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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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진중권
출판사 : 아웃사이더 (서울 : 2003)
아름다움 안에서 종교와 예술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될 수 있을까? 신앙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럴 경우에 종교라는 것도 결국 인간에게서 궁극적인 보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철학을 최고 진리로 쳐주었던 시절에도 예술은 결코 철학에게 기죽지 않았다. 모닥불에서 한줄기 피어오르던 연기도 어느 높이에 이르면 온통 사방으로 퍼져 흩어지듯이, 철학이나 과학이니 종교니 하는 이성적 탐구들도 얼마 안 가서 그 진리성마저 아름다운 경지 속으로 분산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결과인가? 예술에 대한 무시와 핍박이 인류 초기부터 계속되었지만 그 때마다 예술은 이성적 진리보다도 더 위대한 진리로서 진가를 드러내었다. 본 책은, 소크라테스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경향의 내력을 소개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진리를 신화를 통해서 말했다. 그 중에 에로스도 있다. 에로스라는 여신은, 부와 가난 사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간자이다. 늘 결핍 속에 살아가지만 미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유한적으로 존재하면서 불멸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는 어떤 식으로 불멸을 얻는가? 그것은 미(美)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태와 생식이다. 중간자인 에로스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이 에로스의 모습은 곧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통해 불멸에 오르려는 그리스인들의 욕망의 의인화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살이나 색처럼 썩어 없어질 것들과 뒤섞인 세속의 아름다움들, 그리고 그런 무가치한 물질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 색깔도 살 냄새도 없는 단 하나의 신적인 아름다움, 즉 미의 이데아이다. 이것에 비하면 앞의 것들은 그저 아름다움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진리란 바로 이런 목적에 동원된다. '질서와 미'의 원리로 자신을 지배하여 쾌락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능력과 수완이다.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를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 수완, 기술을 체득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이것이 '존재 미학'이다.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을 시도하는 미학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은 생활 그 자체로서 예술 행위를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마법의 시대에서의 예술은 없는 것을 가상으로 만든 창작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현실에 대한 모방이었다. 실물을 닮으려는 욕망은 도리어 인간의 상상력이 합리적 사유에 억눌리는 시대, 그리하여 '가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시대의 산물이다. 가장자리 현실에서 분리될수록 둘을 다시 연결하고픈 인간의 욕망도 그만큼 강해지고, 그럴수록 화가들은 더욱더 눈속임에 집착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대해서 침대를 비유를 들면서 비평하고 있다. 침대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완전한 현실성 속에 존재하는 침대. 아마 이것은 신이 창조한 침대이다. 두 번째는, 목수들이 만든 침대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가가 완벽하게 재현해낸 침대이다. 신이 창조한 침대란 이데아 계에 있는 이성적 설계도에 의한 단 하나의 침대이다. 신께서 침대의 이데아(개념)를 만들면, 목수는 이 설계도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크기의 침대 '들'을 만들고, 화가는 다시 이 침대들을 베낀 무상을 만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목수는 세계 제작자를 모방하고, 화가는 이 모방자를 모방한다. 따라서 예술이란 이중모방이다.
