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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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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표현의 문제 3성경신학-

스피노자의 표현의 문제 3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내재성에서는 모든 것이 긍정이다. 원인은 결과보다 상위이지만 그것이 결과에 증여하는 것보다 상위는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결과에 아무 것도 증여하지 않는다. 분유는 탁월한 증여물로부터가 아니라 본질의 구별을 존속시키는 형상적 공통성으로부터 완전히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플로티누스는 존재가 합일상태의 수와 동일하며, 존재들은 전개 상태의 수(즉 ‘펼쳐진 수)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로티누스에게는 이미 일자의 초탁월성과 접합되는 존재의 동등성이 있다.

이러한 것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들을 통해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만물은 그들을 복합하는 신의 현존(출석)하며, 신은 그를 펼치고 함축하고 접어들이는 만물에 현존한다. 계시적이고 종속적인 유출의 계열이 상관적인 두 운동의 공-현존으로 대체된다. 왜냐하면 신이 사물들을 복합하기 위해 자기 안에 머무는 것처럼 사물들 또한 신을 펼치거나 함축하는 한에서 신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신의 사물들에의 현존이 신의, 사물들 안에의 함축을 구성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신에의 현존은 사물들의, 신 안에서의 내속을 구성한다. 기본존재들의 위계성이 존재의 동등성으로 대체된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그에 현존하는 바 존재와 그 자체 사물들 속에 현존하는 존재는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복합과 펼침, 내속과 함축의 앙상블에 의해 정의된다. 신이 그를 펼치는 사물들에 의해서 함축된 채로 머무는 것처럼 사물들은 그들을 복합하는 신의 내속한 채로 머문다. 모든 사물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펼치는 것은 복합하는 신이다. 신은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 복합이고, 그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보편적 펼침이다.

분유는 이제 일자를 자기의 더 혹은 덜 가까운 원천으로 삼는 유출에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포함하고 그 각각의 본질에 의해서 스스로를 펼치는 절대적 존재의 직접적이고 적합한 표현에서 그 원리를 얻는다. 표현은 이 모든 측면들, 즉 복합․ 펼침․ 내속․ 함축 모두를 포함한다. 표현의 이 측면들은 또한 내재성의 범주들이다. 그 두 개념이 상관적인 것으로 있는 논리적 관계의 체계에서 내재성은 표현적임이, 표현은 내재적임이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표현 관념은 분유되는 것의 진정한 능동성과 분유의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 새로운 내재성 원리가 긍정되는 것은 표현관념에서이다. 표현은 다자의 통일로, 다자의 복합과 일자의 펼침으로 나타난다. 신 자신은 세계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며, 세계는 신-존재 혹은 존재하는 일자의 표현, 펼침이다.

세계는 신으로 격상되고 그 결과 세계는 그의 한계들 혹은 유한성을 상실하여 직접(매개없이) 신적인 무한성을 띤다. 그 중심은 도처에 있고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의 은유는 세계 자체에 적합하다. 신과 세계간의 표현 관계는 본질의 동일성이 아니라 존재의 동등성을 근거짓는다. 왜냐하면 동일한 존재가 그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만물을 복합하는 신 안에도, 그들 자신의 본질 혹은 그들의 양태에 따라서 신을 펼치는 사물들 속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은 복합적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자연은 펼치는 신과 동일한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별상의 이 동등성 혹은 동일성은 표현의 앙상블에 대해 두 계기를 구성한다. 신은 그의 말씀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의 말씀은 신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제 차례에서 우주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우주는 모든 사물들을 그 각각에 그들 몫으로 본질적으로 돌아가는 양태에 따라서 표현한다.

말씀은 신의 표현이고 표현-언어이다. 우주는 이 표현의 표현이고, 표현-얼굴 혹은 표정이다. 이 고전적인 이중 표현의 테마는 에카르트에게서 다시 볼 수 있다. 신은 내면적이고 침묵의 발화인 말씀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말씀은 외화된 발화 혹은 얼굴인 세게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주의적 경향이 온전하게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말씀이론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무가 아니라 존재를 제1원리로 삼는 존재론적 요청들에 의해서 표현주의적 경향을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의 초월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훨씬 더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그것을 억압하는 것 또한 기독교이다.

그래서 언제나 내재성과 범신론이라는 비난이 철학자들을 위협하고,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비난을 모면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사실상 창조주 신의 초월성이 구제되는 것은 유비적 존재개념 덕택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동등한-존재의 사정거리를 제한하는 탁월한 신 개념 덕택이다. 존재의 동등성 원리 자체가 유비적인 방식으로 해석되며, 온갖 상징주의의 방책들이 초월성을 보존한다. 따라서 ‘표현불가능자’가 표현 자체의 한복판에 유지된다.

