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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제 국성경신학[신학]

제 국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제 국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번 역 : 윤수종
출판사 : 이학사 (서울 : 2005)

오늘날의 세계가 왜 이런 모습으로 정착되었는가? 사람은 자신이 처한 세계를 해석하며 산다. 그리고 적응하고자 한다. 적응이 용이하려면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본 책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관점의 내력을 깊이 있게 파헤쳐주고 있다. 이야기는 인간들이 소위 ‘근대성’이라는 것을 안목을 가질 때부터 시작된다.

유럽 근대성의 기원들은 세상사에 대한 신성하고 초월적인 권위를 부인한 세속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먼 거리의 초월적인 신을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을 신성한 지식 기계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출현은 전쟁을 창출했다. 르네상스는 근대성의 실현을 둘러싼 내전의 장소였다. 여기에 혁명 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질서 세력이 등장한다. 대중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함으로써, 즉 삶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려는 대중들의 욕망을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초월적 권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 혁명은 중지되었다.

16세기 내내, 혁명의 과실들이 화려하게 나타날 때마다 평화 요구가 최고의 것이 되었다. 17세기의 유럽은 또다시 봉건적으로 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절대 군주제가 확실히 유럽 대륙 국가들에게 자유의 진로를 봉쇄했다. 절대주의는 근대성 개념을 고정시키려 했고, 초월이라는 새로운 무기의 전개를 통해서 근대성을 규정하는 위기로부터 근대성 개념을 떼어 내려 했다.

구체제의 문화가 지닌 존재론적 이원론은 기능적 이원론으로 대체되었다. 주권의 초월성은 외적인 신학적 지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관계의 내재적인 논리에 근거해 있다. 주권 권력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대표성은 스스로를 다수의 주체들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근대주권 이론은 사회를 권력 속에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개인’을 실현했다. 점차 행정부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와 권력 사이의, 대중과 주권 국가 사이의 관계는 역전되어 이제 권력과 국가가 사회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근대성은, 명령의 전통적 초월성을 명령하는 기능의 초월성으로 대체했다.

훈육의 배치들은 이미 고전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오직 근대에서만 훈육적 도표가 행정 자체의 도표가 되었다.

유럽에서 국민 개념은 세습적이고 절대주의적인 국가의 지형 위에서 발전했다. 세습 국가는 군주의 소유물로 규정된다. 그런데 세습 국가 권력을 떠 바쳤던 봉건적 기반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은 모든 권력 구조에 새로운 조건을 부과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출현 때문에 내부로부터 부식되고 있었다. 이제 왕의 신성한 신체보다 오히려 국민의 정신적 정체성이 영토와 인구를 이념적 추상물로 설정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리적인 영토와 인구는 국민의 초월적 본질의 확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근대적 국민 개념은 군주 국가의 세습적 신체를 물려받아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했다.

세습적 지평이 국민적 지평으로 변형됨에 따라 봉건적인 신민(臣民)의 질서가 훈육적인 시민(市民)의 질서로 넘어갔다. 근대 주권 개념의 국민 주권 개념으로의 변형은 일정한 새로운 물질적 조건을 요구했다.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과 권력 구조 사이에 새로운 균형 상태가 확립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세기 사이에, 국민 주권 개념은 마침내 완전한 형태로 유럽 사상에 출현했다. 국민 개념은 제 3의 신분, 즉 부르주아지 개념과 연결된다. 국민은 이제 역사 발전에 우선하는 주권의 완벽한 모습이고, 더 나아가서 국민은 역사 발전에 우선하게 되었다. 국민은 역사를 헤치고 나가는 물질적 엔진, 역사를 만드는 천재이다. 국민은 마침내 모든 인간 행동과 사회생활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근대적 주권 개념과 그 주권의 종속 및 지배 장치에서 떨어져 나와 자율적인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인민’이다. 국민(nation) 개념과 인민(people) 개념 사이의 연결은 말 그대로 강력한 혁신이었다.

주권이 불안정해지자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처음에는 국민을 언급했고, 그 후 국민 역시 불안정한 해결책으로 드러났을 때는 인민을 언급했다. 달리 말해 국민 개념이 주권에 우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권 개념을 완성했듯이, 인민 개념 역시 또 하나의 가공된 논리적 회귀를 통해 인민 개념을 완성했다.

