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저주론"에 담겨 있는 악마의 복음전략
'가계 저주론'에 담겨 있는 악마의 복음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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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저주론'에 담겨 있는 악마의 복음전략
이 근호 목사
1. 선악적 관점에서 교계를 공포에 몰아넣는 악마
에덴 동산에 한가운데 한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인간은 몰랐다. 그러나 따먹고 난 뒤에 알았다. 마귀가 인간의 운명 속으로 새겨넣은 것은 바로 '선악적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두려움이요 공포였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선악 지혜 아래 놓여 있는 스스로의 종교적 행위과 선행으로 저주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 유일한 자기 삶이요 현실이라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이것이 악마가 노리던 바였고 원하던 바였다. 바로 '가계 저주론'을 펼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이 악마의 족쇄 전략이 오늘날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개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비정상임을 안다. 선이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저주의 세력을 돌파하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선에 관한 지식이나 복음에 관한 지식이나 삼위일체나 구원의 관한 지식 그 어떤 것도 인간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지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가계 저주론'자들은 인간들을 더욱 더 절망의 늪 속을 헤매게 하기 위해 구원의 방법론과 저주 극복론을 펼쳐보인다.
저주받은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처음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러움이란 자아가 달라졌다는데서 오는 정신적 거부 반응이다. 죄 감정이란 이처럼 잃어버린 본래의 것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는 배경에서 비롯된다. 바로 선악의 지혜는 본래의 자기 모습을 망실하거나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래의 것을 분명하고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마당에서 더욱 더 자신에게 절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기껏 '최선을 다한다'하는 식으로 조그만 숨통이라고 마련하려 한다. 그것으로 자기를 가리려 한다.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는 행동이 오늘날 사람에게도 여전하다. 그리고 악마는 너무나도 이점을 잘 이용한다.
어쨋던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 극복과 발전과 개과천성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고 이 몸짓에 악마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격려와 용기를 불어준다. "열심히 해봐. 대대로 내려오는 가계의 저주는 네 대에서 끝 낼 수 있어 " 그러나 이런 악마의 부추김은 곧 아담과 하와가 했던 어설픈 자기 '가리는' 행위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해 놓아야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친근한 선악적 해결책만을 원한다. 왜냐하면 무엇이 되었든 일단 자신을 가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도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서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인간들이, 벗었으므로 하나님 대하기 두렵다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은 좀 엉뚱하게 말씀하신다. 즉 선악과와 그 지혜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쨌던 자기 수치심 가리기에 급급한 반면에, 하나님은 선악 지혜가 인간 세계에 가득차게 된 것을 지적하시고 염려하시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의 보편적 죄는 선을 모른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꼭 이겨야만 축복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족쇄 차여진 무서운 인식 자체를 염려하고 계신 것이다.
창세기 3:10의 경우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결코 하나님을 모른다든지, 의식하고 있지 않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자꾸만 가리려고 하고 잊어버리려 하고 자기 정당성을 내세우고, 변명하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새로운 의식이 죄의 힘에 뒤받침 되어서 솟아오르는 것을 하나님은 관찰하고 계신 것이다. 인간에게 닥쳐진 수치심과 공포의 배후에는 악마가 강요하는 협박과 공갈이 있음을 인간은 알지 못하고 있다. 악마는 인간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열심히 거룩하게 살라고 부축이면서 찡긋 미소를 머금는다. 마치 온종일 자기를 학대하면서 피흘리기까지 신의 은총을 갈구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 전략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평생 위장하면서, 위선을 계속 떨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인간이 된 이상, 이런 악마의 방식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인간들은 아예 단정해 버린다. 이처럼 인간들은 꼼짝없이 이미 악마의 종이 되어 버렸다. 난데없이 돋아나는 욕망은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인간 내부를 마음껏 휘젓고 다닌다.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지배자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선악적 차원에서의 변명과 정당성을 내부적으로 생산해 낸다. 어디까지나 선악적 차원에 준해서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선악의 지혜가 요구하는 책임성과 자책심과 징벌의 위협 밑에서 괴로움을 당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마음 내부에 자리잡은 타자(他者)의 욕망으로 관여 당하는 욕망을 지니게 되었다. 어떻게 관여 당하는가? 정죄함을 당함으로 관여 당한다. 인간 자신으로는 결코 원치 않았을 바이지만 죄는 자기 내부에서 활개치면서 악의 침투와 확산 작업을 분주하게 하고 있다. 그 매개 인물이 인간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8-11)
