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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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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용옥을 이렇게 생각한다성경신학-

나는 김용옥을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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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김용옥

2000년 2월 21일 이 근 호 목사

Ⅰ 서론: 김용옥 연구의 의의

현 시대상에 적용하기 위한 사상을 멀리서 가져온다는 것은 인류가 이 시대까지 오면서 사고한 모든 지혜의 가치 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해당되는 시대의 지혜와 사상의 부정은 새로운 종교의 출현 조짐으로만 설명 가능하다.

왜냐하면 학문의 발전이란 그 때까지 논의된 사상의 집합체 속에서만 도출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상이 그 시대에서 인정받으려면 학문이 그 동안 역사 속에서 길러온 사상의 줄기로부터 이탈되지 않아야 된다. 만약 이탈되어도 그 절대적 정당성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신흥종교의 출현이 되는 경우뿐이다. 종교란 자체적인 계시의 절대성에 의해서 기존의 모든 역사와 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성질이 있다.

하지만 학문은 인간이 지닌 이성의 향상된 성숙도에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용옥의 학문적 작업들은 김용옥의 이성의 성숙도를 드러낸다. 같은 시대를 같이 질주하는 각가지 권위적 계시들과 이성들 토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딪쳐보고 시비 걸어 보고하는 것을 통해 자아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김용옥 연구는 복음이 학문과 경쟁의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데 비 진리성의 정체를 분명히 하자는 데 있다. 누가 무슨 주장을 늘어놓았든지 간에 성도가 본인이 알고 있는 진리 속에는 비 복음의 세계에서 내세우는 주장과 동일한 생각들이 항상 들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바깥과 안이 동일한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그러하니라"(갈 6:14).

따라서 김용옥의 외침 속에서 성도의 옛사람을 규명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곧 다시금 주님이 주신 진리의 본질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자세이다. 만약 이런 작업을 외면한다면 십자가의 의의를 자기의 죄와 연관 지워서 정립하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사실상 김용옥 같은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의해 구원 안에 들어와 있다는 현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의를 보다 부각하기 위해 자기 죄를 들추어내는데 소홀히 하지를 않게 되어 있다.

즉 김용옥의 주장은 곧 내가 지금도 내 속에 있는 나의 죄가 외칠 수밖에 없는 주장이며 김용옥이 펼치는 이론은 나의 죄가 강하게 펼치고 있는 이론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이 곤고한 몸에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더욱 더 증거 된다.

성경 구절 하나 하나가 율법 화되어 성도에게 주어질 때, 성도는 자기 속의 죄성으로 인해 그것을 율법적인 대처를 하게되는데 여기서 정립되는 모든 변명들과 자기 의(義) 고수와 핑계들은 김용옥의 의식과 동일성을 갖는다.

건성으로 자기 행위와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차용하고 해석하는 그 행세를 김용옥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한 것이다. 이렇듯 김용옥을 통한 자기 죄 찾기는 곧 성경을 볼 때마다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는 성도의 죄를 찾는 작업과 분리되지 않는다.

즉 나의 종교성이 곧 죄며 나의 진리 관이 곧 죄인 것이다. 그 종교성과 진리 관을 우리와 같이 아담 안에 속해 있는 김용옥을 통해서 재확인하는 것이 김용옥 연구의 의의이다.

Ⅱ. 본 론

1. 과학의 공포에 직면한 김용옥

과학시대의 큰 흐름 앞에서 날로 왜소해져 가는 인문학의 발을 딛은 김용옥은 인문학 나름대로의 존재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려나간다. 그 방법에 있어 같은 형편에 놓였기에 밀려난 한을 같이 느끼고 철학 계의 선배에서 도움을 얻는다.

첫째는, 과학의 인식 사고와 철학(인문학)의 인식 사고가 다르다는 점을 강변한다.

둘째로, 과학적 사유의 허 점을 고발하여 형이상학으로서의 과학의 입지가 여기에는 과학과 기술 문명이 가져다 준 정신적 폐해를 부각시킨다.

셋째로, 김용옥은 지금까지 공동 투쟁에 나선 서양 철학자에게서도 결별을 해야 하는 큰 부담을 갖고 있는데 마냥 서양 철학내의 자체적인 비판적 이성과 반성적 이성의 빚만 짊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동양 철학만이 지니고 있는 지혜 성을 가지고 서양 철학의 인식의 한계를 공개함으로서 부정적 비판의 연속에 머무는 철학 계를 구제하여 동양 철학에게 주도권을 넘기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서양의 근세철학과 근세과학이 모두 동일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기술이 되겠지만 역사를 창조하는 창조력의 도수를 운운하자면 항상 과학이 철학을 리드했으며, 철학은 과학의 뒷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과학이 저질러 놓은 실수를 유한한 구라로 잘 얼버무려 놓을 시녀노릇밖에는 하지 못했다. 20세기 새로운 철학조류도 모두 그 철학이 의거하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의 빽을 믿고 까불어댄 장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철학처럼 무능력한 구라는 없는 것이다. 서양중세철학이 신학의 노비였다면 서양근세철학은 과학의 노비일 뿐이다. 뭐 잘났다고 그렇게 겁만 주고 있는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53-54].

이 대목에서 보면 김용옥이 앞으로 설계할 전략의 윤곽이 나오는데 그것은 현대 과학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 시대를 전혀 포괄하 수 있는 철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넷째로, 김용옥은 자신이 재해석한 동양의 지혜 속으로 기존의 모든 종교의 진리를 흡수 통합시킴으로서 그 동안 독점적 권한을 누려왔던 진리와 대한 종교계의 절대적 영향력을 분쇄하고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종교란 과학 시대에 이성적으로 같이 싸우고 대결하지 못하고 탈 이성의 세계로 자기들끼리 도망쳐 버린 비겁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 능인들에게 이 시대를 논할 상대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김용옥 자신과 같은 동양 지혜자로서 과학을 이기는 자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론이다.