인민이 국민을 원형적 기반으로 해서 설정되지만 사실상 근대적 인민 개념은 국민 국가의 산물이고 국민 국가의 특정한 이데올르기적 맥락 안에서만 생존한다. 인민은 어느 정도 하나의 의지를 지니면서 그 의지에 근거해 하나의 행동을 하게 될 사람이다. 그들은 대중(multitude)이 아니다.

대중은 복수성, 특이성들의 구도, 관계들의 열린 집합이며, 그 자신과 동질적이거나 동일하지 않고 자신을 벗어난 관계들과는 불분명하고 포괄적인 관계를 지닌다. 반대로 인민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는 것을 배제하고 그것과 자신의 차이를 설정하면서 내적으로는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이 확정적이지 않는 구성적 관계인 데 반해, 인민은 주권을 위해 준비된 구성된 종합이다. 인민은 대중의 다양한 의지들 및 행동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종종 그것과 충돌하기도 하는 하나의 의지 및 행동을 제공한다. 그래서 각 국민은 대중을 하나의 인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에서 자국의 국민 개념과 관련하여 그들 국가가 개척해 놓은 식민지 원주민과의 변증법적 타자(他者) 관계를 통해서 유럽 인민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했다.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인종적 차이를 통해 자국민은 반대로 동질적인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국민 개념과 인민 개념에 결합된 근대적 주권 개념은 자신의 중심점을 갈등과 위기의 매개에서 국민-주체와 그것의 상상된 공동체라는 단일한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즉 국민이 공동체를 상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공동체에 관한 모든 상상은 하나의 국민으로 초코드화 된 것이다. 식민지와 인종 종속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체성 및 문화의 측면에서 유럽적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기능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성과 정체성을 생산하는 추상 기계이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이러한 차이들과 정체성들은 마치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처럼 기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이처럼 유럽적 ‘자아’는 폭력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권력을 느끼고 유지하기 위해, 또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하기 위해 자신의 ‘타자(他者)’ 대결할 필요가 있었다. 끊임없이 식민지적 표상들의 경계를 정하는 전면화된 전쟁 상태는 우연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처럼 폭력은 식민주의 자체의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증법인 주권개념은 2차 대전 이후 ‘민족 해방’이라는 부메랑을 불러일으켰다. 자국민이 주권적 정체성을 갖기 위해 식민지 원주민을 타자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듯이, 이제 식민지 원주민들도 ‘국민’ 혹은 ‘인민’ 혹은 ‘주권’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관심두면서부터 지배국가 자체를 반항과 저항과 해방운동의 타자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反)식민주의적이고 반(反)제국주의적인 투쟁의 지도자들은 체제적인 자국가의 근대화 작업을 위해 과거 유럽 국가가 설정한 ‘주권 형성’의 과정을 기술적으로 그대로 모방하게 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외국 지배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려 하는 반면 동시에 국내적인 엄격한 국내 지배 구조를 수립하게 된다.

대중을 대표하는 인민, 인민을 대표하는 국민,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로 이어지는 고리는 인도에서 알제리까지 그리고 쿠바에서 베트남까지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서구가 넘겨준 독이든 선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는 이미 자본주의라는 초국가적인 조건에 한꺼번에 휩싸여져 있는 상태였다. 비록 ‘제국주의’는 사라졌지만 본격적으로 단일적인 ‘제국’은 떠오른다.

세계 시장이 애써서 빛을 보게 된 각 ‘국민 국가’의 운명을 넘어뜨리게 된다. 국민 국가 간의 경계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에서 국민 국가는 이제 단순한 장애물이 불과하다. 거의 모든 생산 요소, 즉 화폐, 기술, 공장 그리고 설비가 너무나 손쉽게 경계선을 넘기 때문에 ‘국민 경제’라는 그 생각조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근대화 과정에서 각 나라 안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시골 지역으로부터 대도시 중심 지역으로의 대량 이주가 있어왔다.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외국인 노동자 혹은 이민자의 형식으로 지국 남쪽에서 북으로 이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남쪽에서 남쪽으로, 즉 남아시아 노동자들의 페르시아 만으로의 이주와 같이 남부 지역 사이에서의 일시적인 혹은 반영구적인 노동자 이주로 인해 국제적인 노동 흐름은 최근에 더욱 증가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경계를 넘는 이동은 종종 빈곤에 따른 강제 이주와 같으며, 경제적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라는 정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자본은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의 재배치 통해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자본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필요 노동을 넘어 잉여 노동을 강제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총가치보다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잉여 가치는 실현되기 위해서는 적정한 시장이 발견해야만 한다.

