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약속의 형성단계에 대하여
하나님 약속의 형성단계에 대하여 - 창세기 3장과 4장을 중심내용으로 하여- 1991년 12월 10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2 (p 187) 하나님이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약속한 내용이 실제 인류의 역사에 어떤 것을 계기로 해서 파고 들어오는가에 대한 신학적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전체적인 신학체제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신학의 다리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이 대목이다. 이 다리가 튼튼하지 않다면 그 뒤의 모든 신학 체제의 근거가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 연결부위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작은 부분에서 신학 전체의 내용을 찾아내는 시도 자체가 외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약하나마 대충 짐작만 하고 다음에 나오는 구속사건에 대한 풍부한 내용들을 전가하는 식이 되었다. 물론 계시의 점진성이란 조직신학적 언명도 여기서는 톡톡한 보탬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던 모호하다는 것은 좋지 않다. 최소한의 테두리 정도는 분명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수주의 진영에서 그동안 창세기 3장과 4장에서 내놓았다는 테두리는 아벨이 양을 잡아 바친 것이 창세기 3장에서의 약속한 것(예를 들면 가죽옷을 입혔다)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인데, 위의 주장을 근거로 해서 창세기 3장의 후반부와 4장의 전반부를 역으로 기록해 본다면 전혀 실제 성경과는 엄청난 오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는 원인이 아벨이 취한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도 않을뿐더러, 창세기 3장의 가죽옷을 양의 가죽옷이라고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 또 아벨이 제사하고 난 뒤 그 양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흔적도 없다. 또 아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어떤 암시를 받았던, 아담에게 교육을 받았던 창세기 3장의 후반부의 약속은 양의 희생에 주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가죽옷에 주안점이 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꼭 양으로 제사 드려라 그러면 내가 그 제사를 받고 너희들에게 영생을 주겠다는 어떤 언질을 준 적이 없다. 그렇게 했다면 가인도 양을 희생해서 제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에서 제사제물의 종류는 그들의 직업과 관련 있는 것으로 분명히 지적해 있으니 여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은 결코 고려의 대상이 못된다. 창세기 3장에서의 약속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와의 후손에서 나올 어떤 남자아이의 행위이다. 그만이 뱀의 후손과 결투한다. 차라리 하나님이 가족 옷을 입혔다는 행위는 약속 그 자체의 성립을 위한 지속적인 보호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계시하시는데 핵심 되는 중요한 것은 제외시키고 오히려 혼동만 일으키는 부차적인 것을 최우선적으로 제시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따라서 3장과 4장에서는 다른 핵심을 가지고 계시가 진행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진보주의적 안목으로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3장의 약속과는 연결점을 갖지 못하고 단순한 강한 자에 의해 약한 자가 피해를 보는 것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약한 자의 편이고 강한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전체 인류를 이렇게 두 계급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사실상 근거도 없고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차별해서 열납한 것에 대하여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차별은 그 자체가 진보주의적 인사들의 눈에는 불공평한 분으로 인식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3장과 4장을 두고 볼 때, 자연스런 핵심은 무엇인가? 창세기 3장에서 4장으로 밀어내는데 있다. 3장 이후 모든 인류의 움직임이 하나님이 이미 제시한 약속의 성취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러나 아직 인간은 여기에 대하여 눈이 뜨여지지 못하고 있다. 약속이 인간의 역사 속에 자리 잡을 공간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다. 약속이 비집고 들어설 여지는 아직 없다. 인간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기면서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 창세기 4장의 주제가 될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쉽게 상상한 것처럼 양의 희생을 약속이라고 규정하고 이 양의 희생을 축으로 하여 연속적인 사건들의 소용돌이로 역사를 꾸며 나갈 수는 없다. 양의 희생이 축이 아니라 어떤 인물이 축이다. 더 나아가서 양으로 제사 드린(희생제사라는 보장이 없음) 인물이 축이 아니라 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될 인물이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 그 인물이 축이어야 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는 가인의 되물음 안에서 우리는 가인의 위상과 아벨의 위상을 발견하게 된다. 보호해야 될 위치에 있는 자가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 것은 죄가 가인을 정복한 결과이며 이러한 죄가 인간과 직접적으로 접촉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와있게 된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인간의 실상이 선과 악과 연관해서 평가되고 통제되는 입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 선과 악의 기준에서 다루신다. 왜냐하면 그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인간은 반드시 선으로서 악을 이겨야 축복이 유지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가인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면 가인은 왜 실패했는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하나님의 제사 열납 행위에 기인한다. 자기의 제사는 열납 하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열납 했을 때, 가인은 얼굴색이 변한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은 善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가인에게 죄를 유발시킨 동기는 하나님의 일방적 행위였다.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죄에 대한 개념은 인간들 상호간의 질서 위배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벌이시는 활동이나 계획이나 주장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죄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활동에 대하여 동조하지 않는 것이 善아닌 죄가 되는데 만약에 아벨마저 형 제사의 불열납에 대하여 불평했으면 그도 역시 善아닌 것이 된다. 