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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죄와 공동체성경신학레위기

죄와 공동체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죄와 공동체

Ⅰ. 서 론
죄를 가리는 수법도 가지가지이다. 인간들이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가 너무 간교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마치 죄 아닌 것을 인간들이 산출해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들이 죄를 알고 자신이 알게 되는 그 죄를 그냥 두지 않고 의로 전환하는데 까지 죄가 주도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어떤 인간도 죄의 위력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을 살피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도 죄의 조정을 받는 가운데 움직여진다. 양심상 생각나고 경험해 본 죄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 죄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묘안을 구상하게 되어 있다. 소위 자기 합리화, 내지는 자기 정당화 작업이다. 마귀는 이런 시도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마귀는 늘 인간 편에서 인간들을 도와준다. 의를 생산할 수 있는 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처방에 관한 조언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 정말 장하지 장해!"라는 안도감까지 챙기려고 한다. 그러나 마귀는 속삭인다. "보다 더 완벽해야지. 보다 더 의로울 수 있는 자질이 있는데도 여기서 멈추면 행여 신의 징벌이 왔을 그 때에 현재 자신의 게으름을 피운 것을 얼마나 후회하겠어 응? 좀 더 힘을 내어 봐.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의를 향하여 멀찍이 자리잡아야 돼. 그래야 안심할 수는 거야. 자 힘을 내! 저주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힘껏 달아나는 거야. 알았지?" 악마는 끝까지 인간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그리고 죄를 가지고 뒤에서 추적하고 앞에서 가로막고 있다. 선과 의를 향한 다꾸침을 멈추지 않는다. 이럴 때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갖는가? 복음에 호소하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언약 신학을 내세우고, 구원의 총족성과 확신성을 기억해 내고자 한다. "마귀야 물러가라. 나도 이제 예수 안에서 의인이야"라고 외치면서 대항한다. 그런데 이런 대응 행위가 과연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의 연속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렇게 해서라도 죄 그 자체를 떨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되레 마귀가 노리고 추적해서 몰아세우고자 원했던 그 파멸의 코스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죄의 자리에다 의를 대신 채우므로 죄의식과 죄로부터 자유로운 절대적 신으로 행세하고파 한다.