개별 노동자는 그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야만 하기 때문에,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수요는 잉여 가치에 대한 적절한 수요일 수 없다. 닫힌 체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교환 과정은 따라서 일련의 장애물에 의해 규정된다. 즉 자본은 필요 노동 시간을 살아있는 노동 능력이 지닌 교환 가치의 장애물로 설정하고 잉여 노동 시간을 필요 노동 시간에 대한 장애물로 설정하며, 그리고 최후의 목적인 잉여 가치를 잉여 노동 시간에 대한 장애물로 설정한다.

이로서 자본가들은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잉여 가치를 실현하고 과잉 생산에서 생긴 가치 절하를 피하기 위해서 자본은 계속 자기 영역을 팽창시켜야만 한다. 자신의 외부 환경을 먹어치우지 않는다면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이다. 자본의 외부는 필수적이다. 이것은 자본이 세계 권력이 되는 사실상 유일한 세계 권력이 될 수밖에 없는 멈출 수 없는 경향의 시발점이다.

자본은 실현의 욕구를 채우고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축적 주기, 즉 자본화 과정에서 다음 순간에 필요한 것들 충족시키기 위해 팽창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화폐 형태로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 즉 자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를 낳았다.

유럽 자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약탈에 나선다. 자본은 자기 증식에 필요한 생산 수단을 얻기 위해 온 지구의 구석구석을 회득하고,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모든 문명 수준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사회 형태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우위를 과시하게 된다. 즉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정복이 지닌 진정한 역사적 새로움이며 그 외부는 연이어 자본주의 속으로 내면화된다.

이 내면화는 외부에 대한 의존을 가중시키고 이는 사실상 곧 모순관계이다. 자본의 갈증은 새로운 피로 해소되어야 하고 새로운 미개척지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로서 지구라는 공간은 폐쇄 중이다.

자본이 세계 시장을 제국주의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자본에 대한 ‘이윤의 균등화’가 촉진된다. 각 국내에 기반을 둔 금융 자본들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금융 자본의 이윤율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런 와중에서 제국주의 국가는 대중을 인민으로 변형시켜야만 했다. 자국민을 자본주의 선봉장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근대국가는 ‘주권’이라는 이름의 주체성을 계속 확립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지만 ‘국민 국가’로서 제 구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 앞에서 특이하게 조직된다. 그러나 자본화의 전 세계로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은 그 결국 ‘국민 국가’의 한계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국민 국가의 쇠퇴는 심오한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의 충분한 실현이다. 투기 자본이 자본주의의 주기를 작동시킨다.

투기자본이 모여 초국적 기업이 등장한다. 이 초국적 기업을 막을 국경은 없다. 초국적 기업들은 전 지구를 횡단하여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 초국적 기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들과 종속 지역들의 경제적․ 정치적 변형의 근본 동력이 되었다.

우선 초국적 기업은 종속 국가들이 새로운 생산축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을 이전하는 것에 기여하였다. 두 번째로, 초국적 기업은 종속국들의 노동 인구와 국지적 생산 능력을 동원했다. 셋째로 초국적 기업은 전 지구를 가로질러 확대된 토대 위에서 순환하기 시작한 부의 흐름을 결집하였다. 더욱이 새로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와 연결된 자본주의적 이익의 구성은 초국적 기업의 개입에 대립하기는커녕 초국적 기업의 영역 위에서 발전하였고, 초국적 기업의 통제 아래 형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정치적 해방을 위해 대량으로 민중 동원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아니라 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동원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전 세계에 걸쳐 농민들은 자신들의 경지와 마을에서 쫓겨나 세계적 생산의 용광로에 던져졌다.

전 세계에 걸쳐 많은 노동자들이 본질적으로 거의 자유롭지 못한 처참한 환경으로 강제 이주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동성이 노동력의 비용을 거의 증가시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러한 이동성은 매주 자주 노동력의 비용을 줄이고 대신에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경쟁을 증가시킨다. 그들은 높은 임금이 기다리는 곳을 찾아 이동하지만 그런 이주로 인해 도리어 임금은 경쟁력을 잃는 모순을 가져다준다.

