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교수의 열 가지 무지한 점
신학교 교수의 열 가지 무지한 점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신학교 교수의 열 가지 무지한 점
* 여기서 말하는 '신학교 교수' 안에는 일반 미션 계통의 대학의 기독교 학과 관련 교수
나 종교학 계열에 속한 교수들도 포함한다.
첫째, 자신들의 학문적 작업이 과연 성경에서 허용된 방식인가를 검토해 보지 않는다.
인간은 유에서 유를 끄집어내는 방식 이외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다. 이미 '있는 나'로부
터 '나의 문화, 나의 역사'가 유발하게 되는 이 현상에다가 전 생을 바친다. 신학교 교수들
도 마찬가지이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성경의 핵심은 처음부터 탐구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그러니깐 성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덤비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인간의 성과와 업적을 발굴하기 위하여 성경을
샅샅이 탐색하는 자들이다. 없는데서는 아무 것도 안 나온다는 주장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다. "성경 안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 꿈틀거린다. 그러니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그들의 모토이다. 이들은
애초부터 아무 것도 믿을 필요가 없이 오직 알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 얻을 수 있는 메커
니즘을 구축하기 위하여 성경에 접근한 자들이다. 기존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양식과 이
성과 양심과 노고와 열심과 의지력을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구원이 성사되는 묘법을 창안
하기 위해 성경을 분해, 조립하는 자들이다.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가 엄연히 있음을 출발
점으로 하여 이미 '있는 인간상'에서 '납득이 되는 인간상'으로, 더나아가서 '아는 것을 실
천과 행동에 옮기는 인간상'에서 더나아가서 '구원에 성공한 훌륭한 인간상'으로 이들은
그려 나가고자 한다. 쉽게 말해서 유(有)에서 유(有)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의 창조'
를 이들은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 말씀 →인간이 이해하고 수용함 → 인간 행위(실
천력) → 새 세계 창조' 이라는 틀을 구상하고자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관
여하는 것은 → 과정 뿐이요 →, → 과정은 인간이 주도권을 쥐며 하나님은 기껏
후원자 내지는 도움자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을 이 틀에 의해서 해석하려
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범주와 인간이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
는 범주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씀으로서의 창조'가 도중에 '사람 의지력에 의한 창
조'로 뒤바뀐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없음의 상태'가 '인간 있음'에 의한 '있
음의 상태'의 압력에 못 이겨 하나님도 그만 질끈 눈감고 감안해 줘 버리게 된 셈이 되었
다. 그만큼 '인간 있음' 이 우주에 큰 영향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지 아니하냐 기대성이
이런 왜곡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하나님마저 마음껏 주무려드는 자들, 이들이 신학교
교수들이다. 이들은 인간 고유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참작해 주신 그 은총의 대해 하나님
께 영광과 찬양과 은혜에 감사하는 의무감이 인간들에게 짊어져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일을 놓고 인간의 고유 가치성으로 흥정하는데 있어 중개자로 자진해서 나
서는 자들, 이들의 모든 신학 작업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 죽은 자를 살리
는 일도 인간들이 주의 일에 나서 주느냐 마느냐 여부에 달려 있게 되었다. 아무리 하나
님이 택한 자를 건져 살리고 싶어도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 다가서지 않는
한 구원은 성사될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을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믿었던 종들을 찾아가서 전도에 열심 내어 주기를 부탁하고
당부하는 번거러움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죽은 자 살리는 것도 인간들 눈치까지 살피면
서 일방적으로 행동에 못 나서시는 노쇠한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이 신학교 교수들이 가
르치는 하나님이다.