이것은 결코 그 어떤 인간도 원한 바가 아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20)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모든 인간은 선이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임을 알기에 선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선을 얻고자 하는 그 욕망은 악을 염두에 두면서 작용한다. 즉 그 선으로 악을 한없이 가리고 싶은 것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마 7:11)
그렇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어야 된다는 양심은 살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원대로, 욕망대로 되지 못한다. 선과 악의 능력이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자신을 가리는 가리개로 사용하고 싶은 선과 의로움과 거룩함이 선악 지혜의 지배 질서 아래서는 도리어 결국에는 악이 유발되는 결과를 이어진다. 왜 이런 식의 역전이 자꾸만 일어나는가? 그것은 인간의 욕망은 이미 악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에 출중하다고 할지라도 악에 의해서 선보다 악 취향 쪽으로 최종 행동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7-8) 이 본문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에 주목해야 하는데 탐심이라는 것이 과연 선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악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인간이 감히 나서서 판정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없는 이유는, 선과 악 지혜의 원래 주체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창 3:22).
따라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탐심은 악한 것이다'라는 유권해석은 애초에 인간과 별개의 위치에서 확정지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악이라는 권세자에 의해서도 사로잡혀 있는 신세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그래서 인간의 내부에는 이 두 권세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물론 선악의 지혜라는 것을 서로가 활동 수단으로 삼으면서 권세를 발휘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들이 이 다툼에 말려들고 말았다. 악으로부터는 하수인이 되었고 선악의 지혜자로부터는 정죄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정말 모든 인간은 곤고한 존재가 되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 본문 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결국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욕망은 가능성 있는 희망이나 기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 나는 사망의 몸이다'는 사실을 크게 인정하고 절망 가운데서 탄식의 소리로 대변하는 욕망이다.
"아, 그래 결국 죽을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구나! 그러나 계속 살고 싶은 걸 어떻게…"라는 점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욕망이다. 사망으로 이어지는 이 욕망은 인간 내부에 들어 있는 모든 비밀을 요약한 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동기로 작용하는데 그렇게 해서 생산된 모든 것은 전부 사망의 열매일 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8-23)
살고자 하는 모든 욕구와 욕망들은 이미 악의 영향권 속에서 사망의 열매로 뛰쳐나오기 위해 그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는 사망이냐 생명이냐를 선택한 입장에서 조차 배제된다. 선악의 지혜 안에서 인간은 여전히 사망의 몸이며 악은 계속해서 그 안에서 활개치고 있다. 인간의 악마의 노리개이다. 좋아서, 혹은 스스로 선택해서 악의 하수인이 된 게 아니다.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추구해서 저주보다는 축복을, 나쁜 짓보다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체포되어 있다. 선과 악 사이를 선별하는 인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택할 능력은 상실된 채 살아가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인간들이 가만히 앉아서 좌절과 절망만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대로 구원을 쟁취하는 질로 나설까? 인간 속에 있는 죄악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모든 방면으로 구원을 위한, 천국을 달성하기 위한 처절한 노고와 노력에 나서게 한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기독교 방식을 차용한 '인간 구원론'이다.
구원이란 늘 죄를 배경으로 한 뒤 주께서 하신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라는 것을 톡 떼어 내버리고서는 죄의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 구원론'이라는 새 체계를 따로 장만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다가 설립이 가능한 특별 구역인 것처럼 여긴다. 바로 이점이 죄 임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인간은 자기 구원을 측정하고 감상하고 더나아가서 그 수준과 크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 끌어올려 보려고 한다. 높아지고 강해지고 안정성을 지닌 견고한 힘의 자아상을 그리스도 십자가와는 따로 만들어 그 곁에 같이 세워 두려고 한다. 깊은 은혜를 더욱 더 받은 자에 한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모습이 이미 예수님을 '주'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은 반란임을 모르고 있다.
