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오만과 편견성경신학미가

오만과 편견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오만과 편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출판사 : 휴머니스트 (서울 : 2003)

현실에서 과연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해소시킬 묘책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여기에는 치열한 사투의 흔적만을 퍼드려지게 남기게 될 것이 뻔하다. 도대체 이 현실에 무슨 문제가 담겨 있단 말인가?

우선 양국의 두 저자들은 국민국가 자체를 문제 삼고 과연 옳은 정치구조인가 하는 점을 두고 독하게 파헤치고 있다. 현대 국가론의 근간에는 두개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나는 Volk(독일어)요 다른 하나는 nation이다. Volk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거기에 비해 nation은 인민의 주권이 강조된다. 자연적인 혈통이라는 조건과 인공적이고 보편적인 요소가 혼합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미 문제의 발단이 들어가 있다. 소위 '민족 의식'이라는 것을 누가, 무슨 연유가 형성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에도 '민족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민족의식이란 근대국가가 '국민 만들기'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즉 식민지체제와 관련되어서 등장된 의식이다. 왜 타국가로부터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자의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특히 단군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한국민족도 19세기 말까지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의 범주화, 집단화는 주로 신분 질서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외국과의 관계도 한국 민족 대 일본 민족, 혹은 한국 민족 대 중국 민족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전통적인 왕조 구분으로서 '왜. '중국' '조선'의 맥락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 혹은 위협이 점차로 가시화되면서 저항민족주의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억압받는 자의 집단적 연대로서의 민족 개념인데 이것이 근대국가로 넘어오게 되면 국가의 동원원리나 국가권력에 의한 착취로 논리를 정당시하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사실, 그 민족의 특유의 경험이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개개인의 경험만을 기억 속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민족의 특수한 속성을 드러낸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경험일 따름이다. 여기서 그 극소수의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게 된다. 이를테면 종군위안부들의 경험은 당사자에게는 확실한 경험이지만 같은 국민이어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형태의 경험 간에 생기는 틈을 메우기 위해 국민국가는 불가피하 통합하는 방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민족의식을 위에서부터 주입시켜야 하는가 하면, 국민의 국가가 되려면 필히 비(非)국민과 국민 사이를 철저하게 구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적이라는 자체가 배타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민족의식은 신체 조건에다 국민 국가적 헤게모니를 심은 결과이다. 통상적으로 '헤게모니'란 한 집단이 국가, 문화가 다른 집단의 국가, 문화를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지배는 폭력이나 강제력이 아닌 사고방식이나 제도, 사상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방식의 지배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피지배계급이 그들의 종속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동의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 헤게모니의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비록 서구 민주사회가 자본주의적 억압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가 집단적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민족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이로서 민족은 근대국가 안에서 시민종교화되고 세속종교화가 되는 것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욕망을 지닌 개개인을 단일한 집합 의지를 가진 국민으로 추상화시키는 이론적 시스템이 작용한다. 즉 권력의 의지를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기 위해 개개인의 의지로 내면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비국민을 배제하고 타자화시키는 과정 또한 정당화된다. 민족종교로 볼 때에는 그냥 국민이 아니라 동포로서의 국민이 된다. 이것은 '대중독재'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것이 현실화된 것이 나치즘과 파시즘이다. 대중들은 환상 속에서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과 복종을 국가에게 바친다. 이 합의독재를 그들은 국민국가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독재'가 저항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지역공동체 혹은 촌락공동체에 적용하려고 시도했을 때다. 이들 공동체는 고유의 자율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직도 '국민됨'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민국가'의 심화는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게 된다. 국민 사이의 차별화를 강요함으로서 균질화와 보편화를 시도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국가 내의 다(多)문화가 차등이 없을까? 여기서 주류와 비주류 간의 편차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의 경우를 보면. 미국 내의 소수 민족들이 고향이나 조국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까닭에 오히려 더 강한 조국에 대해서 국가주의를 성향을 나타낸다. 조국의 문화의식이나 전통 같은 것들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한 노스탤지어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소수민족의 조국애는 사실 주류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수민족으로서 제국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마치 그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별도로 상정함으로써 거기서 자기 구원을 받는 듯한 믿음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소수민족의 열등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동양과 서양을 구분 지은 서구 유럽의 우월성이 식민주의라는 형식으로 시작해서 그동안 세계를 뒤덮어 왔기 때문이다. 즉 지배받는 종족들이나 인종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그 우월국가(선진국가)를 본보기로해서 그들의 이데오르기 틀 안에서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서양인 행세를 하는 것이 곧 국가나 민족의 독립된 상태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독립된 근대국가들만 그 내부에 또다시 배타성과 차별성이 잉태하게 마련이다. 즉 더 근대적인 계층과 아직 근대성이 미진한 비근대성의 계층으로 구분 짓게 되고, 근대성에서 앞 선 사회 계층의 지배를 국가질서라는 이름하에 당연시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즉 한 국가 내에서도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 의식이 국민국가주의가 쇠퇴할 징조를 보이는 오늘날에는 다른 내용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것은 곧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의식이다. 이제는 자본과 노동이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소비자가 직접 손을 잡는다. 그동안 국민국가적 파시즘에서 소비자 파시즘으로 바뀌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가 복지국가의 형태를 띠면서 대중의 욕망을 국가가 보장한다고 약속을 해주기에 사실상 문제가 종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파라다이스 대신 각가지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사회만 개조해서라도 민중들을 완벽하게 행복해주기 위한 것을 국민국가가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행복을 강요하는 체제를 사람들의 욕망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즉 얼마 전까지의 유토피아는, 열심히 해서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토피아는 '자기 마음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레저 산업까지 이미 대기업의 소비상술이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대기업이 제공한 그런 소비형태의 레저를 강요받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구소련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 구절까지 인용했다. 하지만 이런 노동해방의 논리는 곧 국가적 차원은 노동동원의 논리로 변모해 버렸다. 근대를 넘어서 해방이 아니라 근대에 포박된 해방이다. 오늘날 세계는 소비 욕망이 체계에 갇혀서 지탱되고 있다. 근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회 이론은 나올 수 없고 이는 현재에서 미래를 미리 설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 자신도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를 등지고 뒤를 보면서 미래로 향해 가는 그런 방식으로만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저 욕망이 인도하는 대로 우발적으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발적 욕망이란 현재의 것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또다시 탈주술적으로 반성하려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재주술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미 이성으로 인한 해석이 종료된 이 근대성을 가지고 아무리 연대성과 관계성을 구축하려고 애써봤자 미국의 헤게모니를 따라잡는 데 급급할 뿐이다. 이미 전 세계는 미국의 이미지로서 의식적 식민지화되었다. 미국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권력과 체제의 표상을 드러낸다. 저항하는 자는 저항 받는 자나 모두 미국에 대한 시기심이 심적인 동기가 되어 움직인다. 반미(反美)민족주의는 우리 안에 진짜 미국다운 미국을 세워보겠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다른 사유가 없을까? 시선을 계속 과거를 두고서, 과거만 검토하면서 미래로 막연하게 질질 끌려가는 절망이 이런 것이 아닐까?

