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언약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다윗언약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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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언약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이 근 호
==== 목 차 ====
I. 서 론
II. 본 론
1. 최초언약의 본실
2. 사사시대에 있어 카리스마 적 직능에 대하여
3. 사울과 다윗
4. 사울의 실각
5. 다윗의 등장
6. 다윗의 통치
III. 결 론
I. 서 론
역사란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場이다.
흥망성쇠로 이어지는 사이클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항이 들어있
다. 또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
는 하나님이 그 민족을 선택하고 또 계속 이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선택
하게 된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는 쪽으로 몰고가고 있는 역사임을 짐작으로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하여 다윗과 그리고 그 가문에 맺은 언약(소
위 다윗언약)의 생성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할 때는 어떠한 취지
에서 선택했느냐를 알아 보는데 목표를 두고 작성된다.
계시가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했을 때 역사 그 자체가 계시라는 뜻
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는 성경이라는 경전도 역사의 절대성 안에 종속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라는 것이 한낱 역사가나 고고학이나 문학 비평가에게
그 때,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단편적인 여러 문헌 중
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학식이 풍부하고 천재적인 역사
학자들의 보다 정확한 역사비평에 의거해서 경전이 재 출간되어야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또는 역사를 통해서 다윗언약의 본질을 살핀다는 이야기는 성경안
에서 표현된 역사만이 확실하다는 말도 아니요 또 그것만이 구속사를 구성해야 한
다는 말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역사 부분을 또 따로 떼어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관심 갖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측면에서 우리는 성경 이외의 자료를 역사라고 부를 수
는 있으나 하나님의 계시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가설이라고 한다
면 본 글은,
1.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한 것은 다른 민족이 아는 것과
별도로 특수한 계시의 전달목적이 있을 것이다.
2. 계시는 오직 성경이라는 경전 안에 국한된다는 두 가설에 의해 작성되어진다.
II. 본 론
1. 최초 언약의 본질
언약의 형성은 최초 언약의 생성의 틀을 이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전
부가 다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창9:11-13/ 민18:19/ 렘32:40/ 시89:34/ 사59:21)
영원한 목적을 지향하여 세우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러 형태의 양식과 모습
을 지닌다 할지라도 다 영원을 향하여 전진하는데 동반자적인 위치에 있지 배타적
인 관계는 아닐 것이다.
이런 가설로 두고 보면 영원 속에서 비로소 언약에 대한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영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신약에서 다룰 문제이다(히1:1-2). 어쨌든 구약에
있어 각 언약들은 가는 방향이 같다는 것이다. 이왕 가는 방향이 같다면 최초 언
약에서 공식적인 구조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고 세월이 가고 시간이 역사안에서 흐
를수록 그 공식적인 내용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지고 구체화될 것은 뻔한 일이
다. 하지만 주의해야 될 일은 맨 처음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대하
여 너무 많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약 때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을 마
치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것 같이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언약 상대자인
선택된 자가 감당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란 그 언약 상대자의 역사적
배경과 삶의 정황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 고생하고 몸부림 치고 자기 인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기 파멸의
궁지까지 나아가다가 결국에는 비로소 언약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그 순
간 그 인간은 언약의 실체를 만지게 되고 하나님 편에서도 그 몸부림친 그 인간
자체를 언약의 정형으로 이 역사 안에 남겨두어 후세에게 보존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 언약이란 최초로 선택된 인간이 누구며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서는 어
떤 식으로 다루어 셨는가에 관한 것이다. 언약이란 인간을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
님의 계시도 '00의 하나님'이란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
루어져 간다.(창9:26/출3:6/왕18:36) 언약은 이들에게 나타난 계시와 무관할 수 없
다. 오히려 그 내용을 역사 안에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다. 어쨌든 최초 언약은
최초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한 그것이 후대 언약의 家形
이 된다. 그렇다면 최초 인간이 아담에게 내리신 약속은 무엇을 담고 있나? 창
세기 3장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아담을 찾아와서 남기신 것은 여자를 유혹한 존
재에 대한 저주와 두번째로 여자의 후손이 결국 그 존재를 이기게 된다는 것과 남
자와 여자는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흙이라는 비형상적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실을 놓고 볼 때 남자나 여자,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곳도 기대 할 수 없
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흙이 될 때까지 기어이 책임져야 될 것이다.
단지 희망이 있다면 여자에게 약속한 후손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 낼 일 뿐이다.