'주'가 지닌 그 배타성과 심판성이 어디를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되심 이외에 그 영역도 따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안심되는 자기 구원이라는 벙커를 따로 만들려고 한다. 왜 그럴까? 자기 왕국을 경험하고 싶은 악마적 기질 때문이다. 즉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 달성해서 자아 승리를 맛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주'가 되는 순간적인 쾌감을 갖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거저 넣으시는 은혜와 구원이라는 것을 밑천으로 삼아 욕망을 구체화하고 싶은 것이다.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싶게 말해서, 믿음 없음→믿음 소유했음→ 신과 하나 됨→나도 신이다! 라는 데까지 계속 자아를 밀어붙이려고 한다.
그들 눈에 저 멀리 천국이라는 신비의 성채가 보인다. 영적이라야 보인다고 말한다.(참된 성령은 오직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해 줄뿐이다.) 자기 망상과 환상으로 지어진 전설의 성채 안으로 계속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험과 도전적 모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른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이 부단히 시도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각자의 인간이 죽을 때까지 거꾸로 소급해서 원천적으로 모든 행위를 정죄해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이 이러한 정죄성을 감잡지 못하고 산밑을 힐긋힐긋 보면서 자신의 영적 수준에 못 미친 헉헉거리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재미에 만끽해있다.
즉 이들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역하시고 지향하는 방향과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임을 모르고 자아의 구원관에 매달려 살아간다. 자기 구원만을 즐기는 것으로 남은 새 삶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쩍 더 성숙해졌다고 자위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제거하고 자기를 선두에 세워 놓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공로성까지 이용한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에는 어린양과 나란히 자신의 모습도 함께 들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변개시켜서는 아니된다.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섬기는 그 자아'도 주님과 함께 삽입시켜서는 아니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저촉된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이 내용을 좀 더 확대시켜 보자. 자기 부인이나 자기 회개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자기 부정과 긍정을 시차적으로 조정하여 궁극적으로 자아 긍정에 선회해 버리게 된다. 자기 긍정이 결국에 가서 '자기 부정'마저 삼켜서 구원으로 극복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 만의 세계 갖기'를 원하는 자기 욕망이 결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마저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
자기 영광을 일시적으로 포기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다음 그 뒤에는 또다시 자기 영광을 재취득하겠다는 심보이다. 이런 자들의 위선에 대해서 주님이 가만있지 않는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부인이 안되는 자는 아무리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영광에 도취되는 지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있어 주님의 영광은 항상 뒷전이다. 성경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16-23)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주님이 주시는 영광보다 기존의 세속적 자기 영광의 연장선 끝에서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영광을 찾았기 때문이다. 즉 세속 영광과 하늘의 영광이 같이 연결되어 붙어 있는 것으로 이 청년은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은 세속 영광과 접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그러면 세상 축복에 연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심이다. 이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주님이 주시는 축복은 결코 세상적인 풍요가 아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저주란 무엇을 뜻하는가?
보통 저주라고 했을 때, 그 저주 상태를 파악하는 기준이 자기 입장에 근거해서 마련한다. 자기 뜻이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혹은 무참하게 뭉개졌을 때, 또는 다른 요인에 의해 저지되었을 때나 사람들은 이것을 불길한 징조처럼 받아들인다. "내가 이대로 영원히 망가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 나는 지금 저주받고 있는 거야"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의 기준은 다르다. 저주의 기준은 복음뿐이다. 복음을 믿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어려움에 놓여 있을 수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 본문에 등장하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같은 것이 결코 성도라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 상황이 아닌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성도에게도 미친다.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도 이 일이 일어났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후 5:4-5) 사도는 이러한 상황을 저주 상황으로 간주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 안에 있는 복음적이고도 바람직한 상황으로 해석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5:7-10)
구약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구약 성경 욥기는 악마에게 노출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와 선행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욥은 전혀 악을 저지른 자가 아니었다. 욥은 악에게 지지 않고 살아온 자이다. 그런데 그 욥에게 재앙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재앙과 악과의 관계가 수상해진다. 욥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 고통 가운에서도 죄 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최후로 그는 자기 목숨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다. 목숨까지 동원해서라도 죄짓지 않기를 하나님께 호소할 뿐이다. 욥의 신음 소리 안에서 이 땅 위에서 살다간 모든 인간 행렬의 최후가 묘사되고 있다.
