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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기독신문 98.11.4일자.김지찬 교수의[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대한 반론.성경신학요한계시록

기독신문 98.11.4일자.김지찬 교수의[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대한 반론.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1. 지난 11월 4일자, [기독신문]에 나온 김교수의 글은 비록 짧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뒤로 감추어 놓고 시작된 첨병의 글이라 할 수 있다. 김교수에 대해 생소한 사람은 그가 내세우는 '문예적 해석'이라는 생소한 표현에 대해 별로 주목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는 구속사적 설교를 보다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한 충정심에서 이와같은 글을 남겼을 것이라고만 짐작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글을 쓴 김교수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구속적 셜교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김교수는 그 착각을 도와 이차에 구속사적 설교를 아예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싶어서 그와같은 글을 남긴 것이다.

김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논리상 반드시 다음과 같은 원칙이 우선 성립이 되어야 한다. -[문예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김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아니면 알면서도 구속사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하여 문예적 해석을 먼저 언급한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문법적 -문예적인 해석을 하고 난뒤에 그 다음 구속사 해석에 들어가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참된 구속사 설교는 이러한 문법적 -예술적 해석을 결코 용납을 하지 아니하고,이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해석을 쓰며 들어오는 것을 배척한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에 있다. 구속사 설교라는 것이 단지 성경의 줄거리를 뽑아 그 내용물을 소설화시키고(혹은 문예화시켜) 나열한 설교가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설교를 해왔던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도리어 그 모든 것을 정죄하는 새로운 십자가 해석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에 대한 심판과 정죄의 차원에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성경을 보면서 발췌할 수 있는 모든 시도-문법적, 문예적, 정치 경제 사회적 해석, 언어학적 해석- 그 자체를 정죄하기 위한 해석이 아니면 절대로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은, 신약 사도들에 의한 구약 인용이나 구약해석이, 그 당시 구약을 같이 보는 유대인들이나 자연인들의 문예적 소양과 문학적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해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주장들을 해서 극과 극으로 대립을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들의 구약해석은 구속사적 해석 뿐이었고 그 외의 어떤 해석도 용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난을 자처한 것이다. 진짜로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들은, 구약을 보면서 일방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글로 보고 시작을 했다. 절대로 다른 방식의 해석을 용인할 수 없었다(그러나 김교수는 이러한 해석법을 가지고 실재론적 해석법, 혹은 연역적 해석법이라고 해서 비이성적이고 비학문적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점에 이의를 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곧 성령받은 사도들에게 이의를 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자는 사도들과 같은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성령 받은 자라면 사도들의 [구약해석법]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사도들의 구약해석법은 곧 성령님의 해석법인데, 성령님의 해석법은 십자가 사건으로 전 우주와 역사를 재조명하는 해석법이다. 결코 문헌적 구조에서 십자가가 나올 수가 없다. 만약 나온다면 유대인들은 결코 예수님을 살해하는데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교 학자들은 도리어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율법대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나무랐다. 이 갈등으로 인해 빚어진 사태가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김교수가 주장하는 문예적 해석과 제대로 된 구속사적 해석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바로 이 해석이 절단됨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성경해석은 십자가의 영으로 등장되는 성령으로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수는 계속해서 '언어의 직공'이 되자고 외친다. 자 이로서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가? 또다시 성령받은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십자가 사태를 유발시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다.

