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으로 살펴 본 잘못된 구원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펴 본 잘못된 구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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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으로 살펴 본 잘못된 구원관
1. 복음의 핵심
예수님의 생애는 인간들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생애였다. 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인물로 살아가셨는가? 그것은 인간은 거북스러워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모든 요소를 겨냥해서 접근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진정 이 땅에 죄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라고 지적하자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난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인간들 편에서 이 점이 싫은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는 자청해서 경호에 나섰다. 칼을 빼서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 얼마나 대범하고 영웅적인 행동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중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게된다고 말씀했을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장한 순교 정신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네가 죽더라도 나 있는 곳에는 올 수 없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 죽더라도 갈 수 없는 저 편 세상에서 오신 분이시다. 인간의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 그 미답의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건너 오셨다. 그래서 그 거룩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죄라고 지적할만 여건 속에 놓인 분이시다. 거기에 비해 인간들은 자신들의 배후를 몰랐다. 누가 자신들의 외, 내부를 조종하고 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낯선 이방인인 예수님을 싫어하기만 했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십자가 이후 무덤을 찾아간 일단의 여인들도 그저 동정심 차원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관리해 주려고 했을 뿐이다. 이사야 53장의 나오는 말씀처럼 인간들은 모두 그를 외면하고 싶은 한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추상적 예수에 익숙한 터라 제각기 창안한 예수 부르기에 열심이지만 막상 참된 예수상을 소개하면 외면하고 기피하기에 바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헛점이 있고 그 헛점은 실존 그 자체의 가치와 의미마저 정죄할만한 악이 솟아나는 곳인데 이점에 놓치지 않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마구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 평소에 점잖은 분으로 명망높았던 자들이 유독 예수님에 대해서만은 한목소리로 분노의 평가를 내렸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예수님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 이런 평가를 예수님께서도 잘 예상하고 계셨는데 그 이유까지도 알고 계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다고 판정을 내리셨다. 그 근거는 오직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늘 우충좌돌 하시면서 너무 일방적으로 발언하셨던 것이다. 기존 인간들과 융화하실 하등의 뜻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매사에 있어 이 세상에 매도하셨다. 그저 땅과 육에 속한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제 딴에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늘 나라만 관심두고 가지는 영적 나라, 영적 존재라는 자부심으로 팽배한 그들을 상대로 해서 말이다. 즉 예수님은 기존의 종교적 열의와 지혜와 이성과 정된된 감정을 일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드릴 의향이 없었다. 그저 예수님 자신이 제시한 방식에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은 무조건 악마의 자식이며 죄의 각가지 면모라고 해석을 내렸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가히 과대망상증 환자,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기존 행정 질서까지 위협하는 반국가적 인물이였다. 현명하게 행정적 조치를 취했는데 그 하나는 예수를 기존 민중들로부터 떼어놓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조용히 구실 달아 없애버리는 일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란 우발적인 체포된 범죄에 대한 사형 집행에 관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도 대조가 되고 이질적인 사고를 지닌 한 사나이에 대한 인간 세계에서 내린 침착하고 합법적이고 소의보다 대의를 이성적으로 고려한 최종 판정사건이었다(요 11:50). 즉 "우리의 세계는 당신을 퇴출하기로 결정했소!"