욥에게 일어난 육신의 병과 고통은 사단에게 노출된 인생사를 말해 준다. 모든 인간은 보편적 운명을 지녔다. 욥은 인간의 대표로서 왜 재앙이 와야 하며 그 의미를 밝히는 실험인으로 살아갔다. 욥이 재앙과 만남으로서 욥의 평소의 의로운 행위를 악으로 간주해야만 뭔가 모순된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모순점은 친구들과 논쟁을 하는 것 가운데서 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드러났다. 자신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나란히 병행할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한 것이다. 과연 지금까지 구축해 왔던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모조리 파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고수해야 하는가를 욥은 고통 가운데 요구받게 된다.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이 욥에 일어났던 것이다.
욥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에서 모든 일을 일으키실 때에 욥에게 주어진 고난의 법칙에 따라 창조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욥의 목숨이란 단지 욥 그 자신을 이 땅에 살게 하시겠다는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혜 안으로 욥을 초청하셨기에 욥에게 남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고난이 발생한 것이다. 고난 지나고 생명이 아니라 고난 안에서 비로소 생명이었다. 그 생명만이 악에게 빼앗기지 않는 생명이다. 욥은 스스로의 의로서 자기 생명과 가족과 가문을 지탱하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자기의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억울한 고통과 수모를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불합리성에 의의를 걸었다. 즉 고통 있음이 자기에게는 비본래적인 요소처럼 간주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단이 달라붙는 것이다.
의인에게는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거짓 지혜로서 욥이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재앙도 오고 복도 온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 세상에서의 악마의 역할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구상된 지혜에 불과하다. 하나님 허락 하에 악마에 의해서 저질러진 재앙에 대해 인간들은 그 원인에 대해 전적 무지몽매하다. 이 무지로 인해 욥의 친구들은 애매한 욥에게 그 모든 책임 소재를 찾고자 했고 욥 또한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려 한 것이다. 이것이 욥의 잘못이다. -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욥 32:1-3).
사단은 인간의 행위와 복과의 관련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만약에 복을 철수해 간다면 욥의 행위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장담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소유물과 건강이다. 과연 인간은 소유물과 건강을 상실하고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의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존재인지 그 귀추가 궁금해진다. 즉 재산의 증식이나 건강 회복을 자신의 순전한 행위와 결부시키지 않을 자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악마는 장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사단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반발하는 자가 있다는 그것은 참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뿐이다. 욥도 끝까지 자기 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기에게 일어난 현 사태에 대해 달리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욥의 자기 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불의하게 했다는 사실을 욥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 하다 하느냐"(욥 40:7-8). 그렇다. 욥의 생명 지속이 결코 욥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을 뵙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욥의 생명 보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은 욥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지혜의 전모는, 이 세상에 각기 다른 두 가지 원리가 대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원리는 성공과 존속과 번영이라는 사상으로 세상을 보는 원리요 다른 원리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세상을 보는 원리이다.
