 된다. 최고 자리는 마음놓고 명령할 수 있는 높은 자리임을 교인들에게 암시시킨다. 이런 식으로 교회 일 자체를 근거하면 목사가 가장 신앙이 좋은 자로 규정받는 것은 뻔한 일이니 존경까지 강요하는 일이 일어난다. 섬긴다고 해놓고서 결국 교회 내에서 섬김을 받는 특수 계층 안에 군림하는 현상이 자연적으로 형성이 된다.
각종 조직체의 존립과 유지와 번영을 위해서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온갖 성경 구절이 다 동원시켜 공격과 자체적인 방어에 나서게 된다. 즉 총회법이나 노회법이나 개교회법에 따르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마태복음 7:23이 동원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즉 이 본문에 나오는 '불법'이라는 말을 자신들의 속해 있는 조직 유지법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인식이 어느새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절차에 의해서 발생된다.
"나는 주의 사자며 종이다"→"나의 존재는 남을 구원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사명이다"→"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주님이 세워준 이 교회에서 계시의 말을 전하고 있다"→"그런데 내 말을 안 듣는 자가 있다"→"내 말을 안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막는 일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막는 것은 악마가 사주가 아니고서는 나타나지 않을 일이다"→"나는 내 사명을 지속적으로 수행케 하기 위해 보조적인 법을 만들고 필히 지키도록 교인들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도 주의 복음 전달이라는 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보조적 업무로서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의로운 일이다"→"따라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7:23에서 말씀하신 '불법'이라는 개념을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교회법도 포함될 수 있다"→"따라서 교회법을 어긴 자를 단순히 인간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 곧 예수님의 법을 어긴 자이다"→"교회의 권위란 중요한 것이다. 교회 권위가 무너지면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교회 권위를 위해서도 당회장의 권위를 강화해야만겠다. 이런 일은 당회장 개인의 영달과 명예와 자존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다."
선행싸움으로 번지니까 성경 구절이 예수님의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변명하는 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강대상에서 외치는 목사의 설교는, 목사 자신이 평소의 행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고 또는 면죄부를 제공하는 식으로 성경해석이 감행되고, 장로가 기도할 때는, 장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충정과 그동안의 헌신 봉사한 바를 여타의 교인들이 알아주어서 자신을 좀 더 많이 존경해 달라는 쪽으로 기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자기가 죄 지은 것에 대해 비난하는 쪽을 향해서는 마태복음 7:1-5의 말씀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반면에 자기가 좀 떳떳하고 잘한 일이 있다 싶으면 데살로니가 전서 4:7-8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을 쉽게 동원시킨다.
따라서 이 교회 전체 분위기 유지에 목회적으로 대처하려고 목사들은 신 구 교인들을 조율하는데 수완을 발휘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교인들을 일단 현 그 상태를 긍정시켜 주는데 주력한다. 즉 성령이 임재되어 있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은 자로 쳐주는 것이다. 물론 과연 어떤 자가 성령이 임재한 자인지 아니한 자인지 하는 것은, 목사 본인이 보기에 그 교회 내에서 가장 확실히 성령이 임재되어 있는 자를 기준으로 삼는다. 물론 목사 본인이다. 그래서 목사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는 성령이 임재하여 성령의 일을 하는 자를 반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성령 훼방 죄'로 다스려서 악령의 일군으로 정죄해 버리면 그만이다. 정죄받은 당사자가 자기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아무리 악을 쓰고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더나아서 행위적으로 목사가 지켜내는 성경 항목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항목을 지켜 내어도 이 때 만큼은 행위에 의해서 신자임이 확인되지 받지 못하고 목사에 의해서 악령받은 자로 취급받아야 한다. 즉 목사가 교회에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바는 성경과 동등하다. 만약 목사보다 더 착해도 그 착함으로 인한 교회 질서나 권위에 손상이 갈 우려가 있기에 목사로부터 언제든지 악마의 일군으로 분류당할 요주의 인물이 된다.
결국 교회의 머리는 목사요 교회는 목사의 지체들이다. 이처럼 바로 성령의 임재나 인치심을 인간 행함의 원리에 비추어서 해석한다면 은사의 구별이 은사의 차별로 이어져 거룩에 계층이 생기는 가짜 교회가 탄생되는 것이다. 이 가짜 교회의 토대는 소위 누구보다 더 강하게 성령의 임재가 작열한다는 육신자와 그 육신의 행함이 절대적 기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의 인치심'의 판정자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육신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있는 자가 대리할 때 참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에게 고난이 찾아든다. 왜냐하면 소위 지상의 '성령의 인치심' 판정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을 뿐더러 그의 행함조차도 죄악된 육신의 연장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권위 무시에 따른 보복이 들어온다. 하지만 성령의 인치심은 결코 성도 개인의 가치를 개성있게 인정해주고 살려주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개성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정해 버리는 사역이 실시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결코 각자의 육신에 묶여져 있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다 한 몸으로 주님의 육신에 묶어져 있는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만약 성령의 세례나 인치심이 그 개인의 구원성 확보나 활동성을 인정해주는 식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예상된다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고전 12:21)라는 식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성령이 개인의 개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분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다. 즉 성령은, 성령받았다는 그 인간을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의 의로운 은사의 공평함에는 추호도 잘못이 있을 수 없음을 유일하게 십자가 자신 그 십자가의 몸 하나를 통해서 분명케 하시는 것이다.