이제는 탈근대화 시대이다. 후진국들이 너도 나도 선진국이 되고파서 근대화에 나서지만 이미 전에 근대화를 촉진시켰던 낙후된 산업화 구조는 계속해서 주변국가의 몫으로 전출되고 초국적 기업의 중심에는 ‘정보 기술’이 자리 잡혀 있다. 이것은 후발주자 국가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전히 그 정보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전 지구의 기업이 정보화에 매여 있다. 근대화는 이제 종료된 것이다. 1990년대에 브라질의 포드 자동차 공장은, 1930년 대 미국 디트로이트 포드 공장에 견줄만 하다. 왜냐하면 양쪽의 생산층위는 동일한 산업 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브라질의 공장은 공장 자체의 기술적 하부구조(인프라) 때문에 그 가치의 주도권은 전 지구적인 정보체계의 몫으로 돌아가고 브라질 공장은 그 정보체계에서 나온 가치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1930년도 디트로이트 공장은 그 자체로서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낳는 위치에 있었다.

정보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은 오직 새로운 정보 기술들을 통해서만 소통하므로 이것은 생산의 탈영토화 경향을 야기시켰다. 전에 산업 시대 때의 자본은 특정한 영토에 구속되어서 제한된 노동 인구와 계약상으로 거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산의 정보화와 비물질적 생산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영토의 협상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네트워크가 그 영토를 대신한다.

그리고 생산 체계들에 내재적인 컴퓨터 네트워크와 소통 기술은 멀리 떨어진 중심 장소에서 노동자들을 더욱 광범위에 감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제조업의 지리적 분산은 점점 더 집중화된 경영과 계획에 대한 요구는, 범세계적으로 볼 줄 안목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므로서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가치를 쉽게 포기토록 촉구하는 근거가 마련된다.

이처럼 국민 주권이라는 효율성을 잃어가고 있는 만큼 마찬가지로 이른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도 효율성도 잃어가고 있다. 정부와 정치는 초국적 명령 체계 속으로 완전히 통합하게 된다. 이제 권력의 지형학은 더 이상 공간적인 관계와 일차적으로 관계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성들의 시간적 전위 속에 각인된다.

투기 자본과 금융 자본은 노동력의 가격이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고 착취를 보장하는 행정력이 가장 큰 곳으로 움직인다. 한편 여전히 노동의 견고성을 유지하고, 노동의 완전한 유연성과 이동을 반대하는 국가들은 전 지구적 화폐 메커니즘들에 의해 처벌당하고 고문당하고 결국은 파괴된다. 한국의 IMF 사태가 그런 예이다.

실업률이 내려 갈 때 또는 정말 직접적으로 유연하지 않고 이동적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비율이 올라 갈 때, 주식시장은 하락한다. 이것은 곧 한 국가가 세운 노동 정책에 대해 범지구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로서 범지구적으로 ‘소통의 정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범지구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국가가 된다는 것은 공포이다. 이것은 일국의 행정 관료가 이제는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경향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로서 현대 ‘국민 국가의 주권’은 소통에 종속된다. 범지구적 소통의 장에 접속되지 못한 주권은 주권으로 행세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소통 체계 안에 놓여야 국민국가는 생산적 주체성을 행세할 수 있다. 이처럼 전지구상에 속속들이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자본주의라는 단일 소통체제를 지배하는 추상적 개념이 바로 ‘제국’이다. 과연 이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주장하기를 더 이상 ‘국민’의 위치에서도 아니요 ‘인민’의 위치에서도 아니라 ‘대중’의 위치에서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라고 외친다. 그 창조성이야말로 제국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협동이 필요하다 이야기한다.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노동의 창조적 가치를 발휘하라는 것이다.

주권의 결정이 결코 대중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대중이 지닌 사랑과 욕망에 굴복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생체 정치적 생산력’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율적으로 일(노동)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있는 생체적 생명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대중이 스스로 ‘주체화’를 이루는 길이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범세계적인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저자는 항변하고 궐기를 촉구한다.

평 가

욕망이란 결국 ‘힘 모으기’로 통하기 마련이다.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은 곧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기를 긍정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힘이 있어야지만 자신의 존재가 비로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어느 누가 그동안 긁어모은 힘에 안주하며 그것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진해서 접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결코 다소곳하지 않다. 쉴 새 없이 공격하고 사수하고, 또 공격에 나서고 사수함을 늘 되풀이하면서 자기 존재를 파악하려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간은 없고 오로지 인간성만 넘실댄다. 그리고 상호 마주치며 티격태격한다. 서로가 서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원인제공자가 되면서….

