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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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정재현
출판사 : 분도출판사 (왜관 : 1999)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철학적인 탐구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이것은 인간이 ‘참된 인간상’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됨’과 ‘인간’이 서로 관련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묻는 것이 된다. 즉 ‘참된 인간상’이 분명히 ‘있음’을 전제한 물음이다.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서양의 고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라고 묻는 그 주체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칸트에 이르러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적 우위를 선언하는 선험성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부상과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피히테와 쉘링을 거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구상적 자아로서의 위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겔에 이르면 ‘있음’과 ‘앎’이 같다는 것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헤겔 이후 현대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왜 ‘참’을 묻는가?”라는 실존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즉 보편성과 자존성을 근간하는 하는 본질과는 대비해서 이제 실존이라는 개별성과 우연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누가’가 규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개별적 주체의 시공적 상황성을 포함시킬 때만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전에는 ‘무엇-어떻게’에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누가-언제/어디서’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 즉 ‘무엇-어떻게’가 ‘왜?’라는 질문을 고리로 하여 하나로 연결 지어진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런 ‘보편적 인간’이라는 같음의 대표 단수성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은 명사적 완결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동사적 ‘사람됨’이다. 만약에 자신을 명사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자기구축 작업으로 인해 자기동일성으로 목적으로 삼게 되고, 이렇게 되면 타자를 자기 안으로 예속시키든지 아니면 타자를 자기로부터 몰아내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 한다. 현대철학은 이러한 ‘존재철학’의 오류를 찾아내어서 ‘동사화’된 ‘생성철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는 타자(他者)의 역할이 요긴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린 관계성’이다. ‘열린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열린 가능성’이 나온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같음’으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여분)야말로 바로 실체의 자기충족성이 지니는 폐쇄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차이’의 자리이다. 이 차이가 곧 관계성의 지평이며 자유의 실현가능성의 터전이다. 이로서 타인에 대해 상호동격임을 알 때 비로소 진리는 그 가운데 피어난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참다운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
신학적인 인간 탐구는 인간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들어간다. 하나는 피조성이요, 다른 하나는 죄성이다. 피조성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고, 죄성이란, 타락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피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라는 점이다.
무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뜻하고, ‘신의 형상 부여’는 인간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있어 비록 ‘없음’으로부터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없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없음’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다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늘 신비적인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미 아는 것으로부터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면서, ‘형상’과 ‘유사성’을 구별했다. 즉 신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타고난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그리고 신의 유사성은 ‘신의 은총에 의한 완전을 위해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이해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그를 거역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주어진 형상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될 유사성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죄로 인해 ‘신의 닮음’은 상실되었지만 창조의지에 의한 ‘신의 모습’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신의 형상을 죄와 분리시키는 이레네우스의 이러한 초월주의적 견해는 중세 스콜라 신학에 이어졌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형상뿐 아니라 초자연적 선물인 유사성도 주었는데 범죄로 인해 초자연적 선물은 소실되었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는 자연적 능력, 즉 신과 관계할 능력은 남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신의 형상이란 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뜻하고 후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관련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에서도 신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몰트만은 신의 형상에 대해 이러한 전통적인 실체 유비와는 달리 관계 유비로 접근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신의 형상에 대한 실체적 이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에서 시작한다고 보면서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 중심주의적 편향성을 지님으로써 온당치 못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에 의하면 신의 형상이란 인간론적 개념이기 전에 신론적 개념이므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형상은 먼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 정재현은 이 견해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신의 형상이 신-인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과 함께 인간도 관계적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며, 타락으로 인한 신의 형상의 상실이란 곧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 관계성의 복원에 대해 인간도 마땅히 능동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지시함으로써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의 형상이란 창조사건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주어진 것일뿐 아니라 이루어 가야 할 것이기도 하다.