"모든 종교에는 고등과 저등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기저에는 샤마니즘적 충동이 깔려 있을 뿐이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171 ] 그러니까 김용옥은 과학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샤마니즘도 아닌 그런 사유의 틀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째로, 김용옥은 그 동양철학마저 극복하는 독보적인 철학을 만드는데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문자만을 풀이하는 그런 시대에 낙후된 동양철학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읽어내는 그런 살아있는 철학을 하고자 한다. "역사에는 과거란 없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161] 바로 이점이 현 시대 안에서의 인류에 대한 본인의 시대적 소명감으로 삼는다.

적당히 타협하고 돈을 위해 과학의 틀 안에서 아부하며 적당히 처신하는 기존의 철학가들을 김용옥은 우선 저주한다. 이들을 깨부술 비책은 바로 '몸 철학' 곧 '기철학'이다. 몸이 곧 기라는 '기 철학'을 모르기에 이들은 과학에게 패배의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김용옥의 색깔이 과학 시대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당황스럽게 보이는 것은 현대인들의 기철학을 알고 과학의 본질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몰라도 되는 그런 것을 새삼스럽게 반드시 알아야 되는 필수적인 진리인 것처럼 김용옥이 강변하고 있는 낯선 의도성 때문이다.

즉 현대인들이 오늘날을 사는데 있어 틀에 맞추어야 될 인생관이나 이론이 있어 거기에 의존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날 김용옥이 나타나서는 마치 오늘날에서 특별히 맞추어서 살아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그런 규정된 삶의 법칙이 있는 양 외치고 다니니 이점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김용옥은 일종의 '시대적 착란 효과'를 얻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 마치 문제라는 되는 것인양 사람들은 자신의 사는 근원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현대인들이 나름대로 사는 철학이 있어 그 철학 위에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야 김용옥의 강의를 듣고 수정 내지는 반성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향하여 수정하라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사는 토대로 삶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는 것은 그냥 그대로 살되 이제부터 취미로서 철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과학이 김용옥과 인문학을 하는 자들에게는 자기 밥그릇이나 월급 봉투를 축소시키는 원수일런지는 모르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생활 그 자체가 되어있다. 따라서 김용옥과 더불어 과학에 반기를 들고 대적할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철학교수들처럼 학교에서 주는 월급만 받고 학생 모집에서 나서는 일반 직장인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의 저술과 강의로 말미암아 동양 철학에 대한 취미가 확산되면 자기 취미를 안 알아준다는 차원에서 자신과 더불어 동양 철학의 확산을 저해하는 모든 세력을 타파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내다본 포석이다.

언젠가는 동양 철학하는 사람들이 지식인들로서 존중을 받을 날을 위하여 자신은 순교자와 그 포교자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에 전문가가 아닌 김용옥이 어떻게 혼자서 과학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것인가?

과학은 과학 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간의 정신을 풍요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상이라도 비과학적인 것은 아예 진리에 넣어주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과학은 인간이나 사회를 최종 종착점으로 여기고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서 전체적 우주와 관련짓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큰 것을 탐구하면서 자그만한 것의 입장을 고려해 줄 수가 없는 법이다.

과학의 호감을 사려면 첫째로 과학이라는 인식구조만으로 구조적으로 안정된 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을 찬양해야하고 둘째로, 과학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 과학 력으로만 자체적 모순과 불안정을 거뜬히 극복할 자질을 갖고 무한한 발전과 번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실제적인 과학적 신기술 개발을 통해서 제시해주어야만 한다. 그렇게되어야 그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보다 발전된 이해가 병행해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심사 이외에 인간의 행복이니, 영혼의 만족이니, 아름다움의 추구니, 사랑의 승리니, 생명의 고귀함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라느니, 마음의 안식이라느니, 고결한 성품이니 하는 것들은 과학의 눈에는 허구 개념의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에서 논외로 삼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전혀 고려할 요소가 못됨의 선언이다.

철학은 과학을 향하여 자꾸만 자기들과 협력하자고 보챈다. 모든 영광을 과학자들이 독점하는 것을 철학들은 시기 나서 못 견딘다. 그러나 과학은 철학과 상종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인류의 생존에 있어 직면한 문제점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독점으로 그 위기를 읽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류를 구출한 사명에 불타고 있는 과학자 입장에서 철학자들과 함께 철학이나 논하며 그들과 같이 노닥거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과학자끼리 경쟁적으로 신기술을 계속 개발해 내지 아니하면 인류가 함께 망해 버린다. 이런 사태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철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신기술이란 오늘날에 완전히 과학하는 자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도움되는 가치를 읽는 눈도 역시 과학자의 탐구 과정 안에서 도출되기에 그 우선권이 과학자에게 일임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일반인들은 과학자에게만 모든 생존의 권한을 일임하고 있고 그들이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으로 과학자들의 느끼는 공감대에 참여하고 있다.

인류의 지나간 역사가 어쨌든 간에 이 시대에 와서 인생관과 진리 관을 영도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과학이지 철학이 될 수 없다. 철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인류 생존에 유용한 그 업적이라는 것이 나온 적이 없다.

