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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김영규 교수의 조직신학 편람 1을 읽고성경신학[신학]

김영규 교수의 조직신학 편람 1을 읽고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Ⅰ. 서 론

대략적인 정리

1. 김영규 교수의 신학 작업에 있어 3가지 기본 전제
(1) 성경 외에 또 다른 신과 관련된 개념 하나를 따로 마련해 놓고 있다. 그 토대가 바로 '계시'라는 개념이다.
(2) 하나님은 그리스도 위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위주로 일하신다.
(3) 하나님께서 증거 하시기를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조직신학이다. 따라서 우리 신학자들이 조신학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증거하고, 그것을 소개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하나님도 기뻐하실 줄로 믿는다.

2. 이와 같은 세 가지 전제는 대략 다음의 네 가지 무지성 때문에 발생된 열매들이다.
(1) 종교적 유신론과 복음과의 차이점에 무지함.
복음적 용어들을 총동원시켜 적당히 배치해 놓았다고 해서 복음적 신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적 신학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적 유신론자들인 유대교인들과 충돌했으며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는가를 그 원인이 되는 근원적 사상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2) 논리상, 성경에 대한 인식론이 당연히 신학 전개에 있어 전반에 퍼지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
즉, 김교수 본인은 자신이 나열하고 있고, 또한 알게 되었던 그 모든 전반적인 원리가 그의 전 신학에 걸쳐 반영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결코 그의 신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 중심으로 혹은 신에 대한 인식 중심으로 나열하지 않게 되어 있고,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 교수는 말로는 그리스도로 통해서 계시가 온다고 해 놓고서는 중간 과정을 철폐하고 최종적인 그의 기대는 하나님과 바로 통하려고 시도한다. 과연 이러한 그의 발상 자체가 성경이 용납하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봐야 한다.
(3) 김교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
마치 죄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소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반발하는 죄악의 적극적 기능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메시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변형시켰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인간을 장악한 죄의 결과를 성경 자체에서 찾아보지 않고 그저 상식 선에서(유신론적 철학 및 양심상 윤리적 측면을 고려함)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김교수에게 신학적으로 치명적인 허점을 안겨주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피해가고 십자가와 무관한 껍데기 신학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4) 김 교수는 사단이 노리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
사단이 중점적으로 노리는 바가 오직 기름 부은 자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을 김 교수는 모르고 있다. 김 교수는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저 인간들의 종교적 활동이나 경건된 활동을 방해하는 그런 장애 요소 정도로만 알고 있다.