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실 성령님의 임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마치 자기 죽음에 예감한 한 미친광이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발언처럼 들리게 마련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8-12)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할 승천 하시고 난 뒤 사도 선에서 다시 십자가를 거론하는 것은 이 인간 세상의 질서 체계에 대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말겠다는 선포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너무나도 이질적인 내용과 개념을 지녔기에 애초부터 상호 대화가 완벽하게 불가능한 그 갈등을 두고 두고 오는 세대에 계속 유포하고 시비걸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이 선포의 배경에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적, 정치적, 윤리적,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깔려 있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9)는 식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인간들의 의 인정도 전부, 예수님께서 차별없이 특정인만을 골라 내리시는 의를 불복종하는 불신적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신의 존재성, 영혼의 불멸성, 인류 역사의 최후 완전성과 그 합목적성, 이웃 사랑으로 비쳐지는 아가페 사랑, 이 모든 것을 합해도 결코 예수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비복음적 요소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받아드리겠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기존의 종교와 신의 존재성과 활동성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이며 이는 더나아가서 곧 십자가 범주 밖으로 다시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 안에 머물러서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자로만 자신을 드러내어서는 세상과 원수관계를 탱탱하게 지탱하겠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맨(Man)으로만 남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발 정신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義)를 결코 인간들의 활동이나 의식이나 지혜나 이성이나 노력과 피 땀으로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그 이유도 특이하다. 그것은 인간들이 선을 싫어한다든지 선에 대해 무지해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은 인간들이 단체로 단결해도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악의 권력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는 현실 해석을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뿐만아니라 거룩한 말씀이 되레 인간 내부에서 없는 악까지 대량 생산해내는 중이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8) 예수님은 인간을 아신다. 사람의 일을 곧 악마의 일로 동일시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을 부정적인 만남으로 규정해 버리신다. 바로 이러한 악마의 노예로서의 인간론 설정이 인간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즉 인간의 독립성과 자유 의지성과 그 고유의 존엄성과 피조세계에서의 위상을 비참하게 뭉게버리는 참으로 건방진 발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는 가엾고 시시한(?) 사람하고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한다. 도리어 역으로 그들 손에 죽음으로서 승리를 일구어내려고 하신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4-5)
이 사실도 모르고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가린다. 얇디 얇은 무화과 잎사귀 조각 같은 것들을 가지고 평생 자신을 가릴 요량으로 나서면서 더불어 자기 의(義)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자기 의를 사수하고 방어하는데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 기껏 가린다는 노력들이 바로 신학이요, 목회학이요 여타의 학문이요 기술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인간들이 매일 매일의 권태에 짓눌러 마지못해 삐져나온 '기능성 노동'일 뿐이다. 성경은 인간이 벌리는 그 모든 노동 활동과 종교 활동과 문화 활동을 '행위'라는 한 단어 안에 일목요연하게 몰아넣고서는 율법의 거룩성으로 정조준 해서 한꺼번에 정죄해 버린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것이 예수님이 일관되게 해왔던 작업이었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율법 하에서 이루어졌지만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이 작업을 수행하신다. 십자가는 사람을 살리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심판하는데 의의가 있다. "이미 죽은 시체가 왜 말이 많은가"하는 차원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하나님 사랑 작업은 되레 사람을 죽이고 심판하면서 진행된다. 그래야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그 죄인됨을 제대로 폭로시켜내는 참 하나님의 진수가 온 우주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이 일관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기 구원에 나선다. 즉 '인간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그리스도 몸'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주체성을 놓고서 두 행위자가 서로 대결하는 구조를 낳는다. 하나는 인간이요 다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각자가 고유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열매는 딴게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줄기차게 겨루고 왔던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 이름과의 전쟁사가 신약까지 끌어오면서 얻어진 열매이다.