둘째, 의사들이 환자에게 처방전을 써 주는 것처럼 신학도 대중들에게 이런 기능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기능성에 있다. 이웃이 원하고 있는 바를 충족시
켜 주는 전문 기술자는 이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꼭 필요한 사람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본인이 살아 남을 가치를 확보해 놓은 사람이다. 적어도 그 사회에서는 큰소리치
며 살만도 하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그 사람이
마음껏 누리는 권위요 삶의 정당성이다. 누구나 이런 정당함으로 소지한 사람이 되고 싶
어한다.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그 사람 앞에서는 자신들의 권위마저 삭감하
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고파 한다. 의사들은 이 인간 사회에는 그 정당함을 부여받은 기능
인들이다. 이 사회가 꼭 필요한 사람이다. 몸이 아픈 환자들은 의사 앞에 자진해서 나와서
그의 지시를 하달 받는다. 이것이 처방전이다. 그 안의 내용은 모두 다 명령들이다. 더 이
상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 그 하달된 명령대로만 하면 필히 병이 낫는다는 믿음의 관계
에 따라 복종한다. 의술이라는 기능이 의사를 권위자까지 높여 놓았다. 누구나 바로 이 점
을 부러워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 기능이 이 사회에서 자신을 권위자로 올려놓
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이 사회에서의 전문직의 한 부류로 형성되려
면 그 내용이 단촐한 방법론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즉 위로의 대상이요 치유되어야
영혼들에 대해서 간단 명료한 지시와 명령을 처방전으로 하달해 주면 그 지시에 따라 필
히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는 그런 기능성 내용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교 교수들은 바로
이런 전문기능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권위자 부류에 속하기를 원한다. 자
신의 전문 학문이 여타의 전문직종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기를 원한다. 의사처럼 말 한마
디 한마디에 정당성이 함유되기를 원한다. 교인 앞에서 목사는 의사처럼 대우받기를 원한
다. "성도님, 이렇게 기도하시고 이렇게 신앙 생활하시면 틀림없이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영혼 다루는 방법론을 장차 목회자가 될 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어한다.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해 보면 이런 방법론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이다. 자
기 밑에서 배운 목회자들이 사회에서 '영혼 의사'로 권위 있게 대우받는 동시에 그런 자들
을 배출한 자신도 신학교 교수로서의 전문직이 정당하게 존경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성
경을 제대로 보게 되면 이런 방법론을 연구하는 자들은 모조리 전문 삯꾼들이다. 성경을
오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자기 목숨
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이 말
씀들은 의사의 처방전과 같이 어떤 실천에 옮겨야 될 행함의 항목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
니라 자기 행함과 존재와 실천력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선언하시는 명령이시다. 한 마디
로 말해서, '죽어라'는 말씀인데 이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명령어로 표현
한 것이다. '죽어라'는 분 앞에서 "어떤 행동을 남기면 저는 살 수 있습니까" 라는 대꾸는
주님 말씀의 핵심과 어긋난 생각일 뿐이다.
목회자는 신학교 교수가 스스로를 이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는 전문직업인으로 생각한다
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종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종일 뿐이다.
셋째, 중생 전과 중생 후의 성도 상태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신학교 교수들은, 중생 전 인간상과 중생 후의 인간상에 대해서 심한 오류를 지니고 있
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중생시키느냐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 되고
난 사람이 성공적으로 성사시킬 수 있는 작업이 어떤 것이냐에 관심을 가지고 중생을 설
명하려든다. 중생 했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주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인간들이 중생 되지 못해서 유보된 주의 일이 이제부터는 이들로 통해 차질 없이 성취되
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생 전=주의 일 못함', '중생 후= 주의 일 가능함' 이라는
등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중생이란 그
기준은 예수님이시다.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의 자질이나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
지 예수님께서 그 인간에게 무엇을 남겼느냐 하는 것만이 중생 기준이 될 뿐이다. 즉 '중
생 전= 속죄가 적용 안됨', '중생 후 = 속죄가 적용 됨'이다. 그러니 중생 전이나 후나 인
간 행함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다. 단 중생 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로 비추어 볼
때의 저주의 시절이지만 중생 후에는 이 십자가 저주와 병행해서 그것을 극복하시는 십자
가 은혜도 함께 그 사람에게서 드러난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중생 되지 못함'이라는 규
정 자체가 인간 본인들이 판단에서 도출되도록 허락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사건만을 가지고 결정짓게 된다. 그러니 중생 후에도 일반 은총, 혹은 일반 계시를 긍정해
줄 만 그 어떤 여지도 용납 안된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하등의 근거도
없다. 중생 전이나 후나 여전히 십자가 안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이 십자가 밖
으로 못 빠져나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예수님
과 여타의 인간들을 비교해서 그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기 때문이요 또한 이 정죄성을 기
초로 해서 '중생됨'에 관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일반 계시, 일반 은총을 기
준으로 해서 죄라는 것이 규정되지 않는 이상, 중생 후에도 일반 은총, 일반 계시는 십자
가 앞에서 허구이며 하나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들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중생 후
의 의지나 중생 후의 감정이나 중생 후의 양심이나 중생 후의 이성들은 모두 중생 전의
양심과 이성과 감정과 의지들이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 세상과 하나님을 생각했음
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증거들이 된다. 참된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세상을 관
계하는데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지혜와 양식과 이성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채
허구적인 세상과 하나님과 천국을 연상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회개하는 현상들이다.
