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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 영미 형법의 세 가지 뼈대성경신학[신학]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 영미 형법의 세 가지 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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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 영미 형법의 세 가지 뼈대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권호덕
출판사 : 그리심(한국로고스연구원) (서울 : 2003)

율법의 '용도론'에 있어 편이상 세 가지가 있다고 일단 틀을 잡아놓고, 유명한 개혁신학자들은 각자 어떤 식으로 이 틀에 내용들을 채웠는가를 살펴보는 책이다.

1. 율법의 제 1용도에 관해서 -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16세기 개혁주의자)

그는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께서 중생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다 지켜야 마땅한 도덕적 계명으로 율법을 주었다고 보았다. 즉 일반은총으로서의 율법 용도이다. 물론 이 용도로서는 죄 용서함을 얻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2) 마르틴 루터 (16세기 개혁주의자)

하나님은 시민법, 진실로 모든 법을 제정토록 하시어 죄악을 어거(제어)하게 하셨다. 따라서 모든 법은 죄를 방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칭의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3) 요한 칼빈 (16세기 개혁주의자)

율법은 공포심이나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서 인간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꺾어서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구원을 얻는 시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4) 콜부르게 (19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따라 인간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고 주셨다. 인간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한 연고로 주셨다. 여기서 율법은 자연인과 중생인에게 다르게 작용된다. 자연인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고, 중생된 자들에게는 생명의 법으로 작용한다. 왜 자연인에게는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할까? 그것은 그들이 자유의지를 주장하면서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능력을 상실케 했다.

(5) 빅켈하우스 (19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인간은 처음 창조함을 받을 때 일정한 규범 속에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 인간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율법인데, 타락 후에도 인간 속에는 하나님께서 각인시켜준 율법의 흔적이 있다. 즉 십계명은 구원을 떠나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모든 민족들의 모든 국가법과 종교법에서 십계명의 윤곽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존하고, 구원하며, 사망의 독소가 인간의 유기체 안에 역사하는 것을 가능한 오랫동안 막으려는 조치이다.

(6) 에드와드 뵐 (20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율법은 인간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율법은 유익하다. 만약 죄의 횡포를 제어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우아해지려고 노력한다(좋은 취지에서). 율법은 악인들을 형벌로 두렵고 놀라게 만들고 선한 사람들에게 상(賞)을 약속함을 통해 격려한다. 비록 내주하는 죄 때문에 율법을 무능하게 본다고해도, 또는 율법의 신적인 목적에 이를 수 없다 해도, 율법은 가정과 국가 안에서 교회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남는다.

2. 율법의 제 2 용도에 관해서 - 죄를 책망하는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재세례파는 주장하기를,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선행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반대하여 멜란히튼은 말하기를, 성령께서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하여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영적인 무능을 보게 만드는 사역이 아니라 죄인을 책망하는 사역이라고 한다.

(2) 마르틴 루터

죄가 성장하고, 특히 양심에, 번성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율법의 고유의 직분은, 사람들에게 그의 죄, 맹목, 비참, 악함, 무지, 하나님을 미워하고 무시함, 사망, 지옥, 심판 그리고 잘 예비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는 데 있다. 마치 '자기 의(義)라고 하는 괴물을 때려 부수는 망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3) 요한 칼빈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율법이 개입해서 더 크게 확대시킨다. 즉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고 또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 죄가 더욱 커진다. 아는 율법의 개입과 더불어 입법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4) 콜부르게
율법은 엄격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추구한다. 인간에게 저주가 들어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인간들 그 자신이다. 즉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이 인간에게 엄하게 임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율법을 과소평가하고, 율법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율법은 이런 모든 육적인 시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의 속성을 엄격하게 집행하려 한다. 죄란, 인간의 사고방식을 왜곡되게 조정하는 어떤 힘이다. 따라서 우리 속에 들어있는 존재론적 그 무엇이 아니라 거룩하신 분과의 관계론적 개념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5) 빅켈하우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주제를 파악하도록 율법을 주셨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과,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항상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한다. 따라서 율법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을 대항하는 증인으로 채택이 되는데, 이는 율법이 인간에게 인간의 모든 선행은 효용이 없으며, 인간은 그 내부 깊숙이 중독되어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잃어버림을 당했음을 새롭게 발견케 하기 위함이다. 즉 율법의 도움으로 율법에 순종하고 지켜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고 하며, 순종적이고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고자 하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리어 율법은 원죄에서 나온 열매라고 규정한다.

(6) 에드와드 뵐

율법은 성령님에 의해서 성도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후회를 하는데 동원된다.

