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라는 글을 읽고
[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라는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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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라는 글을 읽고
1999년 7월 14일 이근호
1. 서론
신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이 진정 지혜의 근원이며 진리임을 과연 믿는다면 예수님이 인간들의 그 어떤 면에 대해서 비진리이며 엉터리인 가를 고발하고 지적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떤 학자가 주장한 성경해석법이 과연 바른 해석법이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경 해석법 앞에서만 검토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김 교수의 주장 속에 예수님의 해석법이 어떠했는지를 성경에서 전혀 찾지 않고 또 찾을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단지 "저는 신약 전공 학자가 아닙니다"라는 변명만으로 그냥 지나쳐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이다.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다.
김교수는 지금 싸우고 있다. 예수님의 해석법을 사수하기 싸우면 그 모습이 하늘 나라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그는 문예적 해석법과 싸우고 있으며 자신의 전문가 됨됨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과연 그의 투쟁이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성경에서의 사도의 투쟁과 같은 맥락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문예적 해석법의 내막을 뜯어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이 만약 예수님이 제시한 성경 해석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2. 본론
김교수는 애써 '문학'이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문예'라고 말한다. 문학이란 과학적인 언어적 기법의 범주 안에 있지만 문예라고 할 때는 예술적 범주 안에 놓여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술은 보다 자유로운 창의성이 허용이 되는 활동을 연상하게 된다. 즉 김 교수는 세속적인 비평학으로부터 성경 해석학을 신앙성 있게 구원하고자 하는 참신한 아이디어로서 성경을 '예술성'으로 접근해 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통해 무엇이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진짜 의미가 나오게 될까 아니면 자신의 선입견이나 되비쳐서 나올 뿐일까? 아무리 복잡한 과정, 즉 '원어분석→문법적 분석→문예적 분석→ 정경적 분석→ 신학적 정리 작업'을 해도 처음부터 해석자가 이미 가지고 접근하던 그 인식이 용납하는 내에서는 결론이 도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성경 본문에 담겨 있는 의미란 성경에서 찾는 것은 기껏 변명꺼리나 합리화 과정밖에 안되고 사실은 다른 곳에서 투입된 것이다. 예를 들면, 김교수는 그의 글 끝부분에서 소위 말하는 달란트 비유를 들고 나왔는데 그의 비유 해석에 의하면 소위 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인간들의(제자들의) 게으른 행위를 꾸짖는 것에 초점을 맞춘 의미를 내놓고 있다. 과연 성경 안에서 달란트 비유가 김교수가 말하는 위의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달란트라는 것이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성적 재능(김교수의 경우라면 김교수의 전공 지식인 문예적 해석에 관한 재질)을 의미할까? 그래 기껏 정경적 해석까지 통째로 마스터한 결론이 기껏 달란트 비유를 이것밖에 이해 못하는가? 새로운 사냥법으로 늙은 개들을 조롱하면서도 기껏 내놓은 성경 해석이라는 것은 늙은 개가 아니라 어린 개라도 너무나도 쉽게 세속적으로 짐작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되는가?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취지는, 종말 현상의 선취성(先取性)을 말하는 것으로, 주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의 행위로서 주의 행위를 이해하려 하는 모든 자들의 대한 종말적 심판을 공포하는 비유이다. 따라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하자!"라고 외치는 자들에게는 비유는 철저히 감추어진 해석 불가능 상태에 놓이게 된다. 바로 비유의 존재 이유는, 나름대로의 인간들의 문학(문예) 해석의 한계와 딜레마를 노출시키는 계기로서 작용하자는 데 주님의 뜻이 담겨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책망 받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현명한 사람이다. 마치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들이 오히려 지혜롭게 행동하게 되고, 반대로 아직 신랑이 오지도 않는데 기름부터 준비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는 식과 같은 식이다. 