이런 자들만이 진정 거듭난 자들이다.
넷째, 목회자로 나서는 것이나 자기들처럼 신학교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나 모두
다 각기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은사로 주어진 일인 것으로 간주하려 든다.
예수님의 제자의 기본은 '버림'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
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데 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인간의 소유 의식은 힘
의 소유이며 이 힘이 없이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불신앙에서 비롯된다. 뭔가 힘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의식이다. 거대한 한국의 기독교 교계와 교회
시장을 자기 생존의 터전으로 여기는 자는 누구든지 거기에다 자기 직장을 마련하고자 한
다. 왜냐하면 큰 힘이 곧 자기 장래를 안정하게 보장해 줄 여력이 많기 때문이다. 보통은
목회자를 꿈꾸게 되지만 목회자=고생으로 인식되기에 시작하기에는 심적으로 너무 부담
이 된다. 왜냐하면 바르게 목회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 모여주면 자신의 생계비
가 위협받을 것이 분명하고 또한 목회 실패자로 전락될 것이 뻔한 자기 신세가 너무 창피
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당식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는 식의 목회는 너무나 사기성
이 농후하기 때문에 점잖은 체면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이 방식 말고 자진해서 죽기를 각
오하고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하면서 밤 낮 가리지 않고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될 정도로 간
곡하게 기도하고 정신없이 전도지 돌리며 열심히 작은 교회에 파묻혀 거기에만 매달리기
에는 자신의 믿음과 헌신성이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배운 자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큰 인물임을 대내적으로 알리고 또한 이 종교 시장에서 안정된 직장
을 장만할 수 있는 방도는 외국에 나가 박사 학위 따서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일일 것
이다. 바로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지고 유학을 가게 된다. 즉 '믿음 키우기 위한 시간 벌기'
이다. 과연 신앙이 커졌는가? 천만의 말씀, 이들이 외국 가서 알게 된 사실은, 종교란 기
껏 인간들의 정신적 위락을 돕기 위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종교
의 한계와 그 허실을 파악하고 돌아왔다. 종교 말고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세계 사랑, 인류 공영 사상이다. 온 인류가 문화와 종교와 종족의 벽마저 무너
뜨리고 하나로 뭉쳐서 스스로 찬란한 미래를 건설하는 역군이 되어 각자의 지혜와 총기를
하나로 모아야 된다는 정신을 배워 왔다. 기독교를 없애자 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기
독교대로 또는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자는 그 영역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도 인
류를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기독교 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진리 중의 최고
의 진리는 오직 기독교 사상임을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이로서 이들은 스스로 숲을 보는
도인의 포만감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범종교적으로 보니깐 한국의 교계에서 난무하는 가
식과 위선과 목회자의 이중적인 생활과 교계의 추잡한 정치 판도를 한 눈에 훤히 읽게 되
는 수준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교계 비판 수준을 느긋하게 조율하게 된다. 왜냐하면 수준
낮고 어리석은 교계 인사들이 곧 자신들에게 직장을 알선해 주고 밥벌이를 제공해 주는
주체들이기 때문에 무식한 그들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계를
너무 비판 안하면 순진한 신학교 학생들로부터, 의식 있는 교수, 교계의 희망, 개혁 의지
가 투철한 이상적 교수라는 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당
히 의롭고 적당히 정치적일 필요를 느끼면서 이 양편의 사정을 고려해서 교수는 처신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낸 생존 전략은 다름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이단
같은 목사들을 모두 일단 목회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당신들은 목회자로서 하늘
로부터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은사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목사들을 질 낮은 집단으로 한꺼번에 몽땅 몰아서 분류한 상태를 상정해 놓고서
는 하는 말이다.) 또 다른 신학자로서의 은사는 (곧 수준 높은 은사는) 바로 우리들 교수
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서로 서로 공존하는 길을 찾읍시다. 우리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해
서 사람을 끌어 모으더라도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진리에 대한 최종
해답은 우리들에게 조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신학자로 은사 받은 이 은사의
하늘 권위성을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선에서 타협을 보려고 한다.