Ⅱ 본론

1. 유신론적 포괄 철학의 산물

김 교수는, 인간의 사고 모델이 언어 행위로 통해서 구현된다고 보고 이 언어적 기능을 계시가 주입되는 창구로 삼았다. 마치 인간이 상호 의사 소통하듯이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도 인간의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진리가 외부에서 와야 한다는 생각은 신화적 단계에서는 인간들이 흔히 생각해 왔던 것이다. 김 교수의 말대로 오늘날 현대에 와서 기능적 단계로 넘어가서 비인칭화된 것이 문제라면(p.7) 다시 신화적인 단계로 환원해도 문제이다. 여기서 신화적 단계에서의 신의 계시론과 김 교수가 내세우는 계시론과의 무슨 차이성이 있는가?
김 교수는, 신화적 단계에서의 계시에 대한 인식과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의 권위성을 일치시킬 하등의 논리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하고 무리하게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즉 성경 말씀과 인간들이 만나는 그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하기에 김 교수는 '계시'라는 새로운 파일을 따로 준비시켜놓고 [인간의 언어-계시], 더 나아가서 [계시-성경] 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따라서 그는 세 가지 무리한 모험을 자청하게 된 셈이다.
첫째로, 기능적 단계에 접어든 현대인들의 언어관에다 신화적 단계의 사상인 계시 관을 접목시켜야 하는 일. 둘째로, 임의로 설정해 놓은 '계시'라는 개념과 일반적 종교 경전으로서의 의미를 거부하는 성경적 성경 개념을 연결해야 하는 일. 셋째로, 인간의 언어적 기능에 의해 포집되는 하나님의 감동으로서의 성경과의 관계를 짓는 일이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 다 허공을 칠 작업이 되고 만다는 점은 김 교수의 잘못된 계시관에서 오는 성경관 때문에 생기게 되는 필연적 결과로서 뻔한 일이다. 그는 말하기를,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p.28). 이 주장이, 신의 계시가 인간의 자의식이나 직관에서 나온다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면 김 교수는 쓸데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게 되면 신의 계시가 어떻게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은 크게 이슈가 될 문제가 아니다. 논쟁점은 딴 데 있다. 즉 신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인간이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해서 은혜와 자비를 거론했는데(P.31 중간)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계시를 은혜로 보지 말고, 신의 존재하심 그 자체를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원리적 표현이 아닐까? 즉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계시하셔서 그 은혜성을 드러내셨다는 주장이 보다 책임성이 있는 발언일 것이다. 만약 하나님은 진작부터 은혜로우신데 인간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괘씸해서 계시를 안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이왕 본인께서 은혜로운 분이시기에 더욱 더 은혜로운 쪽으로 일을 추진하시고자 소위 "계시하셨다"는 계시 행위적 은혜성을 추가적으로 더한 것이 김 교수의 논리 취지이다.
하지만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애타게 요청한 경우라면 그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응답하사 계시를 하셔서 이런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행여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인간들에게(죄인들에게) 괜한 계시를 주어놓고서는 "자 나의 은혜를 보아라. 죄인에게 알려줄 필요도 없었는데 이렇게 계시하니 나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냐?" 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리어 인간들에게 심적 부담만 가중시켰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실상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하라고 요청하지도 않는다. 김 교수가 전개하는 모든 신학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죄로 인해 기존의 왜곡된 계시관과 하나님 상이 들어 있음을 아예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하는 점이다. 김 교수는 생각하기를, 인간이 왜 하나님의 계시를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가 그 이유와 그 원인을 구태어 밝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신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 생각과 어쩌면 꼭 같은가!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이미 유대인들의 죄의 근원에 접근해서 지적하고 계신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3-37).
- 이 본문을 살펴보면, 이 대화를 구경하는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결국 저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궁극적 죄의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설정해 놓으시고, 유대인들이 죄의 종이 되었기에 그런 결과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서도 예수님쪽이 너무 과민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단지 그들 손에 있는 율법을 철저히 분석해 본 결과 '예수라는 분은 결코 메시야가 아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정도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런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 (제3자가 들으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독선적 주장)― 점을 근거로 해서 유대인들을 포괄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중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만약 김 교수가 이러한 주님의 뜻에 동조한다면 하나님 존재나 하나님 계시론에 의한 죄관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죄의 기준으로 등장 세워야 마땅하고, 만약 그렇지 않고 유대교인의 주장을 따라 신의 존재성을 근거로 하여, 그 하나님의 존재성을 시발점으로 하여 성경(율법)을 -문맥적, 역사적, 문법적, 사회적, 교리적으로 해석을 시도한다면 김 교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이다. 불행하게도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하나님의 속성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밖에 있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정리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기독론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경우에도 위험하다. 바빙크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확실히 성경의 중심이요 주 내용이지만, 바로 그가 중심점이 되기 때문에 그 분이 출발점이 아닌 것이다"(p.25 밑 12째줄) - 이 주장의 속을 들여다보면, "중심점이 되기 때문에 그 분이 출발점이 아닌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김 교수는 중심점과 출발점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관에 대해서 말이다. 자,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은 출발점과 중심을 과연 이런 식으로 나누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시작도 끝도 오직 예수님 뿐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이 본문에 봐도 중심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신학을 하면서 오직 계시 따라, 성경만 따라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 교수가 왜 가장 중요한 출발점부터 성경을 비켜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김 교수 본인이 어떤 거대한 신학 체계, 우주적 체계를 확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비쳐진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소위 [삼위 일체]라는 패러다임으로(범례로) 묶어 놓으면서 표현 되어왔던 지난날의 교리 신학을 김 교수는 그대로 자신의 신학 전제로 수용하면서(성경을 진리의 최우선 전제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최우선적 전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 신학에 맞추어 역순해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꼭 유대교인의 신학 전개와 닮았다. 일단 진리체로 확립시켜 놓은 삼위일체적 인상을 지닌 하나님 관을 (교재 p.10에서 김 교수 본인이 G. Frege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인간 언어 기능으로 산출된 진리 관을 비판한 것과 같이 이 삼위일체라는 교리도 그저 언어 뭉치에 지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느낀 바를 밖으로 표출한, 후기 Wittgenstein 주장처럼 단지 언어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확인하고 되풀이하기 위한 추인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삼위일체 교리를 교회마다 심어주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참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데 있다.
쉽게 예를 들면, 어떤 가정에 식구가 네 명인데 이 집에 강아지가 새로 들어 왔다. 그래서 온 식구가 그 강아지를 자기 집안 식구처럼 귀여워했고 이름도 형제 항렬을 따라 사람 이름으로 지어 불렀다. 바로 이러한 개에 대한 사랑의 책을 발간해 놓고 나니, 그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들은 그 책의 주제가 '강아지 사랑'에 주안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상스럽게도 호구 조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동사무소 직원은 그 집에 누가 새로 동거인으로 주민 등록을 한 것으로 상상해서 그 집안에 대한 거대한 호구를 새로 시작하려는 하려는 것과 같다. 관심과 주안점이 원래 집주인과 차이가 나 버린 것이다. 실제로 동사무소 직원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안에는 사람이 네 명이고 강아지가 한 마리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손치더라도 그 동사무소 직원은 가족들에게 호응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집주인이 한결같이 사랑하고 있는 그 강아지에 대해서 동사무소 직원은 그 사랑에 같이 동참하지 않고, 그는 단지 자기 본래의 업무에 바빠 또다시 옆 집 호구 조사에만 열심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있는 네 식구가 한결같이 강아지에 대해서 애정을 표현했다는 책을 진실 되게 우호적으로 읽는 독자라면 그 집안의 생각에 동조를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높이는 것- 바로 이점이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된 사역임이 제시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성경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호구 조사라는 자기 업무에 분주한 동사무소 직원처럼 자꾸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정보만 입수해서 거대한 신학 체제를 세우는 데에 관심 있는 자는 이러한 사랑에 도무지 참여 할 수 없다. 삼위일체 신학으로 역순 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방식은, 성경에서만 늘 규정을 해야 될 고유의 영역인, '옳다' '그르다'의 판정을 미리 해소해 버리고, 그 판정의 대상에서 건방지게 이미 벗어나 있는 듯한 행세를 남긴다. 그리고 난 뒤 멀찍이 물러서서 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핑계와 변명만 나열할 뿐이다.