즉 종말에는 인간 행위론을 근거해서 보면 모든 가치관이 상호 도치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어리석게 행동케 하는데 주님은 오히려 역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사람이 자기 것이라면 주인 여부와 상관없이 열심히 일 할 수 있지만 주인이 타국에 가서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처럼 간주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주인의 부재성을 존재성으로 잘못 인식하는 비정상적인 태도이다. 이처럼 종말에는 모든 것이 비합리적으로 주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비유에 담긴 취지이고 이 취지를 발생시키는 기초 사상은, 인간의 성실함과 양심 고움과 노력과 신앙에 있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심' 이것뿐이다. 그래서 소위 달란트 비유(사실은 '게으른 종'의 비유이다.)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 혹은 '주님의 심판하심' 혹은 '종말 때의 현상'이지 결코 '게으르지 말고 우리들만이라도 열심히 주를 위하여 일하자'가 아니다. 그렇게 설교하면 안된다. 왜냐? 그런 내용은 복음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주의 일 한 사람이 이 세상은 단 한사람도 없다. 김교수의 성경 해석을 보면 그 결론이 매사가 이런 식이다.('언어의 직공이 되자' 라는 책에 나오는 해석 실례를 보면) 복음의 능력 중의 하나는 성경을 가지고 아무리 철저하게 문학적 분해 작업을 가진다 할지라도 근원적인 주의 영이 없는 자에게는 결과가 참으로 종교적으로만 드러나고 주님이 기대하는 신앙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김교수의 제시한 아이디어인 '문학→문예'로 전환은 성경 해석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노는 세계가 같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복음→복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경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도출하는 과정은,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예적, 문학적, 현상적 해석법과 무관하다. 도리어 이런 저런 해석학을 정죄하면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에 담긴 의미는 인간의 인식 능력과 자질과 학문적 재능과 협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성경의 참 해석에 조금이라도 끼여 들어갈 자격이 없다. 단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성경→성령→예수님→성령의 은혜성'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완전히 배제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성령님의 해석 과정과 인간의 해석과정이 서로 다툰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한다. 성령의 해석 과정을 통해 나온 '십자가' 의미와 인간들이 이성적 해석법을 통해 나온 십자가의 의미가 서로 충돌한다. 서로 반대의 뜻을 품고 있다. 십자가 개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만의 영광을 높이고 인간의 이성적 이해는, 인간들의 이성적인 노고에 의미와 정당성과 그 활동에 대한 긍정성이 함유된 채 노출하게 된다. 영광 싸움이다. 결국 이름을 걸고 벌리는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김교수는 인간의 손이 높이 들어주었다. “우리도 한다면 하는 사람들입니다."라는 투다. 목회자들이 교회 존속의 정당성을 들고 나와 그리스도의 의를 갉아먹는다면 학자라는 자들은 학문 활동의 정당성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한다. 이러한 의(義) 충돌은 각자의 행위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문예적 해석법이란, 기존의 양식사학(樣式史學) 주석에서 돌출된 것으로 여타의 양식(樣式) 중에서 문예양식(文藝樣式)에 치중해서 해석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시문학(時文學)에 국한해서 적용했던 문예양식을 전설, 민담, 수수께끼, 격언, 실예, 일지, 동화, 재담까지 범위를 확대 실시하겠다는 아이디어이다. 그렇게 보면 성경은 여타의 예술 작품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재발견되며 그 속에서 우러나는 '심미적 효과'가 그동안 감추어진 숨은 의미를 보다 추가로 드러내 줄 것이라는 점을 기대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식이나 장르라는 문학유형을 임의로 구분하고자 할 때는 해석자가 미리 짐작하는 내용의 변동 사항과 상관없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장르 조정은 해석자가 예상하고 시작하는 '신화 만들기'와 관련되어 있다. 삶의 정황이란 말씀 선포자가 내뱉는 말과 글이 내뱉는 힘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현대 지점에서 과거의 삶의 정황을 살핀다는 것은 기껏 현 해석자가 처해있는 삶의 정황에서의 당위성과 의미의 요구성 말고는 특별한 의미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성경 문맥을 살피면서 강조점을 해석자가 자기 책상 위에서 임의로 만들기내기 일 수이다. 자기에게 지금 필요한 힘을 말과 글을 통해 내세우기 위해서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당시에도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시 성취력에 따라 새로운 추종자들이 유발되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러한 의미 찾기란 기껏 자기 추종자들에 대한 확인 작업에 머문다. 