철학이란 기껏 과학자들이 해 놓은 업적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조정하는 뒷처리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새로운 의미들을 덧입혀 각색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철학자들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우선적인 역할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과학에 어디까지나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한가한 시간을 내어서 과거의 동양 고전에 심취하는 것은 좋은 취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 속에 활동하는 현대인들 치고 어느 인간이 신기술 개발과 연류 되어 함께 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에게 철학이 없다고 꾸짖을 것이 아니라 함께 과학의 발전에 매진한다는 차원에서는 구태여 삶의 지혜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자기 생활에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 돌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라고 평가를 내릴 위치에 철학자들은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철학자들은 직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해병대의 입대한 병사가 해병대 훈련이 고되다고 해서 훈련 대신 인생을 논하고 철학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병대 훈련소에서 우선 시급한 것은 강인한 해병대 병사가 되는 것 뿐이다. 또 사회에 있을 때 식물학을 전공한 병사가 전장에 나가 앞으로 진격하는데 희귀 식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을 채집하기 위해 그 자리에 시간을 내어서 멈출 수는 없다. 전체적인 전투력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 전 인류는 함께 사느냐 아니면 함께 죽느냐 하는 늘 전쟁터에 와 있다. 과학자를 대장으로 해서 마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래도 살까말까 하는데 그 대장에게 시비 걸고 분위기를 흐트려 놓으면 힘의 누수만 초래하여 위기성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아무리 교회가 재미있고 하나님이 좋고 예수가 좋다해도 근로자가 상품 생산에 차질을 빚어가면서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교인이라는 위치는 산업전사의 위치보다 아래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보다 경제가 우선이며 그 경제는 과학의 신기술 개발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에 이런 현대 교회를 향하여 신앙이 어떠니 신학이 어떠니 철학이 있느니 없느니 하나님 개념이 어떠니 하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돈 벌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 가치도 없는 교회이다. 목사가 서재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진리 연구하기보다는 돈 많은 교인들을 심방 하면서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교회의 존속에 더 진리다운 태도이다.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남성을 평가하는데 있어 인격을 논하기보다는 아니라 얼마의 돈을 버는가를 조사하는 것이 진리성에 더 가까운 판단이다.

인격이나 주체성보다는 돈이, 그리고 그 돈은 오로지 과학 발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세상 안에 이미 우리는 놓여 있다. 현대인의 보편적 언어는 돈이다. 돈이 화제 거리의 주가 되지 아니하면 누구하고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시대에 돈이 쏟아지는 곳은 과학 기술계 뿐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승부를 걸려면 과학의 무용론으로 무장해서 나서야 한다. 과학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 큰 축 안에서 일개 구조물로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과학은 비판의 대상이 이미 아니다.

과학은 이미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절대 진리의 진원지이기에 과학을 비판할 그 어떤 외부의 진리의 틀을 남겨 두지 아니했다. 현 과학이 허용하는 비판은 신기술, 발전된 과학 이론으로만 과학계의 자체적인 발전을 위한 긍정적 과정에서의 지적뿐이다. 과학이 아래 직급으로 여기면서 아예 논외로 삼는 철학이나 종교나 지나간 날의 과학 역사나 삼위일체 교리나 노자 사상이나 선문 선답으로 과학을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학은 전부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과학은 인간 마저 초월해서 우주와 동격이다. 어딜 감히 인간들이 과학을 비판 할 수 있단 말인가! 과학적인 아닌 사회 과학이나 철학이나 언어학이나 종교나 인문학은 모두 미신에 불과하며 이 시대의 이단이요 적이다! 한의학이 서양 의학을 아직도 보조한다고는 하지만 과학은 언젠가는 그 동양의학마저 가만두지 아니하고 필히 과학적으로 정복해버리고 자기 수하에 두게 된다. 그래서 아예 보조, 혹은 보완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과학적이지 아닌 것은 미신이기 때문에 과학이 미신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과학 체면에 부합될 수 없다.

그래서 지난날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처신했다. 과학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과학주의'를 문제삼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의 존재의 당위성과 가치 성을 일부 유지시켜 왔다.

어디까지나 과학 발전에 도움에 된다는 조건하에서 과학의 부속 기관의 역할을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따라서 김용옥도 이들 선배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자기 몫 챙기기 위한 동양학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 김용옥의 해석학적 토대

'과학주의'의 병폐를 질타하면서 철학계는 비로소 생기가 돈다. 김용옥이 내세우는 가다머 해석법은 이미 그 전에 과학주의를 경계하자는 운동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이성만 물고 늘어지면 과학도 철학에 대해서 함부로 깔보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서게 되었다. "과연 이성은 완전한가?"라는 식으로 철학은 과학주의에 시비를 걸었다. 지식의 영역(진리의 영역)이 과학의 영역보다 아마도 더 넓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가지고 과학자들의 심기를 건들어 본다.

어쨌든 철학자들은 과학의 영역을 언어의 영역으로 전환시켜 놓기만 하면 일단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쾌재를 부를 참이었다.

첫 시비 걸 자로서 철학자들은 데카르트를 지목했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존재와 연장 적인 존재를 엄격히 구분했다. 구분했다는 말은 완전 일치가 가능치 않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과학이 신으로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철학자들은 데카르트를 공격하는데 조금의 자비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왜 신의 세계에서 마음과 물질로 구분되는 세계가 꼭 전환되어야만 하는가? 실지로 세상이 갑자기 돌변한 것도 아닌데 세상을 보는 인식이 바뀐 것이 되었다. 왜 인식이 바뀌어야만 했던가? 그것은 주체의식의 등장 때문이었다.

주체의식이 과학정신의 기초였다. 신을 도외시한 주체 의식이 아니라 신 앞에서 더욱더 주체로 인정받은 주체의식이었다. 절대 부동의 주체는 곧 절대 부동의 진리를 태동하는 주체로 행세하게 된다. 이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객관의 세계와 주관의 세계가 탄생된다. 객관과 주관은 모두 자체에 의존한다. 마치 마음과 물체가 신에게 의존하듯이 말이다. 주체는 주관이 아니다. 주체는 주관을 규정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객관을 객관이라고 규정하는 진리의 모체이다. 이렇게 되니 주관의 세계(자아)는 보다 더 연장 적이고 확대 적인 객관의 세계 안에서 부분으로서만 내포되고 만다. 절대적인 주체가 그렇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주체가 내린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 대해서 정밀하고 규명해 보고 싶은 철학자가 있었다. 칸트였다. 그는 모든 객관적 내용물이라는 것이 주관(자아) 안에서 나름대로 조립된 것임을 밝혀주었다. 인간 안의 오성이 그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성과 직관은 외부에서 쏟아지는 감각적인 경험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내는 재주를 지녔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언어의 조합이다. 즉 객관적 사물은 언어의 조립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차가운 자연 물질을 상대하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라면 이제 '그 언어를 다루는 것이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몫이다' 는 자기 정당성을 펼치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철학의 목표는 사유 구조의 분석에 있다는 것이다. 사유를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언어 분석뿐이다 는 것이다.