이는 플로티누스에게로 회귀하는 것도, 존재보다 상위의 말할 수 없는 일자 자리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재인으로서 세계 속에 스스로를 긍정(주장)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와 ‘그의 내재성에 대해 긍정되는 모든 것을 그 신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부정 신학의 대상으로서 표현불가능하고 초월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존재’는 동일한 신, 동일한 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건들에서조차 내재성은 유출의 관점이나 창조의 관점에 의해 수정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표현적 내재성은 일의성의 온전한 개념화, 일의적 존재의 온전한 긍정이 수반되지 않는 한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현적 내재성은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조장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억압하는 유출의 테마에 접목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비적인 조건들에서는 창조의 테마와 뒤얽힌다. 창조는 한 측면에서는 유출과 동일한 관심에 부응하는 것같다. 유출의 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관점에서도 문제는 항상 분유되는 것 자체 쪽에서 분유의 원리를 구하는 것이다.

분유는 일종의 모방이지만, 그 모방의 원리는 모델 혹은 모방되는 것(모방 대상) 쪽에 있다. 이데아들은 신과 관련해서는 서로 구별되지 않지만 그것들의 이데아들이 신 자체의 가능적 분유(신 자체에의 가능적 참여)를 근거짓는 사물들과 관련해서는 서로 구분된다.

이 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려졌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범형적 유사와 모방적 유사의 지위를 동시에 결정하기 위해 표현 개념이 부상된다. 성 보나벤투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뒤를 이어 이 이중적 결정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 인물이다. 두 유사는 표현적 유사의 구체적 앙상블을 형성한다.

신은 그의 말씀 속에, 혹은 범형적 이데아 속에 자신을 표현하지만, 범형적 이데아는 창조가능한 사물들과 창조된 사물들의 다양성(다자성)을 표현한다. 그러한 것이 그 자체로서의 표현의 역설이다.

본래적이고 영원하기 때문에 표현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신)과 관련해서는 하나이고, 표현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여럿(다자)이다. 표현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신으로부터 표현되는 것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사선과도 같다. 그 자체가 표현하므로(표현되지 않고) 그것은 신적인 본질 자체로서 제한 없이 모든 것에 동등하게 미친다(닿는다).

우리는 동등성 원리와 다시 맞닥뜨리는, 성 보나벤투라는 그 원리에 따라서 신 안에 있는 이데아들 간의 모든 위계를 부정한다. 실제로 표현적 유사 이론은 특정한 내재성을 함축한다. 이데아들은 신 안에 있고, 따라서 사물들은 그들의 버명적 유사물들에 따라 신 안에 있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물로서 신 안에 있을 필요가 여전히 있지 않는가? 복사물의 모델에의 특정한 내속이 있지 않는가? 엄격하게 유비적인 존재 개념을 유지함으로써만 그런 귀결을 피할 수 있다.

성 보나벤투라 자신은 표현적 유사와 일의적 유사 혹은 일의화의 유사를 항상 대립시킨다. 즉 ‘유사’는 두 개의 것이 제3의 것에서 일치함(일의적 또는 분유적 유사)을 의하든가 또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유사하나 제3의 것에서는 일치하지 않음(모방적 또는 표현적 유사)를 의미한다. 피조물들이 신의 유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에서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신과 피조물은 존재를 일의적으로 분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의적 공통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거론된 저자들 대부분은 두 가지 전통에 동시에 결부된다. 유출과 모방, 유출인과 범형인, 위-디오니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갈래 길이 표현 개념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때는 유사적이고 어떤 때는 유출적인 표현의 철학을 버려내는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유출은 우리를 표현-펼침으로 이끈다. 창조는 우리를 표현-유사로 이끈다. 그리고 표현에는 실제로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거울과 모델과 닮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씨앗과 나무와 나뭇가지다. 그러나 이 은유들은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한다. 표현 관념은 떠올려지자마자 억압 상태에 놓인다.

창조의 테마나 유출의 테마는 표현주의가 그것이 함축하는 내재성의 끝까지 가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초월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정확히 표현 개념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적 착락(현기증)이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표현의 내재함과 표현에 표현되는 것의 내재함이라는 이중적 내재성을 말한다.

스피노자주의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내재성을 원리로서 긍정하는 것, 표현을 유출인 또는 범형인에 대한 모든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표현 자체는 모델을 닮는 것도 순수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것도 멈춘다.

그런데 그러한 결과는 일의성의 관점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신은 그자 자기 원인이라는 바로 그 동일한 의미에서의 만물의 원인이다. 그는 형상적으로 실존하는 대로, 혹은 표상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따라서 신은 그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형상들로 사물들을 생산하며, 그 자신의 본질의 관념 속에 관념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형상적으로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속성들은 양태들의 모든 형상적 본질을 감고 있고, 신의 본질의 관ㄴ졈은 모든 표상적 본질들 혹은 모든 관념들을 포함한다.