이처럼 장르 설정은 그 때 그 때마다 새로운 신화 요청 합리화한다. 따라서 이들 양식사학파의 잘못은 성경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했다는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多)의미의 장으로 유도한 죄이다. 그래서 양식사학자들은 성경의 통일성을 일찍감치 포기했다. 통일성이 없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하는 그런 영역 안에서만 그들은 성경의 영감론을 논의하겠다는 만만의 준비 태세를 갖춘다. 즉 통일된 단 권의 '성경' 보다는 그 전에 성경이 될 때까지 수집된 그 다양한 과거사로 분해시켜 성경을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즉 '성경'→'계시'→'계시의 역사'→'역사'로 이전 시켜 고착시키겠다는 것이다.(결국 남는 것은 역사 뿐이요 성경은 그 역사 조작의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들 양식사학파와 그 아류들이 기껏 주석하고 해석해 놓았다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해야 비로소 진리가 되는 십자가 특유의 속성을 지닌 내용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없이도 얼마든지 역사의 텃밭만 들쑤셔보면 얼마든지 줏어모아 재조립해 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종교 관계들이다. 즉 하나님이 역사만으로서 계시해도 충분히 계시로서 제 구실을 할만한 그런 역사성으로서의 계시 내용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일반적인 종교성과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초월한 계시적 내용을 그들의 해석법으로서 도저히 배출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종교성향만 주목할 뿐이다. 그러고서는 자신들의 이런 활동은 개혁주의의 두 거두(칼빈과 루터)로부터 허락 받은 범위 내의 수법이라고 안심하고 있다. 칼빈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는 것이다.
"성령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역사한다!" 즉 '성령→문자적 의미→인간'이런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을 김교수는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인간→문자적 의미→하나님의 뜻'이 불가능한 것이다. 기껏해봤자 '인간→문자적 의미→인간'밖에 안된다. 김교수는 이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방 종교적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의미를 밝히는데 있어 기존의 해석법을 보다 풍성히 가겠다는 취지에서 '문예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해석학과 시학(문학)을 혼동 한데서 비롯된 사고 방식이다. 기존의 해석학에서 시학을 배제한 이유는, 예술 작품이 지닌 은유와 환유의 허구적 요소가 해석학의 과학화와 논리성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유와 환유는 그 본질이 허구이며 그 허구의 빈 공터를 독자와 작가와의 교류로서 새로이 이루어 낼 창의와 창작의 공간으로 남겨 두는데서 예술 행위만의 독창성과 초월성이 있다. 은유라는 것이 자연과 신에 대한, 즉 인간 외부의 환경에 대한 숨은 진리와 비밀을 비유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환유란 그것이 점차 자의식화 되어 이전하는 과정에 동원된다.(응축→치환) 즉 우주의 비밀과 자의식의 만남을 통해 자기 확인과 주체성 확립에 나서는 것이다. 그것이 글로 쓰여지고 설화가 되고 담론이 되고 장르가 되고 시가 되고 노래가 될 때, 바로 이것이 문학이며 문예 예술이다. 그리고 신화이다. 이 안에서 잡다한 인간의 한과 고독과 환희와 찬미가 담겨 있기에 문예 해석은 오직 저자를 수집한 정보를 독자가 가진 경험과 감정과 공유하는 차원에서 대화로 풀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처럼 일방적으로 그 확고부동한 진리 권위성을 주창하는 대상은 해석학의 대상으로 남아서 그 형이상학적 의미성을 발굴, 채취에 나서게 되기에 결코 예술론으로 접근하기에 부적합한 일이다. 만약 문예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하게 되면 필히 성경은 '신화론'으로서 제 모습을 비취게 되어 있다. 김교수가 플롯과 내러티브를 운운하는 것은 이미 교계와 기독교 전통과 공동체 문화에서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는 그 신화적 사고를 심미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고, 변명하고, 추인 하고, 그렇게 해서 신화를 믿고 즐기는 독자들의 예술적 감성에 호소하여 그 '정' 나눔에 의한 '즐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아부하는 절차에 불과하지 결코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는 행위의 노선에 서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해석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신(神) 문화 축제'는 그 밑바닥에 '집단 의식'이 구조화(집단 표상)되어 깔려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여기서 '가상'을 '실제'로 전환하는 의도적인 힘 발휘, 또한 '가변적'인 것을 가지고 마치 '불변적'인 것으로 고정화해 내는 그 내러티브 구조화 시도와 연관된 제 권력들의 출몰과 각 권력 주체들 간의 대결 같은 것은 해석학의 과제가 된다. 