Ⅱ. 본 론
1.'자기 신학 갖기'의 위험성
'소유'라는 개념이 생기려면 그 소유의 '소유자'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다. 소유의 부동(不動)은 곧 소유자의 부동 의식에서 야기된 사항이다. 만약 정립된 소유자 인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소유 개념은 저절로 무너진다. 자기 신학을 소유하겠다는 의식에 대해서 문제점은, '자기'라는 존재의 확인되지 못한 당위성과 정당함이다. 왜 인간은 자기 의식을 근원으로 삼고 모든 출발을 거기서 도출해야 하나? 과연 이러한 자기 관념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인가? "어떻게 하든 나는 내가 지킨다"는 다부진 자부심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든지 그런 생각은 성경이 거부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핵심은, 개인의 절대적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말고 남이 주인공이 된 책을 놓고 마치 자기가 그 책의 주인공인 양 여기는 것은 잘못된 계시 해석이다. 아무리 자 의식이 본인에게 강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현상의 타당성은 성경을 통해서 점검 받아야 마땅하다. 성경이 모질게 답변하는 바는, 인간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성경은 예수님의 자의식 중심으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성경이 곧 내게(예수님)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자의식을 중심권으로 하는 악의 세력이 이미 세상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상식적인 사항이요 보편적 진리처럼 받아 드려지는 주체 의식이 바로 악에 의해서 조성된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개체적인 사람 중심 사상이 곧 이 세상에서 통하는 진리요 상식이요 선과 의의 기준이다.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서 또 다른 내가(신, 혹은 절대적 존재자) 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이미 읽고 그 한계를 고려해서 설치된 악마의 함정이다. 불끈 불끈 터져나오는 자기 존재의 당위성은 모든 인과성을 배제하고 일시적 충동처럼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 존재의 우선성을 간섭하고 억누르기 위해서 그 어떠한 이성적 논리를 동원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이성의 세계에서 무관한 상태로 출현하기 때문에 윤리나 도덕의 세계와도 단절되어 있다. 일종의 현존의 발생이다. 이러한 자기 존재성은 출현과 동시에 나름대로 시간성을 수반하고 등장하는데 이것이 골치거리이다. 즉 자기 존재성을 축으로 한 시간관을 고집스럽게 현실에 내밀면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긴장을 조성하게 된다. 바깥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자기 시간을 가지고 판단하는데 미래에 비해서 현재를 미완성, 혹은 미흡함으로 인식하고, 과거에 비해서는 현재를 연속성을 지닌 진보의 과정 속에 있다고 임의로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삶을 살려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판단의 허점은, 비연속적일밖에 없는 자아를 자꾸만 연속적인 시간의 떠밀림에서 비로소 탄생된 '시간의 이어짐' 위의 피조물로 읽으려고 하는데 있다. 달리 말해서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아 의식이 있고 난 뒤에 동반해서 나타나는 의식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위주의 절대적 시간이 이미 이 우주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자신을 영원의 세계까지 이어지는 절대적 시간의 산물로 정립하여 그 안에서 자기 존재의 절대적 근거성을 나름대로 확보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구원의 노정에서 어느 위치까지 진보해 왔는가?" 혹은 "나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축적해 놓은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으로 인해 얼마나 하늘에 가까운 지점까지 접근해 왔는가?"를 자아성이 우발적으로 샘솟을 때마다 챙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인간은 그저 우발적인 존재일 뿐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임의로만 존재하는 대상이 나름대로 무슨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 존재의 우발성과 임의성을 가지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 살짝 끼어 넣어 나름대로 일관된 역사적 의미성에 합류를 시도한다. 이로 인해 자아의 절대성을 절대적 시간성으로 포장하려는 것이다. '이미', '아직'이라는 구원론적 표상이 이런 현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교요 신학의 환상성이다. 종교와 신학과 모든 학문들은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의 절대적 자아성이 내뱉어 놓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이 안에는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전부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과 사슬로 연결 지어진다. "내가 이런 나쁜 행위를 했으니 벌받아도 싸지 싸." 혹은, "내가 이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으니 복을 안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지"라는 사고 방식을 토해 놓게 된다. 여기서 나쁘다, 좋다, 충성 벌, 복, 같은 개념들이 모두 자기 중심적 시간관 속에서 배출되어 나온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즉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오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임의로 연결시켜 놓고서는 '악한 것' 혹은 '악마의 세계' 혹은 '죄악된 세상'이라는 판정을 내리게 된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가 만든 환상 세계 안에서 도취되다가 결국 그 꿈과 함께 파멸되게 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악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인간들을 스스로 자기 구원론에 반하게 만들어서 그 구원론으로 지옥으로 끌고 내려가겠다는 것이 마귀의 총괄적인 전략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인가?

2. 성경에서 말하는 죄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죄는 예수님 입에서 말씀이 나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논의되었던 모든 인간의 죄관들이 모두 죄가 된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 구절과 같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즉 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서 그 그리스도를 감추임이냐 아니면 드러남이냐로 판정된다. 인간의 자기 소급성 행위로는 죄의 근원에 접근이 안된다. 죄의 근원성에서 인간의 소외된다. '이 세상 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본질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마귀의 권세 아래서의 인간은 의에 대해서 철저히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실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감추어져 있는 사실로 인하여 인간들은 죄에 대해서도 무지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죄와 의의 기준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기준은 '자기 존재의 구원성과 영원성'이다. 임의적이고 우발적인 존재를 고정적이고 영원한 존재로 삼는 것을 진리로 간주하고 여기에 방해되고 장애물로 등장하는 모든 것을 죄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그 자체가 진리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 주는데 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하나님에게 의가 되고 진리가 진리답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을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시킨다면 그 하나님의 행위는 진리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서 더 나아가 표현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순수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관여해 주지 아니하시면 전혀 진리의 하나님답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다. 어쨌던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기 존재와 행위와 연관시키므로서 톡톡히 악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인식이 그리스도를 가리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감추는 짓이다 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수님은 사단을 언급하면서 연이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남기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3-24) 이 본문에서 가장 주위 깊게 봐야 할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닌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곳이다. '나'라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나'를 즉이려 하신다. 십자가 져야 될 존재가 너희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죄의 근원성을 전부 알려주시는 사건이다. 십자가가 아니면 죄를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아라 는 이야기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은 구원될 자격자가 못됨을 알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 구원에 대한 집착이 결코 구원의 접촉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코 의롭지 않다는 말이다. 그 어떤 근사한 신학을 근사한 신앙과 경건한 종교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 구원이나 타인의 구원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 모든 인간들의 행위는 예수님이 홀로 지신 십자가 사건의 의의만 가중시킬 뿐이다. 즉 곧 죄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비로소 죄인 것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아세워셨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신 의의도 여기 있다. 그들만이, 성령이 임하게 되는 그들만이 죄의 본질에 눈이 뜨여지는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0) 모든 죄는 오로지 예수님의 존재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예수님의 진리성과 영광성을 가리는 것이 곧 죄이다. 그리고 이 죄의 권세에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혜사로 보내 주어야만 죄와 은혜를 알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죄는, 인간들로 하여금 죄의 실체조차 모르도록 가리게 된다. 무엇이 죄인가? 어떤 일을 못해내는 것이 죄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두는 것이 죄이냐? 이 구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복음과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자꾸만 인간들이 교회를 위하여, 혹은 주님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만약 하지 않으면 영광이 안된다고 그릇 가르치는 경우를 적발해 내지 않으면 죄의 개념 또한 희석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괜히 오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 지상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계속 우리의 몸을 의미있는 참된 몸으로 부지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든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3. '몸'이라고 불리우는 인간 공동체