사물들 일반은 신적 존재의 양태들이다. 다시 말해 신적 존재의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들 자체를 함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사는 원인과 결과에 공통적인 질(質)의 현존에 의해 정의되는 일의화의 유사이다.

관념들이 모델들이 아니듯이 생산된 사물들 또한 모방물들이 아니다. 신 관념조차 그 자체 그 형상적 존재 상에서 생산되므로 전혀 범형적이지 않고 역으로 관념들은 사물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 형상적 존재상에서 관념들은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재현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것들이 절대적 생산 혹은 활동 역능과 그 자체로써 동등한 절대적 사유 역능을 분유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래서 모든 모방적 혹은 범형적 유사가 표현적 관계로부터 배제된다. 신은 그의 본질을 반영하는 관념들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형상들 속에서도 스스로를 표현한다. 표현은 존재함과 인식함에 대해 동시에 얘기된다. 그러나 오직 일의적 존재, 일의적 인식만이 표현적이다.

실제와 양태들, 원인과 결과들은 전자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구성하고 후자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담고 있는 공통 형상들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인식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전의 전통들에서는 항상 혼동되어온 다음 두 영역을 대립시킨다.

유일하게 적합한, 표현과 표현적 인식의 영역과 기호와, 기호나 위상변환이나 유비에 의한 인식의 영역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상이한 종류의 기호들을 구별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체 상태에 따라서 무언가 결론을 끌어내게 하는 지시적 기호와 우리로 하여금 법칙을 도덕 법칙으로 파악하게 하는 명령적 기호, 즉 우리를 그것 자체에 복종시키고, 기껏해야 신의 몇몇 고유성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줄 뿐인 계시의 기호와의 구별이다.

그래서 신은 각 본질을 다른 모든 본질들과 더불어 직접 생산한다. 결국 실존 양태들 자체는 신을 직접 원인으로 갖는다. 각각의 양태에 대해서 신은 원인이 모종의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힘(역능)이다. 우리는 결코 무한 역행에 진입하지 않는다. 어느 한 양태를 그것의 원인과 함께 고려하기만 하면 그 원인이 모종의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리로서의 신에 직접 도달하게 된다.

각각의 양상으로 신은 직접적으로 즉각 스스로를 표현허가나 혹은 그의 결과들을 직접(매개없이) 생산한다. 그래서 모든 결과는 신 안에 있고, 신 안에 머물며, 그래서 신 자신은 그의 결과들 각각에 현존한다.

실체는 우선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표현은 형상적 혹은 질적이다. 실체는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 속에 스스로룰 표현한다. 각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여기서 복합과 펼침이라는 이중 운동을 볼 수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복합하고, 각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펼치며, 실체는 모든 속성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친다.

실체가 모든 속성들과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들과 동등한바, 어떤 것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실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속성들을 포함(이해)하는 신의 관념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표현하지(펼치지) 않는다.

실체는 스스로를 재-표현하고,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표현은 양태들 자체의 생산이다.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을 생산하지 않고서는, 그가 생산하는 모든 것 역시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는다.

신은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들과 동일한 속성들 속에 만물을 생산하며, 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관념으로 그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사유한다. 그래서 모든 양태들과 그 양태들에 상응하는 관념들은 표현적이다. 신 ‘관념’이 모든 관념들을 포함하며(이해하며), 그것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펼친다.

(평가)
신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을 표현하고 그 표현을 통해 신의 창조 역량이 발휘하면서 삼라만상이 나누어지듯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마치 ‘성령의 은사론’을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듯 하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물음에서 비롯된다. 왜 이 세상은 많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누가 그 많은 것들을 존재케 했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인간 자체를 자연과는 대립되는 특별한 존재인양 간주해서 신의 자리에 앉아서 설명케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절대적인 주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게 자리를 비켜나게 난 다음, 신의 활동성으로 이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줄 모른다.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봐서 항상 어리석은 것이다. 총명함과 치밀함과 명석함과 거리가 멀다. 도리어 세상 철학이나 지혜로 보면 분노를 자아낼 만한 소식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모든 지혜를 비켜가는 방식으로서 십자가를 소개하고 계시다.

즉 피조물이 왜 있느냐가 아니라 왜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느냐의 관점에서 세상 만물을 보아야 한다. ‘있음’에서 지혜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음’에서 지혜가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활동성이란 다름 아닌 세상의 의와 죄과 심판에 대해서 정죄하는 내용을 담고 움직이는 것이다.(요한복음 16:8-12) 성령의 은사란 신이 속성의 우호적인 나누어주심이 아니라 늘 우리를 심판하고 오직 주님의 이름에 부르는 약속에 의해서만 구원하시는 반복적인 증거하게 하시는 능력으로서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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