2. 김교수는 구속사적 설교자를 질낮은 설교자로 간주하고 만약 문법적-문예적 해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사실 그의 주장은 뒷받침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속사적 설교를 거부하는 것이지만) 계속 질 낮은 상태로 머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본인이 보기로는 도리어 김교수가 질낮은 설교자이다. 왜냐하면 김교수의 주장대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근차근 빠뜨린 바 없이 다 문법적이고 문예적 해석을 여러 번 수행한 바 있는 설교자가 전체적 핵심을 모순없이 파악한 후 그 다음 어느 본문을 숲을 본 입장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리게 되면,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이 보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불평하면서 처음부터 문법적 - 문예적 과정부터 다시 따져 나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모든 경우에 설교 형편상 호응해 주지 못할 것이 뻔하다. 만약 그 주장에 호응해 주고자 한다면 그 후의 내용을 또다시 거론해야 하고 그 다음 또 후의 성경 내용을 또다시 연결시켜 설명해야 하는 끝없는 번거러움이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마치 마라톤에 이미 반환점을 돌고 온 자를 보고 이제 막 출발하는 자가 도리어 뒤쳐 온 다고 조롱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진짜로 당신이 돌고 온자인지 내가 납득하도록 다시 돌고 오너라하는 무례함을 서슴없이 범하게 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런 저런 질적 차원의 차이를 빨리 파악하는 방식은 바로 성경해석이나 설교가 종국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어떤 해석이나 설교든 그 지향점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져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예를 들면, 교회성장이나 사회정의나 예배갱신같은 종교 테크닉이나 해외선교같은 것)에 모아져 있는 가로 구별하면 된다. 즉 제한된 범주 내에서 성경해석을 문법적 문예적 해석으로 접근하게 되면 마치 이 다른 것에 해당되는 사항을 말하는 것처럼 보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찬찬히 구약과 신약 전체를 전부 다 파악하게 되면 결국 성경이 말하는 바는 교회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향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을 언급하니 김교수는 짜증스러워 하는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너무나 일방적이라서 받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해석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신학]이라는 학문 만들기를 시도하는 소위 자칭 학자라는 자들의 교만성과 비복음적 정신이 스며 나오는 구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증거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어로 학문안에 고형화 시키므로 성령과 예수 마저 납득되는 대상으로 전환시켜 뭔가 주의 일에 보탬이 되는 가치 있는(?) 자아상을 유지, 확립하려는 것이다. 즉, 예수 믿기보다는 자기 믿기를 감추고 또 자신의 권위를 수호하기위해 건방지게 말씀까지 도용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주의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누가 먼저 주께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5-36).
참 성령 안의 신앙인지 아닌지를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모든 주체를 십자가 안에만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넘기는 열매로만 파악되기에 이 십자가 걸림돌은 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도 예외없이 검증기준으로 삼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곧 인간의 장례식장이요 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십자가 증인이 되기보다는 십자가를 거론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증인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러한 더러운 열매들이 들고 일어나 이 시대에 또다시 십자가 증인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

3. 문법적-문예적 해석이 과연 정답을 낼 수 있는 해석인가?
언어학자 ①방브니스트는, -'모든 기호계는 실존하기 위해서 그 기표적 언어에 의존한다'-라고 했다. 또 ②미하일 바흐찐은, -'말은 고정된 점이나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의미들의 교차점이며 타자의 담론에 주인공의 의식과 말이 은근하게 끼여 들고 있다'- 고 했다(객관적으로 언어를 보고 하나의 의미를 본다고? 하나의 의미란 없다는 뜻이다. 숱한 의미들 지금까지 들어 왔던 의미들이 교차되어 나오는 것이다. 정치적이다 어느 것이 힘이 많이 실리느냐 유행되는 것이 힘이 되니...). 또 -'장르의 문제는 개별적인 예술작품을 신화로 바꾸어 버릴 위험이 있다'(장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신화다. 있지도 않은 것을 하나의 전설로 신화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라고 했다. 또 문학적 대상의 유일성에 대한 일반 이론을 제시한 ③제라르 쥬네프라는 학자는 '글쓰기의 숱한 측면들과 수준들이 어떻게 하나의 네러티브 기능을 구성하는지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 '그것은 하나의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일한 계시로 환원될 수 없다'(보는 사람 각도에 따라 다 다르게 되어 있다는 뜻)-라고 했다. 또 언어학자 ④옐름슬레우는, 기호의 이중분절을 언급했는데 이는 모든 기호의 지층안에서는 겉모습과 동일한 형식의 분절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표현]과 [내용]이라는 상이한 분절은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과의 분절이다(표현안에 또 새끼 표현이 있고 이것은 또 갈라진다 그리고 내용은 항상 자기가 해석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성경을 할머니와 중이 목사가 보는 것이 다 다르다 성경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번역을 잘못해서 그런가. 나타난 것 따로 나타나지 않은 거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 언어와 기호로 미끌어지면서 분해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최종해석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름지어져지지 않는(비문학화되고 비언어화된) 관념의 몫으로 남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모든 문학이 그러할진데 도대체 암묵적으로 비주관적으로 비선입견적인 해석이 가능한가? 도저히 객관적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예수님 자기 지향적으로 해석하신 그 예수님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이다!!! - 이것이 구속사다!!!

