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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윤리주의자들의 비신앙성성경신학요한복음

윤리주의자들의 비신앙성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윤리주의자들의 비신앙성

개혁주의가 윤리주의로 전환되어서는 안된다. 윤리란 모든 종교와 철학의 특징이다. 윤리로 구원되는 것도 아니요 윤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윤리주의 종교를 인식하려고 애쓰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행위의 주체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삼고자 하는 죄악성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을 하나 하나 순종해 냄으로서 계속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려는 비신앙적 의식을 고수하는 한 이 윤리주의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은혜성이 이 윤리주의 앞에서 모독을 받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심지어 윤리주의 자들의 주장은 십자가 의의까지 변개시켜 대속의 가치마저 훼손시킨다. 십자가의 대속 정신을 대적하는 사고 방식이 자신들의 윤리주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핑계를 성경 자체에서 찾고자 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고분고분 순종한 것이 어찌 비난받을 일인가 도리어 칭찬 받을 일이라고 항변한다. 그렇다면 이들 윤리주의 자들의 주장의 허점은 무엇이며 그들의 반복음적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우선 윤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성격을 조사해 본다.
흔히들 칼의 비유를 들면서,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악이 되고 요리사가 칼을 사용하면 선이 된다는데 과연 이 말이 정확할까? 만약에 강도가 칼을 들고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면 그것은 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요리사가 갑자기 강도 짓을 하게 되면 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악이 되고'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한다. 즉 '누구든지 강도 짓을 하면 악이 된다'고 해야 한다. 전에 강도 전과가 있던 요리사이든, 혹은 칼을 들었던 아니면 장난감 권총을 들었던 상관없이 남을 협박하고 강도 짓을 하는 그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질 때가 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에 어떤 자가 강도이든 혹은 칼을 소지하고 있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즉 어떤 신분이 자동적으로 악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또 '강도 짓을 하는 사람'은 있을 지언정 '강도'라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선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에 착한 일을 수도 없이 많이 했던 요리사라고 할지라도 그 요리칼로서 언제 강도로 돌변할 지 알 수 없다. 선한 일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만 그 사람은 '선한 일을 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선한 사람' 인 것은 아닌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적은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앞으로도 자동적으로 선한 것만 행하는 그런 선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심지어 그럴 개연성이 강도 전과자보다 많다 할지라도 개연성을 근거로 절대적 개념을 도출할 수는 없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선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강도'라는 신분 규정을 전에 강도 짓 한 것을 가지고 확정지을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어떤 경우든 '강도'라는 자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에 강도 짓 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미래에 강도짓 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은 있다 할지라도, 늘 강도짓을 꼭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신분에 합당한 행위를 늘 보여주는 자는 없다는 말이다. 설사 눈만 뜨면 강도짓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강도짓을 쉴새없이 하는 사람'이지 결코 '강도'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윤리주의의 세계에서 논리상 신분과 실천은 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과정도 있을 수 없다. 신분이라는 측면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연결 고리가 없을 뿐더러 반대로 행위를 가지고 확정된 신분을 부여할 논리적 정당성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주의자들은, 윤리적 논리 안에서 성도가 되었다는 신분에서 마치 그 신분에 합당한 선을 늘 행할 수도 있고 윤리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됨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만약에 이 믿음이 진정 합당한 믿음이라면 다음에 제시하는 두 가지 경우도 윤리주의로서 해결되어야 마땅하다.

1. 명령되지 않는 여타의 행위에 대한 처리 문제.
2. 가만있는다든지 잠을 잔다든지 음식을 먹는다든지 하는 일상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가치 문제.

