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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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
1998.10.21. -이근호-
하나님의 뜻과 계시와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이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멈추게 하거나 방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죄를 분명히 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22-25/눅 2:34-35 참조).
인간들의 궁극적인 죄는 예수를 미워하는데 초점이 모아진다. 어떻게 인간들의 각가지 죄가 '예수 미움'과 관련성을 가지며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최종적인 형벌이 나오고 또 여러 가지 죄목들이 나오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죄인들이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모두 다 불과 유황불 속에 한데 모여 있다. 하나님의 최종 형벌이란 죄를 극히 죄답게 정죄하자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뭔가 하나님의 심기를 뒤틀리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러움 자체로서 자족하고 합리화한 것이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0).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가증된 것이며, 무엇이 죄가 되는 지는 복음이 개입되므로서 확정지어졌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두 동강 내는 목적으로 일하신다.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죽어나와 나보다 능렦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즉 성령과 불을 인간에게 세례 주실 수 있는 능력자의 고유 권한으로 인해 세상이 알곡과 쭉정이로 두 조각 나게 되어있다. 이 분의 행위로 인해 비로소 세상은 죄의 본질이 들추어 질 것이다. 죄란 스스로 죄되는 기준이 따로 구비될 때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를 배제한 채로 죄냐 아냐를 규정시킬 수는 없다. 이미 성경이 오늘날의 인간들을 보편적으로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죄가 '예수님 미움'이라는 성향을 뿜어내면서 전 인류를 뒤덮고 있다고 선언한 이상 예수님에 대한 미움을 토대로 한 모든 죄관은 거부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죄관을 기준으로 삼을 때만 왜 인간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벌써 인간의 주인이 따로 있어 인간들을 왜곡된 죄안에서 사로잡고 있었다. 거기서 나오는 모든 선악 기준은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이고 복음과 예수님을 미워하는 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복음과 더불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미워하므로 정죄당하는 식이다. 복음과 죄가 쌍을 이루어 연계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에 특정 시대의 죄는 그 시대에 등장된 복음의 역할자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인간들이 자기 경험만을 최종적인 진리로서 신봉하는 습성은 과거 구약 이스라엘 국가에서도 천년 이상 이어져 내려왔다. 이 기준이 성공적이냐 아니면 실패한 것이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집단이 무심코 예수님을 배도하고 죽음으로 내몰 때 이미 들통나 버린 사항이다. 사도 바울도 그런 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음을 성경에서 통해 고백하고 있다. 자기네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당했기에 자신들이 축적해 놓은 모든 신앙적 유산도 저절로 진리처럼 사용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죄의 절정으로 보셨다. 그래서 그들을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호칭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 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이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이해력에서 동원시킨 모든 종교적 경향과 성격과 체계들은, 말씀과 계시를 정치적 집단 안으로 묶어서는 그것을 영원한 집단체로 고정시키기 위한 정교하고 치밀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특정 교단을 인정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선지자로부터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들을만한 빌미가 될 뿐이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옥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딴 기준이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이나 메시야가 이들 특정 집단을 무시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메시야나 선지자를 지옥불에 집어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신다. 어느 집단에 속했든지 아니면 장렬하게 축출 당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필히 정죄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한 죄를 죄되게 하시는 기준은 오직 복음만이다.
마가복음 16:15-16에 나오는 이 복음이라는 기준은 물론 사도 서신 전체를 걸쳐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7-18).
그런데 과연 '오직 복음만!'이라는 이 원리가 구약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들어 있을까?