첨부파일 : 제국.hwp (48.0K), Down:7

관리자(IP:124.♡.84.82)

09-03-06 23:23

제 국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번 역 : 윤수종
출판사 : 이학사 (서울 : 2005)

오늘날의 세계가 왜 이런 모습으로 정착되었는가? 사람은 자신이 처한 세계를 해석하며 산다. 그리고 적응하고자 한다. 적응이 용이하려면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본 책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관점의 내력을 깊이 있게 파헤쳐주고 있다. 이야기는 인간들이 소위 ‘근대성’이라는 것을 안목을 가질 때부터 시작된다.

유럽 근대성의 기원들은 세상사에 대한 신성하고 초월적인 권위를 부인한 세속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먼 거리의 초월적인 신을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을 신성한 지식 기계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출현은 전쟁을 창출했다. 르네상스는 근대성의 실현을 둘러싼 내전의 장소였다. 여기에 혁명 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질서 세력이 등장한다. 대중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함으로써, 즉 삶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안정성을 높이려는 대중들의 욕망을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초월적 권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 혁명은 중지되었다.

16세기 내내, 혁명의 과실들이 화려하게 나타날 때마다 평화 요구가 최고의 것이 되었다. 17세기의 유럽은 또다시 봉건적으로 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절대 군주제가 확실히 유럽 대륙 국가들에게 자유의 진로를 봉쇄했다. 절대주의는 근대성 개념을 고정시키려 했고, 초월이라는 새로운 무기의 전개를 통해서 근대성을 규정하는 위기로부터 근대성 개념을 떼어 내려 했다.

구체제의 문화가 지닌 존재론적 이원론은 기능적 이원론으로 대체되었다. 주권의 초월성은 외적인 신학적 지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관계의 내재적인 논리에 근거해 있다. 주권 권력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는 대표성은 스스로를 다수의 주체들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근대주권 이론은 사회를 권력 속에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개인’을 실현했다. 점차 행정부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와 권력 사이의, 대중과 주권 국가 사이의 관계는 역전되어 이제 권력과 국가가 사회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근대성은, 명령의 전통적 초월성을 명령하는 기능의 초월성으로 대체했다.

훈육의 배치들은 이미 고전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오직 근대에서만 훈육적 도표가 행정 자체의 도표가 되었다.

유럽에서 국민 개념은 세습적이고 절대주의적인 국가의 지형 위에서 발전했다. 세습 국가는 군주의 소유물로 규정된다. 그런데 세습 국가 권력을 떠 바쳤던 봉건적 기반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은 모든 권력 구조에 새로운 조건을 부과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출현 때문에 내부로부터 부식되고 있었다. 이제 왕의 신성한 신체보다 오히려 국민의 정신적 정체성이 영토와 인구를 이념적 추상물로 설정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리적인 영토와 인구는 국민의 초월적 본질의 확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근대적 국민 개념은 군주 국가의 세습적 신체를 물려받아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했다.

세습적 지평이 국민적 지평으로 변형됨에 따라 봉건적인 신민(臣民)의 질서가 훈육적인 시민(市民)의 질서로 넘어갔다. 근대 주권 개념의 국민 주권 개념으로의 변형은 일정한 새로운 물질적 조건을 요구했다.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과 권력 구조 사이에 새로운 균형 상태가 확립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세기 사이에, 국민 주권 개념은 마침내 완전한 형태로 유럽 사상에 출현했다. 국민 개념은 제 3의 신분, 즉 부르주아지 개념과 연결된다. 국민은 이제 역사 발전에 우선하는 주권의 완벽한 모습이고, 더 나아가서 국민은 역사 발전에 우선하게 되었다. 국민은 역사를 헤치고 나가는 물질적 엔진, 역사를 만드는 천재이다. 국민은 마침내 모든 인간 행동과 사회생활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근대적 주권 개념과 그 주권의 종속 및 지배 장치에서 떨어져 나와 자율적인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인민’이다. 국민(nation) 개념과 인민(people) 개념 사이의 연결은 말 그대로 강력한 혁신이었다.

주권이 불안정해지자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처음에는 국민을 언급했고, 그 후 국민 역시 불안정한 해결책으로 드러났을 때는 인민을 언급했다. 달리 말해 국민 개념이 주권에 우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권 개념을 완성했듯이, 인민 개념 역시 또 하나의 가공된 논리적 회귀를 통해 인민 개념을 완성했다.