신의 형상이 시원인 동시에 종말인 과정적 관계의 사건임을 말한다. 이로서 신의 형상이란 이미 창조된 인간에게 덧붙여지는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의미를 지닌다. 곧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인 것이다. 신의 형상이란 인간의 특수한 기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실존적으로 보면, 신 앞에 선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와 신이 물어오는 질문에 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한성을 부정하지 않는 초월성이 유한자에게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로서 인간은 유한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닌다. 유한성에 대한 체험은 곧 초월성에 대한 체험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란 유한성과 초월성이 서로 만나 얽히는 과정이다.
이러한 얽힘이 최고조로 극대화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자유를 지닌 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죄성과 타락과 연관해서 탐구해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신의 형상’은 죄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마귀의 형상’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유전적 원죄설→죄와 죽음의 인과론적 고리’라는 일련의 구도를 축으로 하여 죄론과 구원론을 수립하려는 작업이다.
이 구도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죄인으로 낮추고 신을 높이 떠받드는 경외의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자세는 그 의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엄청난 신성모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신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는데, 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자진해서 신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포기하고 비하시킨다면, 즉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하나님 것)을 함부로 취급한 것이 된다면 그 피조물의 창조적 원주인 되시는 신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을 낮출수록 신이 높아진다는 아니 더욱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을 낮추어야만 신을 높일 수 있다는 발상은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신과 인간의 동격화에 입각한 신성모독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해서 모독될 신성이라면 그것은 애시당초 신성이 아닐 터인즉, 신성모독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의 비열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기존 신학에서의 죄의 강조는 인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타락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라면 이것은 이미 ‘신과 이어져 있음’의 견지에서 보면 ‘있어야 될 본래 자리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겠는데 이것이 곧 죄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에 그런데 인간의 죄는 두 가지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자기 비하’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이다.
‘자기 비하’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자아를 맡기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속죄에 대한 확신에서 주어지는 평안은 결국 자기 확보로 귀결됨으로써 ‘죄의식→속죄→평안→자기유지’라는 이기적 죄성의 고리를 오히려 더욱 조장하게 된다. 즉 죄의식의 심화나 부추김이 인간의 자기비하라는 제스처를 통해 결국 승리주의적 자기 확보를 노리는 반신앙적 작태인 것이다.
또한 자기 비하는 타자를 절대화시키는 사태에 이른다. 타자가 만약 자기 눈에 절대적으로 보인다면 그 절대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고 파괴시켜버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완벽과 완전이 꼴 보기 싫어서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관계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죄, 즉 소외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의 긍정적인 면도 ‘떨어져 나옴’은 그 무엇인가 새롭고 창조적인 것을 ‘향해 움직임’의 동기가 된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죄는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겪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죄가 마술적인 속죄 선언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부정의 과제를 부여해 주는 기제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죄성의식이 구원 가능성과 연관된다고 할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라는 로마서 5:20의 말씀이나 ‘죄의식은 신 앞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자유로운 행위’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은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이처럼 유한성과 초월성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죄성을 피할 길은 없는데 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겸허히 비우고자 하는가, 아니면 죄성을 깨닫지도 못하거나 부인함으로써 오만스럽고도 무지몽매한 상태에 머물 것인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레네우스에 있어 악이란 단지 인간이 미성숙성에서 유발된 모습일 뿐이다. 종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다 하신다. 인간에게 있어 타락이란 신의 선하신 목적의 성취를 가리키는 완전성에 인간이 근접하기 위해 신이 친히 지정하신 조건이다.
