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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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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철학성경신학[철학]

알랭 바디우의 철학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알랭 바디우의 철학

2006년 4월 29일 이 근 호 목사

“왜 그 무엇이 도대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를 중심으로해서 계속 있어 왔다. 있음에 대해서는 있음보다 더 상위의 근거란 있을 수 없으며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 또는 근거임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이유 없는 있음에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서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음이 있음 자체의 근거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있음이 있음으로 읽히게 되는 계기에 주목하자는 것인데 이 계기란 바로 ‘있었다고 없어지는 사건’ 즉 ‘없어짐의 체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일 ‘없어짐’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있음은 경계지어질 것이 없는 전체여서 결코 ‘있음’으로 드러나거나 새삼 체험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어짐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이동으로서 있음과 없음을 서로 구별하게 하고 또한 서로 연관시키는 기제가 된다. 생명선의 견지에서 보자면, 있음의 이유가 있음 자체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을 삼켜버림’이라는 사건/체험, 즉 죽음의 도전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며, 따라서 없음이야말로 있음이 비로소 소중한 ‘있음’으로 읽히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무릇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지만 우리가 관심하려는 인간도 결국 ‘없어질 있음’을 잠시 영위할 뿐인데, 실상 ‘없어질 있음’만이 아니라 ‘없었던 적도 있는 있음’이기도 해서 결국 ‘잠시의 있음’의 앞 뒤로 없음이 철저히 에워싸고 있는 바 ‘없음’에 둘러싸인 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있음이 없음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있음만큼은 확실히 있음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있음은 그 바깥에 없음으로 둘러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없음을 싸안고 있는 있음이기 때문이다.

즉 비록 있음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그 삶 안에 품고 있는 있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없음’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없음이 그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있음의 존재론’은 있음을 없음과 대비시켜서 사유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로부터 존재와 다른 것을 연역해 낼 수 없다. 계속 존재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조차 없음을 낳기에 결국 ‘있음의 존재론’은 치명적으로 주체의 소멸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의 존재론에서는 주체의 모든 형태가 모든 존재자에게도 속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과제로 삼고서 풀어 내야 할 그 숨겨짐도 없음에 의해서 애매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우선적으로 있음의 존재론이 제시하는 존재의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에 못지않게 주체의 실재적인 면이 드러나는 차원으로서의 사건의 가치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수학적인 존재론을 따라서 형식적인 언어로 구성된 진술들로 질서있게 말해질 수 있다면, 자체적인 수학적 논리에 의해서 실재적인 존재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주체적인 개입이 동반된 사건에 의해서 없음에 빨려들어가지 않는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느껴진다든지 또는 감지된다든지 하는 등이 이루어져아만 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1)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하나가 있다는 것은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즉 하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는 근원적인 현존이 아니라 그 어떤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스스로를 하나로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또는 하나라는 것은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를 하나의 존재자로 취할 경우에는 그 하나의 실재성이 곧 구성상의 다수성이자 안정적인 다수성으로 나타나지만, 실재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를 취할 경우에는 그것이 곧 불안정한 다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는 그 자신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법칙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대상 바로 그 자체 속에서 하나가 배제된 연속성을 직관할 수 있는 바, 이 직관은 곧 존재의 불안전성에 대한 직관, 즉 다수는 스스로를 다수화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하여 다수는 다수들의 다수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실에 대한 직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에 드리운 하나의 그 묵중한 현존이란 한마디로 말해 순수 다수성의 현시 위에 가해진 작용이요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바디우는 우리가 하나(1)라는 함정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과 작용 간의 구분을 행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다수로서 현시된 존재는 그 자체가 불안정적이다. 반면에 상황은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다수, 따라서 언제나 안정적인 다수를 말하며, 이때 작용은 상황을 자신의 안정성 안에서 현시되도록 하는 셈, 즉 ‘하나-로-셈하기’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존재가 하나라는 가능성 안에서 현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 덕분이다. 바디우가 상황 안에서 안정성을 누리는 합치는 그 어떤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그 어떤 구조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타성의 다수성을 불러오는 법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렇게 볼 때, 바디우는 이로부터 얻게 되는 존재론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그것은 곧 존재와 다수의 등가화라는 가르침. 따라서 존재론은 그 모습 그대로인 한에 있어서는 불안정한 다수성들에 대한 이론일 수만 있다는 가르침이다.