"신이시여, 저는 신학자인 동시에 목회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를 남들에게 소개해야 될 본래의 업무가 있습니다. 신이시여, 이 관계에 대해서 저는 권위 있고 무오한 성경을 통해서 알기 쉽게 체계를 갖춘 참으로 정통적 신학 체제를 정립하여 저 민중들과 후학들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신이시여, 이런 저의 생각에 있어 신이 보시기에 무슨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확실히 삼위일체의 그 깊은 신비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그 곳에서 흘러나옴을 인정합니다. 신이시여, 저의 이러한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칭찬 좀 해주세요!"

바로 이런 정신 상태에 놓여 있는 김 교수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어라고 답변하시겠는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오직 다음과 같은 답변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높여라.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영광 상태이다.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성취해 내신다. 그 분에게만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멘'이 된다(고후1:19-20)"

김 교수가 모르고 있는 점은, 성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줄로 여긴다는데 있다. 성도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자기 이름이 부정당한 자를 뜻한다. 성경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오직 언약을 위해 줄기차게 일하시고, 그 언약의 상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홀로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그러면 왜 김 교수는 이런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의 근원적 죄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고, 자꾸만 하나님과 그의 나라만을 추구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는 것을 거듭난 자의 도리와 임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 밑바탕에는 '어찌하든지 인간에 대한 가치성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해 수모를 당하셨다는 점이고, 아울러 오늘날에는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삼위일체의 종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를 전제로 내세우는 자들은 말하기를, - "안다 안다. 우리들도 십자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성취를 안다. 그러나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일단 구원의 세계에 들어온 자들을 향한 효과 있고, 효력 있는 학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이상 죄가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구원이 가능한지 하는 그런 초보적이고, 어린애 같이 젖이나 먹는 문제에 계속 머물 수는 없지 아니한가(히 6:12-14)? 일단 구원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신비에 대해서 찬양하면서 그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논하고 정리하는 신학을 수립하겠다는 데 도대체 무엇이 시빗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일단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보니 그렇게 사랑을 먼저 계획하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었고, 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시도록 감화 감동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저런 내용까지 포함해서 담아내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며 전통적이며 복음을 타고 내려온 교회사의 모든 성도들이나 신학자들의 한결 같은 일치된 고백이다"-라고 자기 변명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 안에는 자신을 구원하신 그 주체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들은 간파해 내지 못하고 있다. 즉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라고 지칭하는 자들을 보는 인식과 소위 자칭 '거듭났다'라고 주창하는 이들의 인식과 동일한가 하는 점을 성경을 통해 검토해 볼 생각을 이들은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자아가 어떤 식으로도 부정 당하는 것을 이들은 몹시도 꺼려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부정 당하는 대신 도리어 한껏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은 죄인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신학이라는 작업을 통해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제대로 거듭난 자라면 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과 자신의 신에 대한 종교적 왜곡 성을 대비하면서 진척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김 교수의 글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지 아니한다. 예수님께 영광과 찬양을 언급하려면 그런 말을 나열시키고 풍부하게 고백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자아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현상이 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김 교수가 주장하는 그런 삼위일체 신학으로서는 절대로 회개가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에 있어 십자가 사건은 그저 삼위 일체 신학으로 통합되는 그 과정 안에서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간편한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사랑이라는 것으로 쉽게 극복이 되면 더 이상 십자가 사건은 과거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김 교수가 말하는 소위 '예수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은 그 의미와 내용을 빠트리고 지워버린채 채 그저 상투적 용어만 나열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실제 내용은 '삼위일체 안'이요 '성부 하나님' 안이다. 이런 발상은 성경 전체가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날조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성경이 모든 것을 성부 하나님 안으로 소급 처리 해 버리는 것일까?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 22:3) - 여기에 보면, '어린 양'의 보좌도 하나님 보좌와 함께 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보다 더 크다고 여겨지는 포괄적 개념 안으로 흡수 통합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4-28).