Ⅱ 선택된 자에게만 붙여지는 이름
인간 세계에서의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인물을 관계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묶어놓기 위한 조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이름을 가진 모든 것은 그 이름을 지칭하는 자로부터 개념 범주가 구분지어지게 된다. 즉 그 이름을 부를 때, 이미 하나의 대상체가 되며 그 대상체는 특별한 선입견에 의해 호출받게 된다. 상대를 부를 때, "어이", "거시기", "자네", "신사 숙녀 여러분" 같은 것 뿐만 아니라 "오, 하나님", "신이시여", "여호와 하나님", "주 예수여" "부처님" 같은 호칭도 부르는 자의 일방적인 견해가 미리 담겨있는 채 상대를 향해 관계 형성을 시도한다. 따라서 S. A. 크립키 라는 미국의 분석 철학자는 이름에 대해 그 어떤 내용 부여도 거부하고 있다. 이름은 뜻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상을 지칭할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특정 이름이 보편적 내용을 갖는다면 이미 그 이름은 지칭으로의 기능은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이름에 시간성이 개입되면 그 대상이 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그 내용이 적합한 명칭을 붙이려면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호칭을 동원되어야 필요성이 있게 된다. 옛날의 '아무개'와 지금의 그 '아무개'는 결코 그 '아무개'라는 이름에 합당한 행동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비록 같은 인물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그 어떤 시간적 흐름에 의해서 그 본질성을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과연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것일까?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편에서 의도적으로 관계 형성을 위해서 허락하신 차원에서 제시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참 하나님과 관계 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요청할 자격이 죄로 인해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불러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개념상 차이점이 드러난다. 제한적이나마 하나님편에서 먼저 인간 관계를 잇도록 시도했다는 배려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조성하는 환경이며 또한 지상에서 불리워지는 모든 여타의 신의 이름과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저주하고 부정하게 되는 차원의 '하나님 이름'이다. 이것이 특별한 이유로 구체화되는데 이 특별한 이유한 바로 '하나님 형상'을 피조 세계에 남겨서 창조 세계의 완성을 시도하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란, 인간 쪽에서는 죄로 인해 전혀 이루지 못할 일을, 하나님 형상을 창조의 중심으로 온전히 완성하기 위한 그 목적을 위해 지상에 약속을 제시하고 성취하는 일에만 국한 된다. 그래서 흔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이름'을 해석할 때 그 이름 자체로부터 능력과 구원의 기능이 스스로 발산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경향이 여기 있다. 인간들이 (선택받은 자) 여호와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그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사시키시는데 인간의 불가능성(죄의 결과)을 함께 도출시키는 방향으로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그 지상적 사건들은 사람마다 각기 달리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만나는 하나님은 모두 다 같은 한 하나님이지만 그들이 겪는 경험은 다 다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나타난 반응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그 내용은, 이들 언약 관계에 놓여 있는 자들이 갖는 지상의 이름을 통해서 그 기능성이 드러내는데 이는 선택된 자들이 내뱉은 죄악과 그것을 은혜로 극복하는 방식에 의해서 늘 새롭게 채워지게 된다. 예를 들면 아담이라는 호칭은 '흙에서 나왔다'라는 이름에서 '흙으로 도로 돌아간다'는 이름으로 전환되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배경적 운명으로 자리잡게 된다. 즉 '흙'이 아담과 '생명'인 아내 화와를 대비를 통해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 내리신 약속의 내용물인 '여자의 후손'만이 해낼 수 있는 독특한 기능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남성의 계통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의 구속 작업이 실시됨을 아담의 혈통 안에서 암시되게 된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이루어내야 될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성취할 내용물이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지 않고서도 도저히 성사 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신약 시대에 와서 세례 요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하고 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가! 따라서 만약 이러한 아브라함의 경험과 이삭의 경험과 야곱의 경험이 함유하지 않는채 명칭으로만 '여호와'를 찾는 것은 다른 신을 부르는 것과 진배없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최종 마무리되어 계시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이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구체적 과정을 찾아나서본다.
Ⅲ. 주의 이름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부터 나온다. 그러나 뜸 하다가 창세기 5장에 또 나온다. "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거론한 것은 죄 짓고 난 이후의 인간세계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아담의 형상의 세계가 되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절) 인간의 형상과 더불어서 이 지상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인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4절-5절). 아담은 죽었고 또 그 아담의 형상은 입은 자식도 죽었고 그 손자도 결국에는 죽게 되고 …. 아담의 형상의 내림 따라 죽음도 병행된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서의 '형상'에 대한 거론은 '이름 짓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그리고 아담과 마찬가지이다. 자기 모양, 자기 형상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는 '셋'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물론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이름이 아니라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사람'이라는 대표 명사로서 시작이 된다. 셋의 이름도 사실상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호칭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형상'과 이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에 보답했다. 신약에 와서는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하나님이 준 적이 없다.(행 4:12) 이름이 어떤 때 주어지며 그 주어지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단순히 존재적 구별을 위한 조치만이 아니다. 이름을 제공받은 쪽과 이름 지은 쪽은 이름이 담고 있는 창조성을 사이에 두고 상호 연결되고 있다. 아담이 자기 모양대로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셋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도 같은 원칙에 의해서이다. 이름을 준 쪽과 이름을 받은 쪽이 동일한 틀 안에, 같은 운명으로 상호 통하고 있음을 뜻한다. 