적극적으로 善아닌 상태에 있으면 실제로 적극적인 죄가 인간을 노리고 대면 했을 때, 죄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해 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창세기 4장에서 찾아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정리 정돈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나가는 시발점이 된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그 자체로서 어떤 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제사의 형식이 다른 것은 그들의 생업이 달랐을 뿐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의에 의해 아벨 쪽의 제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하여 아벨은 동의했고 가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가인이 자기 것을 안 받아주었다고 화를 내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에 가인이 자기제사는 받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부했더라도 가인은 하나님의 기준 없는 무분별한 선택행위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반드시 반기를 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제사 선택과정만 두고 직접 창세기 3장의 약속과 결부시키지 말자. 실제로 창세기 4장에서 핵심으로 강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약속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그 이후 부분이다. 가인이 죄에 대하여 취약점을 노출시켰다. 그 취약점이란 다름 아닌 善에 대한 적극성 결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일방적인 동조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가인을 공격해 들어갔고 가인은 비로소 죄의 결실을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 맺는다.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살인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동생, 그 동생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 적극적인 동조를 표하면서 동생을 보호해야 될 책임을 다 할 마음이 없다는 죄의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원래 제사의 열납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의 유지를 뜻한다. 이는 곧 복의 지속적인 내림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동생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형이 이제 오히려 죄의 노예가 되어 악의 사신으로 변모되었으니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이 선택한 동생을 보호하고 나선다. 이 과정이 바로 창세기 3:15에 나와 있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사이에 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과정이다. 가죽옷으로 생명의 원천인 아담과 하와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는 곧 하나님 자신이 내린 약속에 대한 보호이다. 더 풀이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행위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편과 동조하는 편 사이에 직접 관여하고 하나님의 일에 동조하는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복수하시겠다는 내용이 약속의 핵심 내용이다. 땅에서 올라오고 있는 [핏소리]. 이 [핏소리]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선택행위를 모독하는 세력들이 존재하며 이 세력들은 필히 죄의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은 그냥 지상에 임하는게 아니다. 1. 하나님의 선택행위가 일어나며 2. 그 행위를 보는 지상의 평가에서 적극적 동조세력과 구별되어지게 될 것이며 3. 거부세력이 죄와 연계해서 필연적으로 동조세력에 피해를 주게 되며 4. 이 피해를 하나님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시고 약속의 보호에 나서신다. 5. 이러한 적대세력에 대해 가차없는 저주로서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 물론 창세기 4장의 경우에는, 아벨의 죽음으로 저주받은 땅은 아벨의 씨를 대신한 셋의 후손(노아)에 의해 안식을 되찾게 된다 (창세기 5: 29 를 참조. 노아의 주 임무가 바로 여기에 있음).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약속의 지상성취의 5단계에다 더 순서를 부연하면, 6. 하나님은 복수를 위해 죽은 자(피해자)를 대신하여 인물을 제공하시는데 7. 이 인물에게 주어진 사명은 반드시 죄의 세력을 쳐부숴 버릴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8. 물론 이 인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게 아니라 언약(언약 안에 창4의 내용이 성취적으로 들어있음)이라는 체제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9. 언약의 내용은 물론 善에 대하여 적극성을 띤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편파적으로 호응해야 한다. 10. 이 언약의 내용대로 약속의 인물이 준수 될 때, 언약의 결과로 원수는 정복되고 11. 하나님이 창세기 3: 15 에서 언급한 약속은 성취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복음의 핵심으로 일컬어지는 양의 희생은 어디에서 비쳐지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계기를 열어준 善한 아벨의 피를 암시하는데 동원 될 것이다. 그래서 植物用 제사보다 흠없는 어린양이라는 제물이 출애굽 당시에 등장한다. 아벨이 흠 없는 어린양을 드렸다는데서 유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무가 피의 흘림에 있기 때문에 경건한 자(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자)의 희생을 표시하려면 동물제사가 적당한 것이다. 물론 아벨이 여자의 후손은 아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 후손의 성격을 보여주는데서 하나님의 약속의 도구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리를 놓고 볼 때,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웃사랑 아무나 사랑하는 보편적 인간애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으로 국한된다. 즉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두고 말한다. 물론 선택자는 외형적이거나 혈통적이거나 교회에 등록을 했다거나 종교의식에 맞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규정 될 성질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최종적으로 아실 것이다 (마태복음 11: 27 참조). 하나님의 약속, 그것은 인간역사에 균열이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 균열자체가 약속은 아니지만 약속의 본 얼굴은 비로소 그 안에서 비쳐진다.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신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활동에 대하여 이런저런 모양으로 불평을 하고 있는 자로 하여금 얼마나 무수하게 소외당하고 있는가! 그럴수록 참된 성도는 좌절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의 성취되는 필연적 과정의 일부라고 여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봉해야 한다. 바로 이런 자의 존재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도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우리들에게 알려준 비밀대로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로마서 11: 36).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에 적극성을 보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