존재는 그 어떤 기초도 그 어떤 의미도 지나지 않는 순수 다수성이다. 또는 오로지 다수성들로만 이루어진 평면만이 존재한다. 존재와 다수의 이 같은 등가화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다.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전체성도 인내하지를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순수 다수성은 통합적인 다수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정확하게 말해 상황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의 수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수가 어떤 조건들을 거쳐서 스스로를 다수로서 인지되도록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조건들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는 다수로 하여금 그의 순수한 현시를 포기하게끔 하는 작용이다. 하나는 다수로 불안정한 다수의 타자를 위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사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 또는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결코 그 어떤 원자적인 실재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존재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만 존재는 차라리 존재자의 모든 현존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의 실존을 긍정함으로부터 출발하는 일, 따라서 존재의 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일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공백 또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따라서 존재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존재는 자신의 실존함이 실존치 않는 것, 즉 공백이요 공집합이기 때문에,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그 어떤 실존함도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사건’이 지니는 가장 큰 힘은 존재를 공백으로서 또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로서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 데 있다기보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로 이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보다 깊이 있게 사유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 작업을 바디우는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것일까?’

말 그대로 공백으로 정의된 존재를 또는 그냥 간단하게는 공백을 과연 그는 ‘어떻게’ 보다 더 깊이 있게 사유해 나가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지 공백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반드시 모든 강도나 질을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다수만을 고려하는 사유이어야만 한다.

상황 그 자체는 ‘존재는 그 어떤 전체성도 용납하지 않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다’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다수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무엇인가?’ 또는 ‘어떤 다수의 존재함이 우리에게 확인된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경우,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결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 안에서는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일자도, 그 어떤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의 불안정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에 의거하여서는 그의 존재함이 실질적으로 확인된 어떤 다수의 위치를 결코 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함이란 곧 ‘거기에 있음’, ‘거기에 위치 지정 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존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거기에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어떤 다수의 위치지 지정을 위해 그 어떤 공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되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위치 지정의 공간’ 즉 상황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존재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공정된 공간 또는 장소란 없으며 또 존재 그 자체는 모든 관계를 벗어난다. 이 점을 상황의 필연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귀속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합이론의 형식주의에 의거하여 거ε∈S 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ε는 존재함이 확인된 어떤 다수를, 그리고 S는 상황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이때 이 집합들은 ‘공백의 양상들로서의 상황들’을 이룬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앞에서 존재의 사유 방식으로 제시한 명령(공백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또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은 오로지 공백 안에 머물면서 오로지 공백만을 거론하자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이 말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하나 또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맞물려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과 더불어서 존재를 이야기하되 언제나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야만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공백으로 고려하는 한에 있어서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백에 대한 사유를 오로지 공백만을 가지고서 어떻게 진전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공백의 양상으로서의 상황이란 무엇인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 귀속하는 다수란 무엇인가?

또는 존재함이 확인된 다수, 그러면서도 모든 질과 강도 등이 배제된 다른 다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수학적인 의미의 집합’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바디우가 수학적인 숙고 방식 중 특히 집합론에 의거하여서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무한한 다수로서의 존재의 본래 모습은 ‘초과’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집합에는 두 개의 관계들이 공존한다. 원소와 집합의 관계에 해당되는 귀속과 부분들 또는 부분 집합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포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는 본래의 집합 a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집합임을 보게 된다.

귀속들 또는 원소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a와 포함들 또는 부분집합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p(a) 사이의 이런 ‘간격’을 바디우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시된 하나의 다수가 주어질 경우, 그의 부분집합들이 구성하는 하나- 다수는 최초의 다수보다 언제나 본질적으로 더 크다.

또는 상황이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는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바디우가 ‘간격’ 또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귀속 위에서 보게 되는 포함의 초과‘가 바로 이것이다.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의 원소이되 본래의 집합 a의 원소는 아닌 집합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또는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지닌다.