같은 운명, 같은 기능, 같은 속성 안에 함께 놓여 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나는 유일무일한 속성이 나열되어 있다. 다른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씀이 지닌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27절-30절) "정복하라"."다스리라","…주노라"라는 명령들은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만 특별 대우와 우월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지음 받았다는 피조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위치 때문에 주어진 요건들이다. 이 요건을 실시하기 위한 본격적으로 다스림은 아담의 이름 짓기 작업부터 허용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이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름 짓기를 맡긴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형상 안으로 수렴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창세기 1장에서의 6일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높이 자랑하고 증명하기 위한 창조 행위였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창세기 2장에서의 이름 짓기와 서로 연결시켜 보면 이름을 지어준 주체를 위하여 이름 지음 받은 대상이 지배받도록 하는 원칙을 이 창조세계에 남기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 체제 안에서 창조 원칙임이 밝혀진다. 그 증거가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하므로서 보다 확실해진다. 아담은 또 하나의 이름을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여자이다. 이 여자라는 이름은 남자를 염두에 둔 이름이다. 즉 인간의 대표인 남자를 위한 배필로서 등장된 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에게는 분명 지배하는 머리의 위치가 있지만 특히 여자에게는 분명히 머리가 남자이다. 결코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3,7). 이러한 서열은 이름 짓기에서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짓고 거명하므로서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의 대표자는 남자와 여자 중에서 남자가 대표가 된다. 그리고 여자는 그 남자를 위한 존재이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명도 여자에게 직접 준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직접 주어졌다. 이처럼 이름을 지음받은 쪽은 이름을 준 쪽의 역할을 위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뒤에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든다. 죽음이 찾아드는 하나님의 형상은 형상 원칙에 부합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단순히 본래의 흙의 이름으로 환원되어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음의 대명사로서 지칭되어야 될 이름으로 바뀐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그렇다면 아담에게 복속된 이름은 여자는 남자와 더불어 같이 죽게 되는가? 이 최초의 부부는 생명 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방되게 된다. 이제 생명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게 된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생명나무와 관련있고 그 세계에 계신 분이 직접 아내의 후손으로 등장된다는 점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생명세계에 계신 분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후손으로 등장된다면 생명은 다시 남성 혈통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투입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이 차지했던 그 자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름이 들어설 자리가 된다. 그래서 하와는 자신의 첫째 아들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 하지만 그 아이가 아님을 밝혀지고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줄이 이어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왜 꼭 여호와를 거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역사는 아담이나 아담의 후손이 주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담의 후손들은 "…죽었더라","…죽었더라"만 반복될 뿐이다.(창 5:4-31) 아담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종국에는 생명과 무관하게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약속이 그 이름을 부르는 이를 통해서 구체화되기를 적용, 성취되기를 원하는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에녹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의 노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죽은 아벨의 대신 주어진 핏줄은 셋의 노선을 통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기대를 거는 자들이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 5:22) 노아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창 6:9) 만약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창세기 6: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죄 속에서 만들어진 몸들을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시 원래 만들어 주신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을 그들은 지닌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영광이 파손된 모습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땅 위에서 소멸시킴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신다. 심판을 통한 새 창조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존속되는 창조 세계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신 바가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1-7) 이 내용은 마치 창세기 1:27-31의 내용을 반복해 놓은 것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세워놓으시고 그를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싶어하는 그 의도를 홍수 심판 이후에도 반복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성으로 양식을 삼으라고 하셨지만 창세기 9장에서 동물성 피조물까지도 음식물로 주어진다. 그 원인은 '피'에 있다. 노아 홍수 이후의 모든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준해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 유지 보전하는 그 은총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새로운 차원의 창조 세계로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다. 동물을 음식으로 먹으면서 단순히 먹고 배불리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을 잡을 때마다 피를 가려서 안 먹음으로 심판을 무사히 통과시키신 그 하나님의 은총을 대대로 이 피조세계에 영구히 남겨두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다른 말해서 노아 언약을 통한 영광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피를 땅에 쏟아지게 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새로 남겨주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생명은 바로 창세기 3:15의 약속에 근거해서 제공된 생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노아 언약 안에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새로이 등장될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창세기 9:26에서 노아가 다음과 같이 찬양 한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이 종이 되고" 노아가 보기에 셈의 행동과 처신 속에 여호와의 은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은 곧 바로 셈의 후손의 노선을 통해서 살아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셈의 후손이 유지, 보존, 지탱되는 것은 그 원동력이 셈의 생식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여호와의 의해서 살아남은 핏줄, 즉 노아의 후계는 하나님의 은총의 환경 안에 놓여있다. 