1의 경우의 예.
명백하게 명령한 바 없는 행위에 대해서 윤리주의자들은 유사 명령을 출발점으로 제 2의 제 3의 법 조항들을 자꾸만 증폭시켜 나간다. 예를 들면,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다.(엡 5:18) 그런데 어떤 자가 알코올 도수는 없지만 술 맛 나는 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악이 아니냐고 물어 왔다. 혹은 술집에 가서 술은 안 마시고 콜라 마시고 쇼는 구경해도 무방하냐고 물어 왔다. 거기에 대해서 윤리주의에서 안일하게 손쉽게 제시된 답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 3의 행위가 있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악의 정의는, 뭔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한 바가 있어야 하고 그 명령에 저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만 악이 되는데 무슨 지시 내려온 바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악이라고 우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립적 진공 상태가 발생된 것이다. 가치가 유보된 행위가 일어나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신분은 의인도 아니요 죄인도 아니요 공백 상태에 놓인 신분이 된다. 하지만 곧 윤리주의자들은 이 윤리 가치적 진공 상태를 방치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도 윤리적 우위를 잃지 않으려 한다. 성도라는 신분을 가진 자는 그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윤리적 처신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성으로 인해 새로 발생된 사태마저 선악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끈적끈적하게 잡아당겨진 법들을 동원하고야 만다.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라도 못 빠져나가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그 행위들도 통해서 선 아니면 악, 이 둘 중의 어느 한편에 소속된 신분임을 드러내게 만들자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새로 뽑아 올려진 윤리법 조항 마다 신이 내리시는 처벌 규정과 포상 기준이 쌍으로 달라붙을 것은 뻔한 결과이다. 즉 다음 성경 구절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이들이 제시하는 답변들은 기껏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비록 술은 마시지 않더라도 술을 먹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바로 악이 되고 비록 콜라를 마셨다 할지라도 일부러 술집에 들어가서 마셨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전에 비성도 일 때의 술을 그리워한 경향 마저 지워 버리지 않는 죄이며, 술집에 벌어지는 쇼를 관람하는 것은 성도가 이 사회의 구조적 죄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했기에 결과적으로 이 땅에서 술집을 제거하는데 비협조적이므로 악이 된다는 것이다. 진정 성도라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술 취하지 말라→술 맛 나는 것이라도 마시지 말라→ 술집에 아예 가서는 안된다→술집을 제거하는 사회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계명으로 확대해 나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법 팽창 현상'이다. 만약 이 술집 추방 사회 운동에 비협조적인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심보가 수상한 것으로 판정 받아 죄된 행위를 하고 있다고 간주되고 그 자는 신분상 성도라는 점을 의심받게 된다. 과연 이러한 윤리관과 해석이 예수님의 생각과 동치되는 것일까 아니면 배치되는 것일까?

2의 예.