아담과 하와에 관한 하나님의 이러한 평가는 그 이후의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된다(창5:1-3). 따라서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데 약속이란 반드시
심판과 저주 위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담과 하와는 그러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자신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별개의 조
치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약속이나 언약은 근거를 따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 최종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그냥 추방하는 것이 아
니라 가죽옷을 입혀서 동산에서 추방하는 것을 보아 그 여호와의 행위 자체가 어
떤 일방적이면서 지속적인 혜택과 관심을 나타내는 일인 동시에 인간이 무화과나
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행위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형식을 갖는다. 이상의 최초
의 약속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 일률적 방침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관심두는 자에게는 그 인간이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뒤집어 버
린다. 그로인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된 그 시점을
가능으로 바뀌게 한 은혜의 절정으로 전환시키는 증거와 자료로 삼는다. 그래서
은혜란 일종의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이요, 심판의 증표이다. 기존의 인간 쪽에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하나님의 극단적인 자기 표현이다. 쉽게 말해서 너
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은혜를 제공할 필요가 없지 아니한가! 하는 것
이다. 다윗언약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사사기에 나타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2. 사사시대에 있어 카리스마적 직능에 대하여
흔히 쉽게 여기기를 그들이(이스라엘) 곤란에 처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겨 카리스마적인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했다고 한
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는 전문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사
기 2:14과 2:19-23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은 모세 율법의(언약의) 완성에 있
다. 정복된 땅에 그들이 들어섰을 때는 이스라엘에게는 그 땅의 생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여호수아는 모세사역의 연속으로 모세에게 예속된 인물로 봐야한다.
여호수아11:15/ 12:6/ 22:5).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지 약속의 땅에 걸맞는
약속의 백성이 되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만이 요구되는 곳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대로 망하도록 되어 있
다.(신28/ 삿2:24:4-8). 언약의 땅에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백성들의 부르짖
음이 아니라 언약이다. 사사시대의 지파동맹체제에서도 제단은 존속되었다(삿
19:18/ 20:18).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사 출현의 원천을 설명해 준다. 즉 약속의 땅을 평정하고
언약의 백성을 고수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열국을 다 추방하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한 것이다.(삿
2:22:23). 맨 처음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이긴 전쟁이었다(삿
3:1-2,10,28).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의 전쟁의 典型은 기드온 전쟁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여호와와 바알과의 전쟁이었다(사6:28-32). 즉 현재 이스라엘이 바
알의 세력의 손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닌 것으로 바알 세력을 친다. 많은 數가 필요 없었다.(삿7:7-8). 적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지만 기드온 부대는 항아리를 깨고 횃불만 들고 고함 치면서 나팔
만 불어 대었다.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 편에 서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칼이 된
것이다(삿7:20). 이상 여호와의 이 임한 사사의 활동으로 미루어봐서 여호와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이 땅에서 유지하
는데 있었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인 사사들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언약을 위해 일
했다. 그들은 결코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율법의 순종 여부를
가지고 시비 걸 수 없다(예를 들면 삼손 같은 경우). 율법과는 별 다른 체계안에
그들은 놓여 있었다. 그 체계는 인간들로부터 지명받아 지도자가 되는 체계를 벗
어난 체계이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이 언약이 이루어지
며 다만 인간들이 이방의 학대에 못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비로소 등단된
자들이기에 그들의 등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뜻을 돌이키심)과 관련
된다.(삿2:18/ 3:9,15/ 4:3/ 6:7/ 10:10). 약속의 땅에서 율법 외에 다른 법칙이 적용
된다기 보다는 율법을 비치고 있는 보편성에 기인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게 율법을 주기 이전에 먼저 그들을 애굽에서 종되었던 그들을 건졌다는 것이 선
행한다. 율법의 정신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는데 목적이 있다(출20:2/ 신
5:5,15/ 삿6:8,13) 그 때 그들은 여호와께서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출2:23/ 3:7) 여
호와께서 여기서는 자기 백성이란 여호와를 향하여 부르짖는 백성이라는 표상을
가진다. 1)여호와는 부르짖는 자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것이다(삼상1:10-11/7:8).
이스라엘의 참전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자기를 부인하고 참여하는 것이
다.
사사들의 일은 이스라엘에 위기가 있을 때 이스라엘 자체로서는 구원에 관해 전
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대로 쉽게 성공을 거두어 버리는 일을 한
다. 그 승리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고 있는 진정한 왕이 존
재했음에 있지 않을까? 바로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은 그 배후의 왕을 위하여 봉사
하도록 선택된 자들이었다. 즉 율법 보다 선택이 앞서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도
여기에 종속되는데 무조건 선택에 관한 사랑을 이해해야 된다(출20:1-2). 이스라
엘에게는 따로 왕이 필요치 않는 것은 그 땅의 왕들을 여호와께서 홀로 통합해서
다스리는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삿4:23-24/ 8:12) 왕이 없는 이스라엘이(삿
17:6/21/25) 왕 가진 집단을 진멸한 것은 인간 왕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모
세언약에 준하지 않는 왕과 백성 사이에는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되어있다. 즉
양측이 다 책임지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출24:6-8) 따라서 사사의 등장은
언약의 위배됨을 알리는 경고조치이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는 시점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왕을 달라는 요구를 했을 때마다.(삼상8:4-9) 백성들이 왕을 구
하는 것을 마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찾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하나님은
간주하고 계시다.(삼상12:19) 그렇다면 여기에 그것을 고발하는 새로운 사사가 등
장되어야 한다.
