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이 교회 내에서 드러나는 양상
새 언약이 교회 내에서 드러나는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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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이 교회 내에서 드러나는 양상
-권성수 교수의 고린도전서 12장 해석을 읽고- 1997년 신학지남 여름호
하나님은 언약을 내리셨다. 언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도 언약 안에서 있을 때만 교회가 될 뿐이다. 언약이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언약이 빠진 교회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정에 호소할 뿐이다. "여러분, 교회를 유지합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비언약적이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언약을 중심으로 잡고 않고 해석해 버리면 남는 것은 인간들의 종교 본능뿐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경우를 살펴 볼 수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12-27) 이 본문의 해석은 그 바탕을 어디서부터 잡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린도전서 12:3-6) 이 본문에서 보면, '여러 가지'라는 단어와 '같다'는 단어가 번갈아 가며 나온다. 즉 성경에서의 강조점이 다양함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진다는 점에 우선한다. 이 말씀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각 지체로 퍼지게 되어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이다. 은사 없는 지체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두다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사를 받은 자는 모두 오직 하나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뜻이다. 모든 지체가 오직 그 분의 주의 활동에 의해 성사된다. 주의 활동이 중단된다는 지 휴식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은 주가 아니시다. 주님의 일은 주님에 의해서 쉴새 없이 활동하고 계시다. 그 활동이 무엇인가? 이 활동의 결과가 바로 다른 지체를 핍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그런 사랑의 틀을 지체 간에 조성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은 새 언약의 위력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지 결코 인간들끼리 잘 처신해서 온전한 교회를 만들어 내라는 말씀이 아니다. 은사는 사람이 만들어 내거나 증가시키거나 바꾸거나 변경할 사항이 아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17-19) 이 말씀이 언급한 대로, 모든 인간이 고차원 은사자가 되는 것이 처음부터 주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발의 지체된 자가 기도해서 어서 속히 보다 가치있는 눈의 지체로 옮겨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어떤 지체이든 오직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연유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의 교제를 나타내어라 는 말씀이다.
권 교수는, 은사의 선물성과 추구성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언약적 발언을 터뜨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을 양립시켰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 있어서 이 둘을 다 실헁에 옮겼다.… 은사에 있어 은사의 선물성과 추구성은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은사를 나뉘주시는 역사를 하시는 성령의 뜻, 즉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순응하게 될 때에 은사를 실제로 받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57페이지) 이 발언은 권교수가 평소에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바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권교수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의지성, 혹은 자율성을 기초로해서 출발하고 있지 결코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다. 즉 권교수는, 인간은 로보트가 아닌 이상 하나님도 이 점을 고려해서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의식이 가득하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은 인간을 볼 때는, 자율성이나 자유 의지성 소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치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기에 원래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계 맺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하나님 영광을 우선으로해서 죄인들과 새로운 관계에 나선다. 인간의 자율성을 새삼스럽게 고려하고 긍정하고 인정해주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안으로 끌어당겨서 기존의 인간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의만 그 안에서 계속 살게하시는 차원인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식으로 고정시킨 것이 언약이다. 그런데 권교수는 이런 언약과 십자가 정신에 무지하여 또다시 보편적으로 인간들의 종교적 자질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교를 재탕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종교란, 바로 자연 세계를 모방하여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속에서 신과 화목하고 교제를 나누어 거룩을 만들어내는 수법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율적인 희망성과 간구, 열성적인 기대치, 언어 형태의 계시에 복종하는 (이슬람교의 본질) 그런 방식이 동원된다. 심지어 언약과 십자가까지 모방해 내어 교회라는 껍데기를 걸치고 나타낼 수 있는 인간교이다.
구약의 언약 관계는, 항상 그 언약의 중심되는 주체로부터 모든 것을 은혜로서 혜택을 입고 있는 관계를 뜻한다. '주'의 관계라는 것이 바로 왕되시는 분이 지니고 있는 복에 백성이 일방적으로 참여 되는 양식이다. 이것이 사랑이요 은혜의 틀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 되시는 예수님이 '주'가 이미 되셨기에 이 '주'의 입지가 그리스도 몸을 통해서 드디어 구현되는 것이다. 그 구현되는 방식이 바로 은사의 다양함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랑으로 교제하고 용납하는 형식이다. 바로 이러한 새 언약 상태를 올바른 성도는 기대해야 하게 되고 사모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모하라!"는 말은, 그런 것을 사모할 수 있는 자가 성도로서 드러난다 는 뜻이다. 사모 안하면 구원 못받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은사의 형식을 지녔던지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온 은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절대로 엉터리 지체를 지체라고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 성령을 마신 자라면 결코 사랑 없이 행해지는 은사가 발생될 리가 없고 또 그것을 주님이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1-3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본문에 보면, '천사의 말'과 '예언하는 능력', '하늘의 비밀 파악', '신을 옮길 만한 믿음', '모든 것으로의 구제', '몸을 불사르는 봉사' 같은 재능 항목들이 나온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씀은 결국 주님이 안겨 주신 은사가 아니다는 말이다. 즉 "은사를 일단 받았으면 거기에다가 사랑의 은사까지 곁들어 온전한 은사가 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은사가 아닌 것을 사랑으로 분발한다고 주님의 은사로 변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유사 교회, 유사 그리스도의 몸, 유사 주님의 지체를 모방하고 흉내 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형태들은 결코 주님이 주신 은사가 아닌데 왜냐하면 주님만이 성령을 통해서 제공하는 사랑을 창출해 낼 수 없기에 항상 상대 우열 의식을 갖게 마련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은 은사의 원천을 지향하라는 말씀이지 상대적으로 더 큰 은사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더 좋은 길을 보이라"는 말씀은, 그 원천이 교회 내에 작용하고 활약하는 양식을 보여주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는 그 행위는, 결국 인간이 할 몫이 따로 남아 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주님되시는 분은 오직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만 계시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은사 안에서 주님과 교제 하는 자만이 한 몸만을 지향하는 참된 지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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