먼저 초과점의 정리는 일자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차 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는 자신에게 포함되어 있되 자신에게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를, 따라서 하나 자신을 초과하는 다수를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수도 그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를 행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초과점의 정리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하는 것들, 그렇지만 그들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것(예를 들어, 계급, 집단, 조직 등 )을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그런 실존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역설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은 분명히 상황에 귀속하지만, 그 상황에 귀속하는 개인 또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계급(즉 상황의 부분집합으로서의 계급)은 상황에 귀속하지 않는다. 계급은 귀속의 세계를 초과하는 것이다.

상황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상황은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부터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백으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물론 공백들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공백을 유일한 원소로 지니는 집합, 즉 공집합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백의 유일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공백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존재의 단순하면서도 유일한 이름인 공백으로부터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이 갈라져나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름들에 의해서 상황들이 특징지어지게 된다. (모든 상황이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공백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면서 새로운 다수들의 무제한적인 생산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차이점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자기에게 고유한 그 어떤 구조, 즉 그 어떤 안정성을 향유함에 반해서, 이와는 반대로 공백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다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는 바, 지금 여기에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상황 안에서 공백을 몰아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지니는 상황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도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상황과 상황의 상태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틀 안에서 귀속과 포함을, 실존과 비실존을, 개인들과 계급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황의 부분들은 포함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존하지만 귀속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꼭 실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틀의 유형을 따라서 한쪽에서는 실존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비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즉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귀속하는 원소들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상황에 귀속하는 항들이 그 상황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의 부분들 또는 부분집합들 역시 그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다. 따라서 상황의 상태는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는 작용을 하는 하나의 셈이며, 메타 구조라 불릴 수 있다.

특히 상황의 상태에 고유한 이러한 셈을, 바디우는 그것이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고 있다는 의미에서 재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의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해당되는 상황 안에서 재현된다는 것은 그 항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상황의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그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들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상, 따라서 상황에 귀속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포함된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임과 동시에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정규적인 황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둘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들, 따라서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포함되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돌출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우리가 방금 위에서 살펴보았던 항들, 즉 계급, 국가 등의 사회적인 조직들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상황 현시되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지 않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이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는 않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특이한 항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정규적인 항들과 돌출들에 대립하는 역사적인 것들, 즉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특이한 항들, 즉 상황의 상태에 의해서 상황에 재현됨이 없이 상황에 현시되는 항들은 무엇에 해당되는가? 본래 다수에 귀속은 하지만 그 다수에 포함되지는 않는 특이한 항들, 또는 상황적 원소이지만 상황 안의 그 많은 부분집합들로 구성된 집합의 원소는 아닌 그 특이한 항들을 바디우는 비정규적인 항들 또는 역사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적인 항들, 역사적인 것들이라는 명칭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특이한 항들은 특히 자연의 정류적인 항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는 자연과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는 자연적인 의존성 또는 비독립성으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정규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자연으로 사유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특이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비정규적이며 비자연적으로 것으로, 즉 역사로 사유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다수 -형식이 정규적인 것의 안정성 안에 머무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성이 보여주는 다수-형식은 상대방의 메타 구조에 의해서는 결코 취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다수-형식이 상태가 행하는 셈의 재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점을 가리킨다.

바디우는 이처럼 역사를 특이성의 출현으로 정의한 이후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결과들을 끄집어 낸다. 첫째, 하나의 역사라고 고려되는 역사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 위에 차곡차곡 가해지는 부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전체화도, 원소들과 상광들에 대한 하나-로- 셈하기도 아니다.