우선, 율법 앞에서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상태임을 알게 하고,
둘째로,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자랑과 의를 버리게 한다.
셋째로, 깊이 부끄러워하게 되며 동시에 당혹하게 된다.
넷째로,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게 된다.
다섯째로, 자신은 하나님을 닮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인식하게 된다.
여섯째로, 하나님을 옳다 인정하고 자기는 죽어 마땅함을 인정한다. 또 율법이 자기를 저주하면 율법이 옳다고 인정한다.
일곱 번째, 이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고 이전의 모든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된다.
여덟 번째, 구원에 이르는 슬픔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생각을 바꾸는 데로 나아가며 구원에 이른다.

3. 제 3용도에 관해서 - 규범적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그는 이 율법의 용도를 '중생인의 용도'로 표현했다. 이것은 이 용도의 대상이 오직 중생인에게만 해당된다는 이야기이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인 오직 '순종'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칭의 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함이다. 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2) 마르틴 루터

루터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성화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시는지 곧 이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그는 또 십계명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십계명을 지녀야한다. 즉 십계명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한 율법의 방법론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자신의 거룩함으로 어디까지 데려갔음을 보게 만들며, 또 어느 정도까지 우리를 제한함으로 우리가 안전하게 되지 못한 범위를 보게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성화 안에서 계속 자라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녀야한다"고 했다. 또 율법폐기론과의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지닌 자들은 율법을 바로 이루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박혀 있고 우리 마음에 쓰여 있으며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율법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이다" 라고 말한다.

(3) 요한 칼빈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 따라서 죄를 없애지 말고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율법에 하는 일이다. 이것은 곧 율법 속에 성화로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율법의 순종이 이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하나님의 형상)가 된다. 여기서 루터파가 성경 속에서 율법을 보는 관점과 칼빈이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시각으로 보았다. 루터가 율법의 계시성(죄를 고발함)에 치중한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정보성에 치중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칼빈은, "인간은 율법의 고발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쫓겨 가고 복음을 통해 율법의 의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율법의 기능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율법이 불신자에게 접근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의 상태 속에서 절망하게 하고 낙담에 빠지게 만드는 반면에, 신자들에게는 의를 사모하게 만들고 용기와 기쁨이 넘치게 만든다.

(4) 콜부뤼게

율법에는 영원성이 있다. 회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중생인 역시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항상 성도를 부패로 인도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율법에 대해서 전적 무능하며 유능하지 못하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종교개혁 당시의 재세례파와 열광주의적인 직통계시파들이나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누구든지 첫 죄인으로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지닌 채. 말씀에 매달려 있으면 그는 그것이 율법에 일치 하는 삶을 사는 유일한 길임을 경험할 것이다"고 말한다. 즉 믿음으로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5) 빅켈하우스

그는 제 3의 용도를 '교육적 용도'라고 부른다. 성도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이다. 율법은 홀로 선하시고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변한 표현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질서대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행해져야 하고 인간의 의해 버림을 받고 망가진 율법은 다시 세워져야 하고 철저하게 파괴된 질서는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6) 에드와드 뵐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과 모순되는가? 뵐은 율법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님을 힘주어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법적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법에 따라 산다. 율법은 창조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것으로 영원한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 사이에 있는 관계로부터 추방시켜서는 안 된다. 성령은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광신주의나 율법이 없는 자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행동의 규율이 제시된다. 성령이 이 규정에 의해 신자들을 인도하고 성화시키며 그들의 복된 마침까지 보존한다.

평 가

조직신학의 문제점은, 아무리 신학의 개념들로 도배를 해도 모든 것이 철학적 사유 양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을 직접 인간과 연결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의 이성이나 행함이 신학 작업을 할 때나 철학 작업을 할 때나 상관없이 눈치보지 않고 늘 끼어들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 갖추고 있는 기본 사양이, 자아 존재의 긍정성, 자아의 영원성 등이다. (이것은 '가능성'으로 실제화 된다) 따라서 인간이 성경을 대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기대하고 노리고 있고, 얻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자아의 구원일 수도 있고, 성화 일수도 있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파 하는 마음일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 회복일 수도 있고 자아의 절대성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런 마음까지 십자가 앞에다 대고 과연 어디가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점검받아야 한다. 즉 율법의 논할 때는 율법을 인간의 상태와 연결시키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와 먼저 연결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연결하는 방식은 오직 '언약' 뿐이다. 그 이유는 단한가지, 인간의 죄인이기에 언약과 연결이 불가능하고 오직 언약된 분과 연결된다. 이렇듯 성령을 인간과 직접 연결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그 분의 하신 일과 우선 연결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새언약의 주체자이자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복지나 행복을 위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과 맹세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셨다는 이유도 된다.