새로운 사태를 맞이한 경우에 관한 윤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무심코 늘 행하게 되는 일상 생활에 관한 행위들, 즉 잠을 잔다든지, 꿈을 꾼다든지, 음식을 먹는다든지, 거리를 걸어간다든지, 교회 올 때의 옷차림새에 대해서 윤리주의는 어떤 인식으로 다가서게 되는가? 즉 예수 믿는 자는 꿈과 예수 믿지 않는 자의 꿈이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니면 예수 믿는 자는 길을 걸을 때에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는 아니되는가 혹은 지름길이라 할지라도 사창가나 유흥가 골목길을 이용해서는 되는가 아니되는가에 관한 문제 같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로서, 성도가 병이 났을 때, 먼저 기도하고 난 뒤에 병원에 가야 하는가 아니면 일단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 보고 난 뒤 본격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아예 기도만 우선해 봐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고 난 뒤에 병원 진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상황 봐서 알아서 하면 된다고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이 윤리주의자들의 딜레마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상담하게 되면 어두운 윤리적 사각지대로 사태를 몰아가서 그 안에서도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윤리적 사각지대까지 윤리주의 순찰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감시의 폭을 넓혀야 했다. 일상적이면서도 윤리적 가치성이 애매 모호한 경우에 있어서도 성도는 불신자의 행위하고는 뭔가 달라도 달아야 한다는 조건이 늘 윤리주의의 근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윤리주의자들은 성도의 윤리에 대해서 성경 본문을 도입하고 있지만 '달라도 뭔가 달라야 된다'는 사항을 놓고서 '윤리적 행위 차이'로 여기고 있다. 갈라디아서 5:13이나 로마서 13:8-10이나 로마서 13:11-14의 구절을 예를 들어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즉 위의 세 개의 본문에서 말씀했듯이, 성도는 대인관계에 있어 사랑으로 행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사랑으로 종노릇'과 '어두움의 일을 벗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 규명을 행함의 차원에서 국한해서 설명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즉 '∼을 할 때' 그것이 사랑이며 '∼을 할 때' 그것이 어두움의 일을 벗는(혹은 어두움 일) 일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이 사랑으로 행하고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이 사랑의 일이 되고, 혹은 지금 내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자 한다고 시도하게 될 때 곧 그것이 어두움의 일을 벗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방탕과 음란과 호색이라고 여기는 일을 거부할 때에 그것이 곧 육신의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윤리주의자들이 왜 이런 현상을 유발하게 되느냐 하면은, 소위 그 명령법/서술법이라는 문법 형식에 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즉 명령했으니까 명령대로 시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행하라 하니까 사랑으로 그냥 행하면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길을 갈 때에 손에 호주머니를 넣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도가 잠을 잘 때 엎어 자야 하는가 천장을 보고 자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느 쪽이 덜 방탕해 보이고 덜 음란해 보이는 행위가 될까로 판정하고자 하는 충동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이러한 충동에 의한 말씀 적용이 무리하고 부적절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곧 말씀 해석의 근원부터 윤리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이다. 윤리주의의 큰 무지성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도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교도관이 교도소 안에서 죄수들에게 점호할 것을 명했다. 이 경우에 죄수들은 우선 점호가 무엇이며 어떤 입장에 있는 자들은 점호를 필히 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우선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의 경우 점호를 안 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은 죄수 본인이 용납이 안된다. 혹시나 "나 점호하기 싫어"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 단지 점호하기 싫다는 말이 아니라 "나 어서 자유인이고 싶어"라는 말에 불과하다. 죄수 생활은 만족하는데 점호만은 불만족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나중에 복역이 만기되어 자유인이 되어 나오면서 "나는 어서 점호 없는 다른 교도소에 도로 들어가야지"라는 마음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서술적으로 표현했던 명령으로 표현했던 그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계명과 어두움의 일을 벗어라 는 계명 앞에 성도를 세워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 안에' 즉 '사랑 안에', '빛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총괄적으로 말해서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행하라"라든지 "어두움의 일을 벗어라"라는 의미를 윤리주의자들처럼 성도의 행위 원리로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성도로 하여 예수밖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들어오게끔 했던 그 구속의 능력과 원리로만 설명해야만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사랑 안에'(혹은 사랑으로 종노릇), '빛 안에'(혹은 어두움의 일과 방탕과 호색과 음란과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성경을 존중하고 이 말씀대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예수 밖'에서 통하는 원리 원칙에 준해서 실천에 옮기려고 애 쓸 것이다. 불교의 승려들이 늘 주장하는대로, 부처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이 하나이다 는 주장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원리는, 인간에게는 이미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함유되어 있고 어두움의 일을 벗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예수밖에 있는 자를 예수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거기서 살게 하는 주님의 능력과 완벽하게 대비가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성도라는 위상을 갖게 하는 것은 순전히 주님의 고유 능력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도 순전히 주님의 고유의 능력임을 같이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빕 3:3) 그렇다면 불교 승려가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어두움의 일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 실천력에서 나타나는 원리가 바로 예수 밖에서 일어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라고 자처하는 자가 자기 딴에 음란과 호색을 멀리했다고 자부하더라도 만약 자기의 실천 행위를 바탕으로 하여 그 일을 이해하고 있다면 (대외적으로 고백하기를 "저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립니다"고 아무리 외치고 다녀도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어두움에 속한 자이며 여전히 호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자이며 늘 음란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전히 방탕이 무엇인지 호색이 무엇인지 하는 그 깊은 내막은 늘 새로운 문제를 던지면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자기 딴에 음란과 호색을 멀리하는 삶이라고 자부했을 때, 그가 말하는 호색과 음란이 성경에 말하는 호색과 음란과는 질적이고 차원적인 차이를 드러낼 수 밖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십자가가 기준이 아니고서는, 혹은 십자가 지신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항은 자기가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객기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음란과 호색에 관해 두 개의 하늘 계시가 생겨난다. 