차라리 역사는 자신의 특이성들에 의거하여서 전체화로부터 하나의 장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기억’으로 고려되는 하나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첨부파일 : 알랭바디우의철학.hwp (64.0K), Down:25

관리자(IP:124.♡.84.82)

09-03-07 01:38

알랭 바디우의 철학

2006년 4월 29일 이 근 호 목사

“왜 그 무엇이 도대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있어 왔다. 있음에 대해서는 있음보다 더 상위의 근거란 잇을 수 없으며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 또는 근거임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이유 없는 있음에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서 있음 그 자체가 있음의 이유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음이 있음 자체의 근거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있음이 있음으로 읽히게 되는 계기에 주목하자는 것인데 이 계기란 바로 ‘있었다고 없어지는 사건’ 즉 ‘없어짐의 체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만일 ‘없어짐’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있음은 경계 지어질 것이 없는 전체여서 결코 ‘있음’으로 드러나거나 새삼 체험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어짐은 있음에서 없음으로의 이동으로서 있음과 없음을 서로 구별하게 하고 또한 서로 연관시키는 기제가 된다. 생명선의 견지에서 보자면, 있음의 이유가 있음 자체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을 삼켜버림’이라는 사건/체험, 즉 죽음의 도전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며, 따라서 없음이야말로 있음이 비로소 소중한 ‘있음’으로 읽히게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

무릇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지만 우리가 관심하려는 인간도 결국 ‘없어질 있음’을 잠시 영위할 뿐인데, 실상 ‘없어질 있음’만이 아니라 ‘없었던 적도 있는 있음’이기도 해서 결국 ‘잠시의 있음’의 앞뒤로 없음이 철저히 에워싸고 있는 바 ‘없음’에 둘러싸인 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있음이 없음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있음만큼은 확실히 있음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불가피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있음은 그 바깥에 없음으로 둘러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없음을 싸안고 있는 있음이기 때문이다.

즉 비록 있음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그 삶 안에 품고 있는 있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없음’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없음이 그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있음의 존재론’은 있음을 없음과 대비시켜서 사유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로부터 존재와 다른 것을 연역해 낼 수 없다. 계속 존재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조차 없음을 낳기에 결국 ‘있음의 존재론’은 치명적으로 주체의 소멸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의 존재론에서는 주체의 모든 형태가 모든 존재자에게도 속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과제로 삼고서 풀어내야 할 그 숨겨짐도 없음에 의해서 애매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존재론은 우선적으로 있음의 존재론이 제시하는 존재의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에 못지않게 주체의 실재적인 면이 드러나는 차원으로서의 사건의 가치를 드높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수학적인 존재론을 따라서 형식적인 언어로 구성된 진술들로 질서있게 말해질 수 있다면, 자체적인 수학적 논리에 의해서 실재적인 존재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주체적인 개입이 동반된 사건에 의해서 없음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느껴진다든지 또는 감지된다든지 하는 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1)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하나가 있다는 것은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즉 하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는 근원적인 현존이 아니라 그 어떤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스스로를 하나로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또는 하나라는 것은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있다고 고려되는 하나를 하나의 존재자로 취할 경우에는 그 하나의 실재성이 곧 구성상의 다수성이자 안정적인 다수성으로 나타나지만, 실재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를 취할 경우에는 그것이 곧 불안정한 다수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는 그 자신이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를 안정적이게 하는 법칙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대상 바로 그 자체 속에서 하나가 배제된 연속성을 직관할 수 있는 바, 이 직관은 곧 존재의 불안전성에 대한 직관, 즉 다수는 스스로를 다수화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하여 다수는 다수들의 다수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사실에 대한 직관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에 드리운 하나의 그 묵중한 현존이란 한마디로 말해 순수 다수성의 현시 위에 가해진 작용이요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바디우는 우리가 하나(1)라는 함정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과 작용 간의 구분을 행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다수로서 현시된 존재는 그 자체가 불안정적이다. 반면에 상황은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 다수, 따라서 언제나 안정적인 다수를 말하며, 이때 작용은 상황을 자신의 안정성 안에서 현시되도록 하는 셈, 즉 ‘하나-로-셈하기’를 말한다.

따라서 만약 존재가 하나라는 가능성 안에서 현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하나-로- 셈하기라는 작용 덕분이다. 바디우가 상황 안에서 안정성을 누리는 합치는 그 어떤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그 어떤 구조 작용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는 합치는 타성의 다수성을 불러오는 법칙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렇게 볼 때, 바디우는 이로부터 얻게 되는 존재론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그것은 곧 존재와 다수의 등가화라는 가르침. 따라서 존재론은 그 모습 그대로인 한에 있어서는 불안정한 다수성들에 대한 이론일 수만 있다는 가르침이다.