여호와에게 도전하든 순종하든 모두다 은총의 저촉을 받는다. 심판의 기준도 새로운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되지만 은총의 주체이신 여호와께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예를 들면, 가나안 민족과의 전쟁 같은 것이다. 여호와의 약속과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고 거기에다 기대를 거는 자들은 필히 멸망하도록 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창세기 11:4-5에,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5) 여기서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씀이 들어 있다. 이미 인간의 이름은 노아 홍수 이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핏줄과 이름은 곧 죽음과 저주받아야 될 기능과 속성을 같이 짊어지고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자기 이름을 선호한다는 것은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고유 민족과 핏줄을 영구히 존속케 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여자의 후손 뿐이다.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출현하는 그 분의 핏줄 이외에 그 어떤 핏줄도 생명하고는 상관없다. 새로이 창조해 나가시는 핏줄은 창세기 12장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1절-3절) 복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완성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즉 창조 상태가 완벽할 때 그 완벽할 상태를 팽창시켜 온 우주에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 부가하는 힘이 복이다. 그런데 그 복이 아브람을 통해서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름이 세계에 첨가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름과 기존의 이름 사이에 구별이 생겨난다.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복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단 아브라함의 이름만은 예외이다. 누구든지 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무시하면 저주가 주어진다. 이제 새 이름에 의한 새로운 약속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복의 이름을 지녔다는 것은, 복을 제공할만한 기능과 속성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약속 장치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약속의 본질에는 누가 들어 있는가? 창세기 15:10과 17-18에 보면,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라고 되어 있다. 제물을 "쪼개 놓았다"는 것은 제물의 속성과 본질 부분을 밝히자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완성 될 때 과연 어떤 실상으로 드러날 것인가를 부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쪼개놓은 부분을 횃불이 지나간다. 불이란 창세기 3:24에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천사의 모습을 말한다. 즉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는 당사자는 바로 생명나무를 간수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노선을 따라 생명은 찾아오시도록 된 것이다. 즉 약속을 따라 생명을 들어오신다. 그 약속의 씨가 여자의 후손과 연관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능력을 부정하는 자식이 출생한다. 기존의 아담 형상을 입은 핏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다. 이것이 할례 언약으로 보여진다. 아브라함의 여호와로부터 택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창 12:9/13:4/21:33) 이삭도 마찬가지이다.(창 26:25)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기의 새로운 이름을 창대케 하는 약속의 작용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준에서 새로운 이름이 이들 선택자에게 입혀지므로서 이들과 하나님 이름 사이에는 계약이 체결된다. 상방이 서로 유통될 수 있는 이름을 부르면서 계약이 실현되어 나가는 것이다. 어쨋던 이름이란, 창조의 영광의 틀을 유지,보존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창조사역의 증거요 매개체로서 사용하기 위한 조치이다. 창조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이 몸이 죄로 말미암아 흙으로 환원되고 난 뒤에는 그 자리에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 유입이 요구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창세기 15:17에서는 횃불로서 보여지고 있고 출애굽기 3장에서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출애굽기 24:17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불로 나타남이 백성들에게 공개되었고 광야에서 국가 이스라엘을 주도해서 이끈 것은 불기둥이었다. 그리고 성막 제단 위의 제물을 붙이는 불의 본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레 9:24). 원래 제단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며 동시에 복을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제단에 불이 제물을 소비시킬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극복되어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신명기 4장에서는, 형상 금지 항목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불 자체가 형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도 용납하지 못하도록 소멸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지상에 있는 모든 형상 자체를 소멸하는 분으로 보여지는 분이시다. 또한 모세나 백성들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도 불 속에서 대화했다.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신 5:24-25). 모세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았지만(민 12:8) 안 죽고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18-20). 이처럼 불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브라함 계약과 이스라엘 계약의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처음 창조의 틀과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이름'을 중심에 놓고 그 이름의 능력으로만 유지가 가능한 땅을 의미한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5,11)