평 가

본 책은, 오늘날의 인간이 아무리 자기 생존을 합리화하고 변명해도 남을 밀치고 자기만 살겠다는 본능의 일환임을 잘 파악해내고 있다. 자식은 둘만 나아서 잘 기르자고 나라에서 캠페인 벌릴 때에 자식 세 명 낳은 여성이 국가에 죄송해서 죽겠다는 인터뷰를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즉 나라님(국민국가)의 절대법에 의존해서 죄와 의를 스스로 가늠하면서 자기 욕망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이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출생된 세계에서 제공받은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2-3) 물론 죄의식도 이런 근대적 국민국가, 혹은 국민주권국가가 제공한 윤리관에서 제공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모르는 자가 있다. 이런 자는 자신의 미래도 모르고 미래로 가는 시간에 올라탄 사람이다.

첨부파일 : 오만과편견.hwp (48.0K), Down:13

관리자(IP:124.♡.84.82)

09-03-05 23:01

오만과 편견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출판사 : 휴머니스트 (서울 : 2003)

현실에서 과연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해소시킬 묘책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여기에는 치열한 사투의 흔적만을 퍼드려지게 남기게 될 것이 뻔하다. 도대체 이 현실에 무슨 문제가 담겨 있단 말인가?

우선 양국의 두 저자들은 국민국가 자체를 문제 삼고 과연 옳은 정치구조인가 하는 점을 두고 독하게 파헤치고 있다. 현대 국가론의 근간에는 두개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나는 Volk(독일어)요 다른 하나는 nation이다. Volk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거기에 비해 nation은 인민의 주권이 강조된다. 자연적인 혈통이라는 조건과 인공적이고 보편적인 요소가 혼합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미 문제의 발단이 들어가 있다. 소위 '민족 의식'이라는 것을 누가, 무슨 연유가 형성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에도 '민족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민족의식이란 근대국가가 '국민 만들기'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즉 식민지체제와 관련되어서 등장된 의식이다. 왜 타국가로부터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자의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특히 단군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한국민족도 19세기 말까지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의 범주화, 집단화는 주로 신분 질서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외국과의 관계도 한국 민족 대 일본 민족, 혹은 한국 민족 대 중국 민족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전통적인 왕조 구분으로서 '왜. '중국' '조선'의 맥락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 혹은 위협이 점차로 가시화되면서 저항민족주의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억압받는 자의 집단적 연대로서의 민족 개념인데 이것이 근대국가로 넘어오게 되면 국가의 동원원리나 국가권력에 의한 착취로 논리를 정당시하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사실, 그 민족의 특유의 경험이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개개인의 경험만을 기억 속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민족의 특수한 속성을 드러낸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경험일 따름이다. 여기서 그 극소수의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게 된다. 이를테면 종군위안부들의 경험은 당사자에게는 확실한 경험이지만 같은 국민이어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형태의 경험 간에 생기는 틈을 메우기 위해 국민국가는 불가피하 통합하는 방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민족의식을 위에서부터 주입시켜야 하는가 하면, 국민의 국가가 되려면 필히 비(非)국민과 국민 사이를 철저하게 구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적이라는 자체가 배타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민족의식은 신체 조건에다 국민 국가적 헤게모니를 심은 결과이다. 통상적으로 '헤게모니'란 한 집단이 국가, 문화가 다른 집단의 국가, 문화를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지배는 폭력이나 강제력이 아닌 사고방식이나 제도, 사상과 같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방식의 지배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피지배계급이 그들의 종속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동의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 헤게모니의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비록 서구 민주사회가 자본주의적 억압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가 집단적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민족에게 달라붙은 것이다. 이로서 민족은 근대국가 안에서 시민종교화되고 세속종교화가 되는 것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욕망을 지닌 개개인을 단일한 집합 의지를 가진 국민으로 추상화시키는 이론적 시스템이 작용한다. 즉 권력의 의지를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기 위해 개개인의 의지로 내면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비국민을 배제하고 타자화시키는 과정 또한 정당화된다. 민족종교로 볼 때에는 그냥 국민이 아니라 동포로서의 국민이 된다. 