존재는 그 어떤 기초도 그 어떤 의미도 지나지 않는 순수 다수성이다. 또는 오로지 다수성들로만 이루어진 평면만이 존재한다. 존재와 다수의 이 같은 등가화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다.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전체성도 인내하지를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순수 다수성은 통합적인 다수성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정확하게 말해 상황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의 수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수가 어떤 조건들을 거쳐서 스스로를 다수로서 인지되도록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조건들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는 다수로 하여금 그의 순수한 현시를 포기하게끔 하는 작용이다. 하나는 다수로 불안정한 다수의 타자를 위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사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 또는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결코 그 어떤 원자적인 실재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존재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만 존재는 차라리 존재자의 모든 현존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의 실존을 긍정함으로부터 출발하는 일, 따라서 존재의 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일은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게 있어서 하나 또는 일자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공백 또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따라서 존재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존재는 자신의 실존함이 실존치 않는 것, 즉 공백이요 공집합이기 때문에, 존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그 어떤 실존함도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와 사건’이 지니는 가장 큰 힘은 존재를 공백으로서 또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로서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 데 있다기보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바로 이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보다 깊이 있게 사유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 작업을 바디우는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것일까?’

말 그대로 공백으로 정의된 존재를 또는 그냥 간단하게는 공백을 과연 그는 ‘어떻게’ 보다 더 깊이 있게 사유해 나가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지 공백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반드시 모든 강도나 질을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다수만을 고려하는 사유이어야만 한다.

상황 그 자체는 ‘존재는 그 어떤 전체성도 용납하지 않는 무한하며 불안정한 순수 다수이다’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다수가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무엇인가?’ 또는 ‘어떤 다수의 존재함이 우리에게 확인된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경우,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결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 안에서는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는 그 어떤 전체도, 그 어떤 일자도, 그 어떤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의 불안정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우리는 순수 다수로서의 존재에 의거하여서는 그의 존재함이 실질적으로 확인된 어떤 다수의 위치를 결코 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함이란 곧 ‘거기에 있음’, ‘거기에 위치 지정 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존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거기에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어떤 다수의 위치지 지정을 위해 그 어떤 공간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되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위치 지정의 공간’ 즉 상황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존재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공정된 공간 또는 장소란 없으며 또 존재 그 자체는 모든 관계를 벗어난다. 이 점을 상황의 필연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귀속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합이론의 형식주의에 의거하여 거ε∈S 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ε는 존재함이 확인된 어떤 다수를, 그리고 S는 상황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이때 이 집합들은 ‘공백의 양상들로서의 상황들’을 이룬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앞에서 존재의 사유 방식으로 제시한 명령(공백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하고 또 공백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은 오로지 공백 안에 머물면서 오로지 공백만을 거론하자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이 말은, 마치 앞에서 우리가 하나 또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맞물려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과 더불어서 존재를 이야기하되 언제나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야만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공백으로 고려하는 한에 있어서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백에 대한 사유를 오로지 공백만을 가지고서 어떻게 진전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공백의 양상으로서의 상황이란 무엇인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 귀속하는 다수란 무엇인가?

또는 존재함이 확인된 다수, 그러면서도 모든 질과 강도 등이 배제된 다른 다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수학적인 의미의 집합’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바디우가 수학적인 숙고 방식 중 특히 집합론에 의거하여서 공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무한한 다수로서의 존재의 본래 모습은 ‘초과’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집합에는 두 개의 관계들이 공존한다. 원소와 집합의 관계에 해당되는 귀속과 부분들 또는 부분 집합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포함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는 본래의 집합 a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집합임을 보게 된다.

귀속들 또는 원소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a와 포함들 또는 부분집합들을 하나의 고려 아래 세는 집합 p(a) 사이의 이런 ‘간격’을 바디우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시된 하나의 다수가 주어질 경우, 그의 부분집합들이 구성하는 하나- 다수는 최초의 다수보다 언제나 본질적으로 더 크다.

또는 상황이라는 어휘를 빌려 표현하자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는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바디우가 ‘간격’ 또는 ‘존재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귀속 위에서 보게 되는 포함의 초과‘가 바로 이것이다.