이러한 이스라엘에서의 여호와 이름, 혹은 '주' 개념은, 약속된 바를 오직 주님 자신이 벌리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성취해 내시는 분으로서 드러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3,6,13)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 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1-43) 이 본문에 나와 있듯이, 인간들이 제대로 전쟁할 수 있으면 주께서 친히 나서서 복수하실까? 바로 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5-36) 구약에서의 '주'라는 개념이 단순히 성도와의 협력자 정도가 아니다. 홀로 모든 일을 열심히 기필코 처리해 내시는 분이시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누구를 적으로 삼고 전쟁하시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이름 싸움'이었고 '자기 영광' 싸움이었고 '자기만이 하나님의 그 형상자'이심을 드러내시는 싸움'이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시 9:2,5) 자기를 신앙의 대상이나 내용물로 삼는 자는 전원 다 적이 되는데 시편신학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택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만 호소하고 있다. 이 말은 이 하나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에는 추호의 기대를 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인간들에게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의'가 오직 주의 이름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7:17)
여기에 비해 악인들은 사람에게 기대를 건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146:3-4)
하나님의 형상이 불로서 나타나는 것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 이름이 인간의 본연의 죄를 향하여 신속하게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더 짙어진 죄악과 더불어 더욱 더 큰 은혜로 나타나고 있다. 사사기 13장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 집에 나타난다. 그들은 그 천사의 이름을 묻는다. 그럴 때 '기묘'라는 이름을 던져 준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17절-20절). '기묘'라는 이름의 이 천사는 제단 위의 불꽃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이 기묘자라는 이름은 이사야 9:6-7에 보면 한 아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다고 약속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즉 하나님 자신이 기묘자이시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제 자신들은 죽었다고 낙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노아 아내가 말하기를 번제를 통해서 그 죽음이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2-24). 이 번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되게 하는 자리에 '기묘'라는 사자가 직접을 불을 지폈는데 그런 일이 있고 이후 이 마노아 가정에 생긴 현상은 삼손이라는 이름의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번제를 받으시고 그 가정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이러한 마노아 가정의 사건을 이스라엘의 전체 구원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삼손이라는 특정 인물을 출현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손은 바로 제단의 제물의 취지와 같은 운명의 소유자인 동시에 장차 기묘자로 오실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는 공간과 그리고 기묘자라는 낯선 천사의 왕림은, 주의 이름이 인격화되는 조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불이라는 심판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한 아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주의 이름을 가지고 오실 시점이 약속 안에 미리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에스겔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성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계신 모습에서 진행된다. 범죄한 성전에 대한 심판의 징조인 것이다.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5:4),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있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36:22,32). 이사야 6장에서도 이사야는 성전에서 나온 숯불에 의해서 입에 지짐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곧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최후(종말)에 하시는 심판 현상을 둘로 보았다. 하나는 성령의 세례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불의 세례이다.(마 3:11) 심판주가 두 개의 도구를 가지고 등장하는 이유는, 심판하고 난 뒤에 처음 창조의 틀로서 새창조에 나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기존의 아담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멸시키고 성령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 형상으로 대체하시려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서 마련되는가? 이미 온전한 불 세례를 받은 아담의 형상속에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담기게 된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늘 함유하게 되므로 불의 형상은 인격적으로 하염없이 발산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이 본문에서 "내가 받을 세례"를 주목해봐야 한다.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받은 것이다. 성령 세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답답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 불세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 1서 5:5-8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또한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세례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두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갈 3:13) 그 몸이 최후로 보이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십자가 형상으로 세상에 대한 심판의 깊이는 다 드러내셨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바른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에 저주 받아야 당연하다는 점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 베풀기를 주저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즉 예수님이 먼저 물 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받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완성이 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형상을 주님이 갖추신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게 되면(행 2:38/8:16/참조:고전 6;11)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와 사랑의 의지가 가득 함유된 그런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 사랑과 심판의 정신이 가득 담겨 있는 그런 존재로 출현된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야기가 한 그대로이다. 사도행전 2:3에서 오순절날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신체 구조의 일부의 형태로 등장하면서 또한 불의 모습을 띤다는 것은 처음 창조 때의 중간 매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틀을 계속 고수하신 채로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동시에 그 창조의 틀 안에서 새창조를 시도하여 안식의 완성을 실현하시겠다는 목적도 드러내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태의 신체적 형식 표현에 이름이 결부되면서 특별한 인물로 등장된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들이 이름을 각자 지니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도 나름대로의 인간적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사도행전 4:12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을 주는 주의 이름이 된다. 