이것은 '대중독재'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것이 현실화된 것이 나치즘과 파시즘이다. 대중들은 환상 속에서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과 복종을 국가에게 바친다. 이 합의독재를 그들은 국민국가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독재'가 저항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지역공동체 혹은 촌락공동체에 적용하려고 시도했을 때다. 이들 공동체는 고유의 자율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직도 '국민됨'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민국가'의 심화는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게 된다. 국민 사이의 차별화를 강요함으로서 균질화와 보편화를 시도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국가 내의 다(多)문화가 차등이 없을까? 여기서 주류와 비주류 간의 편차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의 경우를 보면. 미국 내의 소수 민족들이 고향이나 조국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까닭에 오히려 더 강한 조국에 대해서 국가주의를 성향을 나타낸다. 조국의 문화의식이나 전통 같은 것들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한 노스탤지어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소수민족의 조국애는 사실 주류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수민족으로서 제국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하면서 마치 그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별도로 상정함으로써 거기서 자기 구원을 받는 듯한 믿음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소수민족의 열등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동양과 서양을 구분 지은 서구 유럽의 우월성이 식민주의라는 형식으로 시작해서 그동안 세계를 뒤덮어 왔기 때문이다. 즉 지배받는 종족들이나 인종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그 우월국가(선진국가)를 본보기로해서 그들의 이데오르기 틀 안에서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서양인 행세를 하는 것이 곧 국가나 민족의 독립된 상태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독립된 근대국가들만 그 내부에 또다시 배타성과 차별성이 잉태하게 마련이다. 즉 더 근대적인 계층과 아직 근대성이 미진한 비근대성의 계층으로 구분 짓게 되고, 근대성에서 앞 선 사회 계층의 지배를 국가질서라는 이름하에 당연시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즉 한 국가 내에서도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 의식이 국민국가주의가 쇠퇴할 징조를 보이는 오늘날에는 다른 내용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것은 곧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의식이다. 이제는 자본과 노동이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소비자가 직접 손을 잡는다. 그동안 국민국가적 파시즘에서 소비자 파시즘으로 바뀌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가 복지국가의 형태를 띠면서 대중의 욕망을 국가가 보장한다고 약속을 해주기에 사실상 문제가 종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파라다이스 대신 각가지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사회만 개조해서라도 민중들을 완벽하게 행복해주기 위한 것을 국민국가가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행복을 강요하는 체제를 사람들의 욕망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즉 얼마 전까지의 유토피아는, 열심히 해서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토피아는 '자기 마음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레저 산업까지 이미 대기업의 소비상술이 장악해 버렸기 때문에 대기업이 제공한 그런 소비형태의 레저를 강요받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구소련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 구절까지 인용했다. 하지만 이런 노동해방의 논리는 곧 국가적 차원은 노동동원의 논리로 변모해 버렸다. 근대를 넘어서 해방이 아니라 근대에 포박된 해방이다. 오늘날 세계는 소비 욕망이 체계에 갇혀서 지탱되고 있다. 근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회 이론은 나올 수 없고 이는 현재에서 미래를 미리 설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 자신도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를 등지고 뒤를 보면서 미래로 향해 가는 그런 방식으로만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저 욕망이 인도하는 대로 우발적으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발적 욕망이란 현재의 것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또다시 탈주술적으로 반성하려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재주술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미 이성으로 인한 해석이 종료된 이 근대성을 가지고 아무리 연대성과 관계성을 구축하려고 애써봤자 미국의 헤게모니를 따라잡는 데 급급할 뿐이다. 이미 전 세계는 미국의 이미지로서 의식적 식민지화되었다. 미국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권력과 체제의 표상을 드러낸다. 저항하는 자는 저항 받는 자나 모두 미국에 대한 시기심이 심적인 동기가 되어 움직인다. 반미(反美)민족주의는 우리 안에 진짜 미국다운 미국을 세워보겠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다른 사유가 없을까? 시선을 계속 과거를 두고서, 과거만 검토하면서 미래로 막연하게 질질 끌려가는 절망이 이런 것이 아닐까?