- 이 본문에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라는 말씀과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라는 말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이상 아들의 나라의 시점을 통과해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의 나라와 아들의 나라를 차별하고 그 두 사이에서 오직 예수님 나라만을 참된 나라로 인정하겠다는 복음적 차원의 뜻을 나타내신 말이다. 즉 예수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통합 흡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의 나라는 없고 이 세상 나라는 이제부터 그 하나님 나라로 통합된 나라와 직접 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나는 방식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시는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이 집중 지점을 성부 하나님의 선까지 상향 조정한 신학 체제를 내놓는 것이다. '더 포괄적이니까 더 진리에 가깝지 않겠느냐'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라면,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신학은 그 자체에 궁극의 목적을 갖기 때문에, 그 진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그 지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11밑 6째 줄).
김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최고 선 = 신]이라는 등식에 대해 성경이 옹호해 주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서이다. 즉 최고선을 복음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고 임의로 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모든 것이 주에게만 해당된다.
김 교수는 '주' → '하나님'으로 시도를 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선에서 멈춘다는 사실이 구약 제사장 언약의 비추어봐서 철칙인 것을 그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언약에 대해 그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 그저 성자보다 더 높다고 여겨지는 성부 하나님과 맞상대하는 날을 고대할 뿐이다.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 상위 개념이니 더 높은 곳에 모든 진리가 더 분명히 정립될 것이라는 논리 때문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타고 넘어 성부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자 하는 이 시도가 과연 성경적으로 용납이 되는가 여부를 묻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신비에 대한 호기심과 충동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를 가지고 자기 신학의 정당성을 일부 변호한다. 그의 강의안 23페이지의 밑에서 4째줄에 보면, - [예수님 자신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이외에 선한 이가 없다(마19:17)고 표현하심으로 유일한 하나님이란 유일한 선한 하나님으로서도 충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분명하게 구약에서 유일한 하나님("네게 내 앞에 다른 신을 구하지 말라" 출 20:3; 신 3:7, "여호와는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의 하나님이니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신4:39 "나는 여호와이니 더 이상 아무도 없고 나 외에 신이 없다"-사 45:5, "나는 여호와이니 나 외에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도 없다"-45:6)으로서 여호와 자신이 우리를 위한 최고선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 라고 언급을 하고 있다. - 하지만 이상의 김교수의 성경구절 인용은 신학 체제가 잘못 형성되면 각 성경 구절들이 얼마나 왜곡되게 피해를 보게 되는가하는 점을 잘 보여주는 증거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19:17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이 본문이 어찌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누가 최고선이냐를 놓고 판정하고 시비를 가리기 위해 거론될 수 있는 귀절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은 율법에 대한 관심사를 질의자에게 재차 예수님이 촉구하는 내용이다. 즉 질의자 너나 메시야인 나나 모두 율법 성취의 원칙을 못 벗어난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질의자는, 예수님을 단지 그들이 받들고 있는 율법과는 따로이 간주해서 상대적인 선한 분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접근했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율법 성취 차원에서 파악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상대적으로 선하냐를 비교하고 경쟁하는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에서 오직 선한 그 한 분께서 주신 계명을 중심으로 질의자를 유도해 나가시려고 하신 것이다. 직접 예수님을 인식하기보다는 율법 완성 차원에서 예수님을 대하기를 요청한 그런 뜻이 이 본문의 취지이다. 즉 질의자가 말하는 그런 범주의 선의 차원에서의 나 예수는 선인이 아니다는 말씀이다.
만약 삼위일체 신학을 가지고 이 본문(마19:7)을 접근한다면 다음과 같은 왜곡된 해석이 되고 만다. "나 예수는 선하지 않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따를 생각 마시고 본인께서 직접 선하신 그 분의 계명을 잘 지키시면 영생은 아마 가능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계명을 준수하신다면 오직 선한 분은 성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케 될 것입니다"라는 해석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영원히 그 유일한 최고선의 자리에는 끼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하여튼 완전 선인이 아닌 이상 상대적 선인으로도 만족스러운 율법 완성이 되지 못한다. 비록 예수님의 겸손을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차후에 인정해 준다는 무리한 해석이 주입되어도 하여튼 성부와 성자가 상호 동반 선인이 될 가능성은 요원하다. 따라서 마태복음 19:17의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선인 논쟁이 주안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김 교수가 최고선으로서의 더 확실한 증명 구절이라고 내세운 출애굽기나 신명기나 이사야 구절은 최고선에 관한 내용이 아니요, 또한 신이기에 신 보다 더 높은 것이 존재 할 리가 없지 아니한가 라는 일반적 신 위상의 확립 성이나 존재의 유일 무일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떤 민족의 신이 정말 하나님이신 가에 관한 언급이다. 즉 기존의 우상 신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말씀이지 결코 인간과 신과의 엄청난 격차를 강조하신 말씀이 아니다. 정말 이 구약 구절들을 제대로 알려면 오직 '주'개념 즉 이스라엘에 찾아오신 여호와의 이름으로서의 '주' 개념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주님은 바로 특별히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메시아 기능과 관련된 주이시다. 따라서 김 교수가 주창하는 것처럼 메시아 기능은 누락된 채 단지 신의 존재성에서 뿜어대는 우월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그런 일반적 신 기능을 위한 해석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논쟁의 차이점은 기껏해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좀 더 강조하느냐 아니면 성부 하나님께 최종 주도권을 부여하느냐 라는 차이뿐이라고 보여지는 듯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신학적 오류가 얼마나 엄청난 혼돈을 일으키고 있느냐 하는 점은 그의 계시론 내용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삼위일체적 신학적 딜레마가 곧 계시의 딜레마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2. 계시론에 있어 대 파탄