3. 사울과 다윗
사울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는 데서 사사와 영속성을 갖는다.(삼상9:1 5-16/10:6,
12-13/11:6)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뜻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사울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은 사사와
같은 계열에 서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왕 제도 자체는 백성을 왕 개인
의 것으로 私有化하는 동시에 운명도 같이 되는 제도이므로(삼상8:9-18) 만약 왕
제도가 구성되고 난 뒤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언약의 땅의 법칙에 부합되게 살지
못할 경우에는 왕 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을 갖게 된다(신
17:14-20/심상13:13/삼상12:13-14). 여기서 사사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사사 임무
수행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백성의 운명이 이방의 왕
제도처럼 한 인간에 예속된다면 그 인간의 한계와 무능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책임져야 된다.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변변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
엘에 승리를 가져온 것을 봐서 이스라엘의 보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지 한 인간이 출중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사
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신 것은 왕이라는 제도가 이방 나라와는 달리 이스
라엘에서는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고자 함이다. 소위 기름부음 받은 자
의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가? 언약 안에서의 왕이 되기 위한 기름부음을 입는 것
이 아니라 기름부음을 위한 왕이어야 한다. 그러면 언약 안에 기름부음이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기름부음이란 성별과 관계되고(창28:18 출29:2/ 30:23,26) 부
름이란 선택과 관계된다(출28:41/ 30:23/ 레8:30).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자(또는
기름 발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일반인과는 달리 구별되도
록 선택된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보편성만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특수성을 두어 그 특수성 안에 보편성을 흡수,
집약시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단 이 특수성의 등장이 보편성
에 어떤 취약점이 있다든지 제도상 모순 된다거나 문제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
니고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이 특수성이 내포하는 본질과 관련 있는 것이
다. 이스라엘이 기름발린 자가 하는 특수하고 성별된 작업에 무관심하면 자신들
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선택도 무너진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간택할 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을 사무엘에게 내린 것은(삼상9:16.10:1) 왕이라는 제도와 직
능이 제사장과 같은(삼상2:18) 차원에 두어지는 것이며, 이는 구원이 그 동안 카
리스마를 입은 사사 본인의 자질과 무관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왕이 모세 율법의
기준으로 봐서 백성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하고 회복시켜 주어야
될 형편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의 성패가 왕이라는 인격 하나에 예속된 이 시점
에서 왕이 취할 태도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카리스마적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삼상12:13-16). 이제 왕이 하는 일은 사사시대 때 백성들이 어떤 위기와 외
부의 침입에 대해 자신들의 무기력에 절망하고 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한
다. 자기의 왕을 구한 죄악도 포함된다(삼상12:19). 이스라엘은 왕을 얻어 놓고
서야 비로소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 없음을 안다. 결국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이
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한 왕이었다(삼상12:5). 이제 사울 왕의 개인의 신앙적 위기
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위기로 여겨야 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사울왕은 개인
적 자질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법보다 백성의 동향에 더 신경
썼다. 그는 백성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카리스마적인 임무를 망각했다. 백
성을 고발하기 위해 세워진 왕이기에 왕의 바른 자세는 늘 백성들로부터 호응 받
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율법을 선택해야 한다. 사울은 이점에 실패한 것이다(삼
상13:8.14:9.15.:24). 사울과는 달리 아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신앙고백을 한다(삼상14:6). 이 왕의 기능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왕 자신도 이러한 왕적 직능에 예속되어야 한다. 왕적 직능
이란 제사나 수양의 기름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삼상
15:22-23). 이 순종이 3)바로 약속의 땅에서 구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체제이다.
4. 사울의 실각
다윗 이전에 사울 체제로 도전한 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요나단이다. 사
무엘 상 14장에서 보면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전쟁 개시를 그들이 하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카리스마적인 맹세를 그는 무시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이유는 왕이란
왕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백성의 구원을 위한 왕이라는 것이다(삼상14:29).
조금 후에 백성들이 기다리기에 지쳐 율법을 어기고 송아지를 피채 먹는 일이 발
생한다(14:3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전쟁에 성공한 후였다. 여기
서 무엇이 범죄인가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
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삼상14:38). 이 사실을 두고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 본다.