욥에게 일어난 고난은 주위 사람들에게는 자기 지혜의 상실을 증명케 했다.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던 거짓된 지혜들이 욥의 고난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생각과 달랐다. 후에 욥의 환경은 다시 회복되었다. 재산 뿐 아니라 자녀와 친구와 아내 관계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죽은 자식이 되살아 난 것은 아니다. 결코 원상 복귀된 것이 아니다. 과거와는 엄연히 단절된 차원 안으로 진입된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상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회복된 것이다. 비록 고난의 시기는 끝났지만 욥의 고난은 여전히 삶의 토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구약에 일어났던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은 기존의 축복과 저주의 인식 자체를 공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세상적인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십자가 복음 사건이 터진 후로는 도리어 악마적 기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악마가 인간들을 그 동안 늘 장악해 왔던 무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그 폐쇄적 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던 그 당시에도 제자들의 인식은 바로 악마가 심어 준 그 기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한 소경이 지날 갈 때,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2-3절) 제자들의 사고 방식은 마치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처벌하려는 유대인들의 인식과 별반 차이나지 않는다. 누가복음 13장에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5절)
이 본문에서 제자들의 물음에는, 기존의 축복과 저주의 토대가 무엇인가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즉 죄가 있으면 저주요, 죄가 없을 경우에만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준에서 본질적 문제는 도대체 죄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죄를 규정하기를, 하나님 계명에 대한 형식적 실천성에 두고 있었다. 그 대표적 예가 누가복음 18:9-14에 나온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중점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의'에 관한 문제이다. 즉 죄와 의의 문제는 인간들의 종교적, 외형적 행위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8:11에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과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문제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참람하다고 말한 바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9:6에 보면,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결국 축복과 저주 문제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죄라고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요한복음 15:22-25을 보자.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본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심으로 무엇이 죄이냐 아니냐가 최종 근거가 갖게 되었다. 영생과 저주의 기준도 동일하게 하나로 집약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5-36)
사도 바울에 와서는 이 원칙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그런데 복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3. 복음이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1:4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본문에서 복음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아버지의 뜻', '악한 세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몸'이 그것이다. 즉 첫째로 복음은 순전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의 뜻의 개입이나 인간들의 소망하는 바와 상관없다. 그리고 둘 째로 인간들은 완전히 죄인들이라는 점이다. 자기들 인식에서 도출된 하나님관이나 종교나 성전이나 예배나 기도나 헌금이나 하는 것은 결코 의롭고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아니다.(롬 3:10-20) 셋째로, 오직 그리스도께서 몸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의가 되고 구원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의 몸의 드림이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되는 지는 고린도후서 5:19-21을 통해서 보다 자세히 보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19절에서는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는다'고 되어 있고, 20절에는 '대신 죽으심'이 나오고, 21절에서는, '성도는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적혀 있다. 결코 '대신 죽으심'이 복음의 핵이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에게 추가적으로 무언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절에 나온 말씀처럼 성도가 의 되는 것이 성도의 실천성이나 윤리성이나 도덕성이나 신앙성 안에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안에서'가 되가 때문이다. 즉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될 수가 없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러면 누구 안에서 살아가는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알려 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선언을 자기 자신에게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단지 살아 있는 것은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이 계속해서 자기를 살려주는 그 능력으로 사는 것인데 이런 상황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신 죽으심'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 안에서 능력으로 살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고백이다. 만약 이점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이요, 저주이요, 불순종이요 마지막은 멸망이요 지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의 기득권적인 종교적 환경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왜 그 배경을 근거로 축복은 타내고 저주는 물려간다고 여기는가? 그것은 복음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의 은폐성과 걸림돌 기능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말하던 축복이 주님의 십자가 속으로 흡수 완성될 때는 어떤 식으로 그 완성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몰라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이 말씀이 구약성경 신명기 28장과 어떻게 연관되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2-6절, 15-18절)
이 본문에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은 완벽한 말씀 실천에 있다. 즉 의의 산출이다. 그런데 이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는 세상을 완벽하게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작용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7-9) 그런데 이런 면을 복음의 핵심으로 읽어내지 못하기에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똑같은 세속적 의식으로 재물의 풍요나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 자리를 축복의 결과로 보면서 복음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즉 왜 이 율법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는가를 신약성경을 통해 그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욕망과 축복을 계속 연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에게 악마가 심어 준 저주스러운 한 사고 방식 때문인데 그 사고방식이 바로 '선악적 사고 방식'이다.
4. 왜 사람들은 '가계 저주'나 '가문 저주'에 공포심을 갖는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세속적인 축복성 가운데 하나는, 든든한 자기 가문의 번창을 손꼽을 수 있다. 이것도 또한 마귀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각하는 가정은 기존의 혈통적 가계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4-35)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을 창설하고자 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새로운 가정은 절대로 혈통이나 사람의 뜻하고 무관하다. 왜 그렇게 되는가? 왜 의도적으로 혈통을 인정치 않는가? 그 내막이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 잘 나와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13-14)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모든 혈통과 혈육과 가문의 저주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들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자기 가문을 다시 되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문에 예속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하신 바이다. 성령께서 약속하신 바는, 과거에 그 어떤 가문에 속했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데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7-29) '유업'이란 구약에서 자식이나 땅을 상속받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업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권한이 주어진 이유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그 아브라함 자손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이 본문에서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에 주목해 봐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가문은 수천 수만의 각양 종족과 육적 가계 중에 하나도 없다. 전부다 하나님의 축복의 가문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축복의 아브라함 가문은 그 자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육적 가계를 기준을 기준으로 하는 축복의 가문이냐 아니냐라는 논의는, 그 논의조차 성립될 수 없다.