김교수는 계시를 둘로 나누고 있다. 계시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누려면 성경 말씀도 일반 성경과 특별 성경으로 나누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김교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말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p.30). 여기서 잠깐 신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 큰 모순점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 하나님이 둘로 나뉘어 계시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 안에 계셔서 그 말씀과 더불어 나타나시기 때문에 두 종류의 계시 관이라는 것이 하나님에게만은 도저히 성립이 되지 못한다. 즉 김교수의 계시 논리에 의하면 일반 하나님과 특별하나님으로 나누어 져야 하는데, 김교수도 아마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시를 구태여 둘로 나누어야 겠다면 사실상 한 하나님이 둘로 따로 나뉘어져야 논리상 정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과업이 아니라 하나님자신에게 부여된 과업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김교수는 무심하게도 그냥 사람과 사람사이에 대화하듯이 말씀만 전달하면 계시가 성립이 되는 줄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함부로 생각하기를 성경보다 더 선행되면서도 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자기 알림 체제'를 따로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로 인해 성경이 계시에게 종속됨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종속 계시로 대우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김 교수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말로는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에 있어 김 교수는 성경을 도리어 계시 체제에다 종속시켜 놓고 있다. 이 말은 곧 성경보고 김 교수 자기 신학 체계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참고 도서에 불과하고, 성경으로서 성경다움이 파기되고 마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성경의 성경다움이 단순히 강력한 권위성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어느 정도 만족하는 것같다. 재판 받는 죄수와 판결을 내리는 판사 사이에서, 판사의 권위가 마치 죄수들이 치하하는 판사님의 총명함과 유식함과 무오함에 대한 변호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권위가 서는 줄로 아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참 성경다움은 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다는 그 기능으로 발생한다. 이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즉 인간은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거나 치하할 하등의 권리나 자격이 없음을 김 교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김 교수는 성경 자체에서 성경의 권위를 옹호할 논리적 근거 마련하기가 난처하니까( 순환논리에 빠졌다고 철학 하는 자들이 놀리니까) 성경밖에 어떤 한 관점을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계시하심'이라는 교리이다. 그의 계시 교리의 출발부터가 그의 계시론과 모순 점을 나타내는 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스로 계시하신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는 로마서 1:18-21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일반 계시가 특별 계시와는 구별되게 따로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 계시라고 분류시킨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특별 계시 하나로 왜 통합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김 교수가 오히려 일반 계시 쪽으로 특별 계시를 통합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계시를 '성경책'이라는 물질로 고정시켜 놓으면 흔히 자연을 통해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앎'을 그 물질 속에서 집어넣는다는 것이 도무지 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전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앎' 혹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스스로 나타냄'을 일반 계시라고 범위를 넓혀놓게 되면, 성경책이라는 물질도 이 넓은 계시 개념 안에 담아 놓기 편리해진다. 그러니까 김 교수는 처음부터 성경을 아예 계시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경책이라는 물질 안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김 교수의 계시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도무지 성경이 무엇인지 전혀 기본이 안되어 있다!
성경적으로 봐서 성경은 인간이 납득이 가도록, 혹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가도록, 혹은 신의 계시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신이 긍휼로서 만남을 허락한 앎의 자리를 마련하는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기 뜻을 내비치는 책이 아니다. 이런 견해는 일반 종교에서의 경전 차원의 개념에서나 통용될 것들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이방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책이 지닌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경전 차원의 신의 계시로 간주하는 식의 계시론과 그 우상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나타난 책이다.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 이 말씀은, 성경 말씀은 주의를 기울이고 어렵게 풀어야 비로소 납득이 가능하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인간의 이해를 피해간다는데 주안점을 둔 말씀이다. 즉 인간은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도 없고, 더 나아가 접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반영해 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선택된 자를 골라내는 작업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예수 안' 혹은 '성령 안' 이라는 말씀은, 거듭난 성도에게 이제는 말씀에 대한 어떤 조심스러운 이해력과 견해를 펼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여전히 성령이 아니고서는 한 시라도 이해될 수 없는 그런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영속적 기능으로서 성령은 그 역할을 잠시도 중지하심 없이 성도 안에서 반복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나 바빙크나 공히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속성인 은혜에서부터 출발시킨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은혜란, 죄 용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간격을 메우는 식의 은혜를 도입한다. -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실 때, 그런 가까이 오심은 어떤 은혜를 의미한다"(P.29 중간쯤). - 판사와 죄수가 한 홀에서 가까이 있는 것이 과연 은혜인가? 김 교수는 십자가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철폐한 은혜 개념을 함부로 계시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로마서 1장 18-21절에 관해서도 무리한 해석이 도입되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이라는 대목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이라는 대목을 놓고 김 교수나 바빙크는 마치 자연 계시가 따로 주어졌다고 곡해하는 시궁창에 주저 앉고 말았다. 이 본문은, 오히려 이와 같은 계시론을 되레 공박하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도무지 감잡지 못하고 있다. 즉 김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이 본문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는 알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신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다른 우상에다 눈을 돌렸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려진 자연 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을 근거해서 그들에게 심판할 때에, 그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지식 때문에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 속에는 자신들과 같이 거듭난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이점을 전제로 해버리면 김 교수와 바빙크 일당도 우상 숭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교수와 바빙크는, 이 '사람들' 속에서 신지식을 갖는 것은 공통되지만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발을 빼려 한다.