죄와 더불어 대비적 의미를 가지고 쌍을 이루면서 최초로 등장되는 현장에서 복음은 상대방의 죄로 인해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본문에 보면, 죄란, 선이 있는 자를 덮치기 위하여 달려든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죄가 덮쳐진 인물인 가인으로 인해 피해자가 생겨나게 되었으면 그 가해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전에 죄의 공격에 대해 경고하심을 받은 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벨 죽음은 순전히 죄가 가인을 덮친 결과에 의한 것이다. 이로서 의인의 죽음은 곧 죄와 연결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죄를 파악하기 위해서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게 되는 의인을 출발점으로 해야만 하는 합당하다는 원리가 수립된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복음을 언급한 점과 같은 차원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이 본문은 세 가지 주요 요소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 악한 세대,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즉 의인의 죽음과 악한 세대가 더불어서 복음의 의미와 그리고 악의 의미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절대로 따로 나타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아벨 살해 사건으로 되돌아 가보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죄가 나오고 그리고 아벨이 나오고 그 아벨이 죽게 되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 그리고 가인의 악의 편에서 속한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저주를 내리려 하셨던 것이 아닐까? 가인은 결코 중립적인 인물이 아니다. 어쩌다 감정 조절이 안되어 한번만 실수한 인물이 아니다. 이미 악에게 덮쳐진 상태에 놓인 대표적 인물이다. 저주가 그의 운명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은 아벨 대신 또 다른 아들인 가인을 합법적인 유일한 자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이미 선악 지혜자가 되었다는 배경에서 악의 정체를 밝히는 최초의 사건이다. 악에 속한 자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선에 속한 자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장식되는 역사의 속성이 최초로 그 얼굴을 드러낸 사건이다. 악은 어떤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꿈틀거릴까? 그것은 하나님과 연관된 자를 하염없이 미워하고 저주하고 궁극적으로 죽여 없애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들이 따먹지 말아야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지혜에 참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제일 먼저 두드려지게 나타난 현상은 수치심이었고 거기에 따라 자신의 하체를 중심으로 몸을 가리고 숨기는 행위를 보여주었다. 지혜를 알면 더 기뻐해야 될터인데 왜 이런 반대 현상을 일어났을까? 부끄러움이란, 자신에 대해 새로은 자이 의식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아에 대해 자신이 다른 안목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낯설음'에 대해 정신적 반응이 수치심이다. 죄란 이처럼 잃어버린 본래의 것과의 괴리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비극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선악의 지혜로부터 출발하여 본래의 자기 모습을 되찾아고 자는 욕망에서 시작한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망실하거나 제거해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래의 것에서 벗어난 현재의 입장을 이질적인 것으로 깨닫게 하는 지혜 속에 갇히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은 낯선 실존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서 독특한 행위가 연출된다. 그 행동은 바로 '가리는' 거였다. 가장 수치를 느끼는 부분부터 우선 가리는 거였다. 몸의 이상을 느끼는 것이다. 왠지 타인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몸을 숨겨 두고 싶은 것이다. 이미 자신의 몸이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스스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자에 대한 공포심이 깃들여 있다. 부끄러움을 해소할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를 잘라 내고 끊어서 수치를 없애는 방식은 선악의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혀 나올 수 없는 지혜이다.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 5:8-9).
그런데 이러한 가리움조차 하나님 앞에서 소용없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서 추궁하려 하셨다. 그러나 이미 선악 지혜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은 먼저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현 자아상을 먼저 언급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벗었으므로 하나님 대하기 두렵다는 의식에 대해 하나님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과 연관시키고 있다. 즉 선악과 따먹은 죄의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치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자아 의식과 삶의 본성을 정리해야만 한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절대로 발생되지 않는 의식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 새롭게 발생된 의식과 행동을 통해 죄악를 스스로 처리하는 인류 보편적 특성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3:10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는 본성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타인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습성을 보여준다. 결코 하나님을 모른다든지, 의식하지 않고 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르는 것으로 또한 남에게 뒤집어 쒸우는 경향성을 띠면서 자기 행동에 나서게 된다. 아벨의 죽음에 대해서 가인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이를 반영한다. 신의 존재하심과 자기에게 날아오는 죄책심은 마치 자신과 무관한 것인 양 여기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난데없이 새로 생겨난 원초적 욕망으로 인해 공포와 부끄러움에 떨고 있다. 시도, 때도, 장소로 가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인간들 내부 속에서 분출하고 있는 욕망이 이 욕망이다. 이 지배자는 계속해서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선악적 차원의 책임과 징벌을 요구하는 선악 의식의 대가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괴로워한다. 더불어 그 선악 의식의 대가(Master) 앞에서 계속해서 수치심을 갖게 된다. 인간의 자아 자체 속에 타자 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늘 인식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20).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은 내부에 자리잡은 이 타자(他者)로 인해 관여 당하는 욕망이 된다. 어떤 식으로 관여 당할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원치 않았던 악의 침투와 확산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타자로부터 정죄의 대상으로서 관여 당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8-11).
여기서 로마서 7:19를 다시 거론해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이다.