모두 예외 없이 축복과 관련 없고 오직 저주와 관련 있는 가문들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그 가계나 가문이 혈통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임의로부터 성령의 찾아오심으로만 성사되는 일이고 그 성령의 오심도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에 준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것이 지속적인 약속 적용 방식이다. 즉 특정 혈통 위주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혈통의 기득권과 특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시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자유로움 선택 행위에 의한 것이다(요 15:16). 마치 구약에서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가 되는 그 약속의 원칙 적용을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주의 입장에서 실시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초혈통적 선택 방식을 모르고 오해하니 사도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하늘 나라의 유업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조건은 하늘의 부모에게 달렸다. 지상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이 조건에 압력을 가할 만한 정당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 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5-6, 26)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혈육적 자기 가족 고리에 집착하는 자가 있다면 율법이 혈육을 향하는 그 저주성과 정죄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다(요 3:6). 육에 영으로 옮겨갈 만한 유리한 조건을 가진 육은 천하에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도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신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4-39)
이 본문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어떻게 자기 가계와 자기 가문에다 특별한 축복적 의미를 보유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성경이 구구 절절 오직 새로운 가족 공동체만을 염두에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자기 가계의 축복성과 연속성에 매달려 있는가? 그것은 계시가 달라서 그렇다.
5. 악마는 가짜 계시를 가지고 교계를 농락한다.
'가계 저주론'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만드는 가짜 계시의 원재료는 소위 '경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 말고 최종적인 기준을 둘 만한 것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과 성경 사이에서 최고의 권위성을 두고 상호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 뻔하다. 반면에 진리에 관해서 최종 계시가 성경으로 한정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지혜는 오직 성경의 뜻에 굴복해야 한다. 그리고 더 추가적으로 보충할 진리는 없을뿐더러 허용해 주어서도 아니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계시의 입장을 기피한다. 자신들의 세상을 향한 욕심이 여전한 이상, 자기 탐심을 정당화시킬 거짓 계시 조작에 나설 것이 뻔하다. 소위 말해서 '잘 되었다, 잘 풀린다, 번창하다'라는 것들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본문에서 성도의 기쁨의 원천은 결코 재물의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호와 한 분 뿐임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의 계시의 핵심도 이 정신이 연속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으로 형성된다. 성경 계시가 과연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 불분명하게 계시한 적이 있던가? 만약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면 성경 이외에서 색다른 계시를 따로 경험상 수집할 하등의 필요성이 없게 된다.
한 분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성경으로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점에 대해서 충분히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다면 다른데 눈 돌릴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에 소위 신이 가져다주는 세속적인 번영과 발전과 소유물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다 하나님 믿는 기쁨을 찾겠다고 나선다면 이런 인간들은 필히 성경 이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핵심은 구원자 되시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기뻐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소원에 부합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이렇게 성경의 내용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소위 세상적으로 축복 받았다는 간증 사례 줏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것은 완전히 정신 상태가 세상으로 기우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적 관심을 토대로 해서 소위 교인 끌어 모으기에 나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 가짜 계시, 거짓 계시들이 폭발적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단적' 사고방식이란 자신이 얻을 꿈과 비전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획득해 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어쨌던 자신만큼은 이 세상에서 살아 생존하고 번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욕구와 욕망을 계시처럼, 진리처럼 마구 사용하고 내세우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성경 외에 따로 계시가 형성된 셈이 된다.