하지만 본문은 이와 반대의 뜻을 분명히 부각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김 교수의 주장이나 바빙크의 주장 그 자체가 이 본문에 의도하는 핑계치 못하는 경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그들은 거부하고 대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대신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한 근거는 로마서 2:13-16에 분명히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 이 본문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서는 어떤 공통적 말씀 체제 안에 가두어 버리시는데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5-6)] 김교수의 주장처럼 일반 계시로 은혜롭게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김 교수가 분류한 특별 계시 즉 율법적 기능 안으로 모두를 소집하고 심판 아래 두고자 하신다(롬 3:19). 이 또한 구약에 예언된 대로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렘 10:25).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구약 때 언약이 노아에게 주어질 때부터(최초의 언약임) 지속적으로 그 뒤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이스라엘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었다. 이미 개인적으로 갖고 신 의식은 로마서 1:18-23에 나와 있는 것처럼 피조물적인 우상에 지나지 않음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 (즉 김교수가 분류한 특별 계시적 차원)에서 비로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이미 율법적 본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는, 김 교수나 바빙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반 계시로 확대하는 식의 전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지속적인 율법적 속성 안으로 계속 인류들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즉 로마서 1:18-23의 말씀에서의 '하나님' 개념을 김 교수나 바빙크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신 의식으로 보았으나 성경은 그런 개념을 적극적인 신 개념으로 사용하시지를 않으신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바로 구약 때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약속된 그 언약의 하나님뿐이다. 바로 선지자에게 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하나님의 중단 될 수 없는 공의적 심판과 진노 퍼부으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김 교수와 바빙크는 오히려 인간편에 서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는 은혜성으로 바꾸어 설명해 버렸으니 이 얼마나 혼란에 빠진 계시관의 결과인가!
그러므로 로마서 1:18-21의 말씀은, 김 교수와 바빙크와 같이 철저히 인간 편에서 아직도 눈이 어두운 자에 대한 은폐적 심판 기능을 제대로 실행케 하는 근거가 된다. 아마 심판 때에는 김 교수도 이 점에 대해서 핑계치 못할 것이다. 김 교수는, 선지자들의 예언과 성경 말씀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 지를 완전히 누락 한 채 계시론을 전개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로마서 2장에 의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 위한 것에 멈추지 아니하고, 김 교수 같은 이방인들의 율법적 본성을 겨냥한 고발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처럼 참 하나님은, 성경을 빼놓고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핑계치 못하는 고발의 기능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자연 계시를 가지고 핑계치 못할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p.33).
왜 이런 무지가 계속 이어지는가?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언약이 오직 '성부― 성자' 사이의 언약을 보여주는 모형이며 그림자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일을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서 일하시는 법이 없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이 점을 간과하여 '하나님 →주님 →인간' 이라는 말씀 전달 계통을 '하나님 →인간'으로 전환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인간' 과의 만남을 '하나님→인간'과의 만남으로 변형해서 신앙한다. 주님은 그저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분을 상대하기보다는 세 위의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진리라고 믿고 있고, 주님은 그저 자신들은 구원시켜 주는데 한 몫 했기에 이제부터는 자신들도 하나님의 일에 한 몫 거들어 드릴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독점적으로 하신다는 점에 대해서 이들은 철저하게 불신한다. 그들이 성경을 기피하고 다른 계시인 일반은총, 혹은 일반계시 개념을 추가적으로 장만해서 그리로 옮겨가는 이유는 바로 성경의 불충분성에 대해 내심 짜증을 내었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 미흡한 부분을 자신들이 더 파악한 일반은총 부분으로 보충해서 체계 있는 신학으로 정돈된 그 복음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것이다. 이러니 성경이 스스로 성경 안에서만 성경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김 교수가 내세우는 성경으로 말하는 성경이 다르게 되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오직 성경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성경이 성경을 증거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교수는 77페이지 중간에서, -성령 증거의 유일한 대상으로 성경의 신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이것은 분명 잘못 본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7-10)
-이 본문에서 분명히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집중하고 적용하신다. 성경은 성경만을 증거하기 위한다는 주장은 바로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교인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모세 율법은 단지 율법 그 자체였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능력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 그러나 그들이 안 것은 그저 율법에 대한 법적 해석뿐이었다. 그 안에서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점도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요7:42). 그러나 율법 안에서 그들은 깜깜한 소경에 불과했다(요9:39). 그들은 율법을 위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한 것뿐이다. 마치 김 교수가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성경 그 자체의 권위성을 정립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성경을 증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과 같다. 특히 사단의 사역이 성경의 권위 깨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p.21), 이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만난 사단과도 다르며 스가랴에 나오는 사단과도 다른 사단 관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1-5)
- 이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입장으로서 장차 사단과 대결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예수님의 상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편 2편에 나오는 다윗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편2:1-6).
- 이 본문에서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라는 대목에 주목해야 된다. 이 상황이야말로 종말까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사단과의 갈등의 핵이기 때문이다. 바로 사단이 시비 거는 것은 예수님이 과연 말씀 성취자로서 합당한가 하는 점이다. 광야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단은 말씀의 권위를 놓고 예수님과 논쟁한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말씀을 성취할 수 있는 인물이냐를 놓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마 4:1-11). 왜냐하면 그 당시 마귀의 앞잡이인 유대인들이 결코 성경을 깨고자 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함부로 적용시키고 해석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의식해서 더욱 더 성경 지키기에 집착한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9).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3. 김 교수는, 하나님이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최고선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p 23). - 그의 이러한 주장의 의도는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