이미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그 욕망이 선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심지어 악한 아비라 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안다(마 7:11). 그런데 선을 지향하는 욕망은 악을 염두에 두면서 작용한다. 즉 그 선으로 악을 한없이 가리고 싶은 것이다. 악이 없고 선이 있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자신의 욕망은 더 이상 자아에 의한 관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아는 지혜가 인간의 욕망을 가만두지 않는다. 인간들이 임의로 선과 악을 취하도록 방관자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 적극적으로 인간을 노리개로 삼고 있다. 인간들이 가리개로 사용하기 싶은 선과 의와 거룩함에 대한 욕망도 선악 지혜 안에서는 도리어 악이 유발되는 욕망으로 판정 받고 만다. 왜 이런 식의 역전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인간의 욕망은 이미 타인의 욕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에 의해 장악되었기에 아무리 선악에 대해 지식과 지혜의 양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선보다는 악 취향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7-8).
이 본문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에 주목을 해야 하는데, 탐심이라는 것이 과연 선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악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것부터 인간이 스스로 판정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없는 이유는, 선 악 지혜의 원래 주체가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탐심은 악한 것이라는 그 적법성에 대해서 인간은 꼼짝 못하고 굴복 당하게 되어 있다. 결국 인간은 악의 배양처이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이 권세자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보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29-30).
인간의 내부에는 이 두 권세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물론 선악의 지혜라는 것을 서로가 활동의 근거로 삼으면서 권세자로 군림하게 있는데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들이 이 다툼에 말려들고 만 셈이 되었다. 악으로부터는 하수인이 되었고 선악의 지혜자로부터는 정죄와 저주를 추적당한는 목표물이 되어 있다. 정말 모든 인간은 곤고하고 피곤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 본문 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결국 살아야 되겠다는 욕망이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욕망은 가능성 있는 희망이나 기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 사망의 몸이다 는 사실을 크게 인정하고 절망 가운데 탄식의 소리를 대변하는 말이다. "아, 결국 죽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구나! 그러나 계속 살고 싶은 것을 어떻해 …."라는 점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욕망이다. 사망을 확정짓는 이 욕망은, 인간 내부에 들어 있는 모든 비밀이 요약된 그 결과를 반영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외부로 내비치는 모든 행위들은 사망의 원인과 그 순서를 보여주는 행위들이다. 인간의 욕망은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산된 모든 것은 전부 사망의 열매일 뿐이다. 살고자 하는 모든 욕구와 욕망들은 전부 사망에 이미 매여 있는 몸에 지나지 않을 나타내는 증거들이다. 인간은 선악의 지혜 안에 빠져들어 간 순간부터 사망이나 생명이냐를 놓고 선택한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선악의 지혜 안에 놓여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사망의 몸이 되었다. 악은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활개치면서 활동한다. 인간은 악의 노리개에 불과하다. 좋아서 하수인 노릇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고 싶은 욕망은 가득 차 있지만 이 욕망은 더 큰 욕망에 이미 꺾여 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바로 처지가 된 것은 먹지 말아야 할 선악의 열매를 먹고 그 지혜의 세계 안에서 살게 된 시점부터이다. 왜 선악의 지혜 안에는 매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가?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을 아는 지혜는 하나님만이 알아야 될 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22절).
이 본문에 보면, 인간들이 선악 지혜를 알게 된 것을 하나님 쪽에서 환영하고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도리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바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그 주인공은 따로 있다. 만약 그 주인공이 아닌 자에게 이 지혜가 들어가게 되면 누구든 간에 그 자는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어 있다. 악마와 인간이 그 신세가 된 것이다. 즉 선악의 지혜를 자기 것으로 삼는 자는 처음부터 선악의 지혜자인 소유자이신 분으로부터 원수가 되고 공격이 대상으로 전락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면서 선악 과실에 대한 안부를 물은 것도 이런 차원에서이다. 또 뱀을 통한 악한 유혹자가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축인 것도 이런 차원에서이다. 이미 원수 관계에 놓여진 그 전쟁이 에덴동산 안까지 번진 것이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7-9).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부터 하늘의 전장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악과 한 통속이 되었다. 선을 지향하는 욕망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악에서 선으로 건너 넘어갈 수 있는 방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철저하게 악의 노예가 되었기에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수치감에 휩싸였고 자신의 몸을 가리는 욕망이 싹텄다. 그러나 그 몸은 내부적으로 악이 팽창되고 온 지체를 악을 지향하다가 결국에는 사망으로 미끄러져 가는 몸이다. 선을 위한 욕망이 최종적으로 악에게 봉사하는 욕망으로 전환된다. 하나님은 선악 지혜를 가지고 인간에게 다그친다. 그 동안 악에 대해서 무감각했던 자도 선한 계명을 접하는 순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악이 발작을 일으킨다. 이제 악의 권세성이 얼마나 엄청난 권력으로 작용하는 지를 몸소 체험하고 자신의 곤고함과 절망감에 몸서리친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이미 죽은 자로 인식한다. 