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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법의 힘성경신학-

법의 힘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법의 힘 : Force de loi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번 역 : 진태원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4)

뭐든지 해체되는 양상으로 의미를 생산하려는 이 시대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도 계속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법이 가진 권위마저 해체가 된다면 이 사회의 질서는 어떤 정당성에 최종 호소해야 유지되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기술과 결합해서 배태해내는 욕망의 열매나 뜯어먹고 사는 형편에 놓인 법 집행자들은 마냥 자신의 권위를 초월적인 성격이 있다고 우기고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자연적으로 자본의 힘과 법이 앞장세우고 있는 정의(正義)의 힘이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로 인해 현대 사회는 사상적으로 절대 가치, 절대 진리에 대해 신뢰를 잃어간다. 그렇다면 이 해체의 시대에서 법이 처신해야 하는 자리를 어떻게 마련되는가? 본 책은, 의미해체를 들고 나온 데리다가 그동안 법이 의지해 왔던 신비한 권위의 토대에 대해 해체를 시도하는 책이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하면 정의(正義)는 정의가 아니며 실현되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어떻게 하든지 이 사회에서 정의(正義)는 실현되어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도대체 왜 정의로워야 하며, 정의를 수행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 법이라는 것이 과연 법 자체로서 정의로운 것이지 아니면 법 집행이 정의롭다고 인정해주는 또 다른 '법의 토대' 개입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들을 제기시킨다. 몽테뉴는 '관습'이 곧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이성(理性)이 토대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시간과 더불어 변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변화, 그 자체인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법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그 신비한 권위를 그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법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신비를 신비롭지 않는 세계 안으로 끌어당겨 분석을 하게 되면 신비, 그 자체의 효력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로서 법들이 정당해서 그 집행도 정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얻어야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법들이 정당하지도 않는데 법들이 정당하다고 여기서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사실 법에게 정당성을 제공하는 그 토대에 함께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법에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법에 복종하지 말고 법의 신비로운 권위의 토대에 복종해야 그것이 법을 제대로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몽테뉴는 보았다. 그 권위의 접근은 '합리적인 따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다.

몽테뉴는 또 말하기를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의 법 역시 적법한 허구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이 허구들 위에 정신의 정의(正義)의 진리를 정초 한다."고 했다. 여기서 '적법한 허구'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에서 자연에 없는 것은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으로는 도출할 수 없기에 '허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추가 보충되어야 하는 실증적인 법이 만들어져야 하기에 '적법'이라는 말을 동원한 것이다. 학문이란 원래, 자연법에 대한 인공적 보정물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가짜 다리라든지, 틀니 같은 가짜 이빨이 당연히 적법성을 가지고 제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법을 만들게 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데리다는 '폭력'을 논한다. 즉 정당한 폭력과 정당하지 않는 폭력(정의로운 힘과 정의롭지 않는 힘)을 구분하는 기준이 너무나도 자의적(恣意的)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폭력을 해체해서 법의 해체를 시도하게 되는데 '역사적 지평'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실시한다. 판사가 법을 집행하면서 판사 본인이 그 때 그 때마다 법을 새로 발명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평은 철조망 경계선과는 달리 닫혀있거나 고정적으로 갇혀 있는 아니라 시간의 흐름 따라 계속 열려지고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법 집행자가 자기 집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흘러간 시간마저 현재 자기 결정의 정당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법에 의미를 주게 된다. 이것은 데리다는 전(前)미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종의 '미래완료'이다. 전미래란, 미래에 앞선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는 미래 시제를 가리키고, 이 시제 이 전에 완료된 어떤 행위, 곧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의 시제가 바로 이 전미래 시제이다. 이 시제의 활용은 이렇다. 어떤 예상 못한 돌발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그 사건으로 인해 과거에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이 이 돌발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목적적인 인과관계가 졸지에 성립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차후에 '재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돌발적인 사건의 우발성은 말소되고 필연적으로 반드시 꼭 일어나는 사건처럼 이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법 집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비적 권위, 혹은 관습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이 정당성이 확보된 의미를 가지고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려는 주체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당한 법을 찾아 환장하는 헤매는 주체자들을 데리다는 벤야민의 학문적 성과를 의존해서 '유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자신의 법 집행이 정당하다는 과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작자들 (왜 법과 폭력이 만나느냐 하면 '힘없는 법'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을 '신들림' 그 자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이 개인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무엇이든지 인간의 존엄한 생명에 폭력을 가해놓고서 그것에다 '정의(正義)로움'으로 포장하는 자들은 다 마찬가지로 본다. 벤야민은 이것은 '타락'이라고 본다.

