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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도와 윤리와의 관계는?성경신학로마서

성도와 윤리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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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와 윤리와의 관계는?

인간에게 상황이 주어지면 자신이 판단해서 일을 처리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윤리적인 면을 감당하지 못해서 혼란이 야기된다. 가장 큰 원인이 판단에 있어 지식과 정보의 한계 때문이다. 대처할 당시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간주되었지만 나중에 와서 보니 너무나도 이기적인 성향이 강해서 결국 타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정보를 미리 챙기지 못해서 최악의 결정에 동의하여 악마의 활동에 편승한 경우도 있다.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소한 범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무리한 면이 있다.
이미 확보해 놓은 재료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상상에 의한 사고 실험을 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가상 미래를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이렇게해서 예측된 세계는 늘 자기 중심적 세계이기에 실제적인 하나님의 중심의 현 세계와 부합되지 않고 충돌된다. 환상과 허구와 잡념이 뒤범벅된 시나리오를 작성해놓고 거기에 의존하는 인간은 결국 자기 판단에 의한 자기 선택의 합법성을 강변하는 주장을 늘어놓는다. 이런 자위적인 선택성 시나리오를 바탕 위에서는 아무리 성경 구절을 잔뜩 동원시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악마의 표적이 된다. 결국 어느새 낙심과 좌절과 그리고 자포자기가 기다리는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성경 안에 있는 구절들이 국가의 헌법 조문처럼 모든 상황에 일 대일 대응되는 식으로 쓰여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구적 시나리오가 성경 구절을 요청하여 진리로서 거듭 태어나고 싶더라도 현대 생활이 워낙 대규모적으로 팽창되어 있어 형식적인 면에서 불가능하다. 억지 인용은 그 자체로서 이미 무리한 해석을 유발하게 된다. 가능한 한 선을 위해, 살고 악은 할수만 있다면 피하기 위해 성경에서 명확하게 죄악이라고 규정해놓았다고 간주되는 조항들을 살펴보지만 그 구절들이 과연 선도 악도 아닌 빈 공간의 존재를 허락해 주고 있는 구절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장담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확실하게 선, 악으로 규정해 놓지 않았다고해서 그 빈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 스스로의 판단에 준하면 그만인가? 예를 들면, 주식 투자 같은 것은 선인가 악인가? 또는 노회에서의 결의 방식에 있어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시키는 것이 과연 선인가 악인가? 또는 교회에서 야외로 놀려 가면서 지각한 교인들을 위해 관광버스가 30분이나 지연 출발하는 것이 과연 선인가 악인가? 목사가 여 신자와 악수하는 것이 과연 성희롱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한 섬기는 자로서의 사려 깊은 배려인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과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선한 일인가?
흔히들 성경 계시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악 규정을 그 시대, 그 공동체 내가 만들어 낸 문화적 인식의 틀이라고 말한다. 즉 상대방이 당황하지 않고 용납이 되는 범위 안의 행위라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 황당하게 하고 죄의식을 유발케 하면 악이 되는 문화적 배경은 시대마다 민족과 사회 공동체마다 다 독특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이란 범우주적으로 조목조목마다 이미 만들어져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공동체 질서가 갑자기 혼란에 빠지고 파국에 이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융통성 있게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각자의 양심에 호소하고 그 건강하고 순수한 양심과 양심들이 만나서 영글어 낸 사회적 최선책이라고 법을 추앙하지만 그 양심이라는 것도 사실은 태어나면서 부딪치고 만난 사회적 환경이 조성해서 길들여 놓은 극히 제한적이고 이기주의 성향을 농후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견해가 옳은 견해인가? 현상적으로 보면 옳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봤을 때 근본적인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왜곡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복음적으로 봤을 때는 개인이 한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나 의미를 아예 허용하지 않는 선에서 출발한다. 즉 성경에서의 의(義) 발생은 인간에게 처음부터 주지 않는다. 신약에 와서 비로소 밝혀진 바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따라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제대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나 그 어떤 행위라도 의롭고 선한 것으로 판정 받을 하등의 권리를 부여받고 있지 않다. 도리어 성경은 말씀하기를, 인간은 악을 향한 충동이 선을 향한 충동을 늘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따라서 인간은 그저 악의 화신이다. 모든 인간이 이점에 있어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 성도가 되었든 비성도가 되었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선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악으로 공개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그렇다면 성도가 비성도보다 나은 점은 무엇인가?
나은 점은 없다. 또 가능하지도 않다. 모두가 다 같은 아담의 죄악된 성질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비성도보다 틀린 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비성도가 받지 못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명인가?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죄인이기에 주의 말씀 앞에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점에 있어 성도는 이방인과 차이 난다. 즉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1-8의 성경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점이 핵심이 되어 있다. 만약 이 거룩을 성도가 스스로 판단력과 절제 있는 실천적 행위로서 만들어 내고 수호하고 그래서 계속 간직해야 윤리적인 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다음의 성경 구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람이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2-4)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1-4에 있는 성경 말씀을 마치 성도가 새삼스럽게 지켜서 생산해 내어야 될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조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이 본문 말씀이 음란과 색욕에 관한 도덕적 규범이라면 이 '음란'과 '색욕'의 범위라는 것이 자기 행위에 결정 지울 수 있는 자위적 범위에서만 지나지 않기에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거리가 된다. 예를 들면 자기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얼마든지 음욕과 색욕적인 것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마치 악이 아닌 것처럼 얼마든지 떳떳해 질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나라에서는 비록 자기 아내라도 아내의 동의를 얻지 않고 부부 관계를 하는 것을 강간법으로 다스리는 법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이것 또한 이 시대 그 문화권에 있어 '약한 자를 보호한다' 문화적 배경을 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음란'과 '색욕'은 약한 자에 대한 -그 대상이 아내든 아내가 아니든 상관없이- 강자의 횡포를 포괄성 있는 표현하자는 해석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이방인과 성도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거룩'의 개념이 구약이나 신약에서나 '차이 나게 구별됨'에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하나님은 모른다고 했다. 이것이 이방인을 속성을 확실하게 말해 준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롬 1:28-30) 이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밖에 모르고 제멋대로 사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미워하게 된다. '음란'과 '색욕'의 근원에서 바로 이 정신이 깔려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곧 신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자기 즐거움의 대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마서 14:23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여기서 '의심'이 '죄'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 '의심'이란 딴 게 아니라 과연 하나님이라는 분을 꼭 의식하며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불분명성이다. 주님은 분명 지금도 모든 것의 주가 되신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8-9) 바로 여기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가 사실 모든 죄('음욕'과 '색욕'을 포함해서)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 거기에 비해 성도는 어떠한 자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8에서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차별성, 하나님의 구별성을 전혀 개의치 않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하는 식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할이 분명해졌다. 성령님의 역할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늘 마음에 두게 살게 하겠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심겨져 있는 채로 사는 사람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즉 윤리나 도덕이 개인적인 판단력이 절제력과 최종 근거를 두고 관련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투신(投身)의 결과로서 빚어지는 거룩을 하나님은 성도에게 찾고자 하신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결코 제멋 대로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 전서 4:1-4의 말씀은 (사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그러하지만) 성도에게가 주는 말씀이다. 성도는 성도 본인의 윤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즉 성도 안에 계시는 분은 성도 본인보다 더 의로우면 성도는 그저 죄인에 불과하며 그 분의 용서하심과 구원해 주신 사랑은 성도 본인의 그 어떤 행위와도 견줄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방인과의 '차별됨', 곧 '거룩성'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방인들과 차이나는 이유는 배후의 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도의 윤리적 솜씨와 이방인의 모습과 대비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이방인들의 배후 세력의 '하나님 없음'과 대비된다. 그래야 '성령의 주심'과 '부르심'의 의의가 계속 살아나기 때문이다.
만약 성도가 스스로의 윤리적, 도덕적 거룩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더불어 제공된 성령의 임재하심이 의의를 모독하는 악마적 태도이다. 이것도 또 다른 면의 이방적 사고방식이다. 거룩한 분의 임재를 자신의 윤리적 성과로 증거 하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변명에 집착할 것이 뻔하다. 자기 정당성이 하나님의 거룩됨과 직결된다고 간주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근거를 자기 의로 마련해서 자기 의를 최종 남기려는 성향을 띠게 된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윤리적 덕목에 첨가할 자기 의를 가지고 누가 감히 그리스도께서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로마서 10:6-7에서는 이점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 이루어 내셨다. 이미 완성되어 버렸다. 성도는 그냥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 죄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자이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외부적으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에 한한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 안에 놓여 있지 않는 자는 무슨 윤리와 도덕을 수행해도 다음과 같은 육체의 열매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왜냐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기에 모든 게 자기 정당성, 자기 변명과 자기 의가 최종적으로 못 참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 론