이러한 사상은 쉴라이어마허에게도 이어지는데, 죄라는 것은 벌로서의 고통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과 신의식 사이의 정비례성에 의거하여 구원이 구현되게 하기 위함이다. 쉴라이어마처는 이러한 목적론적 구원관에 입각해서 종래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전통에서 유구하게 견지되어 오던 임의적 예정에 의한 구원과 저주의 갈림길, 즉 양과 염소의 구별을 거부하고 보편구원론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즉 그에 의하면 만일 영원한 축복의 천당과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라는 영역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다면 이것은 두 영역이 서로 그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된다면 천당의 사람들은 그들의 품성으로 미루어 지옥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낄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지 축복이라는 것이 영속적 저주와 공존하다는 것 자체가 어느 쪽도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쉴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양과 염소를 임의로 가랄 처분하는 폭군적 횡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신의 절대성에 대한 제할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한다. 그에 의하면 인과론적 결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애지중하는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바로 종국적 구원의 단계에서 모든 영혼들을 회복시키심으로써 태초에 시작하는 창조를 비로소 완성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해방적 복음인가!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구원과 완성을 위한 대화적 구도를 짜기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수난 안에서 자신도 함께 수난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더불어 ‘피조성과 죄성의 상호공속성’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 때문에’나 ‘인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과 더불어’의 고통이다.
고대 철학에 의하면 형상을 질료를 움직이게 해주지만 형상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철학을 받아들인 전통 신학은,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결코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통 받은 신만이 고통 받은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신 자신으로서의 신’과 ‘인간을 위한 신’ 사이의 긴장은 예수의 죽음에서 해소가 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받으셨다고”고 했다. 즉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은 유한성과 초월성의 갈등으로부터 종말적으로 해결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18)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창조의 근거요 인간의 자유를 필연케 한다. 이 자유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란 곧 신의 자발적 제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에게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나 자유보다 앞선 것은 없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보다 앞선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되지 않는 자유다’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베르쟈예프가 말했다. 신은 이 자유를 사용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즉 창조의 충만을 위해서 창조의 공허로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도 이것을 위한 자유다.
인간에게도 죽음을 향해 다가설 자유가 있다. 존재는 그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구성하고, 자유는 그 충만으로 존재를 구성한다. 인간의 유한성이란 곧 초월성으로 향하여 자유를 통해 체험된다. 삶의 힘이 없이는 죽을 능력도 없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삶을 긍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삶과 죽음은 긍정적으로 상호 연합되어야 한다.
죽음 안에서의 참된 삶이 있기에 늘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때 실존의 궁극적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깨닫게 하며 인간이 이루어놓은 무수한 형태의 실존에 대한 모든 집착을 초월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면서 늘 실존적 선택과 결단을 행사해야 한다.
평 가
저자는 이방인의 신과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과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언약 자체의 내용과 괴리되게 만들며, 그 언약과 맹세를 자신의 열심만으로 이루어나가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특수성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441페이지 관주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 의문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구약성서에서도 지배적이었던 대리적 죽음관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적 죽음관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에 대한 ‘대속제물’로 그리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대속적 죽음관이 지니고 있는 법적-제의적 사고 및 인과응보적 사상의 한계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의 위해 예수의 죽음이 반드시 그리고 불가피한 절차였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희생이 신의 은총과 사랑의 발로였다고 고백되지만 그 소박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이유는 신의 사랑이 반드시 그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사랑이 꼭 피를 보아야 하는가라는 단도직입적 질문은 신성목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그는 신에 대한 흡혈귀적 공포의 이미지를 어느 한 구석에 갖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왜 꼭 ‘피’의 상징물로만 모아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피라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포괄적으로 ‘희생했음’을 알리는 무의미한 흔적으로만 간주하고 만다. 이는 저자는 그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자유’가 침해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신은 그저 인간의 자유를 원초적으로 기살리기 위한 사랑과 창조 행위를 했다는 것을 최종 결론으로 잡고 있기에 삐져나온 실밥이다. 구태여 피를 부각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자유성을 말해줄 수 있는 실력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구타와 폭행 없이 그냥 곱게 자살하셔도 희생의 의미가 얇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 피 자체에서 나온다는 점을 모른다. 피가 곧 언약이다. 이것을 저자는 모른다. 저자는 그저 신과 협동할 자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유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자유본능을 저주하는 사건임을 저자는 모르고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단절’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 티끌만도못한주제에.hwp (48.0K), Down:12
관리자(IP:124.♡.84.82)