하나는 성령에 의해서만 비로소 알게 되는 성경 속의 음란과 호색과, 다른 하나는 평소에 인간들이 알고 있고 확정된 개념이라서 인간이 애를 쓰고 노력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호색과 음란이라는 계시, 이 두 가지이다. 예수님만 알고 있는 호색과 음란에 대한 깊은 의미에 대해서 윤리주의 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가지고 도전하게 셈이 된다. 그러나 '그 자신만의 경험'이라는 것은 그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변화의 폭일 뿐이지 그 인간의 잠재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잣대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마치 어떤 아이에게 글을 읽어보라고 할 때, 읽지 않는다고해서 그 아이가 실제로 글을 앍을 줄 모른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외부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행위란 이처럼 늘 변화하는 것이기에 고정된 가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결국 윤리주의는 인간들의 각종 변화무쌍한 경험들을 줏어모아 학습하여 '윤리 공학술' 또는 '윤리 과학'으로 전환시켜 계시로 삼으려는 시도이다. 어디 음란과 호색에 관한 개념 뿐이겠는가! 예를 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자기 딴에 이 정도 같으면 좁은문이러니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시는 좁은문이 엄연히 다르다. 자기가 자진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서는 좁은 문은, 자신의 숭고한 양심과 도덕심과 열정으로 어느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좁은문인 반면에, 예수님이 경험시키시는 좁은문은 인간으로서 그 어떤 노력에서 견딜 수 없는 좁은 문이다. 이런 경우를 계속 화개해 나가게 되면 성경 전체가 모두 이 중 계시 간의 갈등을 빚어내는 계기가 된다. 먼저 예를 들었던 강도와 요리사의 사례를 다시 검토해 보면, 전에 강도짓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또 그런 강도짓이라면 본인이 얼마든지 자제 할 대상이라고 자신 만만한 그런 개념을 품고 있는 어떤 요리사가 언제 칼을 들고 요리 대신 강도짓 하게 될련지 본인과 더불어 누구도 장담 하지 못한다. 심지어 초범 강도, 약한 강도, 강도짓 같지 않는 강도,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강도, 덜 강도, 비(非) 강도, 유사 강도, 정당 방위성 강도, 생활고로 인한 강도, 혹은 사랑으로서의 강도, 전도의 수단으로서 강도, 하나님 영광을 위한 강도, 남을 구원하기 위한 강도,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강도 등 각가지 변명과 핑계를 늘어 놓으면서 자기 정당성에 나서지 않을 자가 어디 있께는가! "강도 짓하나 안하나 항상 저는 주님 앞에 늘 강도이며 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호색한이며 음란한 자이며 죄인 인 채 지금도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만이 제대로 음란과 호색에 관해 해석한 자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명령)하셨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10-11).
-여기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오직 나 예수님만이 너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관계 안에 네가 이미 놓여 있음을 알고 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만약 그 여인이 전에 처럼 모세 율법에 준해서 간음죄를 염두에 둔다면 간음했던 아니했던 이미 그 여인은 여전히 죄악된 자이다. 간음자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라는 새로운 질서를 자기에게 이미 적용시키는 여인 같으면 그 정죄를 무산시키고 모독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음죄를 막론하고 어떤 여타의 행위를 하든지 말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을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만 해석해야 할 것을 자신의 윤리적 실천 행위에 근거해서 계시 해석을 하는 자들은 기독교 신자라는 명분을 가진 아직도 불교신자에 불과하다. 다른 원리 안에 매여 있다는 말이다. 오직 주님의 실천력에만 기대를 걸고 그 십자가 정신 안에서 계속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자가 강도이며 동시에 의인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의 원리'의 효력이 지워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길을 가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이 방탕의 일종이며 죄악일까? 아니다. 발가벗고 다녀도 그것으로 인해 성도가 죄인이 될 수 없다(죄를 모른다든지, 죄 의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세력과 능력을 여전히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아님도 역시 받아들인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만약 성도가 도로 타락하는 경우란 바로 이러한 구속의 원리에 벗어나 모든 것을 윤리주의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는 인식 같은 것이다. 사실에 있어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성은 이처럼 윤리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내용에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 아니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슨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신앙심에 있다. 일요일날 하루 종일 숨만 쉬고 있는 자들에게 윤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시비걸 것이 뻔한 일이다. "형제여,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주일 성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의 영광된 일에 매진하는 것이 주일 성수입니다"고 말이다. "윤리주의자 목사님, 그러면 어느 정도로 열심히 주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까?" "제가 여기 평신도 주일 생활 지침서 가져 왔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결정된 사항들이니 보시고 될 수 있는대로 준수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윤리주의자 목사님, 만약 이 지침서대로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형제여 주의 사자인 목사에게 순종 안하고 반항하게 되면 좋을 게 없습니다." 하고서는 여러 가지 간증거리를 들이 댄다. 이런 자들이 오늘날에 존재하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이들 윤리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만 지시고 그 뒤 아무 것도 안하시고 손은 놓은 상태에서 자기들에게 하늘에서 명령법만 내려 보내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 대신 다급한 심정으로 윤리적 행위로서 그 진공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만약 신앙 일변도 나간다면 모든 성도는 필히 방탕해 지고 주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 뻔합니다. 그런 신앙주의는 참으로 위험한 사상입니다." 이들은 성도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 스스로도 늘 혼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참된 성도를 볼 때는 자기네들 처럼 으레 그러러니 단정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28-30).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주님은 자기의 지체되는 교회를 보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듯이 말이다. 또 다른 데서 이야기가 말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0-22).