결과는 백성들은 전혀 면제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만 최종 남게 된다. 하나
님이 보시기에 만약 죄라면 그것은 사울 왕가의 책임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최
후에 남은 자는 사울이 아니라 요나단이다(42절).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고자 하나
백성들은 요나단을 통해서 승리를 하여 구원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구원자를 죽일
수 있느냐고 송사한다. 사울은 자신의 맹세에 입각하여 죄를 결정하지만 백성들
은 구원의 성취능력을 가지고 죄를 결정하려고 했다(45절). 즉 꼭 왕이 아니더라
도 구원자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 왕이 가진 카리스마의 일
부가 붕괴됨을 나타낸다. 왕의 고유 권한이 상대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
께서 꼭 사울 왕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가의 균열은 도
전 받는 왕위의 조짐이다. 이것은 후에 또 다른 왕, 다윗의 등장의 정당성에 유리
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의 갈등은 다윗 통치 이후 여러
번 나타나는 모반이 다만 왕가의 대를 잇는다는 구실이라면 그 부당함이 쉽게 밝
히는데도 도움된다. 왜냐하면 요나단 조차도 다윗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삼상20:16). 이토록 다윗 등장의 정당성은 사울 왕가인 요나단에게도 지지 받는
일이었다. 요나단에 있어 구원이란 "사람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라고 하는
신학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어린 다윗과 일치된 생각이었다(삼상14:6/17:47). 이
스라엘에게 왕이라는 직능은 하나님이 왕 없이 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그 방식의
범주를 벗어 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 언약이 겨냥한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언약의 땅의 유지책이다. 거기에 비해 사울
왕은 율법이 지닌 고발의 기능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아니했다. 이것은 직능에 위
배되는 것이다. 다윗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울의 어떤 점을 고발하
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카리스마적인 사무엘의 선택 마저
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직접 선택에 나섬으로써 인간과의 어떠한 접촉점도 허락하
지 아니한다 4)(삼상 16:6-13). 제사와 율법의 노선에서 벗어나 있다(삼상 16:2-5).
제사와 율법마저도 다윗의 자의적 행위에서 재해석 되어져야 한다. 사무엘의 등
장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다읫의 등장은 사울 왕가와 거기에
고착되어 있는 백성들의 현 사고체제에 대한 고발이다. 인간의 선택행위가 얼마
나 부실했으며, 율법해석에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가는 새로 등장한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과 활동으로 분명해진다.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달라는 요청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바로 이해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왕은 하나님
이 선택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왕이란 직능은 율법이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왕은 단순
히 백성의 대표자만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중보자적인 기능도 있다. 따라서 왕이
란 제사장직까지 흡수하게 된다. 5)왕을 세워둠으로서 자신들의 부르짖는 행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왕직 자체가 율법의 속성으로서 백성들에게 죄를
들추어 저주하는 기능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無에서 새로 시
작해야 한다. 그러나 카리스마적인 직능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과 마
찬가지로 그것도 새로운 선택 안에 흡수한다(삼상 16:13).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전개하는 것은 어린 사무엘의 의미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다윗이 보여주는 왕적 사역이 어떠
하며 여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양분된 정치상황과 태도를 검토하는 일이다. 동시
에 두 왕이 존재하면서 나타나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생성되며
발전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서서히 해체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또 다른 실체를 지닌 이스라엘 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5. 다윗의 등장
다윗이 사울에게 배척받게 된 것은 백성들로부터 직접 주목을 받을 때부터이다
(삼상18:7-9).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백성들을 향한 유일한 통치양식으
로 지속시켜나가고 싶은데 다윗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이 시점에서 다윗의 긍정적 활동으로 백성들의 눈에 자신의
버림당한 결정적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울은 자신은 자기가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윗을 자기 사위로 받아 드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다
윗의 전쟁터에서의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의 구실도 됨을 염두에 두고 다윗을 위험
한 전쟁터에 보낸다(삼상18:25-27). 그러나 그것이 사울과 다윗 사이에 분명한 경
계선이 쳐지는 계기가 되는데 원인은 한쪽은 하나님이 같이 하지만 다른 한쪽은
같이하지 아니한다는 차이 때문이며 원수관계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8:28-29). 이후부터 다윗의 편이 아닌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란 말로 등장한다.
(시편에서) 따라서 다윗의 활동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가 새로운 양상으로 정리된
다. 다윗이 쫓겨다니면서 사울 왕, 즉 기름부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태도에 대
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로서 살면서 그는 무
엇을 이스라엘에 남기며 보여 주고자 했던가? 그것은 모든 것을 無로 부터 시작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도 다윗 에게는
해당이 된다(21:1-6). 거룩과 비거룩을 다윗의 활동에서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삼상23:9/30:7). 거룩이란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삼상
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오히려 쫓겨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오히려 환영받는 왕(삼상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
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삼상30:7-20).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을(헤렘)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준다(삼상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여호수아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
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부음에만 기대를 건다(삼상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
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이
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
으로 하나님이 그를 친히 치시게 된다(삼상25:38). 뿐만 아니라 결국 사울 왕도
그 아들과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
한 진노를 경험하고(삼상28:18) 새로운 왕이 그 사실을 애도함으로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된다(삼하1:16-27).