09-03-07 11:22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정재현
출판사 : 분도출판사 (왜관 : 1999)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철학적인 탐구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이것은 인간이 ‘참된 인간상’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됨’과 ‘인간’이 서로 관련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묻는 것이 된다. 즉 ‘참된 인간상’이 분명히 ‘있음’을 전제한 물음이다.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서양의 고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라고 묻는 그 주체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칸트에 이르러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적 우위를 선언하는 선험성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부상과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피히테와 쉘링을 거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구상적 자아로서의 위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겔에 이르면 ‘있음’과 ‘앎’이 같다는 것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헤겔 이후 현대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왜 ‘참’을 묻는가?”라는 실존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즉 보편성과 자존성을 근간하는 하는 본질과는 대비해서 이제 실존이라는 개별성과 우연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누가’가 규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개별적 주체의 시공적 상황성을 포함시킬 때만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전에는 ‘무엇-어떻게’에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누가-언제/어디서’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 즉 ‘무엇-어떻게’가 ‘왜?’라는 질문을 고리로 하여 하나로 연결 지어진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런 ‘보편적 인간’이라는 같음의 대표 단수성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은 명사적 완결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동사적 ‘사람됨’이다. 만약에 자신을 명사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자기구축 작업으로 인해 자기동일성으로 목적으로 삼게 되고, 이렇게 되면 타자를 자기 안으로 예속시키든지 아니면 타자를 자기로부터 몰아내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 한다. 현대철학은 이러한 ‘존재철학’의 오류를 찾아내어서 ‘동사화’된 ‘생성철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는 타자(他者)의 역할이 요긴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린 관계성’이다. ‘열린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열린 가능성’이 나온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같음’으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여분)야말로 바로 실체의 자기충족성이 지니는 폐쇄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차이’의 자리이다. 이 차이가 곧 관계성의 지평이며 자유의 실현가능성의 터전이다. 이로서 타인에 대해 상호동격임을 알 때 비로소 진리는 그 가운데 피어난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참다운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
신학적인 인간 탐구는 인간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들어간다. 하나는 피조성이요, 다른 하나는 죄성이다. 피조성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고, 죄성이란, 타락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피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라는 점이다.
무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뜻하고, ‘신의 형상 부여’는 인간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있어 비록 ‘없음’으로부터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없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없음’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다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늘 신비적인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미 아는 것으로부터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면서, ‘형상’과 ‘유사성’을 구별했다. 즉 신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타고난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그리고 신의 유사성은 ‘신의 은총에 의한 완전을 위해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이해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그를 거역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주어진 형상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될 유사성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죄로 인해 ‘신의 닮음’은 상실되었지만 창조의지에 의한 ‘신의 모습’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신의 형상을 죄와 분리시키는 이레네우스의 이러한 초월주의적 견해는 중세 스콜라 신학에 이어졌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형상뿐 아니라 초자연적 선물인 유사성도 주었는데 범죄로 인해 초자연적 선물은 소실되었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는 자연적 능력, 즉 신과 관계할 능력은 남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신의 형상이란 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뜻하고 후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관련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에서도 신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몰트만은 신의 형상에 대해 이러한 전통적인 실체 유비와는 달리 관계 유비로 접근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신의 형상에 대한 실체적 이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에서 시작한다고 보면서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 중심주의적 편향성을 지님으로써 온당치 못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에 의하면 신의 형상이란 인간론적 개념이기 전에 신론적 개념이므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형상은 먼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 정재현은 이 견해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신의 형상이 신-인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과 함께 인간도 관계적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며, 타락으로 인한 신의 형상의 상실이란 곧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 관계성의 복원에 대해 인간도 마땅히 능동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지시함으로써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의 형상이란 창조사건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주어진 것일뿐 아니라 이루어 가야 할 것이기도 하다.