법이 선하기에 자신이 마땅히 사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이해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아직 무지한 상태에 있다. 이런 자는 비록 악의 욕망이 내부에서 활개를 치고 있어도 자신은 아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인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무지를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죄악을 지적하기 위하여 선의 참 본질을 지속적으로 투입시켜 왔다. 악을 이기고 악마를 땅의 세계로 추방시켜 버린 하늘의 그 선의 원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흐름을 따라 지상에 등장됨으로 악은 그 정체의 숨길 어떤 여지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참 선과 악은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되는가?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다시 살펴본다. 제사를 드린 후에 가인의 낯이 분노로 충만 되어 붉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무엇이 가인으로 하여금 화나게 했는가? 가인은 신과 관계를 맺고자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의 욕망에서 나온 행위이다. 가인이 내세운 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신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신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의한 가인에 대한 거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인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에 거부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했던 제사 모범을 가인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이 아니다. 도대체 제사 모범, 예배 모범이라는 있을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3).
이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예배 모범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악이다. 악이 침범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몸의 모든 지체는 이미 악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땅 자체가 지닌 어떤 일관성 있는 사고 체제를 하나님 편에서 거부하신다는 몸짓이었다. 제사를 거부한 것은 현 인간의 궁극적 지혜의 성향 자체를 전면 부정한 것과 다름없다. 가인은 인간 몸에서 최초로 태어난 자식이다. 그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 맏이 되는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거절했다는 점에 있다. 가인은 그 당시에 땅을 대표하는 자이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서 제사를 드렸다. 가인과 그 예물은 곧 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의 거부한 것은 땅의 현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가인이 하나님을 모른 체 하겠다고 다짐하고 반항하는 자세에서 제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런 제물도 바치지 않고 성의도 없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다. 단지 가인은 전형적인 땅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땅의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근본된 땅을 갈아야 살 수 있는 자들이다. 땅의 사람이란 곧 하나님으로부터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부정적 입장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살아야 되는 자들이다. 그 추방된 자가 추방되어서 살고 있는 근본의 땅에서 생산된 소산물 중 일부를 하나님께 제사를 통해 바치려고 했고 가인이 그 일을 맨 먼저 했다. 땅의 입장에서 봐서는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다.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의 차이는 성의의 차이가 아니라 직업상 차이에서 구분된 것뿐이다. 가인으로서 달리 다른 제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로서 땅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나설 수 없는 입장임을 분명히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 자체가 악의 본질이라 말 할 수없다. 악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같은 형제인 동생 아벨과 그 제물을 받고 부터였다. 갑자가 가인의 심령이 분노가 가득 찼고 그것이 얼굴 색 변화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 악이 노리는 바는 이것이었다. 반항이었다!
하나님이 지상에서 실행하시는 일에 대한 반항 의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솟구쳐 올라온 것이다. 악의 솟구침이다. 자기 제사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니다. 동생의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열납되었다는 그 사실과 상대적으로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다는 사실 사이에서 악은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어 가인의 얼굴을 장식했다. 단지 가인의 지혜의 무가치성과 무용성 때문이 아니다. 가인이 자기 제사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했다면 구태여 동생을 살해할 필요성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제사드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동생이 제사 드리는 식으로 드린다든지 아니면 제사 받으실 때까지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식으로 계속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가인이 분노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여기서 반항심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신에 대한 적대감으로 번졌다. 가인의 심령을 이렇게 자극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차별적 행위에 있었다. 가인은 화를 내면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린 결과를 놓고서 화를 낸 것이다. 그래 놓고서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되레 가인에게 따지신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여기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말씀에 유념 할 필요성이 있다. 