이 본문에 의하면, 모든 약속을 필히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도의 마음에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또 히브리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12:8).

성경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대해 명백하게 언급했건만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윤리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대든다. "그렇다면 '주께서 다하니까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왜 명령법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까? 본인들보고 직접 실천에 옮기라고 명령법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었던가요?" 결국 윤리주의 자들은, '가만히 있는 것/명령을 내리신 것'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인간 행위로 통해 말씀을 자기 선에서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즉 '가만히 있는 것=악', '뭔가 하는 것=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차원 내지는 행위 범주에 준한 인식 구조는 하나님이 벌리시는 구원의 인식 구조에 부합되지 못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 여기서 말하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은 그 명령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과 지향을 위한 명령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그냥 가만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후에 비록 이스라엘에게 숱한 계명들이 쏟아져도 여전히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는 원칙은 변동이 없다. 즉 윤리주의자들의 가지고 있는 행위 인식 가지고는 감히 성경 말씀을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끝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면 기껏 유대인들의 딜레마처럼 자아의 신분 결정을 윤리적 행함에 준해서 확정지으려고 제2, 제3의 보조 율법을 한없이 추가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비해 참된 신앙인인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 말씀에 의하면,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것은 성도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오직 자신의 기쁘신 뜻을 목표로 한 소원을 성도 안에 두시고 계시다. 갈라디아서 2:20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말씀 속에는, '가만히 있는 것=악/ 뭔가 행하는 것=선'이라는 행위적 인식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윤리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것이 서술법이든 명령법이든 어떤 형태이든간에-, 과연 누가 믿는 자인지 안 믿는 자이지를 구별짓기 위해서였다. 즉 자기 행위를 근거로해서 말씀을 접근하는가 아니면 믿는 자로 접근하냐를 가려내기 위해서 주어져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그 결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즉 그 다 이루심의 모습을 믿는 자 안에서 드러내어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시려는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예수 밖의 인간들은 독자적인 자기 나름대로 행위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겠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믿고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자기는 죽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 자 어느 쪽이 진짜 성도인가?

결 론

사람이 믿는 것이 없을 경우에는 결국 자신의 행함을 통해 자아의 위상과 신분을 확인코자 한다. 더나아가서 타인도 그렇게 규정하려고 하고 모든 말씀은 그런 눈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계속 강도짓 하는 강도로서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도 그것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도는 없다. 단지 강도 짓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사람만 전문적으로 강도짓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강도짓을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 개념이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있다. 죄인이라는 개념을 행함의 차원에서 계속해서 죄 지음을 확인해서 얻어진 결론이 아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윤리주의 견해에 따르면 세상 모든 자가 다 강도짓을 안하고 있는 것은 각자 양심적 실천력이 대단해서이다는 결론에 도달된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차원에서 선과 악을 이해하지 않는다. 즉 열심히 한 만큼 선이 되는 것도 아니요 가만있는다고 죄인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먹고 마시는 것, 죽고 사는 것,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 이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동행하시는 주님의 능력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이점을 믿는다. 즉 호색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행하게 하시고 어두움의 일을 벗어나도록 주께서 조처 하실 줄을 믿는 자가 성도이다.

그런데 윤리주의 자들은 이 주님의 자리에다 자신의 윤리 실천 능력을 대입했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전에 없는 능력이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비복음적인 인식이다. 성령은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는데 분주하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성령을 못받아 봤기에 성령께서 실제로 어떻게 성도를 다루는 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수 밖의 원리인 윤리주의로 그 본연의 모습 뿐인 것이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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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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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