예수님은 왜 성도를 자신의 몸으로 구성시키려고 하실까? 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의의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절) 즉 하나님은 인류를 한 사람, 한 몸의 구성체로 보고 계시다는 점이 너무나도 분명한 창세기 3장 사건에 근거를 둔 언약적 안목이다. 이 언약적 안목만이 하나님의 견해이다. 따라서 은혜, 즉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은사는 이 한 몸을 위한 것이다. 한 몸으로 모으는 만드는 은사가 아니면 은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한 몸=인류 전체'로 본다면 '성도의 공동체=그리스도의 한 몸'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인간 사회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상황이다는 점을 받아 들어야 한다. 인간 사회가 아담의 한 몸에 묶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인식들은 언약에서 이탈된 사고 방식이다. 따라서 몸과 몸으로 인류와 예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모든 성경상 진리는 와해되어 버린다. 나 개인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는(인간은) 언약 체계 안에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사항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성경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고전 12:12,14-19)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신 데는, 인간 공동체를 또 다른 한 몸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언약적 인식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야지만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 사회는, 여러 인간들을 지체로 하여 하나의 몸의 기능을 하게 되는 원리로 조성되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개별적 신체성과 같은 조직성을 인간 사회도 보이게 마련이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 보이에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이고 아담적인 종교 공동체가 유사해 보이는 그리스도 몸으로 이전 할 수 있는 방도가 혹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거부당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반절) 여기서 주의 몸과 인간의 몸 사이에 확연한 건널 갈 수 다리가 아예 존속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외형상 여타의 몸의 집단처럼 보이겠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완전히 딴 몸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두 번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 )에 의해서만 차별적으로 새로운 생성되는 경우 뿐이다. 즉 출처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외형상 필연적인 볍칙에 의해서 전이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은사의 우발성으로 인해 모든 필연적 법칙은 어디에도 설 수 없다. 오로지 기적만이요 하늘의 은사만이다. 마치 사람으로 보이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경우와 같다.
인간 몸의 다양함이 하나의 필연적 한 단체와 한 사회로 조직화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현상에 속하지만 아담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배제한다. 아무리 인간들이 자기 몸을 활용해도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 다양성→유일성의 전환은 인간 사회에서 얼마든지 정치력과 행정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종점은 결국 아담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성도들의 사회를 이루면서 아담의 세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은사를 내려 주셨고 동시에 그것이 어떤 은사에 의해서 하나로 집결되는 가를 보이신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하나로 모으게 한다는 것은 모두 다 한 분을 근원지로 삼는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뭔가 마신 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여기에 보면 모두 다 한 성령을 마신 것이 되는데 이런 현상은 아담의 몸에서 도저히 발생되지 못할 현상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런 현상이 발생되지 않는 단체는 결국 어떻게 되는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뿐이다. 비록 그들에게 산을 옮겨 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아니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단체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랑의 형태처럼 보이는 구제와 순교도 그리스도로 집약되지 못하면 사랑의 은사라 볼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몸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몸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그리고 부정해 버린다. 그저 주님께 받은 사랑의 은사만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정말 성령을 마신 자라면, 정말 사람들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의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한 몸만 증거 하는 사랑의 은사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는 최종 은사로 모아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 아담의 범죄에 모아지는 이치와 같은 원리이다. 인간의 몸으로 시행할 수 있는 '공동체 만들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이 이 지상에 존재함을 보이게 위래서 사랑의 은사는 작동한다. 지금 누구에 의해서, 누구의 은사에 붙들려 있는 가는 인간들의 자신의 몸으로 실행코자 하는 '공동체 운동'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하나로 모으게 하는 능력인 사랑의 은사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몸을 주도하는 것은 인간 몸의 다양함이 아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이라는 본문이 이를 말해 준다. 성령과 주와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범주에 제약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행함에 예속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을 주도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들의 몸에 의해서 움직이는 종교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행위가 나타나게 된다. 사랑의 은사를 여타의 은사와 따로 구분해 둔 것은 주님으로부터 제공된 사랑이라는 선물은 그리스도 고유의 것이며 이 고유의 선물만이 인간의 모든 다양함을 그리스도에게로 묶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사랑의 은사에 의한 믿음과 소망은 세상의 기존의 모든 모든 인간들의 단체 행위를 감시하고 정죄하고 고발의 기준이 된다.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5장에서는 '의(義)의 왕노릇', 혹은 '의(義)의 선물'이라고 표현된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아담의 한 몸을 구성하는 모든 인류의 죄에 고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예수님의 살아 있음은 곧 몸으로 살아 있음이요 몸의 살아 있음은 아담의 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그' 한 몸 이외에는 교회가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아담의 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된 자만이 교회이며 성도이다.(외형상 차이나는 점은 없지만) 그래서 지체된 자기 몸을 위한 교회란 있을 수 없다. 오직 머리를 위한 지체일 뿐이다. 지체인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만이 친히 교회임을 드러나기 위해 지체로 뽑힌 것이다.
주의 몸만이 교회이기 때문에 주의 몸을 생각하는 교회는 교회이지만,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인간의 몸의 주님의 몸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마셨다면 더 이상 자신의 몸으로 남아 있을 수 없고 반면에 그 누구로부터 마신 적이 없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을 위한 공동체 자체를 위하여 살게 될 것이다. 물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을 수 없고 단지 공동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한 소망과 공동체 자체를 사랑하는 사랑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을 마시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모방하거나 흉내는 내면서까지 자신들의 몸(종교 공동체) 유지에 불끈 달아 있다. 사랑의 은사만을 보이면 될 것을 교회 자체를 유지하고 존속하고자 결속력을 지탱하려는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는 죄악이다.