유대교 신자인 벤야민이 알고 있는 신은, 법마저 파괴하는 신성함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창설하고 보존하는 신화적 폭력, 즉 헬라적인 관점을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상이다. 데리다는 이 벤야민 사상에 동의한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에 오직 신만이 관리할 수 있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해서 침범하는 그 폭력에 중심에는 국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법적 폭력은 법과 관련되어 두 가지 폭력 사이에 구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법을 설립하고 정립하고 정초 하려는 '정초적 폭력'이요 다른 하나는 법의 영속성과 적용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증하고 보장하려는 '보존적 폭력'이 그것이다. '국민개병제도' 같은 것이 법보전적 폭력에 해당되고 노동자들의 파업금지 조치가 결국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력이라고 간주되어 처단하기 위해 동원되는 폭력이 '정초적 폭력'에 해당된다. 법의 권력은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할 뿐이요, 실존해야 하며 이를 위협하는 그 어떤 폭력도 용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이러한 폭력 행사를 정당화 시켜주는 이론에는 그동안 두 가지의 이론이 있어왔다. 하나는 자연적법 주장인데, 자연법상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이 대자연은 생존경쟁을 위한 폭력이 이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본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원초적인 수단으로 동원되어 왔다는 것이고 인간 사회도 이 대자연의 원칙에서 크게 포용되어져서 같이 진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폭력은 자연의 산물, 말하자면 원재료 같은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이론은 법실증주의적인 주장인데, 법이란 역사적 생성물이라는 것이라서 역사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한 이 법도 무시될 수 없고, 따라서 법 집행에 따르는 폭력도 당연히 정당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자연법주의가 현존하는 모든 법을 그 목적들의 비판 속에서만 평가할 수 있다면, 법실증주의는 모든 생성하는 법을 그 수단들의 비판 속에서만 평가할 수 있다. 즉 정의(正義)가 목적들의 척도하면, 적법성은 수단들의 척도다. 하지만 이런 대립과 무관하게 두 학파는 공통적인 근본 독단에서 일치점을 갖고 있다.

곧 정당한 목적인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 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성을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만약에 이 독단적 전제가 거짓된 것으로 드러나는 날에는 각자의 순환논리는 다 깨어지는데 벤야민은 그 날을 메시야가 도래하는 날로 보고 있다. 오직 정의로움은 신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어떤 법을 동원해서라고 그 폭력의 정당함을 설득할 수 없다. 궁극적인 정의와 법 해석은 최종적 권위자인 오직 신에게만 있다.

평 가

저자는, 법의 행사가 인간 세계에서 통용된다고 오해하고 있다. 법이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법을 다룰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못할 정도로 죄인이라는 점을 밝혀주기 위함이다. 진정한 거룩 앞에 인간의 법감정은 그 자체가 저주받을 일이다. 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주신 것이다.

첨부파일 : 법의힘.hwp (48.0K), Down:9

관리자(IP:124.♡.84.82)

09-03-06 03:37

법의 힘 : Force de loi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번 역 : 진태원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4)

뭐든지 해체되는 양상으로 의미를 생산하려는 이 시대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도 계속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법이 가진 권위마저 해체가 된다면 이 사회의 질서는 어떤 정당성에 최종 호소해야 유지되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기술과 결합해서 배태해내는 욕망의 열매나 뜯어먹고 사는 형편에 놓인 법 집행자들은 마냥 자신의 권위를 초월적인 성격이 있다고 우기고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자연적으로 자본의 힘과 법이 앞장세우고 있는 정의(正義)의 힘이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로 인해 현대 사회는 사상적으로 절대 가치, 절대 진리에 대해 신뢰를 잃어간다. 그렇다면 이 해체의 시대에서 법이 처신해야 하는 자리를 어떻게 마련되는가? 본 책은, 의미해체를 들고 나온 데리다가 그동안 법이 의지해 왔던 신비한 권위의 토대에 대해 해체를 시도하는 책이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하면 정의(正義)는 정의가 아니며 실현되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어떻게 하든지 이 사회에서 정의(正義)는 실현되어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도대체 왜 정의로워야 하며, 정의를 수행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 법이라는 것이 과연 법 자체로서 정의로운 것이지 아니면 법 집행이 정의롭다고 인정해주는 또 다른 '법의 토대' 개입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들을 제기시킨다. 몽테뉴는 '관습'이 곧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이성(理性)이 토대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시간과 더불어 변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변화, 그 자체인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법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그 신비한 권위를 그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법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신비를 신비롭지 않는 세계 안으로 끌어당겨 분석을 하게 되면 신비, 그 자체의 효력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로서 법들이 정당해서 그 집행도 정당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얻어야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법들이 정당하지도 않는데 법들이 정당하다고 여기서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사실 법에게 정당성을 제공하는 그 토대에 함께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법에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법에 복종하지 말고 법의 신비로운 권위의 토대에 복종해야 그것이 법을 제대로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몽테뉴는 보았다. 그 권위의 접근은 '합리적인 따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다.