성령 세례라든지, 성령의 인치심의 세계는 십자가 안의 세계이다. 그 십자가 안의 세계에 들어가서 십자가 몸 앞에 비쳐진 인간들의 육신을 보니 "너도 죄악된 육신이요 너도 죄악된 육신이구나"가 다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서 비차별성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 성취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 밖에 없다. 따라서 그 예수님의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성경에 나와있는 각가지 지시와 명령으로서) 우리들 육신의 죄악됨을 고발하고 동시에 대속의 은총으로 사죄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 체계는 이미 출애굽기 24장에서 출발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5-8). 이 본문에 보면, 언약서를 가지고 모세가 언약의 규례를 낭독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서를 듣고 있는 백성들에게 양푼이에 피를 뿌리는데 그 피가 모세의 피나 백성의 피가 아니라 흠없는 제물의 피이다. 바로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 안의 세계요 이 십자가 안의 세계로 초청케 하고 머물게 하시는 능력이 바로 '성령 세례', 혹은 '성령의 인치심'이다. 따라서 동일한 피를 받았다는 점에서 결코 인간 육신에 준한 실천적 실적에 준해서 그 어떤 차등이라도 성령의 세계나 십자가 세계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법이다. 그 사람이 어떤 은사로 활동하든 그 인간의 행함에서는 그 어떤 고유의 의나 가치가 차등 지어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생각해 놓으신 교회 모습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 보게 하셨으니"(고전 12:22-25). 은사는 여러 은사이니까 당연히 구별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별된다고해서 그 구별 사이에 차등이 있지는 않다. 만약 사도 바울과 아볼로 간의 은사의 가치나 능력에 차등이 있다고 한다면 절대로 다음과 같은 고백은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7). 이 본문에서 '아무 것도 아니로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이와같은 구별성을 가지고 차등성을 주장하는 논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1-13). 이와 같은 논쟁에 직면한 사도 바울은 그 논쟁을 정면으로 대치하는 방책을 도입하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뇨?" 왜 사도는 교회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누구시냐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꺼집어 낼까? 그것은 교회 존립은 그 어떤 특출한 인물 위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앞세워서 그 누구든지 하늘의 보좌의 은사성을 훼방하는 자를 정죄하며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 지상의 그 누구도 십자가 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만 고정하는 태도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로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 외에는 없다. 십자가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남들과 차등지워 챙길만한 위인이나 의인은 없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겠느냐고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다구치고 있다. 구원이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의 완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이처럼 십자가의 능력은 택한 자에게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다. 지상에 있는 세상에 있는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에서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 되게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성령께서 작업하시는 기준이기에 모든 능력이 거기에서만 나오도록 조치하신다.

2. 인식에 있어 구체적인 내용 변화
십자가 앞에서는 어느 인간도 의(義)에 대해서 차등이 없다는 것이 인간관에 대해서 획기전인 전기로서 작용한다. 왜 차등이 없을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 본문에 준해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사람들의 입을 막아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도 입을 떼고 놀릴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이제 그리스도의 의만을 진술하겠다는 사람에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만한 자격자로 간주하신다. 물론 이 의는 위의 본문에 말해서 보면, 차별이 없다. 선택된 자가 불신자에 대해서 갖는 차별성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종교 이력하고는 무관하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에서 오는 차별성뿐이다. 그렇다면 다같이 믿는 자 사이라면 두 말 할 것이 없이 차별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그렇다면 인식의 변화란 다른게 아니라 '차별성 없음의 원리'로서 모든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를 해석하는 관점에로의 변화이다. 이 '차별성 없음'의 원리는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자리에 근거를 하고 있기에 지상에 있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타인과의 차별성을 논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하늘에서 무차별성은, 인간의 행함과 무관하게 선택하신다는 점에서 무차별성이요, 지상에서 드러나는 하늘의 무차별성은,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구원받고 싶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고해서 구원시켜 주지 않는데서 오는 무차별성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불신자와 차이나는 것은 신자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 때문이지 결코 신자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에 기인된 결과가 아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라는 성경 본문은 구약 신명기에 나오는 다름과 같은 본문과 맥락을 같이 한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9:5).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속죄의 은총이 홍해 바다 가에서만 적용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선행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법궤는 그 때 그 광야에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어 그들을 사랑과 긍휼로 지켜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단번에 이루어진 대속이었지만 지속적인 사죄의 은총 아래 계속 존재하게 되는 자가 성도이다. 한 때의 속죄로 인해 사람이 너무 완벽하게 되어서 더 이상 속죄 당할 이유도 없고 그 혜택을 입을 필요도 없고 또한 더 이상 주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는 자립될 수 있는 자로 변화되는 것이 성도가 아니다. 성도란 다음과 같은 운명을 지닌 자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도는 주되시는 분의 언약적 선택성에서 나왔기에 만약 자신을 불신자와의 개별적인 행위 차이를 놓고서 스스로의 신자됨을 규정하려고 한다면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주님 차원에서의 '차별성 없음'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아예 차이 없게 두시고 인간이 전혀 관여될 수 없는 창세 전에 내린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 그 가운데 구원될 자만을 건진다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별성을 지상의 상황으로 관여할 수 없는 하늘의 범주로 소급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그 하늘에서 결정한 현실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경우에 국한된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3). 