인민이 국민을 원형적 기반으로 해서 설정되지만 사실상 근대적 인민 개념은 국민 국가의 산물이고 국민 국가의 특정한 이데올르기적 맥락 안에서만 생존한다. 인민은 어느 정도 하나의 의지를 지니면서 그 의지에 근거해 하나의 행동을 하게 될 사람이다. 그들은 대중(multitude)이 아니다.

대중은 복수성, 특이성들의 구도, 관계들의 열린 집합이며, 그 자신과 동질적이거나 동일하지 않고 자신을 벗어난 관계들과는 불분명하고 포괄적인 관계를 지닌다. 반대로 인민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는 것을 배제하고 그것과 자신의 차이를 설정하면서 내적으로는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이 확정적이지 않는 구성적 관계인 데 반해, 인민은 주권을 위해 준비된 구성된 종합이다. 인민은 대중의 다양한 의지들 및 행동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종종 그것과 충돌하기도 하는 하나의 의지 및 행동을 제공한다. 그래서 각 국민은 대중을 하나의 인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에서 자국의 국민 개념과 관련하여 그들 국가가 개척해 놓은 식민지 원주민과의 변증법적 타자(他者) 관계를 통해서 유럽 인민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했다.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인종적 차이를 통해 자국민은 반대로 동질적인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국민 개념과 인민 개념에 결합된 근대적 주권 개념은 자신의 중심점을 갈등과 위기의 매개에서 국민-주체와 그것의 상상된 공동체라는 단일한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즉 국민이 공동체를 상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공동체에 관한 모든 상상은 하나의 국민으로 초코드화 된 것이다. 식민지와 인종 종속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체성 및 문화의 측면에서 유럽적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기능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성과 정체성을 생산하는 추상 기계이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이러한 차이들과 정체성들은 마치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처럼 기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이처럼 유럽적 ‘자아’는 폭력을 필요로 하며, 자신의 권력을 느끼고 유지하기 위해, 또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하기 위해 자신의 ‘타자(他者)’ 대결할 필요가 있었다. 끊임없이 식민지적 표상들의 경계를 정하는 전면화된 전쟁 상태는 우연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처럼 폭력은 식민주의 자체의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증법인 주권개념은 2차 대전 이후 ‘민족 해방’이라는 부메랑을 불러일으켰다. 자국민이 주권적 정체성을 갖기 위해 식민지 원주민을 타자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듯이, 이제 식민지 원주민들도 ‘국민’ 혹은 ‘인민’ 혹은 ‘주권’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관심두면서부터 지배국가 자체를 반항과 저항과 해방운동의 타자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反)식민주의적이고 반(反)제국주의적인 투쟁의 지도자들은 체제적인 자국가의 근대화 작업을 위해 과거 유럽 국가가 설정한 ‘주권 형성’의 과정을 기술적으로 그대로 모방하게 된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외국 지배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려 하는 반면 동시에 국내적인 엄격한 국내 지배 구조를 수립하게 된다.

대중을 대표하는 인민, 인민을 대표하는 국민,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로 이어지는 고리는 인도에서 알제리까지 그리고 쿠바에서 베트남까지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서구가 넘겨준 독이든 선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는 이미 자본주의라는 초국가적인 조건에 한꺼번에 휩싸여져 있는 상태였다. 비록 ‘제국주의’는 사라졌지만 본격적으로 단일적인 ‘제국’은 떠오른다.

세계 시장이 애써서 빛을 보게 된 각 ‘국민 국가’의 운명을 넘어뜨리게 된다. 국민 국가 간의 경계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에서 국민 국가는 이제 단순한 장애물이 불과하다. 거의 모든 생산 요소, 즉 화폐, 기술, 공장 그리고 설비가 너무나 손쉽게 경계선을 넘기 때문에 ‘국민 경제’라는 그 생각조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근대화 과정에서 각 나라 안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시골 지역으로부터 대도시 중심 지역으로의 대량 이주가 있어왔다.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외국인 노동자 혹은 이민자의 형식으로 지국 남쪽에서 북으로 이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남쪽에서 남쪽으로, 즉 남아시아 노동자들의 페르시아 만으로의 이주와 같이 남부 지역 사이에서의 일시적인 혹은 반영구적인 노동자 이주로 인해 국제적인 노동 흐름은 최근에 더욱 증가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경계를 넘는 이동은 종종 빈곤에 따른 강제 이주와 같으며, 경제적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라는 정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자본은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의 재배치 통해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자본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필요 노동을 넘어 잉여 노동을 강제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총가치보다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잉여 가치는 실현되기 위해서는 적정한 시장이 발견해야만 한다.