가인이 제사 드리기 전에 분노로 고개 숙인 채 드렸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제사 드리고 난 뒤의 일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 뒤의 일에 대해서 가인이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 선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인의 생각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즉 가인이 지금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을 선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가인은 선하지 못한 결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의 차이가 분노가 되어 얼굴에 덮고 나타났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를 준다. 이것은 인간에게 짐 지워진 그 현실을 극명하게 지적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악을 이겨야만 하는 존재에 놓여 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라고 했다. 인간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창세기 3장에서 죄 지은 이후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 인간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만들어 자기의 하체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고 있다. 인간이 행위가 담겨 있는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하나님께서 부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옷이 아담과 하와에 덮히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아담과 하와에서 남기신 생명의 약속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즉 인간이 만든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정신과 원리는 대대로 취소되지 않고 살아 있게 된다. 이런 관점을 이어나가 생각해 보면, 가인은 동생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는 그 하나님의 행위에서 은혜성을 읽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 것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에게 분노의 낯 빛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악이 소원하고 있는 바였다. 신이 하는 모든 일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이다! 악이 발췌된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고 선택하시는 일을 통해 악은 그 정체를 계속 은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인의 이러한 악에 사주에 의한 반발심은 결국 최초의 살인 사건을 유발시켰다. 살인 그 자체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더욱 더 근본적인 면이 있다. 우연히 사람 죽였다고 다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피성에 들어가서 목숨을 구하게 되는 살인도 있는 것이다. 악과 연계된 살인만이 범죄이다. 다윗이 아말렉 소년을 죽였다고 살인이 아니다(삼하 1:15). 그러나 밧세바의 남편을 살해한 것은 살인죄에 해당된다(삼하 12:9). 악의 근원과 연관성을 가질 때만 죄가 된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죄이다.
악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가인에게 있어 그의 욕망은 악의 본래의 성향을 드러낸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란 절대적으로 자아를 감싸고 방어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로마서 7:5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여기에 보면, '죄의 정욕'이라는 말이 나오며 또한 '지체'라는 말이 나온다. 인간의 죄악된 욕망이 지체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죄의 정욕은 이미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따라서 자아의 욕망을 조절하거나 관리해서 선을 이룬다든지 아니면 악을 발생시키는 것은 차원에 인간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체는 더 이상 제것이 아니다.
단지 율법에 의해 죄의 정욕이 활개치면서 활동하는 매개물에 불과하다. 이 관계를 로마서 7:1-4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남편은 주관자요 아내는 남편에서 매여 있는 신세라는 것이다. 이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은 인간을 분석한다. 인간은 죄가 발생하는 중심지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덜 짓고 보다 선한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는가?"라는 욕구를 지닌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 자체가 성경이 보고 있는 인간상과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자아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의 소망을 만족시켜 주는 계시가 아니라 도리어 그런 관점으로 자아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 그 자체의 허점과 문제점을 낱낱이 폭로하는 기능으로서의 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제대로 알리시는 계시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으로 자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그 모습 자체가 죄에서 유발된 것이다.
죄가 무엇이냐를 찾아내는데 있어 우선적인 해결책은, 왜 인간은 성경과 다른 관점에서 자아상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그 원인을 파악하는데 있다. 즉 왜 인간은 성경과 다른 관점을 가진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나름대로의 죄관을 따로 마련하여 그 차원 안에서 죄와 선을 구분하려고 하느냐 하는 점이다.
로마서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이 본문에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은 인간은 다른 식의 죄관을 가졌기에 제대로 된 죄에 대해서 감히 죄라고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율법이 주입되지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면 율법이 오기 전까지의 사람들은 과연 의인들이었는가? 성경은 어디에도 이점에 대해 단연코 거부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의 죄는 모르고 있지만 죄의 결과를 나타내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의 보편성이다. 마치 창세기 5장 족보에서, 사람들의 수명을 기록해 놓고서는 뒤에 가서 '죽었더라'를 반복해서 나열하는 취지와 같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오래 사는 것이 그 자들의 운명의 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운명의 질은 바로 '죽었더라'라는 표현 안에만 담겨 있다.