그러니 이들 신학 교수들은, 애초부터 자신의 믿음 없음을 교묘하게 처리하고 처신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도피해 놓고서는 이제 돌아와서는 수준을 언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준 낮은 자의 덕을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 보수 계열에 속한 신학 교수들은 너무나도
비겁한 자들이다. 치사한 자들이다. 자유 계열에 속한 신학자들처럼 솔직하게 기독교 교리
보다 종교학이나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경제학이 인류를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서 해방시킨
다고 말하지 않고 자꾸만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돈과 취직과 삶의 터전 장만을
위하여 학문적 양심마저 숨겨들여와 놓고서는 마치 보수주의자 인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이
신앙없다고 내몰아 치고 있다.
이들에게는 도대체 확신 같은 것은 없다. 학문적인 확신조차도 없다. 솔직하지 못하다.
그저 눈치 살피기에만 급급하다. 진리가 무언지 모르면 차라리 모르겠다고 용감하게 말
못하고 있다. 자유 계열의 신학교 교수들처럼 "진리는 없다! 혹은 절대적 진리는 아무도
모르게 되어있다!"라고 왜 과감하게 외치지 못하는가! 그러면서 틈만 나면 큰 교회 교주
가 되어 전권을 휘두려는 그런 권력자, 독재자상을 그리워하고 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서슴없이 영혼 장사를 하는 일반 목회자의 대담성을 따라가기에는 귀국한지 너무 오래되
지 않았기 때문인가? 좋게 말해서 아직도 양심에 화인 받지 않은 순수함 때문일까? 그렇
다. 그러나 이 철없는 기간도 오래가지 아니한다. 한해 한해 지나갈수록 이제는 신학교 자
체를 영혼 가게 삼아 신학생을 대상으로 그들도 돈 장사에 나서게 될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 처음부터 이들은 믿음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처신을 정당화 할
다른 길을 모색하다 보니 '신학교 교수라는 이름의 은사론'을 새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다음과 같은 자만 예수님의 종으로 간주하신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
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배설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자, 이들이 신학교 교수들
이다. '버림'과 '잃음'을 이해 못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기본적으로 같은 신앙인이
아니라고 외친다. 무엇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있는 가를 지금이라도 돌아보기 바란다.
다섯째, 대중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와 그 근원적 본성에 대해서 어둡다.
인간은 생명의 흔적들을 찾고자 하며 산다. 병들고, 결핍되고, 무너지고, 실패하고, 결국
죽는 죽음의 순환을 기피하고 그 어떤 경우에서도 다시 소생하고, 늘 성공하고, 싱싱하고
생기발랄한 웃음과 행복의 공간이 마련되어지는 생명 순환을 원하고 있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자주 옛 것에 대해 천시하고 박대한다. 그리고 새로운 신
선한 것에 동경과 기대를 갖는다. 이 틈바구니 사이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인간이다. 새
로운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근원적 목마름이다. 그래서 교회 나올 때도 새로운
것을 구경하고자 해서이다. 나름대로 미리 신비 세계이기를 그리면서 교회에 나온다. 교회
는 대중들이 정신적 오락 장소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 말고 새로운 체험이 터져나오는
전당이 되기를 고대하면서 교회에 나온다. 신선하고 신기한 사건에 접하기를 고대한다.