6. 다윗의 통치
사울이 죽고 난 뒤, 다윗의 과제는 자신이 단순히 다윗지파만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 됨을 어떻게 그들에게 납득시키냐에
있다(삼하2:4,10-11). 이런 점에서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왕가에 대한 백성
들의 신뢰를 존속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울 자체보다도 그가 이
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죽었다는데서 사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왕 체제 자체를
계속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양식으로 고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해결 되어야할 문제가 남아 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삼하2:10).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무리한 시도였다. 애들
장난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삼하2:14). 다윗은 모두를 용서받고 싶었다(삼하
4:10-12). 그러나 요압은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삼하
3:27-39). 어쨌던 자연스럽게 사울의 집은 약하여지고 다윗의 집은 강해진다(삼하
3:1). 사울 집의 약화는 백성들로 하여금 나머지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삼하5:1-3). 다윗은 카리스마적인 언약자로서 백성에 대한 자기 사명을 다
하기 위하여 남은 이방인들을 치기 시작한다(삼하5:3,6,19,25). 여호와 전쟁에서의
중심은 법궤에 있다(수6:6). 그 법궤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6)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이 곳에 와야
한다(출23:17/34:23/신16:16). 여호와의 임재 장소를 일정하게 규정했다 할지라도
법궤의 이동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가나안 땅의 성소에 여호와가 임재하신다
는 것을 믿는 것은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에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여호
와께서 토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라고 약속했다. 나중에 이 토단에 성막이 들어서
고 법궤가 안치된다. 그럼으로 해서 그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부서져버린 돌판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새롭게
제공된 돌판이므로 말씀대로 하자면 당연히 멸망당해야 될 이스라엘 민족을 '노하
기에 더디하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출33:19/34:6) 현재 동행하
고 있다는 물증으로서의 법궤(시은좌 또는 속죄소)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
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땅을 전부 점령했을떄, 바로 그 자리가 여호
와의 승리를 영원히 빛날 장소이다(민10:35). 다윗은 신명기에 나오는 '여호와 이
름을 두시려고 선택된 장소'를 카리스마적인 사명이 완수된 최종적 장소로 이해했
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비로소 안식이 실제적으로 보장된 것을 천명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신12:5,10-11,14,18,26,14:23-15:20/16:2,6-7,11). 그 택하신 장소
까지 승리를 이끌어 가는 그 당사자가 바로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는 자라는 견해를 다윗은 가지고 있다(신16:16/17:1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정한 것은 여부스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추방되어야
할 최종의 족속인데 그것마저 정복했다는 뜻이 있다(창15:21/수3:10/삼하5:7). 드
디어 전쟁이 그치고 평정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법궤로 구현된 하나님의 理想도
이제는 이스라엘 앞에 보여질 때가 된 것이다. 법궤가 일정한 장소에 영구히 안
치될 때 이스라엘의 영원성도 함께 보장받는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거처한 곳
으로 가져온다(삼하6:10). 여기서 사울家에 속한 왕비 미갈은 왕의 체통을 지킬것
을 요구했지만 다윗은 왕의 임무가 바로 법궤의 유지 보존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 자체가 고발 가운데서의(왕제도) 긍휼이기 때문이다(법궤). 심판과 긍휼이 왕
제도에서 만난다. 미갈의 不姓은 이러한 다윗언약에 이탈되는 생각이므로 다윗왕
가의 후손을 낳는 왕후의 자격에서 벗어남을 나타내는 말이다 7)그러나 다윗의 생
각도 다윗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미흡하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
겠다고 하신다(삼하7:5-17).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궁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
윗 가문 자체를 언급한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진정한 가문에 속할 수 있는가 하
는 것은 단순히 혈통 서열로 결정되지 않음에 다윗 언약의 신비가 있다. 그 신비
는 누가 진정 다윗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언급하셨듯이 다윗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지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삼하7:14'나
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대
외적으로 어떤 눈부신 실적을 남겼느냐(삼하8장), 혹은 대내적으로 얼마나 정치제
도를 안정되게 정비했느냐 보다는(삼하9장) 사무엘 저자가 많은 분량을 다윗의 사
생활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다윗언약이 가진 실체는 세속적인 政街에서만이 밝
혀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내어 후대함으로 자기의 관
대함을 정가에 비치고 주위의 이방나라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선포함으로 내외
적으로 말썽의 소지를 없앤 다윗은 다윗언약의 대상인 왕의 실체를 힘에 의한 통
치라는 차원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즉 힘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왕이 되고 또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길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열왕기 저자는 다윗이 사방에 전쟁을 벌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했고 역대기 저자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상5:3/대상22:8/28:3).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코 다윗언약에 들어 있는 왕의 표상
과 상관없음이 다윗 자신의 전쟁 중에 한 행위로 드러난다(삼하11:1). 이미 남편
있는 여인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과 관계를 가짐으로 율법과 마찰되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이 여기에서 무마되면 좋았을 터인데 임신했다는 소
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임신케 한 장본인을 휴가 나온 남편으로 돌리기 위해 일을
꾸몄지만 거룩한 여호와전쟁 수행에만 관심 있는 우리아에게는 다윗의 술책에 말
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삼하11:11). 이러한 우리아의 일관성 있는 태도는 다윗의
다음 범죄를 유발 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하나님은 우리아 부부를 통해 다윗