사망의 보편성은 곧 죄의 보편성을 뜻하며, 사망의 왕노릇은 곧 죄악의 왕 노릇이 된다. 뒤에 가입된 율법은 바로 이런 현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인간들은 어떻게 산들 죄와 그의 징벌은 사망의 형벌 아래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7:4의 '율법을 통한 사망의 열매'란 바로 이런 과정을 함축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제 죄를 증명해 주는 율법을 다시 회수해 버린다 할지라도 사망의 보편성이 인간 세계에 여전히 적용되어 있는 한 바로 이런 차원에서 죄관을 수립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사망의 왕노릇과 관련 짓는 죄 개념을 구성해야만 참 죄관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동안 인간들이 성경 밖에서 잘못된 죄관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기 사망, 즉 자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를 기정 사실로 하지 않고 도리어 자아상을 왜곡되게 긍정해서 자기 존재의 영원성을 확보해 놓기 위한 필요 때문에 구성된 죄관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악을 어떤 식으로도 멀리하고 선만 확보하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자기 구원관을 최종 가치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맹목적 자기 구원관에 집착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만든 세계의 원리와 원칙을 반복적으로 반발하는 요인이 된다. 이것이 죄이다. 인간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구원관과 종교관, 계시관은 하나님이 생각해 놓으신 계시와 늘 충돌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겠다는 욕망으로 행동을 추진하는 반면,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뜻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이러한 생각들은 이미 알게 된 선악에 관한 지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선도 알고 악도 아니까 그 아는 지식을 통해서 자신이 세상에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구원의 근거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악을 아는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저주의 목표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더욱 더 깨우치게 하는 기능밖에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그래서 사망의 보편성이 합당한 것이 되고 생명 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조처한 하나님의 조치가 올바른 것이 된다. 인간에게 있어 이처럼 선악의 지혜는 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악과 지식을 알게 된 그 자체가 악한 일을 만고 역사 안에 분명히 새기기 위한 확증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선악 지혜의 원래 지향점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다. 하나님의 의만 나타난다면 모든 선한 법과 지혜도 종결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율법이 주입되기 전에도 사망은 인류의 운명을 장악했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있어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여전히 죽음으로 치닫는 운명의 소지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죽음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선과 악의 지혜와 연계해서 생각 할 줄 몰랐다.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하여 순수하고 바르게 살아간다고 여겼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은밀한 것'까지 심판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롬 2:16).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시 90:8).
인간들은 이미 죄에 매여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선악에 의한 심판에 종속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엄하고 선한 법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기에 인간은 율법에 매여 있는 아내와 같은 것이다. 일부로 죄 짓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망의 열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되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을 선과 악 사이에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절대자처럼 여기고 있다. 뱀은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속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범죄한 인간들이 눈이 밝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이었고 지혜였다. 역시 인간은 피조물 그대로 남았지 결코 신은 될 수 없었다. 악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뿐이다. 인간들은 너무나도 맹렬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세계로 잠입하고 만 것이다. 저주를 알게 되었고 사망이 무엇이지 알게 되었고 심판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지혜에서 그 선이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있어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느껴지는 지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인간들은 악한 본성 안에서 만들어 내는 선, 그것을 선 인양, 혹은 의 인양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다가 결국 원인도 이유도 모르는 채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앞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애초부터 인간들이 행해서 달성되는 선이나 의는 있을 수 없었다. 무슨 행위도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악한 행위들이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0-17) 게다가 다음과 같았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
자기네들끼리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설정해 놓은 선과 악의 기준은 이제와서 소용이 없었다.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기준이 나타났고 그것을 통해 그동안 인간들이 연상한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이 아니었다. 더구나 인간들의 네세운 그것으로 인해 더욱 더 저주와 사망으로 내 몰리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들의 악에 근거를 둔 기준성으로 오히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고 살해하고 치워 버리고 무시하고 모독하는 악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왜 인간의 의로워질 가능성을 막느냐? 왜 인간의 선한 자질조차를 인정해 주지 않는가?"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짓밟고 배격했다. 자기 스스로의 의와 윤리로 사망에서 구출되어 보겠다는 그 집념은 하나님의 엄중하신 선한 법을 업신여기고 모독하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은 애초부터 달랐다. 참 율법의 주인공과 그들이 해석해 낸 율법의 정신은 근본부터 일치점이 없다. 그들의 법의 안목으로 봐서 하나님의 의로 오신 분은 기껏 불법자의 동류에 지나지 않을 그런 가치에 머물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 22:37).
인간들은 율법을 잘못 읽어서 율법 없는 생활에 대해서 상상도 못했다. 오직 율법의 남편으로 원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롬 7:6).