평 가

본 책은, 오늘날의 인간이 아무리 자기 생존을 합리화하고 변명해도 남을 밀치고 자기만 살겠다는 본능의 일환임을 잘 파악해내고 있다. 자식은 둘만 나아서 잘 기르자고 나라에서 캠페인 벌릴 때에 자식 세 명 낳은 여성이 국가에 죄송해서 죽겠다는 인터뷰를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즉 나라님(국민국가)의 절대법에 의존해서 죄와 의를 스스로 가늠하면서 자기 욕망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이란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출생된 세계에서 제공받은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2-3) 물론 죄의식도 이런 근대적 국민국가, 혹은 국민주권국가가 제공한 윤리관에서 제공받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모르는 자가 있다. 이런 자는 자신의 미래도 모르고 미래로 가는 시간에 올라탄 사람이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27 성경신학 칼 슈미트 Carl Schmit (1885∼1985)의 사상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26 성경신학 화이트 헤드와 동양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11-27
열람 ➜ 성경신학 오만과 편견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24 성경신학 신의 세속화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123 성경신학 아이 투 아이 : 감각의 눈 · 이성의 눈 · 관조의 눈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22 성경신학 중세 철학 : 그리스도교 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11-27
121 성경신학 녹색 세계사 : 진보의 역사 뒤에 숨겨진 파괴의 역사 이사야 최고관리자 06-11-27
120 성경신학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 영미 형법의 세 가지 뼈대 [신학] 최고관리자 06-11-27
119 성경신학 세상을 움직인 악(惡) : 절대권력을 지닌 세기의 악인 16인의 사악함 - 최고관리자 06-11-27
118 성경신학 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6-11-27
117 성경신학 금기의 수수께끼 :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레위기 최고관리자 06-11-27
116 성경신학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11-27
115 성경신학 산 중에서 길을 물었더니 : 우리 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06-11-27
114 성경신학 지각(知覺)의 현상학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06-11-27
113 성경신학 예수는 신화다 : 기독교 탄생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충격보고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6-11-27
112 성경신학 말과 사물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11 성경신학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아가서 최고관리자 06-11-27
110 성경신학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 최신 두뇌과학이 밝혀낸 종교의 실체 - 최고관리자 06-11-27
109 성경신학 부정변증법 로마서 최고관리자 06-11-27
108 성경신학 전 략 론 전도서 최고관리자 06-11-27
107 성경신학 외채 부메랑 : 제3세계 외채는 어떻게 우리 모두를 해치는가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6-11-27
106 성경신학 앙띠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6-11-27
105 성경신학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04 성경신학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미가 최고관리자 06-11-27
103 성경신학 이기적 유전자 :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 - 최고관리자 06-11-2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