신의 형상이 시원인 동시에 종말인 과정적 관계의 사건임을 말한다. 이로서 신의 형상이란 이미 창조된 인간에게 덧붙여지는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의미를 지닌다. 곧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인 것이다. 신의 형상이란 인간의 특수한 기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실존적으로 보면, 신 앞에 선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와 신이 물어오는 질문에 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한성을 부정하지 않는 초월성이 유한자에게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로서 인간은 유한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닌다. 유한성에 대한 체험은 곧 초월성에 대한 체험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란 유한성과 초월성이 서로 만나 얽히는 과정이다.
이러한 얽힘이 최고조로 극대화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자유를 지닌 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죄성과 타락과 연관해서 탐구해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신의 형상’은 죄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마귀의 형상’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유전적 원죄설→죄와 죽음의 인과론적 고리’라는 일련의 구도를 축으로 하여 죄론과 구원론을 수립하려는 작업이다.
이 구도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죄인으로 낮추고 신을 높이 떠받드는 경외의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자세는 그 의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엄청난 신성모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신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는데, 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자진해서 신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포기하고 비하시킨다면, 즉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하나님 것)을 함부로 취급한 것이 된다면 그 피조물의 창조적 원주인 되시는 신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을 낮출수록 신이 높아진다는 아니 더욱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을 낮추어야만 신을 높일 수 있다는 발상은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신과 인간의 동격화에 입각한 신성모독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해서 모독될 신성이라면 그것은 애시당초 신성이 아닐 터인즉, 신성모독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의 비열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기존 신학에서의 죄의 강조는 인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타락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라면 이것은 이미 ‘신과 이어져 있음’의 견지에서 보면 ‘있어야 될 본래 자리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겠는데 이것이 곧 죄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에 그런데 인간의 죄는 두 가지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자기 비하’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이다.
‘자기 비하’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자아를 맡기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속죄에 대한 확신에서 주어지는 평안은 결국 자기 확보로 귀결됨으로써 ‘죄의식→속죄→평안→자기유지’라는 이기적 죄성의 고리를 오히려 더욱 조장하게 된다. 즉 죄의식의 심화나 부추김이 인간의 자기비하라는 제스처를 통해 결국 승리주의적 자기 확보를 노리는 반신앙적 작태인 것이다.
또한 자기 비하는 타자를 절대화시키는 사태에 이른다. 타자가 만약 자기 눈에 절대적으로 보인다면 그 절대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고 파괴시켜버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완벽과 완전이 꼴 보기 싫어서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관계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죄, 즉 소외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의 긍정적인 면도 ‘떨어져 나옴’은 그 무엇인가 새롭고 창조적인 것을 ‘향해 움직임’의 동기가 된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죄는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겪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죄가 마술적인 속죄 선언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부정의 과제를 부여해 주는 기제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죄성의식이 구원 가능성과 연관된다고 할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라는 로마서 5:20의 말씀이나 ‘죄의식은 신 앞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자유로운 행위’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은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이처럼 유한성과 초월성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죄성을 피할 길은 없는데 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겸허히 비우고자 하는가, 아니면 죄성을 깨닫지도 못하거나 부인함으로써 오만스럽고도 무지몽매한 상태에 머물 것인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레네우스에 있어 악이란 단지 인간이 미성숙성에서 유발된 모습일 뿐이다. 종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다 하신다. 인간에게 있어 타락이란 신의 선하신 목적의 성취를 가리키는 완전성에 인간이 근접하기 위해 신이 친히 지정하신 조건이다.
