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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총신교수 신학문제 보고서], [총신교수 7인의 신학사상의 문제점]성경신학고린도전서

[총신교수 신학문제 보고서], [총신교수 7인의 신학사상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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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교수 신학문제 보고서], [총신교수 7인의 신학사상의 문제점],
[김지찬 교수의 강의 녹취록]을 읽고

2000.6.30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그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니라" (고전4:1-5)

이 본문은, 복음(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받을 수밖에 없는 삶으로 지낸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나온 말씀이다.
이 본문 바로 앞에 나와 있는 고린도전서 3:18-20에 보면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사도가 이런 내용을 담아 세상을 향해 복음을 날리게 되면 돌아오는 반응이야
너무나도 뻔하다.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이고 헛것이라고 공박하게 되면 세상의
것으로 생존을 영위하려는 자 중에 사도를 환영할 자가 누구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의 칭찬'만을 기대하라고 한다. 이 말씀은 아예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을 기대하지 말하는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흔히 말한다. 사회 안에서 그들과 융화되지 못하면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바르게 보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상식에
속하는 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고 있는 '하나님의 일군'은 그런 상식적인
상식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주신 비밀이 너무나도 소중한

비밀이기에 이것을 맡고 있는 직분조차 너무 고귀하기에 이것 외에 모든
것이 상실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하나님의 칭찬만을 감사하면서 세상의 그 미련성과
어리석음과 무의미를 과감하게 공격할 수 있는 입장에서 서야만 한다는 것이 사도의
생각이다. 이 괜찮은 조직을 어떻게 안정시키느냐 라든지, 이미 속해 버린 이 조직체
안에서 계속 조직맨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 어떤 변명을 마련하느냐 하는 것은 사도의
머리 속에는 아예 없다. 이는 사도의 자존심 유지 차원이 복음 증거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아예 그 어떤 인간의 이성적 지혜와도 상관할 것이 없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만 증거 하는 성령의 사역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외치는 자는 하나님께서 필히 '자기 궤휼'에 빠뜨리게
하시고야 만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3:19에 나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학문성과
학문의 이성적 체계성을 앞장세우고서는 자신에 관한 우상성과 자기 영광성과 자존심과
생존을 위한 양보할 수 없는 전투성을 은밀하게 감추고 숨겨 놓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궤휼'은 글자 그대로 자기로 인한 '궤휼'이다. 자기 존재와 의미성
챙기기에 급급해서 유발되는 '궤휼'이며 '위선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내세우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총신 교수들을 대하면서 다음의 두 가지 관점으로 시작할 수가 있다.

첫째는, "이들이 필히 성도이어야 한다"는 관점.

둘째는, "이들이 꼭 성도일 필요가 없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첫째 관점은 예상외로 비복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을 지금
살아 계신 주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안의 특정 인간 집단을
이상적인 천국의 대용으로 여겨서 전적으로 거기에다 기대를 걸고 의지하려는 생각이
지배를 하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장차 목회자나 신학자라는 기능인을 배출하기 위해 학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신학생 입장에서는 불신자들의 다양한 견해들과
그들의 자기 영광성과 결부된 채 터져나오는 각종 학문적 체계를 미리 신학교 강의
시간을 통해 접하므로서 불신 세계가 안고 있는 비복음성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의 충만함을 충분하게 파악할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앞으로 교회 내에서 무수한 개성들을 지닌 각종 교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은밀하게
품고 다니는 음흉하고 그 더러운 변명들은 사전에 신학교 교수들이 조작해내는 것을
통해서 그 치밀한 이성적 논리 체제로 미리 접할 수 있다. 즉 주님만이 홀로 임의로
해내셔야만 가능한 구원의 능력을, 십자가 지지도 않은 (질 수도 없는) 소위 교수라는
기능인의 혀로 인해 십자가의 복음이 한없이 욕얻어먹고 모독 받는 광경을 똑똑히
목도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이런 신학교 교수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신학생 자신 속에 아직도 다음과 같은 비복음적 속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 총신만이 한국 교회의 희망이다. 어쨌든 총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주의가
최후로 유지되는 참 복음적 신학교가 되어야 한다.

2. 따라서 총신만큼은 그 어떤 자유주의 신학도 발 붙여서는 아니 된다.