Ⅲ. 결 론

주님은 애초부터 인간의 종교 공동체를 자신의 몸과 대비되는 아담의 몸으로 보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2-14) 그래서 주님이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몸밖에 없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5:17)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 드러나는 것은 아담의 몸에서 참으로 나올 수 없는 은혜와 하늘의 은사성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이 교회를 만든다든지,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든지, 교회를 번창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만이 지닌 고유의 은사성과 전혀 다른 발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몸으로만 족하고 존속될 뿐이다. 숫자가 많아진다고 더 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요 숫자가 줄어든다고 더 작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은혜성과 은사성에 전적으로 일임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런 점에서 아담의 몸과 인간의 공동체와 차별된다. 그 지체들이란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의 은사만 증거할 따름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 나타난 이상 따로 교회라는 종교 공동체는 필요치 않다. 지상의 모든 공동체의 인간의 몸, 아담의 몸의 연장체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자신들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끄집어 내놓기에 열중한다. 전도일수도 있고, 헌금일 수 있고, 말씀 연구일 수도 있고, 찬양과 예배 일 수도 있고 구제와 봉사와 순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그리스도의 몸을 비쳐 내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는 결코 자기에게로 도로 돌아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 성령을 모두다 마셨기에 모두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인정하고 주만 좇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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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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