몽테뉴는 또 말하기를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의 법 역시 적법한 허구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이 허구들 위에 정신의 정의(正義)의 진리를 정초 한다."고 했다. 여기서 '적법한 허구'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에서 자연에 없는 것은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으로는 도출할 수 없기에 '허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추가 보충되어야 하는 실증적인 법이 만들어져야 하기에 '적법'이라는 말을 동원한 것이다. 학문이란 원래, 자연법에 대한 인공적 보정물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가짜 다리라든지, 틀니 같은 가짜 이빨이 당연히 적법성을 가지고 제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법을 만들게 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데리다는 '폭력'을 논한다. 즉 정당한 폭력과 정당하지 않는 폭력(정의로운 힘과 정의롭지 않는 힘)을 구분하는 기준이 너무나도 자의적(恣意的)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폭력을 해체해서 법의 해체를 시도하게 되는데 '역사적 지평'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실시한다. 판사가 법을 집행하면서 판사 본인이 그 때 그 때마다 법을 새로 발명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평은 철조망 경계선과는 달리 닫혀있거나 고정적으로 갇혀 있는 아니라 시간의 흐름 따라 계속 열려지고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법 집행자가 자기 집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흘러간 시간마저 현재 자기 결정의 정당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법에 의미를 주게 된다. 이것은 데리다는 전(前)미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종의 '미래완료'이다. 전미래란, 미래에 앞선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는 미래 시제를 가리키고, 이 시제 이 전에 완료된 어떤 행위, 곧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의 시제가 바로 이 전미래 시제이다. 이 시제의 활용은 이렇다. 어떤 예상 못한 돌발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그 사건으로 인해 과거에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이 이 돌발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목적적인 인과관계가 졸지에 성립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차후에 '재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돌발적인 사건의 우발성은 말소되고 필연적으로 반드시 꼭 일어나는 사건처럼 이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법 집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비적 권위, 혹은 관습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이 정당성이 확보된 의미를 가지고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려는 주체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당한 법을 찾아 환장하는 헤매는 주체자들을 데리다는 벤야민의 학문적 성과를 의존해서 '유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자신의 법 집행이 정당하다는 과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작자들 (왜 법과 폭력이 만나느냐 하면 '힘없는 법'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을 '신들림' 그 자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이 개인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무엇이든지 인간의 존엄한 생명에 폭력을 가해놓고서 그것에다 '정의(正義)로움'으로 포장하는 자들은 다 마찬가지로 본다. 벤야민은 이것은 '타락'이라고 본다.

유대교 신자인 벤야민이 알고 있는 신은, 법마저 파괴하는 신성함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창설하고 보존하는 신화적 폭력, 즉 헬라적인 관점을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상이다. 데리다는 이 벤야민 사상에 동의한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에 오직 신만이 관리할 수 있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에 대해서 침범하는 그 폭력에 중심에는 국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법적 폭력은 법과 관련되어 두 가지 폭력 사이에 구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법을 설립하고 정립하고 정초 하려는 '정초적 폭력'이요 다른 하나는 법의 영속성과 적용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증하고 보장하려는 '보존적 폭력'이 그것이다. '국민개병제도' 같은 것이 법보전적 폭력에 해당되고 노동자들의 파업금지 조치가 결국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력이라고 간주되어 처단하기 위해 동원되는 폭력이 '정초적 폭력'에 해당된다. 법의 권력은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할 뿐이요, 실존해야 하며 이를 위협하는 그 어떤 폭력도 용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이러한 폭력 행사를 정당화 시켜주는 이론에는 그동안 두 가지의 이론이 있어왔다. 하나는 자연적법 주장인데, 자연법상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이 대자연은 생존경쟁을 위한 폭력이 이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본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원초적인 수단으로 동원되어 왔다는 것이고 인간 사회도 이 대자연의 원칙에서 크게 포용되어져서 같이 진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폭력은 자연의 산물, 말하자면 원재료 같은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이론은 법실증주의적인 주장인데, 법이란 역사적 생성물이라는 것이라서 역사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한 이 법도 무시될 수 없고, 따라서 법 집행에 따르는 폭력도 당연히 정당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자연법주의가 현존하는 모든 법을 그 목적들의 비판 속에서만 평가할 수 있다면, 법실증주의는 모든 생성하는 법을 그 수단들의 비판 속에서만 평가할 수 있다. 즉 정의(正義)가 목적들의 척도하면, 적법성은 수단들의 척도다. 하지만 이런 대립과 무관하게 두 학파는 공통적인 근본 독단에서 일치점을 갖고 있다.

곧 정당한 목적인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 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성을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만약에 이 독단적 전제가 거짓된 것으로 드러나는 날에는 각자의 순환논리는 다 깨어지는데 벤야민은 그 날을 메시야가 도래하는 날로 보고 있다. 오직 정의로움은 신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어떤 법을 동원해서라고 그 폭력의 정당함을 설득할 수 없다. 궁극적인 정의와 법 해석은 최종적 권위자인 오직 신에게만 있다.

평 가

저자는, 법의 행사가 인간 세계에서 통용된다고 오해하고 있다. 법이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법을 다룰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못할 정도로 죄인이라는 점을 밝혀주기 위함이다. 진정한 거룩 앞에 인간의 법감정은 그 자체가 저주받을 일이다. 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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