이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린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이 오셔야만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主)-주(主)'끼리 맺은 관계는 인간은 배제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편 110: 1)

인간의 이름(실존과 기능과 행위)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될 입장에서만 거론된다.

인간 배제용으로 주입된 율법을 어떻게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거론될 수 있는가?

의로움이나, 거룩함도 모두 인간들이 배제된 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체결된 언약에 의해 형성된 차원이다. 성도는 단지 그 안으로 초청된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이다.

그래서 로마서 8:30에 나오는 말씀,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보면, 의로움이나 영화롭게 하심이나 모두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헬라어에서 부정不定시제란, 표상의 한계, 표상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이러한 표상의 한계를 표상의 긍정적 토대로 전환하기 위한 생산적인 표현이다)

같은 예로 에베소서 2:5-6에도 나온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예수 안'의 세계로 옮겨놓게 하신 것이다.

율법이 이란 결코 이 '예수 안'의 세계 속으로 딸려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7: 4)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성도가 율법에서 떨어져 나감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뒷모습을 남기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래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만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것뿐이다. 늘 성도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일이다.(갈 5:24) 그래야 십자가 지신 그분의 공로만이 천국 세계에 가득 채워질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는 '예수 안'의 세계를 율법 없는 세계로 장식하려 하신다. 그 의(義)가 무엇인가? '바로 '율법 외'의 한 의(義)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성도가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는 것도 이 '율법 외의 한 의'를 의지하는 경우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해서, '다른 이름으로는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율법의 용도는 오직 하나 뿐이다. '율법 외의 한 의'를 지향하기 위함이다.

언약적으로 보자면, 갈라디아서 4:24에 나온 말씀대로 '두 언약' 중에서 하나의 언약 기능을 담당해서, 다른 하나, 즉 새언약의 취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5:39의 말씀에 따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조직 신학은 자꾸만 인간도 합세한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오직 '아들의 나라'일 뿐이다.(골 1:13)

'한 사람도 거주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될 세상이라는 뜻이다.

첨부파일 : 율법의세가지용도와그사회적적용.hwp (48.0K), Down:13

관리자(IP:124.♡.84.82)

09-03-05 01:37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 영미 형법의 세 가지 뼈대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권호덕
출판사 : 그리심(한국로고스연구원) (서울 : 2003)

율법의 '용도론'에 있어 편이상 세 가지가 있다고 일단 틀을 잡아놓고, 유명한 개혁신학자들은 각자 어떤 식으로 이 틀에 내용들을 채웠는가를 살펴보는 책이다.

1. 율법의 제 1용도에 관해서 -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16세기 개혁주의자)

그는 질서를 중요시하는 하나님께서 중생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다 지켜야 마땅한 도덕적 계명으로 율법을 주었다고 보았다. 즉 일반은총으로서의 율법 용도이다. 물론 이 용도로서는 죄 용서함을 얻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2) 마르틴 루터 (16세기 개혁주의자)

하나님은 시민법, 진실로 모든 법을 제정토록 하시어 죄악을 어거(제어)하게 하셨다. 따라서 모든 법은 죄를 방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칭의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3) 요한 칼빈 (16세기 개혁주의자)

율법은 공포심이나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서 인간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꺾어서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구원을 얻는 시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4) 콜부르게 (19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따라 인간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고 주셨다. 인간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한 연고로 주셨다. 여기서 율법은 자연인과 중생인에게 다르게 작용된다. 자연인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고, 중생된 자들에게는 생명의 법으로 작용한다. 왜 자연인에게는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할까? 그것은 그들이 자유의지를 주장하면서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능력을 상실케 했다.

(5) 빅켈하우스 (19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인간은 처음 창조함을 받을 때 일정한 규범 속에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 인간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율법인데, 타락 후에도 인간 속에는 하나님께서 각인시켜준 율법의 흔적이 있다. 즉 십계명은 구원을 떠나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모든 민족들의 모든 국가법과 종교법에서 십계명의 윤곽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존하고, 구원하며, 사망의 독소가 인간의 유기체 안에 역사하는 것을 가능한 오랫동안 막으려는 조치이다.