성도든 아니든 어떤 인간이나 그 행위는 늘 악하고 자기 영광 위주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다. 하나님은 성도를 위해 때마다 또다른 상황을 만들어 주신다. 성도가 어떤 식으로 윤리적 대항을 하는지 성도 스르로 점검케 하시는 것이다. 그 때마다 성도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각가지 신앙적 처방과 비법들을 총동원해서 사단을 이기고 악에서부터 해방되려한다. 그런데 그 처방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용지물인 것을 깨닫는 쪽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유도하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7:24-8:1) 바로 새 상황에서 다시금 '복음 증거'이다.
성도에게 있어 신앙이란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이처럼 마르지 않고 늘 하늘로부터 수여되는 선물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14) 성도 자신이 구축해 놓고서는 그동안 악을 순간 순간 이겨왔다고 여기던 윤리적 무기같은 것들이 도리어 그 자체가 현재적 하나님의 선물을 가로막는 사단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용서는, 새삼스럽게 성도가 친히 관리해야 하는 그런 덕목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다. 여기에 생명을 걸고 이것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이다.
히브리서 13:1-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 본문에도, 손님 대접, 혼인성 강조, 돈에 대한 초월 같은 여러 가지 윤리적 항목이 나오지만 최종적인 것은 바로 '주는 나를 돕는 자'라는 사실에 대해 신명을 거는 믿음에서 나온 결과들이다. 나그네 잘 대접하고 바람 안 피우고, 청빈하게 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바를 무엇보다도 소중해 여길 때 자연적으로 다른데 관심 두지 않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상황들은 성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상황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바가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너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19) 이것이 사도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기도이기도 하다. 자신의 처지보다 하나님의 처지를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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