이라는 인간의 범죄성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
단이 다윗을 지적할 때 간음이나 살인의 차원에서 고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
목해야 한다(삼하12:1-6). 나단의 지적은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두 신분계층을 예
를 들면서 신분적인 특권이 이스라엘에서 허용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특권이
란 개인이 지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각기 서로 다른 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인 법을 제쳐두고 특정인이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이스라엘 왕이 다윗에게 나단은
묻고 있다. 여기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명쾌하다. 소위 이스라엘의 왕의 입장에
서 볼 때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런 자의 존재는 용납되지 아니한다(삼하
12:5). 율법의 적용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
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출24:5-8). 쌍방이 책임지는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구원
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
라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는 자는 그 누구든 그 모세언약의 저촉을 받아 죽
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나단은 이야기해 준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
고. 여기서 나단은 왕의 임무에 대하여 중요한 사항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왕이 백성들 보기에 솔선수범해야 된다든지 모범적으로 먼저 율법을 지켜
야 되지 않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왜 나 같이 부족한 자를 왕
을 세웠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중의 뜻과 관련되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지적 받고 난 뒤에 한 기도가 적혀 있다. 여기서 보면 내가 주께만 범
죄했다는 것과 성신에 관한 언급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심령을 원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 성이 어떻게 변모되어야 하는
희망사항까지 거론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에 행하시고 그때야 주께
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율법 이전에 먼저 주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
다는 점을 다윗은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도를 하게 된 다윗의 신학적 기반
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죄악을 범죄한 자는 반드시 여호와께 벌을 받는다는
강렬한 율법수호 정신을 자기자신에게 적용시킬 때 어떤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
는가 하면 자기가 그 범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소유했다는 것이 증명될 때만
가능하다. 다윗은 자기가 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표적으로 여겼던 그 죄 자
체를 어디서 발견했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바로 이 소리를 했을 때 다윗은 비로소 자신
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이 파악된 것이다. 그러면 나단이 자기
를 찾아오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수많은 범죄를 행사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으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위치에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수많은 인자와 긍휼로 인한 결과라
고 이해한다. 결국 왕이란 다윗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리임
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이다. 다만 자리가 타인보다 왕의 위치에 있
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여(시편51:4)오직 긍휼로 다스
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道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시51:13). 진정한 제사
와 번제는 통회하고 傷한 심정이다(시51:17/40:6). 다윗언약에 의한 진정한 후계
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윗의 통회하는 심정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는 출생의 경
험을 지닌자에 한한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 해당되는데 그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의 범죄로 잃어버린 자, 그 바탕 위에 다시 태
어난 자에 한해서 비로소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이다(삼하
12:15-25). 다윗은 말없이 죽어버린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삼하12:23) 여기서 다윗의 하나님의 용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용서행위를 '주께서 꺾으신 뼈에 참여시켜 그것으로 기뻐하게
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다(시51:8). 다윗도 아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간주하여
참여를 선언함으로 자기 말고 자기의 죽음, 그 현장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그 다음
의 행위에 기대를 건다. 그것이 여디디아 즉 하나님의 사랑행위이다. 다윗언약은
다윗의 혈통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다윗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여기는 자 말
이다. 따라서 이 이후에 나타나는 다윗왕가의 내분은 혈통적 다윗왕가가 얼마나
다윗언약하고는 상관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實例가 될 것이다. 사무엘하 13장에
넘어가면 다윗왕가에서 일어난 私的인 일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무엘하
12:10-12에 나오는 다윗家의 재난의 예고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원인은 결코 힘의 불균형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다윗왕가의 부도덕성과 비윤
리성과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자질과 연관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다윗언약과 상관없는 세력들의 준동을 방치할 수밖에 없
는 다윗 및 다윗왕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다윗언약이 수립된 후에
도 그 기반에는 모세율법이 지향한 정신을 변동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
한다. 잦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상황도 원래의 노선을 빨
리 찾아가지 아니한데 책임이 있다. 그 원래의 노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다윗
의 현 시점에서 다윗의 부도덕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는 가운데서 누
가 실패자이며 그 실패자 때문에 누가 또 헷사람 우리아같은 희생을 치르게 되느