이로서 지식의 영역(철학의 영역)이 과학의 영역보다 폭이 넓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라고 위로하고들 있다. 과학 활동 자체를 사유 활동으로 보고 그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감시하거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배심원 자리에 철학자들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관선 변호사도 선임하고 검사도 선임한다. 그러면 과학의 가치를 논하는 주임 판사는 누가 할 것인가? 여기서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진리가 과학의 객관성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주관성에서 나오는가의 싸움이다. 진리의 구실을 해주어야 하는 과학적 객관성이 자꾸만 새로운 오류를 나타내고 변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완전한 진리를 붙잡을 수 없는 바에는 이 오류 가능한 객관이라도 진리성에 가장 가깝다는 차별적 가치 우위 정도를 그 시점에서 부여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객관주의의 주장이다. 뭔가 중심점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애초부터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단지 과학자 자신들이 각자의 주관에 기초한 주장들을 내세우다보니 그 때 그때마다 새로운 진리들이 복수 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것이 상대주의이다.

그런데 각자의 주장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을 일단 진리가 규정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바로 주관성을 구성하는 구조를 살펴보면 거기서 객관화 될 수 있는 공통적 내용들이 파악될 것이라는 주장이 절대적 진리 관에 반발하면서 제시된다.

이것이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의 지평'이다. 지평이란 어떤 지점으로부터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시야의 범위이다. 그렇게 되면 지평은 제한적이고 유한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열려있다. 지평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가장 가까이 있는 것만 끌어 모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지평선이 넓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된다. 닫히기만 하는 지평이 아니라 언제든지 열린 지평이 된다. 그 안에는 있는 주체가 살아가는 것에 따라,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것이 시야의 지평이다.

이것이 개인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선 이해)인데 이것이 타인의 선입견과 융합하는데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의 지평이 발생되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이미 과거의 전승과 전통으로 다져진 이해의 지평을 선입견으로 지니고 있다. 과학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가다머에 있는 진리에 이르는 완결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이데거가 주창한 바에 따라 앞서 가지고 앞서 보고 앞서 잡을 뿐이다. 이처럼 과학자가 마련한 과학적 지식은 철학가의 눈을 거치면서 그 실천적 가치가 밝혀진다. 현 전통과 전승에 융합되지 않는 진리 외침은 결코 진리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사회란 이러한 이해의 지평들의 융합을 통해 진리에 대한 해석이 수립되는 공간이다.

과학이 참일 수 있는 것은 어떤 독단적인 진리 판정에 준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선 이해들 속에서 합법화하려는 실존성 때문이다. 즉 진리란 사회적 실존에서 피어난다.

김용옥이 가다머를 해석법의 스승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즉 오늘날의 진리성은 새로운 실존적 구조 성을 제시함으로서 새롭게 형성될 가능성이 있음을 가다머가 철학적으로, 해석학적으로 협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해의 지평은 과거 고전에 언어적 정밀한 작업이 밑받침되어야 그 정확성이 더해짐을 가다머가 동조해 주었다고 여긴다. 비과학적인 학문인 동양학을 하는 자신의 학문 가치가 이 과학 시대 안에서도 제 빛을 발할 수 있는 타당성을 굳건하게 확보한 셈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현대인은 결코 과거인과 소원될 수 없다. 오늘날의 과학적 진리가 사회적 실천까지 파급된 진리로 제대로 역할을 하지면 오늘날의 실존과 부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이 독점적 기술력 속에 인간은 함몰되어 기껏해야 물질의 파편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학은 인류와 더 이상 화합되지 못하는 진리로서 인간을 잘못 읽고 있는 게 된다.

이런 황폐화를 역으로 추적해 보면 데카르트가 잘못이 아니라 서양 철학 전체가 인간 자체를 잘못 읽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절대 고정점인 주체의식 안에서 아무리 스스로 반성하고 비판해도 과학의 횡포로부터 영원히 탈출 될 수 없는 구조 안에 애초부터 놓여있었던 것이다. 인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김용옥은 보고 있다. 서양적 인식론이 아니라 동양적 인식론으로 보면 애초부터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 주장에 이 21세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3. 동양학으로 서양 체제 허물기

김용옥에 의하면, 서양은 인간을 통전적으로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며는 자연과 괴리된 인간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무한자 신과 그 앞에선 유한자 인간과의 관계를 절대적 관계로 맺어놓았기에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버리면 결국 인간 중심적 사고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이다.

곧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절대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혹은 자연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서의 인간성을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 그 지혜는 동양의 고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그의 신 노자(新 老子) 사상이 펼쳐진다.

김용옥이 과학을 대항하는 방식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있는 우연을 필연의 영역보다 넓게 잡는 방식을 택한다.

"자연은 반드시 우연을 허용한다. 우연에 대비하여 모든 필연적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솎음은 인간의 인위적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순환과정에 내재한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151 ].

즉 자연 스스로가 '솎음'이라는 무위적 행위를 필연적 프로그램화해서 혼돈에서 질서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 필연적 프로그램은 기(氣)로서 나타나는 기의 양태로 볼 때에 더 이상 근대 과학적 사고인 공간이나 죽은 물질적 개념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자에게는 공간이 없고, 기(氣)만 있다. 사실 노자에게 있어서 허(虛)라는 것은 기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 실(實)이라는 기의 양태와 대비되는 상대적 개념의 기의 양태일 뿐인 것이다. 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 공간 속에 허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허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공간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측면이다."[노자와 21세기 상 p.187 ].

즉 김용옥은 공간 개념을 제거함으로서 근대 과학의 설자리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중국인의 우주는 기계적 물질이 활동하는 바탕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생명이 유행(流行)하는 경계(境界)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나는 '萬物有生論'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어떠한 것도 죽은 것이라고는 없으며 일체의 현상(나타난 모습)의 내면에는 생명이 은장(隱藏)되어 있다. ― 존재가 생명을 구유(具有)하고 있다면, 생명의 특질은 끊임없이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존재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또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93-94 ].