집합 a의 모든 부분집합들로 이루어진 집합 p(a)의 원소이되 본래의 집합 a의 원소는 아닌 집합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또는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지닌다.

먼저 초과점의 정리는 일자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차 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는 자신에게 포함되어 있되 자신에게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를, 따라서 하나 자신을 초과하는 다수를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다수도 그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를 행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음으로 초과점의 정리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하는 것들, 그렇지만 그들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것(예를 들어, 계급, 집단, 조직 등 )을 실재적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그런 실존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역설적인 유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은 분명히 상황에 귀속하지만, 그 상황에 귀속하는 개인 또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계급(즉 상황의 부분집합으로서의 계급)은 상황에 귀속하지 않는다. 계급은 귀속의 세계를 초과하는 것이다.

상황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상황은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부터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백으로부터 그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물론 공백들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공백을 유일한 원소로 지니는 집합, 즉 공집합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백의 유일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공백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존재의 단순하면서도 유일한 이름인 공백으로부터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이 갈라져 나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름들에 의해서 상황들이 특징지어지게 된다. (모든 상황이 공백의 그 어떤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공백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면서 새로운 다수들의 무제한적인 생산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차이점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황은 자기에게 고유한 그 어떤 구조, 즉 그 어떤 안정성을 향유함에 반해서, 이와는 반대로 공백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다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공백과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적하는 바, 지금 여기에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상황 안에서 공백을 몰아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지니는 상황의 상태를 필연적으로 도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상황과 상황의 상태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틀 안에서 귀속과 포함을, 실존과 비실존을, 개인들과 계급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황의 부분들은 포함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존하지만 귀속이라는 셈의 입장에서 보자면 꼭 실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틀의 유형을 따라서 한쪽에서는 실존하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비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는 다수가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초과점의 정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즉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귀속하는 원소들이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상황에 귀속하는 항들이 그 상황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상황의 부분들 또는 부분집합들 역시 그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진다. 따라서 상황의 상태는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는 작용을 하는 하나의 셈이며, 메타 구조라 불릴 수 있다.

특히 상황의 상태에 고유한 이러한 셈을, 바디우는 그것이 상황의 구조를 구조 짓고 있다는 의미에서 재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의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해당되는 상황 안에서 재현된다는 것은 그 항이 상황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상황의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울러 그 항이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하나의 고려 아래 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들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첫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상, 따라서 상황에 귀속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포함된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임과 동시에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정규적인 황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존재,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둘째로, 상황 안에서 현시되지는 않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는 항들, 따라서 상황에 귀속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포함되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는 아니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돌출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우리가 방금 위에서 살펴보았던 항들, 즉 계급, 국가 등의 사회적인 조직들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상황 현시되지만 상황의 상태에 의거하여서 상황 안에서 재현되지 않는 항들, 그리하여 상황의 원소이지만 상황의 부분을 이루지는 않는 항들이 있다. 바디우가 특이한 항들이라고 부르는 이 항들은, 정규적인 항들과 돌출들에 대립하는 역사적인 것들, 즉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한 범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특이한 항들, 즉 상황의 상태에 의해서 상황에 재현됨이 없이 상황에 현시되는 항들은 무엇에 해당되는가? 본래 다수에 귀속은 하지만 그 다수에 포함되지는 않는 특이한 항들, 또는 상황적 원소이지만 상황 안의 그 많은 부분집합들로 구성된 집합의 원소는 아닌 그 특이한 항들을 바디우는 비정규적인 항들 또는 역사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적인 항들, 역사적인 것들이라는 명칭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특이한 항들은 특히 자연의 정류적인 항들과 대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는 자연과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는 자연적인 의존성 또는 비독립성으로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정규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자연으로 사유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특이성이 전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비정규적이며 비자연적으로 것으로, 즉 역사로 사유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다수 -형식이 정규적인 것의 안정성 안에 머무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성이 보여주는 다수-형식은 상대방의 메타 구조에 의해서는 결코 취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다수-형식이 상태가 행하는 셈의 재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점을 가리킨다.