냐로 밝혀진다. 즉 의인의 죽음을 값으로 하여 언약의 根底를 이루고 있는 사상
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복오빠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범죄는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
장에 있는 왕자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후에 갖게 한다(삼하13:21-22). 그러나 이는 다윗 왕의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다윗언약은 보복으로 유지되어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
에 대한 후속조치는 있어야 했다. 公義性을 생명으로 하는 왕으로서 피해 당사자
로 하여금 복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방치되어서는 안되는 것
이다. 왕의 미지근한 범죄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 측으로부터 가해자를 싸고돈다
는 의혹을 낳게 만든다. 그렇게 될 경우에 복수하는 측에서는 결국 가해자뿐 아
니라 그 가해자를 보호했다고 여기는 배후까지 공격해 버리는 실수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왕가의 혼란은 이래서 야기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에서
왕의 정책에 혼선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으니 요압이다. 요압의 눈에 다윗왕의 결
정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윗왕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겁탈 사건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던 왕은 이
번에 또 압살롬이 양털깎는 축제기간에 왕자들을 몰살했다는 급서를 듣고도 압살
롬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 곁을 떠
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하여 슬퍼할 뿐이다(삼하13:37-39). 당황한 쪽은 다윗의
명확한 정책기준을 몰랐던 요압이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시
험해 보고자하는 유혹을 받는다. 요압의 이와같은 태도는 모호하기만 한 다윗의
의중에서 도대체 누구를 진정 차기 왕으로 등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기 위해서다. 무의식적으로 압살롬을 미리 천거해 보는 것이다(삼하14:1). 거
기에 따른 다윗의 반응이 궁금했다. 演技에 능한 여인 하나를 내세워 여인 자기
집안 일인양 사건 하나를 의뢰케 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그나마 남은 아들도 살인자로 해서 또 죽여야 하는가 라고 문제
를 제기한다. 그러나 요압의 이러한 비유는 전혀 압살롬과 다윗과의 사이에는 적
합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
어 있고 그 선택은 왕이 알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다
윗이 알고 있는 간택문제는 율법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율법에 의한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그것이 구현이라고
본 것 같다.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었고 사랑의 차원
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말한 것이 있어 아들 압살롬을 다시 3년만에 예루살렘으
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얼
굴 마주 대하기를 거절한다(삼하14:24). 왕의 이러한 태도는 요압으로 하여금 다
시 압살롬을 거론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아 그와의 관계에 부담을 갖
는다(삼하28-33). 이러한 추세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존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거사에 대비케 한다(삼하15:1). 향후 4년간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 왕
의 색다른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나가는 일이었다. 감히 다윗 왕이 생각지도
못한 재판관 제도를 자기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 왕과 대중 사이의 대화와 삶의 유
일한 창구를 틀어막아 버렸다(삼하15:2-6). 그리고 제사순례라는(예루살렘에서 헤
브론,다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 합법적인 이유로 절차에 의해
왕으로부터 허락을 득한 후에 헤브론으로 빠져버린다. 이는 압살롬 자기가 헤브
론에 거처하는 것이 왕의 합법적인 승인에 의한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 다음 시
행될 일도 어떤 합법성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백성들에게 유도해 내
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초청받은 유지들이 별 의심없이 압살롬과 행동을 같이 하
는 것이다(삼하15:7-11). 다윗성을 떠나 피난 길에 나선 다윗왕은 후궁 10명을 궁
전에 남겨둠으로서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압살롬의 반란을 일시적
인 일로 여기고 법궤까지 이동 시키려는 레위인들에게 제자리에 놓기를 당부한다
(삼하15:24-29).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과 그 일행은 울음으로 비참한 현실을 맞이
하고 있다(삼하15:30) 도대체 누가 이 참담한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몰고 가고 있
는가? 그 때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한다. 아히도벨이 적군 쪽에 붙어 있다고 그
때 다윗은 그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산시키는 것 자체가 사태를 원상복귀하는 유일
한 방법으로 보고 그렇게 여호와께 기도한다(삼하15:31). 마침 후새가 자기 앞에
나타난다. 다윗은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어 압살롬을 영접하게 한다. 그
래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즉 자기와 같이 따라온 신하와 先王을 배반하
고 자기를 왕으로 환영하는 신하의 忠誠度 사이에서 번민케 하여 정책결정을 주저
하고 있을 때 다윗 일행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삼하17:22).
다윗왕에 대한 변란은 평소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호적인 자들이 누군인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 집안에 속
한 자들 중에서도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 주면서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한다. 왕은 그
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다윗의 행렬을
보고 따라 오면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심지어 돌과 티끌을 뿌린다. 그의 이러
한 행위는 다윗 자신이 사울 지파를 피흘리게 한 그 범죄의 대가가 이제야 스스로
아들을 통해 완벽하게 보응 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윗
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그의 모든 저주가 오
히려 善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다(삼하16:12). 다윗의 이러한 생각은 신하인 아
비새와도 다른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굴욕 속에서 다윗언약
으로 이스라엘을 정비해 보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이 굴
욕 속에 있는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언약대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후새와 아히도벨의 정책 대결에서 후새가 승리하고 있었다.