김용옥에 있어서 만물의 봄에 있어 인간 존재와 대비되는 상대적 죽음이라는 것을 고려치 않는다.

"중국인의 우주는 유기체적 우주이며 죽은 물질의 운동의 장이 아니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117 ].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죽은 물질의 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표현 가능한 개념인가? 어떻게 죽은 물질이 운동하는가? 여기에 김용옥은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흐름 안에서 우주를 논하자는 주장을 편다.

"생명이야말로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묶는 유대적(紐帶的) 본질이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 73 ].

이것은 곧 김용옥 자신의 사회철학으로 발전한다.

"나의 기 철학의 제 2원리는, 인간의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고 말한다[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81 ].

이 주장은 그 동안 서양철학으로부터 무시당한 동양철학의 위신을 극복하는 방편이기도 하면서 여타의 동양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우주 보(宇宙 寶)로서 본인만의 펼칠 수 있는 독보적인 철학의 전개를 개시하는 선언이기도하다.

이 선언은 기 철학 제1원리인 "인간의 모든 진리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 구현되어 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 49]라는 주장이 단지 관념에 머무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과학적 이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인간의 몸을 지탱하는 그 생명을 생명답게 유지하는 사회가 몸에 부합되는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한 몸을, 생명을 어떤 잘못된 사회적 이론과 사상으로 인해 황폐해 졌는가?

김용옥은 우선 현대 국가 자체를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제도로서의 국가 조직으로부터 지배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스리지 않는 정부일수록 좋은 정부이다"고 외친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97 ]. 왜 그런가 하면은 인간의 몸은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적 시스템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의 취산(聚散)으로 이해되는 인간은 결코 즉자적인 자기 동일성의 절대성·불변성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취·산을 계속하는 동적 평형상태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의 몸(존재)이 기의 취산의 중용태(中庸態)일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존재의 자기동일성은 오로지 나의 기와 외계의 기의 동적 관계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시중(時中)인 것이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102]. (시중이란, 비 반복적 순환을 말함).

한 마디로 말해서 늘 외부와 교섭하고 움직이는 몸을 가지고 물질의 연장으로서의 육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물질적 개념의 육체라는 표현대신에 동양 사상에서 근거한 '기'(氣)라고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존재 개념(자아개념을)의 토대를 완벽하게 거부하고 오직 기의 생성 적 흐름만을 근거로 하여 세계와 인간을 논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기가 취(聚)하는 방향으로서의 움직임을 우리는 자율이라고 부르며 그 기가 산(散)하는 방향으로서의 움직임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율은 동양의 전통적 사상체계에 있어서는 몸의 혼(魂)과 관계되는 것이며 자유는 몸의 백(魄)과도 관계되는 것이다. 산의 궁극은 죽음이다. 따라서 자유는 원래 죽음의 가치에 속하는 것이다. 산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하며 취는 엔트로피 감소를 의미한다. 자유는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이며 자율은 엔트로피의 감소 현상이다. 그것은 우리 몸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p.103-104) ] (혼은 하늘로가고 백은 땅으로 간다. 이로서 자연이 곧 몸이며 몸이 곧 자연이다. 이것이 기의 흐름이다. : 저자 주).

"동양 철학에 있어 다스림이란 자기가 곧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 몸을 닦는 것이다. 도(道)로서 자기 몸을 닦는데 인간의 몸은 도안에서 하늘에까지 연속되어 있다. 따라서 거대한 시공의 연속체로서 자기를 제대로 파악하여 성실한 자연과 더불어 성실한 관계망을 확립하는 것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p. 318-321].

김용옥은 사회 속의 개체의 입지를 몸의 구조에다 유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포 하나가 우리 몸이라는 세포의 사회로부터 이탈될 때, 즉 자유로와 질 때 그것은 죽는다. 세포에 있어서 자유는 죽음이다. ― 개개의 세포는 나의 몸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장의 통제 속에 있지만 그 자체로서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유를 지니고 있다. 나의 개개의 세포는 나라는 몸을 일탈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몸의 장(場) 속에서는 어떠한 필연적 법칙에 의해서만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개개의 세포는 전체의 가능성을 다 구비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 108 ].

즉 서양 사상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개념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자유란, 권력 구조 안에 놓여 있는 절대적 자아 개념이 확립의 있을 때만 성립하는데 이러한 서양의 자아 개념조차 옳지 않기 때문이란다.

"'아'(我)하는 관념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형상화된 시간을 고집하고 과거와 미래를 절단해 놓고 본 자기(自己)에서 생기는 것이다. '我'를 뚜렷하게 내세우는 것은 시간을 무시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자기의 현유(現有), 즉 아(我)는 사실상 그 잠시나마 존재마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p. 279-280].

이로 인하여 서양 사상적 인간관은 끊임없이 권력과 폭력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 무엇으로부터 벗어 날려고 애쓸수록 개인(Individual)이 되어 개인 되어 갈수록 그 개인은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복속 되어야 될 질서와 전체를 갈구한다. 이러한 개인과 전체의 아이러니칼한 순환의 굴레는 사실 인식론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인간의 설정, 그 자체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서구라파 근대적 인간이 추구해온 모든 전제가 허위의식에서 발생한 거짓 명제들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인식론적으로 그릇 설정된 허위질문인 것이다″[삼국통일과 한국통일 상 p.50 ].

"인간의 한계를 당초부터 설정하였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인간을 불완전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각을 강요당해야만 하는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적 인간상은 과정 적 존재일 뿐이요, 목적 적이고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다. 항상 절대자에게 귀속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비굴한 존재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 280 ].

그렇다면 김용옥이 말하는 기의 세계, 도의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나는 이미 중국의 자연의 관념이 사람의 생명의 내적 흐름을 투과하여 형성된 것임을 말하였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81 ].