내러티브의 구조화 작업은 '지속'이라고 하는 시간의 '공간 정렬 작업'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예술론으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예술을 규준하는 힘의 출원지에 대한 역추적이 가능한 경우에만 국한되는데 이렇게 되면 김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예학으로서 모든게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즉 문예학이 결코 모든 의미론 연구의 최종 밑바닥이 아닌 것이다. 문예학 밑에는 이미지를 산출하는 상상력이 작용하는 층이 있고 그 상상력 밑에는 인간의 무의식에서 솟아 나오는 욕망 구조가 놓여 있는데 이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요 사회 공동체가 강요하는 당대의 질서이다. 왜냐하면 한 사회란 언어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장(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 구조 밑에는 하나의 개별적 생물체로서 쉬지 않고 생존 지향적으로 발산하는 욕구의 층이 있다. 이 욕구의 원천은 인간의 몸이다. 이 '몸체'에서 나오는 욕구는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구분되지 않는 근원적 생존에 헐떡이는 세포의 현재적 생성 활동에 기인된다.
왜 인간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가? 왜 인간은 위를 좋은 쪽으로(good), 밑을 나쁜 쪽으로 (bad) 보려고 하는가?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자연구조를 자신의 정신구조로 모방하고서는 그 틀로서 자연과 신을 노래하는 인간들의 이러한 끊임없는 정신 활동,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 행위와 노동에 대한 자신의 의(義)와 정당함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축적하고 챙기고 있는 내막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성경은 밝혀 주고 있다. 즉 성경을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그 작업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정당성과 의로움을 놓치지 않고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질서가 유통되는 세계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인정 투쟁'이 일어난다.(헤겔식으로 보면) 성경은 인간 활동에 의한 하나님과의 투쟁에 있어 대표적 민족으로 유대인을 들고 있다.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살해당했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목회적 활동이나 신학적 활동조차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의가 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성경이다. 그리고 그 중심은 십자가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십자가로서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죽임'이다. 몸의 죽임은 인간의 행위의 불의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직 십자가에서 터지는 그 자체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자기 일을 하시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그 모든 접촉점을 거부한다. 고린도전서 2:9-10을 보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셨느니라" 이 본문에서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에 주목해 보자. 즉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하고는 무관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거기에서는 신화밖에 안 나온다. 신화란, 인간이 구원에 대한 열망이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되나? 어떤 메시아를 불러야 하며 어떤 신을 찾아야 구원되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될 수 있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영광 되는 일을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신화 안에 들어 있는 공통성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거론한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산 자 앞에서 노출시키므로, 산자의 가치를 모두 무가치하게 정죄하는 걸림돌로서만 세상에 드러내실 뿐이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사 6:5)
3. 결 론
성경에서는 신앙은 종교와 신화에 대한 신념과 헌신과 심취와 전혀 무관하다. 도리어 그것을 정죄한다. 성경에서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에 대한 증언의 양태로만 세상에 나타난다. 그리고 여타의 종교적 신앙심과 신을 향한 신념과 대결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이 맞는가 아니면 이 땅을 직접 두 발 딛었던 그 분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이 맞는가의 싸움이다. 이러한 성경의 본질 앞에서 본인 안에 숨어 있는 신화적 구원 욕망이나 되비쳐 나올 뿐이다.