개별 노동자는 그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야만 하기 때문에,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수요는 잉여 가치에 대한 적절한 수요일 수 없다. 닫힌 체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교환 과정은 따라서 일련의 장애물에 의해 규정된다. 즉 자본은 필요 노동 시간을 살아있는 노동 능력이 지닌 교환 가치의 장애물로 설정하고 잉여 노동 시간을 필요 노동 시간에 대한 장애물로 설정하며, 그리고 최후의 목적인 잉여 가치를 잉여 노동 시간에 대한 장애물로 설정한다.

이로서 자본가들은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잉여 가치를 실현하고 과잉 생산에서 생긴 가치 절하를 피하기 위해서 자본은 계속 자기 영역을 팽창시켜야만 한다. 자신의 외부 환경을 먹어치우지 않는다면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이다. 자본의 외부는 필수적이다. 이것은 자본이 세계 권력이 되는 사실상 유일한 세계 권력이 될 수밖에 없는 멈출 수 없는 경향의 시발점이다.

자본은 실현의 욕구를 채우고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축적 주기, 즉 자본화 과정에서 다음 순간에 필요한 것들 충족시키기 위해 팽창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화폐 형태로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 즉 자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를 낳았다.

유럽 자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약탈에 나선다. 자본은 자기 증식에 필요한 생산 수단을 얻기 위해 온 지구의 구석구석을 회득하고,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모든 문명 수준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사회 형태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우위를 과시하게 된다. 즉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정복이 지닌 진정한 역사적 새로움이며 그 외부는 연이어 자본주의 속으로 내면화된다.

이 내면화는 외부에 대한 의존을 가중시키고 이는 사실상 곧 모순관계이다. 자본의 갈증은 새로운 피로 해소되어야 하고 새로운 미개척지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로서 지구라는 공간은 폐쇄 중이다.

자본이 세계 시장을 제국주의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자본에 대한 ‘이윤의 균등화’가 촉진된다. 각 국내에 기반을 둔 금융 자본들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금융 자본의 이윤율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런 와중에서 제국주의 국가는 대중을 인민으로 변형시켜야만 했다. 자국민을 자본주의 선봉장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근대국가는 ‘주권’이라는 이름의 주체성을 계속 확립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지만 ‘국민 국가’로서 제 구색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 앞에서 특이하게 조직된다. 그러나 자본화의 전 세계로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은 그 결국 ‘국민 국가’의 한계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국민 국가의 쇠퇴는 심오한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의 충분한 실현이다. 투기 자본이 자본주의의 주기를 작동시킨다.

투기자본이 모여 초국적 기업이 등장한다. 이 초국적 기업을 막을 국경은 없다. 초국적 기업들은 전 지구를 횡단하여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 초국적 기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들과 종속 지역들의 경제적․ 정치적 변형의 근본 동력이 되었다.

우선 초국적 기업은 종속 국가들이 새로운 생산축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을 이전하는 것에 기여하였다. 두 번째로, 초국적 기업은 종속국들의 노동 인구와 국지적 생산 능력을 동원했다. 셋째로 초국적 기업은 전 지구를 가로질러 확대된 토대 위에서 순환하기 시작한 부의 흐름을 결집하였다. 더욱이 새로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와 연결된 자본주의적 이익의 구성은 초국적 기업의 개입에 대립하기는커녕 초국적 기업의 영역 위에서 발전하였고, 초국적 기업의 통제 아래 형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정치적 해방을 위해 대량으로 민중 동원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아니라 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동원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전 세계에 걸쳐 농민들은 자신들의 경지와 마을에서 쫓겨나 세계적 생산의 용광로에 던져졌다.

전 세계에 걸쳐 많은 노동자들이 본질적으로 거의 자유롭지 못한 처참한 환경으로 강제 이주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동성이 노동력의 비용을 거의 증가시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러한 이동성은 매주 자주 노동력의 비용을 줄이고 대신에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경쟁을 증가시킨다. 그들은 높은 임금이 기다리는 곳을 찾아 이동하지만 그런 이주로 인해 도리어 임금은 경쟁력을 잃는 모순을 가져다준다.