다른 이름은 왜 구원의 매개체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원 창조의 기능과 능력이 없는 이름은 무용지물이다.하나님이 새 이름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계 2:17) 그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구실을 못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의 깊이를 인식하고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다. 만약 예수님의 이름에 기대를 걸고 따른다면 그들의 이름도 하늘 나라 생명 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이 생명의 이름에 합당하게 이들은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는데 그 수준은 예수님의 형상 만큼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 때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고후 4:4). 전에 창세기 6장에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신께서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은 자를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임재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갈 4:19). 이 아들의 형상을 입을 자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렇게 형상을 기어이 새 창조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처음 창조의 영광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이름을 부정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이 이름이 친히 행하셨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제 위치에 다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주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셨던 주님의 이름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이처럼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라도 결코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이루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즉 그 어떤 사람은 "나는 순종한 적이 있었노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고 깊은 지혜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모든 것이 오로지 주께서만 다 하셨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주'를 거론하면서 그 '주 다움'의 정신을 희석시키고 오직 주께만 돌아갈 몫의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 '인간 긍정'의 정신을 그 자리에게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그 방식을 율법을 통해서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하나님의 언약 앞에 모두 무너지게 되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나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5-16) 이 본문에 보면,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그럴까? 모세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닌가? 다윗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닌가? 그렇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아브라함 자손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다. 여기서 사적인 구원욕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이유가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구원받는다는 의지만으로 구원이 가능치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저주밖에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성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놓여 있었고 율법은 모든 자들로 하여금 자기 죄 밑에서 굴복 당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1-23) 이 본문에서, '죄 아래 갇혔다'는 상황과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이 같은 뜻이다. 그 어떤 인간도 율법에 순종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구원 시도는 모두 실패이다 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도를 '주'를 외쳤고 '주'를 믿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내려온다. 그런데 그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주어지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께서 오셔서 의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4-5)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오로지 '주'이시기에 제공하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가 될 뿐이다. 바로 이점을 고백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나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구원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되시는 분이 하시는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고백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다.
Ⅳ. 인간의 이름에서 도출된 구원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이 순전히 주의 이름 홀로 이루어짐에 반해서 계속해서 자기 구원론에 계속 집착하는 자들은 있어 이들은 자기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성경 전체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나선다. 이들먼 먼저 성경의 지향성의 주의 이름으로부터 자기 이름으로 꺽어놓는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부응에 호응해 줄 수 있는 책인가?
도살장에서 한우를 잡을 때 부위 별로 칼로 나누게 된다.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각각의 부위들이 상품화되어 정육점을 통해 팔려 나가게 된다. 안심을 원하는 자에게는 안심 부위를, 등심을 원하는 소비자에게는 등심을, 내장을 원하는 자에게는 곱창으로 팔려 나간다. 각기 필요에 따라, 요구에 따라 일정량을 취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어느 부위를 좋아하십니까?" 묻는 물음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대답할 자가 아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 예수님을 전인격과 교제하게 되는 참 신앙인에게 있어 이런 물음이 가당치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수님과의 전인적인 교제와 무관하게 예수를 찾는 자들에 의해서 성경은 무참히도 도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유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정보 조달책으로 성경을 끌어당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성경이 아니라 자아를 더욱 더 고양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고 탐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는 지금보다 더욱 값어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