(6) 에드와드 뵐 (20세기 독일 개혁주의자)

율법은 인간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율법은 유익하다. 만약 죄의 횡포를 제어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 때문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우아해지려고 노력한다(좋은 취지에서). 율법은 악인들을 형벌로 두렵고 놀라게 만들고 선한 사람들에게 상(賞)을 약속함을 통해 격려한다. 비록 내주하는 죄 때문에 율법을 무능하게 본다고해도, 또는 율법의 신적인 목적에 이를 수 없다 해도, 율법은 가정과 국가 안에서 교회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남는다.

2. 율법의 제 2 용도에 관해서 - 죄를 책망하는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재세례파는 주장하기를,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선행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반대하여 멜란히튼은 말하기를, 성령께서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하여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영적인 무능을 보게 만드는 사역이 아니라 죄인을 책망하는 사역이라고 한다.

(2) 마르틴 루터

죄가 성장하고, 특히 양심에, 번성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율법의 고유의 직분은, 사람들에게 그의 죄, 맹목, 비참, 악함, 무지, 하나님을 미워하고 무시함, 사망, 지옥, 심판 그리고 잘 예비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는 데 있다. 마치 '자기 의(義)라고 하는 괴물을 때려 부수는 망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3) 요한 칼빈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율법이 개입해서 더 크게 확대시킨다. 즉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고 또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 죄가 더욱 커진다. 아는 율법의 개입과 더불어 입법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4) 콜부르게
율법은 엄격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추구한다. 인간에게 저주가 들어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인간들 그 자신이다. 즉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이 인간에게 엄하게 임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율법을 과소평가하고, 율법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율법은 이런 모든 육적인 시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의 속성을 엄격하게 집행하려 한다. 죄란, 인간의 사고방식을 왜곡되게 조정하는 어떤 힘이다. 따라서 우리 속에 들어있는 존재론적 그 무엇이 아니라 거룩하신 분과의 관계론적 개념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5) 빅켈하우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주제를 파악하도록 율법을 주셨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과,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항상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한다. 따라서 율법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을 대항하는 증인으로 채택이 되는데, 이는 율법이 인간에게 인간의 모든 선행은 효용이 없으며, 인간은 그 내부 깊숙이 중독되어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잃어버림을 당했음을 새롭게 발견케 하기 위함이다. 즉 율법의 도움으로 율법에 순종하고 지켜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고 하며, 순종적이고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고자 하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리어 율법은 원죄에서 나온 열매라고 규정한다.

(6) 에드와드 뵐

율법은 성령님에 의해서 성도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후회를 하는데 동원된다.

우선, 율법 앞에서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상태임을 알게 하고,
둘째로,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자랑과 의를 버리게 한다.
셋째로, 깊이 부끄러워하게 되며 동시에 당혹하게 된다.
넷째로,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게 된다.
다섯째로, 자신은 하나님을 닮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인식하게 된다.
여섯째로, 하나님을 옳다 인정하고 자기는 죽어 마땅함을 인정한다. 또 율법이 자기를 저주하면 율법이 옳다고 인정한다.
일곱 번째, 이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하고 이전의 모든 삶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된다.
여덟 번째, 구원에 이르는 슬픔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생각을 바꾸는 데로 나아가며 구원에 이른다.

3. 제 3용도에 관해서 - 규범적 용도

(1) 필립 멜란히톤

그는 이 율법의 용도를 '중생인의 용도'로 표현했다. 이것은 이 용도의 대상이 오직 중생인에게만 해당된다는 이야기이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인 오직 '순종'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칭의 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함이다. 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2) 마르틴 루터

루터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성화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시는지 곧 이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그는 또 십계명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십계명을 지녀야한다. 즉 십계명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한 율법의 방법론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자신의 거룩함으로 어디까지 데려갔음을 보게 만들며, 또 어느 정도까지 우리를 제한함으로 우리가 안전하게 되지 못한 범위를 보게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성화 안에서 계속 자라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녀야한다"고 했다. 또 율법폐기론과의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지닌 자들은 율법을 바로 이루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박혀 있고 우리 마음에 쓰여 있으며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율법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이다" 라고 말한다.

(3) 요한 칼빈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 따라서 죄를 없애지 말고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율법에 하는 일이다. 이것은 곧 율법 속에 성화로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율법의 순종이 이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하나님의 형상)가 된다. 여기서 루터파가 성경 속에서 율법을 보는 관점과 칼빈이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시각으로 보았다. 루터가 율법의 계시성(죄를 고발함)에 치중한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정보성에 치중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칼빈은, "인간은 율법의 고발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쫓겨 가고 복음을 통해 율법의 의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율법의 기능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율법이 불신자에게 접근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의 상태 속에서 절망하게 하고 낙담에 빠지게 만드는 반면에, 신자들에게는 의를 사모하게 만들고 용기와 기쁨이 넘치게 만든다.