이제는 탈근대화 시대이다. 후진국들이 너도 나도 선진국이 되고파서 근대화에 나서지만 이미 전에 근대화를 촉진시켰던 낙후된 산업화 구조는 계속해서 주변국가의 몫으로 전출되고 초국적 기업의 중심에는 ‘정보 기술’이 자리 잡혀 있다. 이것은 후발주자 국가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전히 그 정보에 종속된 경제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전 지구의 기업이 정보화에 매여 있다. 근대화는 이제 종료된 것이다. 1990년대에 브라질의 포드 자동차 공장은, 1930년 대 미국 디트로이트 포드 공장에 견줄만 하다. 왜냐하면 양쪽의 생산층위는 동일한 산업 단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브라질의 공장은 공장 자체의 기술적 하부구조(인프라) 때문에 그 가치의 주도권은 전 지구적인 정보체계의 몫으로 돌아가고 브라질 공장은 그 정보체계에서 나온 가치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1930년도 디트로이트 공장은 그 자체로서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낳는 위치에 있었다.

정보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은 오직 새로운 정보 기술들을 통해서만 소통하므로 이것은 생산의 탈영토화 경향을 야기시켰다. 전에 산업 시대 때의 자본은 특정한 영토에 구속되어서 제한된 노동 인구와 계약상으로 거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산의 정보화와 비물질적 생산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영토의 협상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네트워크가 그 영토를 대신한다.

그리고 생산 체계들에 내재적인 컴퓨터 네트워크와 소통 기술은 멀리 떨어진 중심 장소에서 노동자들을 더욱 광범위에 감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제조업의 지리적 분산은 점점 더 집중화된 경영과 계획에 대한 요구는, 범세계적으로 볼 줄 안목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므로서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가치를 쉽게 포기토록 촉구하는 근거가 마련된다.

이처럼 국민 주권이라는 효율성을 잃어가고 있는 만큼 마찬가지로 이른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도 효율성도 잃어가고 있다. 정부와 정치는 초국적 명령 체계 속으로 완전히 통합하게 된다. 이제 권력의 지형학은 더 이상 공간적인 관계와 일차적으로 관계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성들의 시간적 전위 속에 각인된다.

투기 자본과 금융 자본은 노동력의 가격이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고 착취를 보장하는 행정력이 가장 큰 곳으로 움직인다. 한편 여전히 노동의 견고성을 유지하고, 노동의 완전한 유연성과 이동을 반대하는 국가들은 전 지구적 화폐 메커니즘들에 의해 처벌당하고 고문당하고 결국은 파괴된다. 한국의 IMF 사태가 그런 예이다.

실업률이 내려 갈 때 또는 정말 직접적으로 유연하지 않고 이동적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비율이 올라 갈 때, 주식시장은 하락한다. 이것은 곧 한 국가가 세운 노동 정책에 대해 범지구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로서 범지구적으로 ‘소통의 정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범지구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국가가 된다는 것은 공포이다. 이것은 일국의 행정 관료가 이제는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경향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로서 현대 ‘국민 국가의 주권’은 소통에 종속된다. 범지구적 소통의 장에 접속되지 못한 주권은 주권으로 행세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소통 체계 안에 놓여야 국민국가는 생산적 주체성을 행세할 수 있다. 이처럼 전지구상에 속속들이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자본주의라는 단일 소통체제를 지배하는 추상적 개념이 바로 ‘제국’이다. 과연 이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주장하기를 더 이상 ‘국민’의 위치에서도 아니요 ‘인민’의 위치에서도 아니라 ‘대중’의 위치에서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라고 외친다. 그 창조성이야말로 제국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협동이 필요하다 이야기한다.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노동의 창조적 가치를 발휘하라는 것이다.

주권의 결정이 결코 대중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대중이 지닌 사랑과 욕망에 굴복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생체 정치적 생산력’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율적으로 일(노동)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있는 생체적 생명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대중이 스스로 ‘주체화’를 이루는 길이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범세계적인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저자는 항변하고 궐기를 촉구한다.

평 가

욕망이란 결국 ‘힘 모으기’로 통하기 마련이다. 욕망을 긍정한다는 것은 곧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기를 긍정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힘이 있어야지만 자신의 존재가 비로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어느 누가 그동안 긁어모은 힘에 안주하며 그것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진해서 접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결코 다소곳하지 않다. 쉴 새 없이 공격하고 사수하고, 또 공격에 나서고 사수함을 늘 되풀이하면서 자기 존재를 파악하려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간은 없고 오로지 인간성만 넘실댄다. 그리고 상호 마주치며 티격태격한다. 서로가 서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원인제공자가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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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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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