이러한 새로움을 자꾸만 제공해 줄 수 있는 교회이기를 원한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메
우면서 죽여 나가는 존재들이다. 이들에게 진리라든지 정의라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권태
가 해소될 지경에서 겨우 고려해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진리란 생소함으로 다가오
는 새로운 일들이다. 진부한 것들을 청산시켜 주는 새로운 사태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인
간에게 있어 하나님은 항상 새로움을 창조하셔서 인간들에게 환희와 감탄과 경의로움을
제공하시는 전지전능한 환상의 인물일 뿐이다. 희망을 소멸시키지 않고 앞서 던지면서 인
도하시는 분, 이것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신이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의 기호와 성질에
자연적으로 호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교회 안에서 대화가 된다. 대중들에게 있어 신학이
란 늘 에디슨의 발명품처럼 '깜짝 쇼'를 연출 시킬 만한 내용이기를 바란다. 대중들의 희
망과 구미에 맞고 그들의 권태로움 메워 주기 위해 신선함에 신경 쓰는 신학자들, 이들은
그저 품위의 티를 내면서 한편으로 인기 얻기를 기도하는 천박스러운 연예인에 지나지 않
는다.
여섯째,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피란 처참한 것이다. 피란 생명의 종결이며 최후의 언어이다. 붉은 피가 낭자한 시체에게
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돌린다. 그 시체와 결부된 자아이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인
간은 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피는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육체 안에서 흐른다.
마치 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생명 인양 착각하면서 마음껏 활동한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노라"고 외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붉은 피를 감출 수는
없다. 안에 흐르는 피가 밖으로 나왔을 때 지금까지의 생명이 모두 거짓임을 감지하게 된
다. 예수님에게서 쏟아져 나온 붉은 피, 그것은 거짓과 허상의 본 모습이었다. 모든 활동
을 고발하기 위한 피였다. 한평생 열심히 움직여 온 발걸음들, 그리고 외침들, 그리고 손
놀림들, 그 어떤 것도 쏟아진 붉은 피 앞에서 조용히 녹아진다. 그래서 붉은 피는 모든 것
을 점령해 들어간다. 온 세계를 덮치고도 남음이 있다. 피에 녹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
다. 최후로 남아야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피 뿐이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들 '그리스도의 피'를 모른다. 그 앞에서 녹아지지 않고 있다.
피를 모르고 있기에 자신의 할 말을 다 해댄다. 뭐든지 긍정하자고 외친다. 온갖 지성과
지식들을 끌어 모아 놓았다고 자랑한다. 이들은, 안의 피가 밖으로 반드시 나와야 되는 이
유를 모른다. 피흘림을 잊고 산다. 거룩한 피에 이미 녹아 버린 그런 인생이 아니다. 어리
석은 인생들이다. 피 보다 더 큰 지혜가 없음을 이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피만 남게 되
는 세계를 이들은 단호히 싫어한다. 그래서 이들은 곧 예수를 싫어하는 자들이다.
일곱째, 교수 자신의 욕망을 은폐한 채, 외부로는 오직 학문의 순수함만을 생각하고 지향
하고 있는 자처럼 행세한다.
학문이란 일종의 노리개이다. 인형과 전쟁 놀이 기구로 어린 시절을 꿈과 희망 속에 보
내던 자들이 이제는 또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지고 그 곳에서 미래를 엮여 내려 한다. 학문
에만 순수하게 몰두하는 것은 일종의 자폐증 증세이다. 마치 원숭이들이 거울을 닦고 또
닦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같다. 그러나 거울에서 반사되는 것은
순전히 자기 모습뿐이다. 자아에게 몰두하는 나르시즘은 자기 복제를 염두에 둔 유혹에
빠진 경우이다. 인간의 모든 학문은, 자기만이 믿고 인정할 수 있는 순수한 기초로 간주하
면서부터 시작한다. 자기의 창조성을 끊임없이 만나기 위해 자기 증식에 나서는 행위이다.
제2, 제3의 자아의 모사물(模寫物)로서 학문의 내용은 채워진다.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유
혹 당하고 있으면서 말하기를, 순수한 학문적 열성에만 빠져 있다고 변명한다. 정말 자아
를 알려면 의로운 분의 대신 죽음 앞에 자아를 나타내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아는
부정당해야 한다. 저주 당해야 한다. 그분으로부터 심판 받아야 한다. 진실과 거짓도 그
십자가 앞에서 드러날 뿐이다. 학문적 업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이 모호한
채 학문을 계속한들 과연 무엇이 학문적으로 진실인지 거짓 인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
가?
학문을 구성하는 기호와 언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호와 언어는 그 자체적으로는 아
무런 비밀을 담고 있지 못하다. 그저 굴러다니는 낙엽의 파편들이다. 부스러지는 낙엽으로
거대한 전당을 세워 놓아도 그 안의 주인은 여전히 홀로 자아뿐임을 왜 숨기려 하는가?