즉 성경에서의 계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핵심인데 반해서 인간들이 자기 행위를 긍정하고 의로운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자기 행위에 기초한 계시를 따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성경 안에 나타나지 않는 그 인간 자신을 정당화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제가 저의 체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향한다면 저의 체험도 그 연줄을 따라 계시적 의미가 다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본적 성경 전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변명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모든 체험과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부정하기 위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계시와 인간 체험에 근거한 계시와의 내용상 차이점은, 하나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한 계시인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기만의 체험과 지식을 거룩화하는 계시이다. 상호 충돌될 것이 뻔하다. 이 잘못된 계시관은 개인적 체험 수준에 머물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주위에 확산시켜 나간다. 개인의 거룩함에서 가문이나 혈통의 거룩함으로 이어지고 더나아가 자기 교회의 거룩함으로 확산되어 이어진다. 결국에는 자기 존재함과 자기 가계와 가문과 족보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것처럼 사용될 것이 뻔하다.
'성경+교회 전통=종합 계시'라는 등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는 현 자기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재현되고 구체화된다고 신봉하는 것이다. 더 이상 성경을 성경으로 풀 필요가 없고 이제부터는 현실적으로 자기 가문과 가정과 자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의 움직임과 연계해서 해석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계시의 중앙에는 자기 가정과 교회의 종교적 활약상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 잘못된 계시관에서 파생된 오류의 예를 한 번 들어보면, 소위 교회에게 치리권이 있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즉 초대 교회에는 교회 자체에 치리권이 있었다→ 치리권이 있는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고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치리권을 행사하는 용감한 교회니 누가 뭐라도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라는 논리를 전개해 버리는 식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논리상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고독하다→나도 고독하다→고로 나도 선지자이다. 라는 식과 같은 것이다.
어디서 오류가 발생된 것인가?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조사권과 치리는 그 기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이 아니면 누구든지 저주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서의 교회 본질은 교회 존재 자체에 과거의 경험과 체험에 근거해서 만들어 낸 신화나 족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만 기초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직 십자가 정신으로만 작렬하기 때문에 모든 자체적 역사관을 부정해 버린다. 즉 어느 가계나 가정이나 교회나 교단은 매일 같이 복음 정신에 준해서 늘 치리 당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에 최종 근거하지 않고 자기 교단이나 자기 가계나 자기 교회 자체의 치리권 소유를 근거로 치리권 행사에 나서는 행위는 완벽하게 치리감이다.
천국과 지옥을 분류하는 기준은 교회에서 장만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완벽하게 따로 마련해 두신 것이 있다. 자기 교회를 마치 천국과 지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또하나의 이단이 등장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성경은 이런 경우를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 바가 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성경 계시를 들러리로 삼아서는 아니된다. 성경은 자기 가계와 자기 교회를 긍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결 론
성경은 인간 가계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보고 있다. 그렇게 볼 때에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엡 2:1/고전 15:22)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자들이다. 또한 진노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르고 있다.(엡 2:3/롬 5:10) 하나님은 어떤 근거에서 인간을 이토록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가? 여기에 거룩한 율법 앞에 그 누구도 변명의 여지없이 죄의 사슬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윗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어디 다윗만 그러한가. 모든 인간들은 죄 값으로 죽음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입장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인간은 자꾸만 성경에 나와 있는 신의 기적들은 흉내내어서 영구히 자기 축복, 자기 계시로 삼으려 한다. 신적 능력을 늘 소지하고 다니기를 원한다. 종교란 원래 다 이런 시도들이다. 유에서 유로 나아가고 아는 것에서부터 다져 나가서 영원한 거룩에 손을 대려고 한다. 그러나 사도는 다음과 같이 이들의 시도를 정죄해 버린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사도의 주장은 참으로 황당하게 들려 올뿐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구원의 능력이 자신들이 비켜 간다면…. 이런 사태는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걱정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속 편한 작업을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간주되는 유사 선행을 실시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 구원받은 자라고 선전해 대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 구절이 이들의 시도를 단호히 부정해 버린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바로 이런 말씀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다움을 드러내신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이 하나님 지혜에 맞서려고 한다.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구원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이다.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이로서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구분된다.
기독교는 자기 몫 챙기는 종교가 아니다. 자신과 자기 자손의 출세와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증명하는 종교도 아니다. 거지 나사로를 보라. 그 후손이 대대로 번영했다는 그 어떤 흔적이 주님의 은총을 증명하는 멋진 간증거리로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