창세기 15:1에서 말하는 상급의 의미는, 김 교수가 말하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일반적으로 베푸는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전쟁의 주체가 되시는 '주의 이름'(출 15:1-3)으로 벌이는 그 전쟁의 전리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준다는 차원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이 벌리시는 그 전쟁에 도리어 아브라함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증거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빼앗아 버리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바로 독생자 이삭을 주고서도 도로 빼앗는 그 과정을 통해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참예된 자임을 확인케 하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4-16).
- 이 본문에서, '대적의 문을 얻는다'데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주께서 홀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성취하신다는 뜻을 김 교수는 알지 못하고 그저 인간은 초월적 신으로부터 은혜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을 기독교화, 복음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4. 그 밖의, 김 교수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짧은 언급이나(p.26 맨 끝), 63페이지 나오는 언약관과 그 밑에 관주 158), 159)에 나오는 내용 풀이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의분마저 느낀다. 이와 유사한 성경 풀이가 p. 70 밑에서 6째줄 - p.71 위에서 3째줄까지 이어진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를 김 교수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5. 끝으로, p.78 밑에서 4째줄에는 위험천만한 언급을 해놓고 있다. -"교회가 불완전하고 마음은 부패하고 그 통찰은 제한되어 있으며 그 신앙이 적고 약한 어떤 차이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본문에서 '교회가 불완전하고'라는 대목이 있다. 과연 성경 어디에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사상이 나오는가! 이런 면을 보면 김 교수 이 분이 도대체 성경을 믿고자 하는 분인지 아니면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 단체를 믿는 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서 과연 거룩한 불완전함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정말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교회를 가만 두고 보실 분인가? 도대체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인데 자기 교회가 불완전한 것으로 그냥 두고 보신 단 말인가? 바로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불완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참 믿음이 아니라 보이는 종교적 형태와 현상들을 우상처럼 신봉하고 그것을 보다 이상적 상태로 개혁해서는 계속 고수하고 싶어하는 전형적 불 신앙의 한 단면이다.