승리의 비결은 간단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한 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후궁을 차지하도록 권하는데 이는 후궁은 왕에게 봉사하기 위한 왕의
전용물과 같은 의미가 있어 압살롬은 그의 實勢를 과시한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
으로 하여금 즉각 지쳐있는 다윗의 세력에 덤벼들어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그들의 군대를 우리편으로 삼을 수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
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대해 후새는 다윗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한 후에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적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만의 하나 전투 초
반에 우리 편이 밀리는 경우 군 전체 사기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느
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
를 모집하여 다윗군대를 공격하면 마치 이슬이 땅을 덮듯이 어느 누구하나 살아남
을 수 없는 완전승리가 보장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후새의 의견은 아히도벨의
의견보다 더 극적이고 환상적이라 참모들에게 감명을 끼친다. 이러한 압살롬편의
현실을 무시한 허망한 꿈은 후새의 계략에 의해 더욱더 자만에 부풀어 있다. 다
수의 지지가 후새에게 쏠리자(삼하17:14) 아히도벨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윗군대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이 친히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압살롬 군대를 공격한다. 공격 이전에 다윗은 장군들에게 나를 봐서라도 압살롬
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할 것을 부탁한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압살롬 군
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압살롬 자신도 짐승을 타고 숲 속으로 도주 피신하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모의 장점인 긴 머리카락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생포되고
만다. 이 사실이 요압에게 알려지자 고의적으로 왕의 명령을 위반하고 사정없이
찔러버린다. 그리고 난뒤 요압은 그 다음 행동을 염려한다. 압살롬의 전사 소식
을 보류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구스인을 하나 보내어 일단 다윗왕
의 태도를 엿보기로 한다. 예상대로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병사들을 격려하기보
다는 자기아들 압살롬의 죽음, 즉 다윗언약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의 성실
에 따른 것이었다(삼하7:14/18:33). 다윗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지었다고 처단
하는 그런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표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다윗 왕 정책의 理想이었다. 그러나 다
윗의 자기 가문에 대한 집착은 일부 신하와 前 王의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
게 지파 對 지파 감정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 속에서
자기 판단에 의해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不在中에 벌어졌다는
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의 意思와 反하는 승리는 다윗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이방적이다. 다
윗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多數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가장 못한 자를 통하여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이 여호와 전쟁 방식
이다(삿8:2). 다윗은 군대장관을 새로 요압에서 귀순한 아마사에게 맡기기를 원했
다(삼하19:13). 그러나 그 사람도 다윗의 부재중에 요압에게 살해되고 만다(삼하
20:10-13). 여기서 요압과 다윗이 전쟁을 보는 견해에 차이가 나는데 요압의 경우
승리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전쟁 수행 중 다윗의 분노를 가지게 한 행
위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삼하3:27-28/18:14-15/19:13/20:10). 요압은 다윗으로부터
우리아를 제거하는데 가담한 자였다(삼하11:16-17). 요압이 생각하는 왕정체제란
왕의 절대적 권한 하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오직 정면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복당한 자와 정복자에서 결정된다고 여긴다. 왕이란 항상 이겨야 그 자
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삼하12:26-28). 요압의 이러한 견해는 귀순해 온
자에 대한 다윗의 파격적인 우대에 대하여 회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조
금 전까지의 원수를 전우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배신하면 어떻게 한단 말
인가? 그러나 다윗은 이방인들과 전쟁과는 달리 국내 분쟁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달리 이해했는데 그것은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공작 이 후 시온성에 대
한 견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온성은 어떤 분쟁에 휩싸인다 할지라도 그 은혜
성을 인정하는 자의 차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시51:18). 밧세바에 대한 다윗
자신의 범죄는 바로 다윗언약이 내포하고 있는 그 恩惠性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으
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햇 사람 우리아였다
9)(삼하11:11/신명기 23:10). 우리아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
법관과 달랐다(삼하11:4/12:6).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지 결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신은 비록 왕의 위치에
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충실한 종을 자신이 살해한 셈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모아진다(시51: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이스라
엘에서 범죄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율법이란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51:8'주의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34:20).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
는 것은 바로 우리아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로 하는 왕 즉 죄인에 의
해 죽었기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마태복음1:6) 10). 이로서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
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 보고 싶었다 11)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
은 전쟁의 연속, 피흘림과 칼부림으로 인해 얻어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질서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판이 있다면 이러한 다윗의 언약적 통치를 이해
못하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배반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은혜성에 어두운 것이 언약과 무관한 자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압
은 가장 비이스라엘적인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제거 되었느냐를 통해서도 언약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삼하22:25-26/왕상2:32-34). 압살롬의 난 평정 이후 왕이
라는 제도가 다윗지파에게만 꼭 한정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불만을 갖는 무리가 등
장한다(삼하19:41/20:1-2). 이와 같은 불만이 마치 왕이 자기들의 기업을 다 차지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삼하20:19). 왕과 기업,
이 두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되어야 된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고유
한 것이라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12) 또한 그러나 왕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것도 용서되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시바의 반란은 이로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왕의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위치는 다윗의 인구조사에서 밝혀지듯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고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종으로서 그들이 범죄
했을 때(삼하24:1)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역할이 중심이다(삼하24:25).
그 후 다윗은 누구하고도 동참하기를 거부한다(삼상20:3/왕상1:4). 이미 후계자는
이스라엘 내부의 그 누구와도 결탁 되지 않는 인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 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씩 그의 면전에
서 사라진다.
III. 결 론
인간이 왕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왕 되심이 희석되거나 포기되고 말까? 그
럴 수는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 임재가 취소되지 아니한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죄악을 사사시대의 카리스
마적 직능과 결부시켜 그들을 긍휼과 자비의 통로로 전환시키셨다. 하지만 그 죄
악이 긍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 즉 의인 우
리아를 제물로 내놓음으로 가능한 일이다(시51:8). 다윗언약이란, 이름은 다윗이지
만 실제로 우리아같은 신앙의 차원에서 맥을 이어간다. 하나님 자신의 것의 '버
림'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언약을 조금도 이해 못할 사람이다. 구원이란 종교적인
용어 나열과 그것을 외운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이 안고 있는 내용과
의미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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