성경을 제쳐두고 성경에 다가서기 위한 갖가지 학문적 시도와 접근 방법론에 관해서 보다 심도있고 타인을 능가하는 융통성이 있는 견해를 제시한다 할지라도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음 뿐이며 복음 앞에서 그 방법론을 복음적인 이유를 대면서 폐기를 선언해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김교수는 자신이 무엇을 증거해야 될 것인지 감을 못잡고 있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되는지도 모른다. 김교수 주장의 전제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의 존재성과 무조건적인 그 존속'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가 보장되므로서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활동 상황도 정당함을 보장받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러한 전제와 부합되는지를 조차 확인해 봤는가? 물론 유, 무식의 전투장에서는 져서는 아니된다. 무식한 자들이 공부 많이 한 유식한 김교수의 의견에 겸손하게 청종하기는 켜녕 시기, 질투로 일관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김교수의 개인적인 명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대한 예수교 장로교 합동 교단과 그 총회신학교에 합당한 학문적 권위성 정립과 정체성과 확립과 결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인은 김교수의 주장의 전제를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공동체의 존속이라고 말한 것이다) 김교수에게 유식에서 오는 권위는 무식한 자가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잡히지 않는 유식이라는데 있다. 성경적이 아닌 유식이다. 이게 문제이다.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견해와 다르다는 말이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그 어떤 인간도 알아 낼 수 없는 곳에 있다. 비밀은 스스로 드러내지 아니하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증언'만이 자기 백성에서 당부하신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5-49).
이 본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게 말씀의 자체적으로 성취력으로만 된다. 인간은 아무리해도 안된다. 그 말씀의 중심은, 그리스도 중심이다. 너희들은 그저 증인에 불과하다. 그 증언 활동조차 너희 힘으로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힘뿐이다.
따라서 참으로 성령 받은 증인이라면,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만을 증거할 따름이다. '복음→복음'으로만 진리이다.
김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모든 인간의 방법은 위험한 것이라' 하면서 자신의 주장도 그 '위험한 것'에다 포함시키는 파격적인 겸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교수 주장은 위험스러운 것이 아니라 엉뜽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면 될터인데 자신을 증언하고 있다. 왜 주님 것을 버리고 자기 것을 다지고 또 다지려 하는가? 학자로서의 합당한 높은 학문성과 그 진보성과 탁월함을 유감없이 양보없이 과시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그렇다면 학자 이전에 신자로서 정신을 딴데 팔고 있는 자이다. 이런데 동원되는 지식은 '도구적 이성'에 불과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의견에 따르면) 그 도구적 이성을 가지고 실천 이성으로 써먹으면 탈난다. 왜냐하면 계속 도구적 이성의 기능성 안으로 자아는 숨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꾸겨진채 숨겨진 자아의 미흡성을 외부로 노출시키기 않기 위해 무리한 새로운 도구적 이성을 변명용으로 계속 외부로 작렬하게 된다. 결국 자기 증인으로 전락할 뿐이다. 김교수는 여전히 유명 학자들의 그 사회적 권위성에다 힘을 요청하여 자신을 학자로서 내세우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계속 '유식한 자=신앙이 한수 높은 자'라는 자리만을 고수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김교수에 정말 원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교수라는 의식조차 포기하고) 복음의 증인으로서 학교 강단에 서는 것뿐이다. 물론 그 증언 활동 자체가 결코 자신을 계속 교수로 보장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도 복음만 증거 했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책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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