Ⅲ 결 론

김 교수는, 한국 교회의 비윤리적이고 영지주의적 상태를 보고 개탄하면서 어떻게 하면 개혁할까를 힘쓰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과연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지를 살펴야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 교회는, 개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물론 부흥이나 성장이나 성숙이라는 개념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적 교회관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있어야 될 존재성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성경 본문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증거 하는 일이다. 그것뿐이다! 한국 교회가 다 불교가 되든, 다 방탕과 술취함으로 타락을 하든 참된 교회는 거기에 신경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책임자는 목회자들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참된 성도는 묵묵히 주님만 증거 하면 그만이다. 이 일을 제대로 안하면서 남 핑계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주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니지 않는가! 십자가 보혈의 값이 그렇게 싸게 평가받아서야 되겠는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3-24).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라 십자가만을 앞장 세워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 행여 십자가만을 전할 때, 그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도리어 십자가를 모독하는 경우에 주님까지 모독하게 되지 않느냐 하는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도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 1:28).

* 또한 김 교수는 전체적인 약점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 언약과 일반 계시(일반 은총)를 혼동하면서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빙크의 신학에는 신의 은혜만 들어 있지만, 노아 언약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담겨 있다. 성경 해석을 안일하고 상식 선에서 풀이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란, 오직 하나님의 심판에 둘러싸여 소개된다는 점을 좀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 심판을 빼놓고 은혜를 거론하는 것은 참 긍휼이나 은혜가 아니다. 모든 것을 신성의 신비적 은혜 성으로 소급하는 작업은 이미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들이 해왔던 바이다.
*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주님은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해서 가까이 접촉될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단절로서 더 강력한 은폐를 유지하시는 분이다. 민수기 16장에서 불의 향로로 인해 무려 250명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민16:35). 가까이 있다고 해서 구원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동안 인간들 속에 내재되어 숨겨져 있는 죄악들이 모세와 아론과 같은 선택된 거룩한 제사장의 은폐성 활동을 통해 폭로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을 모르고 김 교수는 오해하기를,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어서 찰나적으로만 하나님과 만난다고 했는데(P30),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매일같이 진노하시는 분임을 성도는 받아드리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입김과 탄식과 신음 소리에 참여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바로 이런 고백이 구원받은 자의 고백이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이 자기 구원에 환장해서 구원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권리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종교성 때문에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으로만 오해하는 김 교수 같은 자들이 범람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구원이 주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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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