이 본문의 말씀조차 그들은 억지를 부려서 더욱 보다 완벽하게 더 율법화된 남편으로 간주하려 한다. 즉 율법은 영에 비해서 덜 완벽한 율법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을 섬기면 자기네들이 더욱 온전한 율법 실행자가 된다고 여긴다. 성경대로 말하면 더 이상 율법이 필요치 않는 것이 영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점을 믿지 못하고 영이라는 것이 마치 신종 율법으로 간주한다. 즉 자기네들 행함 여부에 따라 의와 악이 구분되는 새로운 율법 조항으로 변개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행함에 따라 정립되는 자아상이 오직 법 체제, 선악 체제 안에서만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항상 자기 존재를 가지려고 한다. 자기가 자기를 소유하려고 욕망한다. 그러니 소유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와 소유의 대상으로서의 자기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발생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자기 찾기에 나서는 가운데서 그저 선과 악이라는 지식의 범주 안에서만 수시로 자기 자아상을 챙기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상 안에서의 사는 목적과 이유를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항상 법 구조 안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인간은 도대체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자크 라캉의 의견은 이렇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신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욕구가 발생한다.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요구는 이미 자신이 법적으로 파악해 놓은 세계의 원칙 안에서 요구가 일어난다. 법이 요구하는 대로 법 안에서 욕구를 만족하려 한다. 그래서 법을 남편처럼 떠받쳐 모신다. 마치 남편없는 삶은 상상도 못하겠다는 아내처럼 말이다. 참된 자아상을 그 법 앞에서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그 주체에서 나오는 요구도 법적이다. 그런데 그 법이 깨어진 주체를 유발시키게 되었다. 소위 말해서 '분열된 주체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향유해야 할 자리가 결핍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뭔가 거세(제거)된 것이다. 여기서 불안을 느낀다. 종잡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 여기서 불안을 느낀다. 우주를 법으로 체계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은 곧 내가 나를 법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장애가 발생했다는 말이다. 욕구가 요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욕망이 생겨난다. 욕망이란 욕구와 요구의 차이이다. 법적으로 이해해 볼 때 깨어진 주체상으로 드러나지만 이제부터는 욕망의 구조로 주체상을 해석하게 된다. 결코 충족될 없는 욕망이지만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무환히 대상을 소유하여 자기 자신과 일치화 시키려고 한다. 소위 말해서 은폐요 가리움이다. 그런데 이 일치화는 '상상적 동일화'이다. 마치 어린애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변열된 자아상에서 벗어나 그 거울상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간주하는 식과 같다. 인간은 '상상적 동일화'의 토대 위에 '상징화'가 시도하게 된다. '상징화'란 타자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일치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기호와 기표들을 동원시키고 전전하는 하는 것을 말한다. 결핍이 되는 대상은 거세해 버리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것을 찾아 상징화하므로서 만족을 하려는 식으로 욕망은 움직인다.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원하는 게 뭐지?"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거울 앞에 있는 아이같아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르고 단지 타자가 나에게 뭔가 계속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 안에서 타자의 의미가 자기의 의미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동일성이 형성되는 이중의 메카니즘의 토대 위에 놓여 있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계속해서 분열된 주체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절대적 가치자로서의 자아를 설정해 놓았기에 모든 가치가 생성되는 곳이라면 여지없이 절대적 자아상이 끼어들게 된다는 말인데 바로 이점이 라캉이 인간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바이다. 즉 생물학적인 욕구를 절대점으로 출발했다는 점이 진정한 지혜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다. 라캉이 밝혀놓은 무의식 속의 자아상 속에는 왜 인간들이 자기 절대화를 시도하는가 하는 점이 나타내 주지 못하고 있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절대적 자기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는가 말이다. 그것이 이미 자신을 절대적인 가치자로 확정시켰기 때문에 그 자아상를 외부로 계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야, 나는 과연 절대적 존재자이구나!"라는 점을 늘 재정립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이며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다. '이미(already) ― 아직(not yet)'의 구조는 시간을 통한 자기 정립을 시도할 때 필히 드러나는 시간 구조이다. 선과 악이라는 대비적 가치 사이에 끼어있는 욕망이기에 이 욕망은, 악함을 늘 의식해면서 선함을 지향하는 그 선한 양심을 실천케 하는 힘이 된다. 이로서 양심은 늘 법제화 되어 있다. 새로운 자아상을 찾고자 시도하는 그 원칙도 기존의 자아상을 형성했던 선악과 지혜 라는 원리 밖으로 못벗어나기에 계속해서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 라고 하는 가치성 문제만을 최종 거론하게 된다.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항상 난제이다. 단지 나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착하고 선한 인물이냐를 하염없이 외부로 드러내고 싶고 스스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누구냐?"라는 것은 영원히 물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물음이다. 인간이 본디부터 선을 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왜 자아 속의 욕망은 악에 대해서 그토록 두려워하고 그곳에서 구원되려고 끝없이 투쟁하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드러난 것으로 원래의 것을 대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선과 악의 논리에 빠져있기에 거기서 구원되고자 시도하면서도 그 수단으로서 또 선악 논리를 동원해서 적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영원한 한계이다. 정말 이렇게 되면 구원 아니다! 그저 구원되려고 아둥바둥하는 애쓰고 있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아무리 성령과 복음을 말해 주어도 인간들은 고작 선과 악 사이의 가치 조율을 통해서 선한 세계로 도약을 시할 뿐이다. 악한 것보다 선한 것을 원하는 취향이니까 자신은 그 어떠한 선한 세계에서도 살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아를 새 모습으로 상징화해서 입힌다 할지라도 귀한 존재로서의 자아상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결국에는 자기 이름을 찬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기 잔치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인식과 논리의 과정들이 일률적으로 오직 이것만을 목적으로 고정된 순차를 따르게 된다.