"중국인은 동양적 세계관을 일찍 탈피해 버렸기 때문에 존재의 궁극근원을 따지지 않고 존재는 '이미 있는 것', '이미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여 '존재'가 현상계에서 생성 변화하는 무궁한 참여의 연기(緣起)만을 탐구할 뿐이다" [노자철학 이것이다. p.86 ].

이러한 도의 정신에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 사회라고 보고 있다.

"인간은 결코 제도를 위하여 살지는 않는다. 인간은, 희랍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근사한 이름을 붙여놓았든지 간에 난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이상을 위해서 사는 것 같지만(플라톤의 거짓말처럼), 사실 인간은 싸놓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어디까지나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인간의 이상은 전체적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지극히 미소한 먼지터럭과 같은 것이며, 그 이상을 빌미로 성립한 제도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제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말은 곧 인간이라는 몸(기)덩어리가 대부분 '본능'의 체계라는 것인데, 이 본능이라는 것 자체가 프로이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고도의 문명의 단계에서 성립한 반복의 체제라고 나는 보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이제론적(理制論的)으로 말한다면 그저 살집이 한 칸 있고 갈아먹을 땅이 있으면 그리고 인(人)의 간(間)에서 발생한 어떤 제도로부터 생명의지에 반하는 최소한의 압제가 없으면(그러니까 징병, 세금, 형벌등) 그냥 사는 것이다. 행복이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삶이 사실 인류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나는 생각한다"[노자철학 이것이다p.325-326 ].

김용옥이 말하는 이제론이란 작위적인 군현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그냥 '마을'로서의 제도를 등장시켜 어떻게 국가가 성립되었는가를 밝히는 이론이다.

"한 마을(理)이란 300보거리의 지형에 모여있는 25가 정도의 취락으로서 사당이 있고 전야(田野)의 농경지를 긴 씨족공동체이다" (이 개념이 반드시 시골 농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박한 대지(땅) 친화적 제도를 타율적이고 유위적인 제도가 등장하면서 혈연성과 지연성이 파괴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중앙집권적 왕정 제도이다. 부국 강병책의 수단으로 군대를 조성하고 거기에 관직이 생겼다. 이러한 유위적 작태로 인해 인간의 노동력은 제한되고 토지와 인구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따라서 무위가 주는 보복을 겸허하게 받아서 무위를 무위로 허(虛)하도록 남기는 그런 유위로서 디자인된 문명 사회가 몸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김용옥은 생각하고 있다.

"서양 문명의 최대의 주제는 진리(Truth)였다. ― 그런데 동양문명의 최대의 주제는 삶(Life)이었다. ― 그래서 그들의 중심과제는 현상과 본체의 문제가 아니라 유위와 무위의 문제였다. ―인간이 잘 산다고 하는 문제는 반드시 진리라는 주제와 일치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하는 문제는 현상과 본체의 일치라는 문제와는 별개의 주제였던 것이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p147).

결국 김용옥은 삶의 효율성 곧 몸의 효율성만을 극한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사회의 이상은 인민의 삶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나 통제가 최소화되며 인간의 삶의 다양성이 최대한 보장되는 사회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의 최소화와 다양성의 최대화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자율성에 의한 질서를 바탕으로해서 가능한 것이며 그 자율성의 함양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p.110 ].

이 교육의 방식에 있어 현대의 인식 속에서 현대를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갖다주는 시대착오적 우연성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고전의 시대는 통전적 형이상학 체제의 시대였다. 즉 우주론, 생물학, 윤리학, 심리학, 물리학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설명하던 시대였다. 개인의 자율을 보장하기 위한 합리성보다는 보편적 권위성 정립에 비중이 두었던 이론들이었다. 그런데 김용옥은 이와 같은 준 종교적 학문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들 속에 이미, 언제나 함축되어 있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민주적 사고와 조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사회이론의 재구성은 그 어떤 경로든 현 사회적 인식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용옥은 자유성을 버리고 자율성으로 돌아설 것을 강변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대중들의 문제점은 자율성의 부재에 관한 것도 아니오, 자율성의 원천에 관한 문제도 아니라 자신이 지닌 자율의 지향성이 이미 혼돈 안에서 혼란스러워졌다는데 있다.

즉 자연의 자율성은 그 어떤 방편으로도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같은 인간들만 상대하면서 자율성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율적이지 못한 채 자율성 사용만 남발되고 있다는데 있다. 김용옥의 주장대로라면 자연도 나름대로의 언어를 인간을 향해 내 뱉 아야 한다.

예를 들면, 나무와 대화한다든지 새들과 인간과 우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회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김용옥이 주장하는 氣이론이 비로소 정당화되는 상황이다. (김용옥이 참으로 그의 이론을 극한까지 몰고 갈 생각이 있다면 불교의 윤회설을 받아드려야 하고 그 윤회의 흔적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몰두해야 한다. 즉 개개의 짐승들이 과거의 개개인의 인간이었고 또 식물이었고 박테리아이었던 점을 증명시켜야 한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구선 승려의 [관]이라는 저서와 {봉성기획 출판사}, [우주심과 정신물리학]이라는 이차크 벤토프의 저서 {정신세계} 속에 잘 나와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류의 사람과 자기를 차별화하기를 원한다.

"기철학은 종래의 기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현대철학의 한 시도로 봐야할 것이며, 자꾸 '기'라는 단어의 그릇된 인생 때문에 단학·무학·백학도사들을 연상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철저한 반 종교주의자이며, 반 신비주의자이며 모든 비 과학성을 거부하는 상식론자이다. 나는 축지법을 믿지 않으며 나를 불로장생을 믿지 않으며 나는 모든 마술과 미신을 믿지 않으며 나는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다"[도올세설 p.344].

그러나 자율이라는 개념에게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자율은 인간의 몸만을 유쾌하기 위해 자연 통제에 필연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에 대해서 그 어떠한 개념을 갖고 있든지 간에 자연은 자연 그 자체를 위해야 될 하등의 정당성이 제공될 수 없는 상대이다. 존재가 되었던 생성이 되었던 그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누구를 위한 생성이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자연 속에서 인간밖에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무리하게 부정하면 안 된다.