바디우는 이처럼 역사를 특이성의 출현으로 정의한 이후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결과들을 끄집어낸다. 첫째, 하나의 역사라고 고려되는 역사란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 위에 차곡차곡 가해지는 부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전체화도, 원소들과 상광들에 대한 하나-로- 셈하기도 아니다.

차라리 역사는 자신의 특이성들에 의거하여서 전체화로부터 하나의 장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는 ‘기억’으로 고려되는 하나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결국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들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고문서가 배제된 역사가 되지 않을까? 역사가들의 지식은 결코 재현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벗어나는 사건들의 역사를 과연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성을 유일하게 건설하는 사건의 진리와 오로지 진실성에 의거하여서만 말을 하는 지식을 엄격히 구분해야만 한다.

둘째, 특이한 항은 상황의 비정규적인 황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아 특이성으로서의 사건은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지, 결코 상황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특이성 자체는 비정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특이성이 경우나 필요에 따라 하나-로-셈하기 안에서 취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특이성은 정규화될 수 있기까지 하다.

사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적인 전통으로부터 유래되는 바, 이 같은 전통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사유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였다. 왜냐하면 현시되고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다양한 형태들에 맞서서, 따라서 전체성에 맞서서, 신앙의, 사랑의, 진리의 사건을 가장 극명하게 대립시킨 이가 바로 키에르케고르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수형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이자 수직적인 개입을 말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키에르케고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상황에 대한 단절 또는 수직적인 개입이 아니라 상황에 귀속된 하나의 항이며,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상황의 본래 모습에 다가가는 것이지 결코 상황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건은 하나-로-셈하기를 취소시키는 항, 따라서 상황을 그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항,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곳에서 실재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항일 뿐인 것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결코 케에르케고르적 의미의 신학적 지평 위에 서 있는 개인과 우주 사이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에서, 즉 본래의 다수적인 상황으로서의 공백과 상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로-셈하기 사이에서이다.

결국 바디우는 실재적인 것과 법칙 사이의 간격으로 사유되는 둘의 힘을 가지고서 개인과 우주 사이에서 고려되는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둘의 힘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사건 개념에는 이처럼 일자의 현존이 아닌 둘(2)의 활짝 만개하는 활동성이 있다. 바디우는 이것을 ‘사건의 둘’을 이야기한다.

한편 바디우는 사건의 둘과 더불어서 ‘자연의 둘(2)’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둘(2)이란 존재의 유일한 이름인 공백과 이 공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각각의 복잡한 이름들로 이루어진 쌍,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로와 하나로 이루어진 쌍, 즉 자연적인 다수들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쌍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의 둘(2)과 자연의 둘(2)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둘은 존재를 정규화하지만, 반대로 사건의 둘은 바로 이 정규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바디우에게서 세 가지의 종류의 둘을 보게 된다.

즉 자연의 이원성을 형식화한 자연의 둘, 그리고 사건의 간격을 유형화한 사건의 둘, 마지막으로 자연의 둘과 사건의 둘로 이루어진 쌍을 가리키는 존재와 사건의 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바디우는 의외로 간단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가 충실성의 공정 안에 머문다는 것은 상황의 항들과 그 상황 안에 개입이 유통시킨 사건의 이름과 함께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상황의 항들과 사건의 이름 간의 연결 또는 비연결들 각각을 하나의 검열(물론 연결은 긍정적인 검열을 그리고 비연결은 부정적인 검열을 가리킨다)라고 부른다.

우리가 충실성을 공정에 의거하여서 상황의 항들을 사건의 이름과 관련지어 긍정적으로 검열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바로 이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얻게 될 모든 항들을 한 곳으로 다시 모은다는 것을 말하는 바, 바디우에 따르면 바로 이렇게 모여진 항들이 곧 하나의 진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그 자체가 곧 상황의 항들 중에서 사건의 이름과 관련하여 모여진 항들을 가리키는 한에 있어서. 상황의 한 부분, 그렇지만 사건의 이름, 충실성, 검열에 의거하여서 미래에 보게 될 한 부분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된 진리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