속임수, 그리고 그 속임수의 망을 가지고 집을 짓는 행위, 이것이 학문 작업이다. 하나님
의 우연은 절대로 인위적 필연 속에 갇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남은 것은 학문이란
고장난 노리개뿐이다.
여덟째,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서로 십자가로 단절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
니라"(갈 6:14)
성경에서 이와 같이 십자가로 세상과 단절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교회라는 조직체
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십자가 이외의 것으로 세상과 분리된다고 간주하게 되
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가? 그것은 이 단절의 벽에 틈과 연결의 구멍을 장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즉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인 교회 조직체로 고형화되면 형식적인 교
회 확장을 위하여 필히 세상을 위해 출구를 활짝 열어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 열려
진 출구를 통해 교회 안에 세상 나라가 스며드는 틈새로 작용된다. 들어 올 수 없는 곳이
도리어 들어오도록 허용되는 곳이 되고 만다. 성경에 나오는 참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의 인도함을 통해서만 들어 올 수 있는 세계인데 반해서, 교회를 단절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교회 조직 확장과 유지에 유용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면 얼마든지 대환영을 받게 교회
성장에 도움 되느냐 아니 되느냐로 판정이 날 것은 뻔하다. 여기서 교회들은 신학 교수들
에게 성장 지향의 신학만을 용납하고 초빙하는 경향으로 기운다. 즉 '하나님 나라→교회'
가 되고 '하나님 성장=교회 성장'으로 변형된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 교회 성장 신
학이 되 버린 것이다. '복음 전도, 십자가 전도= 교회 사업 전도, 교회 키우기 전도'가 되
어 버렸다. 그러니 십자가 단절은 희석되어 버리고 세상과 교회가 상호 교류 할 수 있는
공동적 요소를 성경에서 끄집어 내어 주기를 목회자들은 바라고 있다. 소위 '접촉점 신학'
이나 '종교성 신학', '희망의 신학', '치유와 위로의 목회 신학' 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아부하기 바쁘다. 이래 되면 십자가가 완전히 교회 내에서 사라진다. 교회 키우기를 위한
십자가 도는 도저히 병행될 수 없다. 십자가 도가 사라지면 그 교회는 구원의 능력은 전
무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
력이라"(고전 1:17-18) 구원되지도 못하면서 교회는 계속 키워 나간다? 이것은 곧 교회=
세상 나라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 나라와 단절을 요구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 결국 교
회 다니나 안 다니나 모든 결과는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세상 나라를 심판
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그 기준은 교회 법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도 뿐임을 알아야 한
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
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그렇다면 처
음부터 교회 성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 된다.
애초부터 십자가의 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교회 존재만으로 세상에 구원을 줄 수 있
겠다고 나선 것이 결과적으로 십자가 도를 거부하는 셈이 되었다. 사실은 구원을 주고 안
주고는 교회가 담당할 몫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조직체가 그 일을 대행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단절이 아니라 수용 위주로 나가기 위해 교회 자체가 십자가 도를 도리어
거침돌로 간주해서 철거해 버리고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
회를 부정하지 못한 채 도리어 봉사하려는 신학자는 결국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 모는데
열중한 공범자들이다.