서양의 신에 대한 개념이나 동양의 도 개념이나 모두 궁극적으로 인간의 문제로 귀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서양학문에 대한 동양학의 우위를 과대하게 선전하므로 결국 동양학 자체를 왜곡시키는 무리수를 놓고 말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동양학이란 어디까지나 과학적 사고 안에서 활용도를 참작한 범위 내에서의 동양학이다.

"어느 나라 제사장이 가장 효험이 있나"라는 질문을 오늘날 던질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과거 인식이란, 과거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로부터 떠나 있는 이 현재성 강조에 의미를 두는 인식이어야 한다. '변화되었음'이라는 명제는 변화 이전의 시절을 선망하라는 것도 아니오 현재가 과거보다 더 낫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현재 이 시대가 필요한 것은 이 시대의 인식 안에서만 해결하자는 명제이다. 동양학으로 보완하자는 주장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그 동양학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동양학은 오늘날의 인식의 틀인 과학시대를 보좌할 수 있는 제한적 아이디어만을 제공하는데 머무는 서양 학문의 일종으로서 '과학적 동양학'에 불과하다.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를 치는 것은 현재의 이론뿐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자는 옛 위인들이 아니다.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를 다져진 대중들이다. 그래서 김용옥의 기 철학과 노자 철학의 타당성은 이 이론이 얼마나 과학적인가에 준할 뿐이다.

4. 김용옥의 기독교에 대한 견해

"내가 지금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행복한 사실은 내 마음속에 아무런 우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우상도 없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35 ]라고 김용옥은 절규에 가까운 고백을 털어놓는다.

김용옥은 왜 그리 하나님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나타내는가?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기와 몸과 생명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다고 여기기를 왜 그리도 싫어하는가? 왜 하나님이라는 의식이 자신의 기 철학만큼은 절대로 삽입될 수 없는 속성이라고 여기는가?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가 지닌 개념은 너무 완벽하게 절대적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다.

김용옥은 자신의 몸이 우주의 중심이요 기 철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절대 진리를 향한 모든 가능 태에서 자신이 제외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김용옥 자신은 늘 불확실한 과정 속에 헤매고 있는데 반해 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그 과정의 최종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건방져 보이는 것이다. 만약 김용옥 본인의 기가 느끼지 못할 세계라면 기 철학 자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김용옥은 자신의 기 철학의 인식론을 '느낌의 인식론으로 명명했다' [도올세설 p.351] ).

상황이 이러하니 김용옥은 그 어떤 경우라도 이 기 철학을 취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 대신 와르르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은 김용옥의 확신을 배제시킨 그 하나님이라는 관념뿐이다. 김용옥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말할 때 그는 괘씸해한다.

"내가 우리 나라의 의식 있다고 하는 행동 인들을 만날 때마다 구역질나게 느끼는 것은 '선지자적 오만 성'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p. 100 ].

김용옥 입장에서 볼 때 만약 신이 있다면 김용옥 본인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서 문안드려야 하나님다운 행동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은 신을 알기 위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이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을 경주한 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온갖 종교와 학문과 역사를 다 섭렵해도 그래도 신이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보니까 신은 사마니즘적 충동의 산물이다고 단정했다.

"내가 죽어서 천당을 간다고 하는 생각은 나의 이상이 분명 나의 삶밖에 있는 경우인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확인될 수 없는 이상이다. ― 동양인들은 역사의 목표를 '천당'처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건강' 같은 것이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p. 73 ]라고 김용옥은 이야기한다.

동양인들 중에 천당을 믿는 사람들이 김용옥과 같이 자기 몸의 삶으로 확인해서 그래서 확인되었기에 비로소 믿었는가? 김용옥은 인간의 종교심을 무시하는데 있어 어설픈 억지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김용옥은 종교가 있음의 원천을 종교심에서 출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종교심이 나올 수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확인 될 수 없다'는 말은 '확인되는 것만 믿겠다'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서양식 사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주장하는 다양성과 보편성은 신에 관한 것만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배척하는 다양성과 보편성이다.

절대를 사모하고 희망하는 보편적 인간들의 몸의 느낌은 김용옥 본인의 몸 의식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말하는 보편성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할 경우에만 신을 믿는다고 했는데 [금강경 강해 pp.16-23], 왜 인간들의 몸이, 혹은 기가 절대자 유일자로서의 신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김용옥이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김용옥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눈에 보이는 몸의 생물학적 인식으로 출발하는 보편성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그 모든 보편성의 총체로서 절대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탐구하려는 것이 정신 세계에서 너무나도 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김용옥은 자신을 상식론자라고 말한다. [도올세설 p. 344 ]).

왜 이런 모든 인간들의 상식적 보편성에 억지 논리로 차단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자꾸만 절대적 진리 성을 정신없이 추구하면서 지식의 속도를 더하므로 말미암아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인문학자들을 낙후된 무식자로 전락시킨 과학 기술 세계의 횡포 앞에 공포를 느끼고, 과거의 신화 세계로 되돌아가고픈 소박한 낭만주의적 성향이 이런 시샘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절대 없이 살고 싶고 절대를 아예 추구하지도 않는 세상을 김용옥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시대 착란 적'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에 대해서 이런 신화적 견해를 가지고 기독교를 접근하다 보니 예수를 무당의 일종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라는 무당을 무당으로 쳐다 볼 때만이 그 무당을 무당 됨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절차탁마대기만성 p. 152 ].

그러나 김용옥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무어라고 말씀하시고,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고백하는지 전혀 들을려고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느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5. 신앙적 차원에서 바라본 김용옥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한시라도 달라진 적이 없다. 자신의 본질을 늘 왜곡하면서 행세하게 된다. 인간에게서의 기억이란 환상이 긁고 지나간 흔적이다. 늘 몸에서 환상은 생산되도록 욕망은 부추긴다.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늘 좌절을 맛보는 것은 환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라는 것도 어김없이 자기 몸에서부터 시작된다. 몸이 추구하는 욕망이 늘 새로운 환상을 덧붙이는 식으로 인간을 몰고 간다.