이 문제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건에 관련된 자리라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풀린다. 즉 사건과 사건의 이름이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특징을 연역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는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또는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사건의 이름 또한, 비록 그가 오로지 개입을 통해서만 상황 안에서 유통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사건과 마찬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즉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통해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로서 산출된 사건적 진리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필연적으로 사건 그리고 사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상황과 상황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 초과와 방황을 보여주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되었든 셈이 되었든 상관없이 기존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기존의 모든 법칙에게 있어서 분간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결코 상황의 언어에 의해서 분간되고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리는 그 자체가 존재함의 그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체 상황의 진리이자, 상황의 존재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적인 사유에서 진실된 것의 반대가 허위의 것이었다면, 이제 진리로서의 참된 것의 반대는 존재치 않게 된다.

그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오로지 참된 것의 산출적인 공정에 장애물이 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바디우가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백과사전 안에서 분류된 그 어떤 부분들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는 지식 안에 구멍을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산출적인 사유는 초과와 방황을 제거하려고 모색하는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사유이며, 특히 산출적인 사유는 구성주의적인 사유와는 반대로 명명할 수 없거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이 존재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출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진리란 곧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분간할 수 없는 어떤 부분(구성주의적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 그러지만 비초월적인 어떤 부분(초월적인 사유에 대항하는 측면)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출적인 사유는 결국 바로 이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의 장소를 발견하고 있다.

즉 ‘진리의 모든 공정이 비롯되는 것은 그 어떤 정원외적인 비존재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안에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출적인 사유는 진리를 지식 안의 구멍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독트린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론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는 플라톤으로부터 라캉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독트린의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볼 때,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곧 벗어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산출적인 사유의 특징으로 제시한 ‘초과와 방황을 떠맡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명명이나 분간이 불가능한 부분들 안에서 진리를 산출하는’ 등의 언급들은 다름 아닌 탈질서,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을 여러 각도에서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산출적인 사유의 이러한 독창성은 산출적인 사유란 언제나 벗어나고 있는 사건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사유라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연역되어 나오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벗어남과 관련하여 그 어떤 순수하게 분간 가능한 것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는가?

즉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이란 질서 잡힌 우주로부터 자기를 분간하는 것 또는 질서 잡힌 우주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들로부터 자기의 주체를 분간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질서로부터의 벗어남은 필연적으로 사건을 그 어떤 일자의 재림 안으로 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건이란 한 상황을 벗어나서 이러저러한 원소를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간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사실 분간이라는 것은 상황과 상황의 상태가 보여 주는 셈과 부분들의 과정 아래 놓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의 상황을 이러한 정규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분간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를 볼 때, 벗어남이란 상황 또는 질서를 벗어나서 어떤 형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또는 질서의 그 어떤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벗어남, 즉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산출적인 사유는 우리를 바디우 고유의 주체의 개념으로 안내한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산출적인 사유의 측을 이루는 개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분명하게 말한다. “오로지 산출적인 공정의 개념만이, 대상이 배제된 후 -사건적 진리의 단순하고 유한한 단편으로서의 주체를 드러나게 하면서 진리의 탈대상화와 주체의 탈대상화를 포섭한다”. 또는 “주체는 산출적인 공정의 유한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있을 때, 우리는 이 공정에 의거해서 이러저러한 공정의 생산물인 유한한 국지적인 짜임새 하나하나가 곧 하나의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주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 어떤 절차, 말하자면 분간하는, 긁어모으는, 재취합하는 등의 절차, 즉 산출적인 공정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하여 검열을 행하는 공정, 따라서 사건을 보장하며 진리를 고려하는 공정이기도(산출적인 공정)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산출적인 공적의 생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정의와 해석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주체는 대상이 배제된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작용이지 작용의 결과요, 생산이자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둘의 시각에서 보자면 갈라진 간격에 대한 사유의 실행이자 그 실행의 결과인 것, 충실성과 검열의 시각에서 보자면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인 것, 진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진리의 실존이 매번 동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생산이자 그 생산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는 주체-대상이라는 상관관계 안에서 거론되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인 것이다.

둘째, 주체는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이다.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와 더불어서 어떤 사건이나 진리가 있게 된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사건 또는 진리의 부분이기도 한 것, 따라서 사건 또는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사건이나 진리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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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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