바로 이것이 바로 신학생들이 갖고 있는 비복음적 우상성이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라 하셨지 언제 '개혁주의'를 증거 하라 하셨는가. '개혁주의' 주창이
곧 '우상주의'의 이종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솔직히 고백할 수 없더란 말인가. 또한
그런 영적 안목이 안 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복음적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왜 '개혁주의'를 주창하는가? 그것은 이 바달(합동측)에서는 '돈'이 되기 때문이요.
'생존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내용이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개혁주의
내용대로 목회 하면 노회에서 목회직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장로들에게 미움받는 거이
시간문제이다.) '개혁주의 교회'라는 상표권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교수들은
총신을 위한 총신 충성도 아니오 진리를 위한 진리도 충성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총신 기둥과 개혁주의 기둥을 상호 붙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비복음적 교수들은 자기네 신학을 반박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박할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 교수들보고 비개혁주의니 비복음적이니
또는 '개혁주의' 앞장세우면서 밥그릇 싸움질이나 한다고 비판하는데 그러한 너희들이
나중에 목사 안수 받고 목회 하면 그 교회는 너희들 소유하고 생각 안 할 자신이
있는가? 아닌 노골적으로 말해서 목사라는 것이 무슨 종신 직업이라도 되는 것인
양 여기고 그 직책 자체를 자기 소유로 삼아 그것으로서 평생 밥벌이하려고 덤벼들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너희들은 소위 노회나 목회 세계에서 온갖 감투와 간판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없으면 아예 새로 조직을 만들어서라도) 그것으로 자기 세력
키우고 자기 목숨과 가족의 생계를 미리 안정적으로 도모하기를 시도하면서 무슨
개혁주의니 복음이니 라고 하면서 남을 판단하려 드는가? 사실 너희 총신 학생들
대부분이 학교 당국에서 대충 졸업시켜 주고 빨리 목사 만들어 주어서 영혼 장사나
해서 밥 먹고살게 해달라는데만 관심 두고 있다는 것이 보다 솔직한 현실 아니가?
죄 없는 자가 있거든 돌을 우리들을 향해 마구 던져! 우리 교수들이 기꺼이 맞아
줄게! 이 후배들이 복음이 뭔지도 모르고 말이야...

복음을 참으로 믿는 자는 세상에 대해 그 어떤 지대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할 일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하면 내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고 약간의 생활비도 확보되는 비법이 없을까?" 라고 생각할 틈이 없다.
반대로 "아, 이 좋은 복음을 저런 식으로 오해하는 것이 지옥이구나. 그렇다면
과연 내 속에는 그런 생각 안 들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늘 회개하는 가운데 보다 많은 타인의 체험과 생각들을 미리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학생의 태도이다. 애초부터 신학교 교수는 복음적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부터 잘못이다. 성도의 주위에는 이처럼 항상 지옥 세상이
유발하는 유혹거리가 항상 들 끊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복음까지 들먹이는 세계에서 성도는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자.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

추가내용 : 강의록에서 드러난 'k 교수의 신앙 의식'

성경 문장 표현에서 나타난 '직설법과 명령법적 표현'에 관한 그의 견해를 보면,
그의 신앙관이 얼마나 기본이 부족한가가 드러난다.

k 교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애들아, 너희들이 나를 믿어주는구나 그것 참 착한
일이다. 이로서 내가 너희들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마(직설법).
자 이제는 나를 믿는 착한 일 뿐만 아니라 내가 지시하는 여러 가지 법들도 지켜
내는 착한 일도 더 하려무나"라는 투이다.

즉 '믿어주었다'고 하는 착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칭찬한 다음에 (인간 긍정)
추가적으로 그 인간들이 해내어야 될 일을 숙제거리로 명령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애들아,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너희를 미워하고 있느냐?(직설법) 그렇다면 이제 왜 꼭 이래야만 하는지를
나의 명령과 마주치면서(명령법) 그 깊이를 알아가거라"이다.

즉 인간 부정을 지속시키는 근원으로서 명령법의 형식으로 계속 말씀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가운데서 십자가 의의는 깊어지기 때문이다.(엡1:17-20)

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를 들어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위의 인용한 말씀이 인간 긍정을 위한 직설법인가? 혹은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에 속하는가? 결코 아니다! 신자 자체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배경으로
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속죄 업무가 무의미해진다. 주님의 속죄 사역은 선한 일을
신자에게 일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홀로 해 내시므로 여전히 오로지 주님 자신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신자의 의(義)로 인한 영광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의의 결과로 인해서만 자신이 영광 받는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 이유는 , 모든
자비와 긍휼이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인한 결과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 참된 구원 사역의 핵심이자 곧 하나님의 영광성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명령법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자비를 베푸시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어느 것 하나 자비 아닌 것이 없다. 주님의 말씀(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인간은 늘 자신의 탐욕과 죄를 알아 가고 미워짐의 대상으로 재확인한다.
즉 다음과 같이 고백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k 교수의 모든 주장은, 인간 긍정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해 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추려서 그 실천으로 생산된 의나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고
계속 구원의 길로 한 걸음 전진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실제로 한번이라도
구원

의 은혜에 접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하든 구원을 필히 따내어야겠다고 심리적
투쟁을 벌리는 자의 대표적 성향이다. 즉 구원은 되지 못하면서 남들 앞에서 마치
구원받은 자의 행세를 해야 하는 괴로움을 못 견뎌서 기껏 자신 내부에 있는 윤리성을
발판으로 하여 타인과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k 교수의 모습도 신학생에게는
장래를 위해 좋은 공부 재료가 된다. 그들이 교회 내에서 만날 비신자들의 '신자
모방' 형태를 이 신학교 시절을 통해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 저래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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