영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란, 단지 이 당연함을 얼마나 잘 비호해 줄 새로운 법적 조치인가를 탐색하기 위한 관심일 뿐이다. 영의 세계조차도 자기네들이 이해한 율법 세계의 원칙으로 읽고자 한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존재 의미와 그 노고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토대로서의 영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적에 바탕으로 놓여진 영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공적만 그대로 나와야 하는 영이 인간들의 죄악된 해석에 의해서 인간들의 행함 여부에 따라 은혜도 되기도 하고 은혜가 되지도 못하는 그런 영으로 전적으로 바뀌어 통용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있어 율법 남편은 결코 죽지 않고 여전히 남편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저주의 대상으로 남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그런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죄의 기준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의 영이 남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죄의 기준이 바뀐 자는 자신의 존재 기준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안에서만 확증한다. 바로 최종적인 자기를 향한 심판을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는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도 죽었지만 자기도 죽었다. 예수님이 당한 저주의 심판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때문이다. 이점을 두고두고 잊지 않은 채 자아를 생각하는 자가 성도이다. 이것이 바로 영 안에서의 자세이다. 십자가에서의 저주는 율법이 자아에게 쏟아 붓는 모든 저주의 총량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11,13).
이 율법의 저주에서 죽은 자에게 남아 있는 저주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이제 율법의 저촉을 더 이상 받지 않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기 육체적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애를 쓰지도 않는다. 오직 믿음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만약 여전히 율법 안에서 자신을 의로워지려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뿐만아니라 그 자에게 있어 예수님의 죽음은 헛것인 것으로 취급당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죄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헛것으로 간주하고 여전히 자기 육체에 기대를 거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이런 자들을 성경에는 '육체를 따라 난 자'라는 호칭으로 불려지는데 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잇지 못하고 내어 쫓김을 당하는 부류이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30).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거기에 비해서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는 태도, 이것을 성경에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 믿음의 세계는 영의 세계이다.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속한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아버지로 불리신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 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이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아직도 율법의 종노릇하는 짓은 그만 두어야 한다. 즉 날과 절기와 해를 삼기 지켜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형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 4:19-20).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기 노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약속에 준해서 주어진다. 약속이 무언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약속 주체자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제외되어 있다.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과, 뱀의 후손 곧 악마와의 싸움의 결과가 곧 약속의 성취이다. 바로 이 약속 성취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 바로 악마의 함정에 빠진 결과이요 죄의 본 모습이다.
신약에 와서 약속 성취는 십자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십자가로서만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고 그것으로 인해 악마의 죄의 정체는 전부 노출되었다.
악마는 끊임없이 인간의 행함의 지혜를 동원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 성취는 결코 인간의 행함에서 나올 수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인간은 죄악 속에서 죽어야 할 상대이다. 더 이상 자기 속에 의가 없음을 십자가 앞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 또 자기 행위에 따라 죄가 더 증감된다고 믿어서도 아니된다.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악이다. 더 선이고 더 죄가 되는 그런 바탕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에 기초해서 나타난다. 그렇지 않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 육체를 동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여전히 죄 안에 갇혀 못 나온 자이며 하나님 저주의 상대자로 남아 있는 자이다.
계속 율법 준수자가 되려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신약적으로 볼 때 곧 저주 안의 존재이다. 자기 행위에 집착하고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의 행위 차원에서 다시 재 정렬하는 것으로 비로소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즉 "그렇다면 제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어떻게 행동하란 말입니까?"라는 물음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