이러한 사상은 쉴라이어마허에게도 이어지는데, 죄라는 것은 벌로서의 고통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과 신의식 사이의 정비례성에 의거하여 구원이 구현되게 하기 위함이다. 쉴라이어마처는 이러한 목적론적 구원관에 입각해서 종래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전통에서 유구하게 견지되어 오던 임의적 예정에 의한 구원과 저주의 갈림길, 즉 양과 염소의 구별을 거부하고 보편구원론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즉 그에 의하면 만일 영원한 축복의 천당과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라는 영역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다면 이것은 두 영역이 서로 그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된다면 천당의 사람들은 그들의 품성으로 미루어 지옥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낄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지 축복이라는 것이 영속적 저주와 공존하다는 것 자체가 어느 쪽도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쉴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양과 염소를 임의로 가랄 처분하는 폭군적 횡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신의 절대성에 대한 제할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한다. 그에 의하면 인과론적 결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애지중하는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바로 종국적 구원의 단계에서 모든 영혼들을 회복시키심으로써 태초에 시작하는 창조를 비로소 완성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해방적 복음인가!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구원과 완성을 위한 대화적 구도를 짜기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수난 안에서 자신도 함께 수난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더불어 ‘피조성과 죄성의 상호공속성’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 때문에’나 ‘인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과 더불어’의 고통이다.
고대 철학에 의하면 형상을 질료를 움직이게 해주지만 형상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철학을 받아들인 전통 신학은,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결코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통 받은 신만이 고통 받은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신 자신으로서의 신’과 ‘인간을 위한 신’ 사이의 긴장은 예수의 죽음에서 해소가 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받으셨다고”고 했다. 즉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은 유한성과 초월성의 갈등으로부터 종말적으로 해결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18)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창조의 근거요 인간의 자유를 필연케 한다. 이 자유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란 곧 신의 자발적 제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에게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나 자유보다 앞선 것은 없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보다 앞선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되지 않는 자유다’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베르쟈예프가 말했다. 신은 이 자유를 사용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즉 창조의 충만을 위해서 창조의 공허로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도 이것을 위한 자유다.
인간에게도 죽음을 향해 다가설 자유가 있다. 존재는 그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구성하고, 자유는 그 충만으로 존재를 구성한다. 인간의 유한성이란 곧 초월성으로 향하여 자유를 통해 체험된다. 삶의 힘이 없이는 죽을 능력도 없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삶을 긍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삶과 죽음은 긍정적으로 상호 연합되어야 한다.
죽음 안에서의 참된 삶이 있기에 늘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때 실존의 궁극적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깨닫게 하며 인간이 이루어놓은 무수한 형태의 실존에 대한 모든 집착을 초월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면서 늘 실존적 선택과 결단을 행사해야 한다.
평 가
저자는 이방인의 신과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과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언약 자체의 내용과 괴리되게 만들며, 그 언약과 맹세를 자신의 열심만으로 이루어나가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특수성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441페이지 관주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 의문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구약성서에서도 지배적이었던 대리적 죽음관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적 죽음관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에 대한 ‘대속제물’로 그리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대속적 죽음관이 지니고 있는 법적-제의적 사고 및 인과응보적 사상의 한계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의 위해 예수의 죽음이 반드시 그리고 불가피한 절차였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희생이 신의 은총과 사랑의 발로였다고 고백되지만 그 소박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이유는 신의 사랑이 반드시 그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사랑이 꼭 피를 보아야 하는가라는 단도직입적 질문은 신성목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그는 신에 대한 흡혈귀적 공포의 이미지를 어느 한 구석에 갖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왜 꼭 ‘피’의 상징물로만 모아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피라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포괄적으로 ‘희생했음’을 알리는 무의미한 흔적으로만 간주하고 만다. 이는 저자는 그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자유’가 침해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신은 그저 인간의 자유를 원초적으로 기살리기 위한 사랑과 창조 행위를 했다는 것을 최종 결론으로 잡고 있기에 삐져나온 실밥이다. 구태여 피를 부각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자유성을 말해줄 수 있는 실력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구타와 폭행 없이 그냥 곱게 자살하셔도 희생의 의미가 얇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 피 자체에서 나온다는 점을 모른다. 피가 곧 언약이다. 이것을 저자는 모른다. 저자는 그저 신과 협동할 자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유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자유본능을 저주하는 사건임을 저자는 모르고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단절’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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