⊙ 결론

김 교수께서 정말 한국교회를 위하고 싶고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발언해야 한다. -[ "자신을 살려주는 설교를 하지를 말고 자신을 죽이는 설교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그 동안 목사 자신의 생존욕에 가려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전면에 부각될 것이 아닙니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사도)는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습니다'(고전4:13)-이런 설교자의 자세가 되어야 모든 세상적이고 작위적인 성경 해석법을 거부하고 복음의 진수을 그대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라고! -

김교수가 정말 성경을 바로 해석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10년 이상 연구한 그 해석법 조차 스스로 육적임을 고백하는데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 김지찬: 총신의 파워 게임을 즐기고 있다. [해석방법론]을 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문예적=문학적-역사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이 일치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줄거리를 어떻게 하는가하는 점이다. 장르를 결정해야 된다? 구조분석을 해야 된다. 중요단어의 의미 문예적 해석에 주력해야 된다.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창조 구속이 부각 될 수 있겠지? 본문에 대한 일차적 주해가 포함된다? 정경적해석이 포함안된다고 본다. 신약과 구약에 본문에 적용이 되는가? 잘못된 주해 개념이 아니고 구속개념이라고?
고재수 교수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창세기12장의 약속과 연관을 시키지 아니하면 틀렸다고? 성경 본문 자체의 목소리를 누가 알 수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반박이 위의 글이다.
사도행전 8장의 경우를 보자.
☞ 구속사 해석: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8:26-35).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성이 없는 인간이 아니다. 이성이 있는 있는 인간이다. 예술적인 기질도 있다. 이사야의 글을 보고 말이 무엇이며 이사야 글의 구조분석을 못해서 이해 못했겠는가! 글자 원어 분석 못해서 이해를 못해서? 그렇다면 원어 분석하면 되는가? 주어 동사 해석하면 다 되는건가? 언어의 주체가 누구 인가? 인간인데! 인간을 모른다.

- 이 본문을 다시 보자.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이 말씀이 누구를 지금 가르키고 있는가? 타인인가? 자기인가? 원어 분석해본들-저가 나오는데 저가 누구인가? 원어분석 구조분석 아무리해도 예수가 안 나온다. 성령받은 빌립은 그냥 예수가 나온다. 그냥 예수로 적용한다. 성령받지 못한자가 성령받은 자의 해석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김지찬 등의 언어구조 분석이다.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이사야가 해석된다. 비단 빌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의 모든 성령받은 사람이 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구속사의 해석이다. 언어학 전공한 사람들이 왜 신학교가는가? 언어학이라는 자체가 배설물로 여기고 신학을 하는 사람이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인데...... 언어의 직공이 되어 뭐 할 것인데.... 성경 전부 숲을 보아야 되는데....마라톤 다 돌고 온 사람들이 있는데.....선무당 사람잡는다고....

이호식씨 글- 어느 글 하나 정돈이 안되어 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는 뭐냐? 도와주는 예수. 우리가 하나님가 하나되는 이것이 목적이다.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서2장9절- 이 말씀은 무시하고 자기가 신이되는데 있다.

헬라 종교의 두가지 과정에 대해설명 해놓은 책이- [ 종교에서 철학으로 ] - :F. M. 콘퍼드 저 남경희 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 본 책의 가치성- 저자가 밝히듯이, 종교란 개인이 선택해서 참여하기보다는 영향력 집단이나 사회로부터 오는 암시에 의해 강요받은 것이다(p 57). 기독교 내에서 주장하기를,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근접 조차할 수 없는 독보적인 세계관과 인생관과 구원관이 구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고상하기 그지없고 균형 잡힌 도덕들이 가득 쌓여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동안 집단 독재 체제에 익숙해져 있기에 무의식으로 내뱉아 놓고보는 파쇼 근성의 결과이다. 본 책의 가치는, 모든 종교인들이 맹목적으로 갖고 있는 자아 체제에 대한 경외심에 대해 그 실상을 탐색해서 인간들의 그 순수한 기본적 삶의 양식으로 재배치 시켜 주었다는데 있다. 종교 생활은 중지되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자기 집단의 삶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철학적으로 정리 정돈하는데서 나왔다는 점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책과 관련해서 본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기독교와 복음 :
성경에서 말하는 참 기독교는 오직 '언약에 의한 선택'에 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불멸의 존재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에 초점을 두는 것은 날조된 기독교이다. 오직 성부와 성자의 언약에 의해서 선택된 결과적으로 생겨난 것이 참 교회이다. 따라서 저자가 소개한 헬라 철학의 우주를 지배하는 사랑과 공의의 법칙은 공허한 인간들의 한숨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문예적 해석외에는 일체 용납하지 못하겠다. 진리는 없다. 건방지게 결론을 맺지 말라. 그냥 성경본문가지고 진리를 찾아보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다. 나는 구조주의가 아니다. 그냥 성경보고 해보자. 그냥 해본 결과 착하게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자. 예수도 그냥 좋은 사람임을 인정하자. 심각한 놈인줄 모르고 있다. 김지찬은 빌립처럼 해석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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