(4) 콜부뤼게

율법에는 영원성이 있다. 회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중생인 역시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항상 성도를 부패로 인도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율법에 대해서 전적 무능하며 유능하지 못하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종교개혁 당시의 재세례파와 열광주의적인 직통계시파들이나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누구든지 첫 죄인으로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지닌 채. 말씀에 매달려 있으면 그는 그것이 율법에 일치 하는 삶을 사는 유일한 길임을 경험할 것이다"고 말한다. 즉 믿음으로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5) 빅켈하우스

그는 제 3의 용도를 '교육적 용도'라고 부른다. 성도가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이다. 율법은 홀로 선하시고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변한 표현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질서대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행해져야 하고 인간의 의해 버림을 받고 망가진 율법은 다시 세워져야 하고 철저하게 파괴된 질서는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6) 에드와드 뵐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과 모순되는가? 뵐은 율법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님을 힘주어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법적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법에 따라 산다. 율법은 창조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것으로 영원한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 사이에 있는 관계로부터 추방시켜서는 안 된다. 성령은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광신주의나 율법이 없는 자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행동의 규율이 제시된다. 성령이 이 규정에 의해 신자들을 인도하고 성화시키며 그들의 복된 마침까지 보존한다.

평 가

조직신학의 문제점은, 아무리 신학의 개념들로 도배를 해도 모든 것이 철학적 사유 양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을 직접 인간과 연결되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인간의 이성이나 행함이 신학 작업을 할 때나 철학 작업을 할 때나 상관없이 눈치보지 않고 늘 끼어들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 갖추고 있는 기본 사양이, 자아 존재의 긍정성, 자아의 영원성 등이다. (이것은 '가능성'으로 실제화 된다) 따라서 인간이 성경을 대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이 기대하고 노리고 있고, 얻고자 하는 바가 따로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자아의 구원일 수도 있고, 성화 일수도 있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파 하는 마음일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 회복일 수도 있고 자아의 절대성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런 마음까지 십자가 앞에다 대고 과연 어디가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점검받아야 한다. 즉 율법의 논할 때는 율법을 인간의 상태와 연결시키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와 먼저 연결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연결하는 방식은 오직 '언약' 뿐이다. 그 이유는 단한가지, 인간의 죄인이기에 언약과 연결이 불가능하고 오직 언약된 분과 연결된다. 이렇듯 성령을 인간과 직접 연결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그 분의 하신 일과 우선 연결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새언약의 주체자이자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복지나 행복을 위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과 맹세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셨다는 이유도 된다.

이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린 명령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이 오셔야만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主)-주(主)'끼리 맺은 관계는 인간은 배제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편 110: 1)

인간의 이름(실존과 기능과 행위)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될 입장에서만 거론된다.

인간 배제용으로 주입된 율법을 어떻게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거론될 수 있는가?

의로움이나, 거룩함도 모두 인간들이 배제된 채,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체결된 언약에 의해 형성된 차원이다. 성도는 단지 그 안으로 초청된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이다.

그래서 로마서 8:30에 나오는 말씀,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보면, 의로움이나 영화롭게 하심이나 모두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헬라어에서 부정不定시제란, 표상의 한계, 표상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이러한 표상의 한계를 표상의 긍정적 토대로 전환하기 위한 생산적인 표현이다)

같은 예로 에베소서 2:5-6에도 나온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예수 안'의 세계로 옮겨놓게 하신 것이다.

율법이 이란 결코 이 '예수 안'의 세계 속으로 딸려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7: 4)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성도가 율법에서 떨어져 나감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뒷모습을 남기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래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만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것뿐이다. 늘 성도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일이다.(갈 5:24) 그래야 십자가 지신 그분의 공로만이 천국 세계에 가득 채워질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는 '예수 안'의 세계를 율법 없는 세계로 장식하려 하신다. 그 의(義)가 무엇인가? '바로 '율법 외'의 한 의(義)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성도가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는 것도 이 '율법 외의 한 의'를 의지하는 경우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해서, '다른 이름으로는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율법의 용도는 오직 하나 뿐이다. '율법 외의 한 의'를 지향하기 위함이다.

언약적으로 보자면, 갈라디아서 4:24에 나온 말씀대로 '두 언약' 중에서 하나의 언약 기능을 담당해서, 다른 하나, 즉 새언약의 취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5:39의 말씀에 따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조직 신학은 자꾸만 인간도 합세한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오직 '아들의 나라'일 뿐이다.(골 1:13)

'한 사람도 거주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될 세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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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