여기서 사도 바울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말씀을 왜 꼭 했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식론은 결코 인간의 행함에 토대로 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특히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총'은 아무리 인간 행함에 준해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세태 속에서 멈추지 않고 활동됨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기 행함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인식한 자에게만 해당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왜 꼭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그래야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믿음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되나? 펄펄 살아서 마음껏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신 할 새로운 자질과 양심과 능력과 재주를 은혜로 공급받아서 선한 활동에 나서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곧 주의 일이지 않는가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일'에 맞는 새로운 인식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28-29를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을 점검해 보면, 하나님이 일의 주체자와 성취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치심을 입은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영생의 양식을 주어짐을 믿는 것이데 바로 이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요구하는 새로운 인식론이란 모든 행함의 주체자는 인간이나 성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인식론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사역은 무엇을 초점으로 하고 있는가? 그것은 성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조처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새 사람되었으니 독자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의 하나님의 일은 진정 자기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만약 독자적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필히 무차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거론하지 결코 독특한 자기만의 성과를 부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성경 말씀의 그 어느 말씀이라도 주님이 성도 안에서 성취시켜 주지 아니하면 결단코 지킬 수 없는 것이요 따라서 그것을 지킨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아들께서 완수케 하신 다는 점을 믿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나 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1-13,16). 이 본문에 보면, 베드로나 요한 경건이나 권능으로 낫게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수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병자와 같은 인식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더나아가서 베드로는 이야기하기를, 병자의 믿음까지 자신들이 심어주거나 자신의 신앙을 이용토록 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난 믿음'이라고 명쾌하고 간결하고 증언해 주고 있다.
이처럼 같은 현실 속에서 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인식론으로 인해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을 믿기는커녕, 인간 베드로와 요한의 행함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거론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외면하고 싶어 하는가를 설명하는 근거를 잡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인식론이 있기 때문인데 같은 세상을 보고 같은 현실을 살아도 이들은 십자가에서 내려다 보는 무차별성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이가 다 하나님 심판 아래 있다는 그런 관점은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들 누 앞에서 터져도 그것이 곧 자신의 저주성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행함에 주목한다. 행함의 방식에 의해서 '신자 규정 짓기'에 나서고 동시에 '불신자 규정 짓기'에 나선다. 세리와 창기와 간음한 여인도 즉석에서 용서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이 차별적인 존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고유 권리에 준해서 행해짐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간음한 여인이나 체포하다가 그 앞에 율법서를 들이댈 뿐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7절).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그들 에게 다가선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앞에서 설 수 없었고 그들이 고소하던 간음만 여인만 남겨두고 다 떠났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씀을 남기신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즉 간음한 여인과 간음하지 않았다고 자부한 그들과 행함을 두고 차별을 논하던 그들은 다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고 단지 이제 무차별적인 사죄의 은총이 작열하는 그 현장만 펼쳐지게 된 것이다. 용서받은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순간 무엇을 느꼈겠는가? 비차별적인 은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죄의 무거운 무게가 날라가 버리는 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는 죄의 종이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
그러나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기어이 자기 행함에 의한 확인되는 선행을 고집했다. 주님의 사죄에 의한 무차별성 보다는 각자 행함에 의한 차별성이 생기는 그런 식의 구원을 선호한다.
십자가를 통한 신의 자비성이 아무리 무차별적으로 은혜로 제공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행함의 차별로 이어져야 비로소 믿겠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와 있는 지시와 명령들을 실제로 수행하므로서 자신이 창세 전부터 예정되고 선택된 '신자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행함 위주의 인식론을 통해서 볼 때에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비차별성이 지배할 공간은 없다. 이들의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지상에 와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행함에 준한 큰 차이성을 확연하게 부각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라고 여긴다.
주님에 대한 이러한 오류는 주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와 주님과 불신자 사이의 관계의 차이점에 대해서 육신에 대한 사죄 은혜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육신이 해낼 수 있다는 말씀의 성취성의 유무로 판가름하게 만든다. 즉 '탐내지 말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성도의 육신는 실제로 무엇을 보고서도 탐내지 않는 완전한 육신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불신자는 탐을 낼 수 밖에 없는 육신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성령이 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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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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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