이런 식으로 덧붙여진 환상은 지난날의 철없는 환상을 반성하면서도 그 피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만큼 더 큰 보상을 안겨다준다는 내용물이다. 그러니 나중에 더 큰 아픔과 상처로 돌아올 것은 뻔한 이치이다. 지나간 서글픈 기억이 후회 서러워 막연하게 모험과 도전에 나서보는 것, 바로 이런 생활의 연속이 인생이다. 본질을 모르기에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내는 수고 속에서 자아의 고정성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몸의 본질을 말한다. 우리 몸은 죄로 인해 부정당해야 마땅하다. 환상이니 꿈이니 하는 것은 다 나의 근원을 감추는 악마의 숨소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몸은 왜 우리의 몸을 부정하는 쪽으로 움직이는지 이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거역하며 자기 환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신 몸에 극렬하게 저항한다. 이로서 인간 몸이 지닌 그 본래의 죄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인간은 자기 몸이 행한 일에 모든 일에 대해서 보상 내지는 보응의 차원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환상의 주체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두고 싶은 것이다. "선한 일을 계속 쌓아두었으니 조만간 좋은 일이 있겠지" 혹은 "죄악을 행했으니까 낭패 서러운 일이 벌어지겠지"라고 여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가져다주는 은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 중심으로 세상을 끌어가는 분도 아니오, 인간의 몸에서 발생되는 상황에 따라 세상을 조정해 나가시는 분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몸에 근거해서 나오는 은혜만을 가지고 세상을 통일해 나가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은혜에만 민감하시다. 인간의 환상을 거들 의사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은혜를 훼손하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심판이 주어지고 자신의 은혜의 깊이 잠겨 들어가는 자에게는 구원의 영광이 기다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몸 중심주의에 예민하게 관여하는 존재가 따로 있다. 곧 악마이다. 악마는 늘 인간의 선악 적 인식에 기생하면서 산다. 인간들이 걱정거리나 또는 자랑거리를 쏟아내어 놓을 때마다 거기에 보조를 같이 맞춘다.

신기하게도 그 인간들이 미리 예상한 상황들을 틀림없이 만들어내어 주는 것이다. 인간들이 장래가 염려되고 선택의 기로에 설 때에, 은연중에 보이지 않는 힘을 향하여 강한 암시로서 압력을 가한다. 그런데 이것이 곧잘 통하는 방향으로 악마가 협조해 주는 것이다. 떼를 쓰고 억지를 쓰면 안 되는 일도 때로는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더욱더 자기 행위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자기 몸에서 나오는 느낌이나 예감에 철저히 매이는 생활로 악마는 이끈다. 결국 이 원리에서 못벗어나게 한다. 현실이라는 것이 자기가 꿈꾸던대로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킨다. 환상이 곧 현실인 것처럼 간주하도록 자꾸만 미끼를 던지는 식으로 인간들을 지배하는 것이 악마이다. 이것이 인간의 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심이요 윤리심이다.

선한 일에는 하늘의 복이 따르고 나쁜 일에는 하늘의 저주가 주어진다는 원리에 맹종하는데 여기서 복과 저주의 기준이란 여기까지나 자기 몸 중심이다.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김용옥 본인이 그리스도의 몸 중심에 참여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 치명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기 몸으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김용옥 연구가 기독교 교계에서는 중 차대한 의의를 갖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몸 중심에 가장 명백한 이단 성을 김용옥이 유감없이 발설해 주고 있다는데 있다.

즉 자기 몸의 형편을 위해 구원의 하나님을 부르짖는다면 최종적으로 김용옥 종교 안에 모두 집합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보이신 그 은혜의 영광 성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좋은 일이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고 안심하는 일이요, 성도에게 나쁜 일이란 예수님의 영광을 호도하고 훼손하는 광경을 마주하는 일이다.

결코 자기의 형편과 신세로 인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속해있지도 않는 것이 성도의 신분이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김용옥은 철저히 어둡다.

오직 자기 몸의 평안함과 안돈 함이 있으면 그것이 곧 천국이요 극락이요 해탈의 상태요 도의 세계라고 여긴다. 김용옥은 평상 심 일변도이다. 이것을 유지하는 것에 그는 신명을 걸고 있다.

그는 한번도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된 적이 없는 자이다. 따라서 그가 논하는 세계는 곧 그리스도의 영광과 무관한 세계이며 어두움의 세계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작렬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김용옥 주장하는 바로 이러한 세계가 오늘날 한국 교회의 내부를 온통 장악한 정신과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가!

고생스러운 자기 몸을 회생시켜 보고자 목숨을 다 바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찾는 한국 교회의 세속적 모습은, 한국교회와 똑같은 사고 방식을 지닌 김용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악마조차 부리시는 하나님 원대한 뜻이 오늘날 이렇게 활용된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 아픈 현실의 단면이다.

Ⅲ. 결 론

인간이란 흔히들 "살아야한다!"고 하는 외침에서 인생을 느낀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외침은 항상 거짓말이이다. 왜냐하면 이미 살아있기에 그런 몸부림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본질은 '살아야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계속 움직여야겠다'는 점을 알아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향하여 움직이느냐에 따라 인간들마다 질적 차이를 보인다. 사실상 인간은 이미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구태여 "살아야겠다"는 각오는 잘못된 목표점이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마당에 문제되는 것은 그 움직임이 무엇을 위하고 무엇을 향하는 움직임이냐 하는 점이다.

바로 인간의 '창조성'에 관한 문제이다. 즉 인간은 무언가 자꾸만 창조에 나서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데 그 본질이 있다. 내 것으로 갖기 위해 창조에 나서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다.

김용옥의 본질은 김용옥은 무엇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창조 활동에 나서고 있는가를 탐색하는데 있다. 그가 갖고자 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이요 진리관이요 인생관이다. 사실은 다 같은 개념이다.

우리는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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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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