아홉 번째, 신앙 세계 안의 용어가 세상 나라 안에서의 법칙(Rule)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 못하고 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 자신의 일과 활동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나서서
행할 수 있는 사항은 전혀 없다. "빛이 있으라!"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 원칙은 사람을
만드는 경우든 혹은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는 경우든, 예수님께서 병마를 축출
하는 경우든, 사도가 설교하는 경우든,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경우든 그 어떤 일에도
동일하게 실시되는 기본 원리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 세계에 또 다
른 원리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행함의 원리이다. 아기를 낳든지, 문명을 일으키
든지, 모세의 뒤를 따라 가든지, 제사를 드리든지, 성전을 만들든지, 전쟁에 나서든지, 구
제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든지, 전도를 하든지 간에 항상 염두에
두는 원리가 있다. 바로 자신들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원리이다. 예수님께서 5000명에서
떡을 먹이시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왔다. 다음과 예수님과의 대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
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
까"(요 6:26-28)
이 본문에서 분명히 언급하시기를 영생할 양식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너희에게 주시
겠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이 본문은, 인자가 주신다는 사실과
인간들이 자기의 행함으로 얻겠다는 사실이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이들의
행함에 대해서 '믿음'이라는 표현으로 수정하고자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예수님이 이렇게 나
오니깐 그들도 믿음의 범주 안에서 대꾸한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여기서 과연 예
수님이 제시한 표적은 무엇이었을까?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40,44,51,56)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인간들
의 행함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의 행함에 초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는 말씀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믿음이란 하늘의 아버지께서 일부러 보내신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고 그 때 그 믿
음의 표적이라는 것도 역시 성도가 행할 수 있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행하
실 수 있는 대속의 피와 살뿐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언급은 기존의 인
간의 행함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한 경악스러운 요구이다. 즉 행함의 법칙으로 가지고 인
간 쪽에서 접근해 나가는 모든 시도를 주님은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행함의 차원이 아니
라 믿음의 차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서 접촉 가능한 믿음이 아니라는 점에 사전에 바탕으로 해서 계시하신 말씀이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요 6:66) 정말 과연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나 신학자들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모아들이도록 안달을 내신 분인가? 또한 할 수만 있으면 세상적인 안목과 기독교
신앙을 상호 연결시킬 수 있는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신 개념적인 복음을 창
안하고 그들의 형편을 도와주고 해결하고 이해하려고 전도의 미끼 같은 것을 던지셨는
가?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
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주님은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신다. 도리어 그 법칙을 공박하고 기피해 버리신다. 왜
냐하면 그래야지만 오직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만 자기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점이 하
나님 아버지가 생각한 그 뜻이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셨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이니라"(요 6:38-39)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종으로서 신학교에 재직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자처럼 행세할 수 있어도 천국에서는 영원
히 찾을 수 없는 인물에 불과하다.
열 번째,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전혀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노를 격동케 하는 일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죽음을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하셨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적 삶
의 결과이다. 아무리 고상하고 아무리 경건의 티를 낸다 할지라도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의 사업이나 업무를 염두에 두지 말
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만 주장하고 내세우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학교 교수들은 왜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가? 그것
은 자신의 학문적 자존심이 결부된 권위를 획득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죽어 가고 있으
면서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이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식 자체가 악이
라는 점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
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
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
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이 본문에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되어 있다.
과연 신학교 교수들은 안개의 범주에 속하지 아니하는 특별한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자랑하지 않아야 되지만 신학 학자들만큼은 예외적인 자들인가? 과연 칼
빈과 루터와 카이퍼와 바빙크와 주기철, 손양원 목사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존재들
이란 말인가? 성경에서는 오히려 반대이다. 다윗이나 모세조차도 예수님과 비교해서 그
가치를 격하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
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1:29)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3:3) 사도
들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다윗과 모세를 거론한 것은, 다윗과 모세를 예수님과 같이 동
등하게 놓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도 죄인이며 예수님이 아니면 그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
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에게만 권위를 돌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차라리 역사 상의 모든 거장들과 학자들의 이름들은 부족함 점이나 한계나 죄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비추어 파악해야 마땅한 것인 아닌가?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소
위 신학교 교수들은 도리어 이런 거장들과 학자들의 이름과 권위를 자주 거론하므로서 자
신의 학문적 권위를 보장받는데 급급하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만을 오직 순수하게 거론하
면 천박한 논문이라고 외면해 버린다. 왜 이런 정신 상태에 놓여 있는가? 그것은 궁극적
으로 자기의 자존심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이런 자존심을
행하여 격발한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
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성경에서의 사랑이란 자기
를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에만 매여 사는 것을 말
한다. 이런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가차없는 저주만 떨어질 뿐이다. 신학교 교수들은 무슨
글을 발표해도 하늘의 주님을 생각하고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는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
신의 자존심을 최종 염두에 두면서 타인의 자존심과 경쟁 관계에 돌입하는 재미로 산다.
이래 놓고서도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 공로자로, 협력자로 여긴다. 정말 주의 종이
면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모든 신학자들과 인간들의 작품을 배설물로 여기고 "저는 죄인
중에 괴수에 불과합니다"를 소리치면서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 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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