이렇게 원상을 두 번 복사한 것이므로 예술은 그림자의 그림자,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진 허위라는 것이다. 이 곤란함에서 예술을 예술답게 구원방법이 없을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술품 속의 미인은 현실의 미인보다 더 아름답다. 이는 현실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에 현실보다 미의 이데아에 더 가깝다는 플라톤의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인데, 예술은 허구이나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말한다고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방해내는 예술은 이미 일어난 개개의 사건을 기록한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그림 예술보다 이 점에 있어 더 분명하다. 플라톤은 시의 창조는 합리적인 머리론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뜨거운 영감과 열광은 차갑고 냉정한 '이성'과 양립될 수 없는 법이다. 열광에 사로잡히면 시인은 차분한 이성을 읽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신적인 힘은 경계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힘을 합리적 지식의 체계인 기술과 대비시킨다. 아름다운 시들은 인간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작품도 아니며 신적이자 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란 신들의 통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학사에서 수천 년 간 '모방론'과 대립해 온 '영감론'의 가장 오래된 표현을 본다. 합리적 이성을 초월한 이 힘은 위험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검열'과 '추방론'으로 맞서서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너무나 여유 있게 처리한다. '카타르시스', 즉 격렬한 감정을 배설할 때 심지어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가끔 그렇게 하는 게 영혼의 건강에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인간을 미치게 하는 병원균이 아니라 면역을 키우는 유익한 백신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적'인 영감 다루기는 데카르트 시대에 와서 더욱 틀이 잡힌다. 근대에 와서 해부학이 발달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진리의 근원은 주체자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정신이 기계나 물질보다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이른바, '기회원인론'이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를 매개하는 건, '인과관계'가 아니라 신이 설정한 '예정조화'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육체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는 '정념론'을 통해서 각종 감정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것도 규칙에 합한 경우에만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왈로의 주장에 따르면, 글쓰기의 규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요구한 시학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리고 내용이 점잖아야 하고, 그리고 진리에 충실해야 예술답다는 것이다. 기괴한 것, 창조적인 것, 추한 것, 잔인 한 것, 충격적인 것, 에로틱 한 것은 예술로서 가치가 없이 정신을 혼란케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이나 자연도 모두 수학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저 혼자만의 주관적인 사고방식, 저만의 개인적인 행동 방식을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저항에 부딪친다. 뭔가 알 수 없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성의 빛으로 밝힐 수 없는 뭔가 어두운 것을 표현하면서 고전시대의 예술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것은 상상력의 부활이다. 즐거운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 예술이란 인간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자연은 외화(外化)된 정신이다. 즉 로고스(세계 설계자)가 자기 밖으로 나와 자기가 아닌 타자가 된 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로고스는 왜 자신을 타자로 만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자신을 인식하게 위해서란다. 하지만 자연물 중에서 무기물은 자연의 이념에 부적합하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하다. 외화를 거쳐 다시 자기 내면으로 돌아옴이 없이 단지 내면에만 머무는 것은 진정한 현실적 존재라 볼 수 없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외화했다가 다시 안으로 귀환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자의 이념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자연물이기에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인간이 보기에 자연미도 본질적인 결함이 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미로 눈을 돌린다. 이 이상미(理想美)는 자연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곧 인간화된 자연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한 사고방식이 이런 인간 중심의 인식이 아닌가? 따라서 이런 예술관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예술이라고 보고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 즉 ‘신천사(新天使)’는 파울 클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의 이름이다. 이 시대의 환경 훼손과 인간성 파괴로 인해 슬픔과 고통을 품고 있으면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세상을 살피고 있는 천사이다. 이 천사의 존재에 저자는 희망을 건다. 이런 천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예술관이야말로 현 세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평 가
인간의 순수한 숭고함조차 죄악인 것으로 간주하고 계신 분 앞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추구가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누가복음 23:27-29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죄를 처벌하는 날이 얼마나 혹독했으며 차라리 출생된 자식이 없는 부모가 행복하다고 말씀했겠는가. 미에 대한 감수성을 극도로 발췌해 낸다할지라도 그것마저 또 다시 마주치는 '통곡의 벽'일 뿐이다. 괜히 세상이나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 차라리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라.
첨부파일 : 앙겔루스노부스.hwp (48.0K), Down:6
관리자(IP:124.♡.84.82)
09-03-04 23:10
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진중권
출판사 : 아웃사이더 (서울 : 2003)
아름다움 안에서 종교와 예술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될 수 있을까? 신앙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럴 경우에 종교라는 것도 결국 인간에게서 궁극적인 보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철학을 최고 진리로 쳐주었던 시절에도 예술은 결코 철학에게 기죽지 않았다. 모닥불에서 한줄기 피어오르던 연기도 어느 높이에 이르면 온통 사방으로 퍼져 흩어지듯이, 철학이나 과학이니 종교니 하는 이성적 탐구들도 얼마 안 가서 그 진리성마저 아름다운 경지 속으로 분산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결과인가? 예술에 대한 무시와 핍박이 인류 초기부터 계속되었지만 그 때마다 예술은 이성적 진리보다도 더 위대한 진리로서 진가를 드러내었다. 본 책은, 소크라테스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경향의 내력을 소개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진리를 신화를 통해서 말했다. 그 중에 에로스도 있다. 에로스라는 여신은, 부와 가난 사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간자이다. 늘 결핍 속에 살아가지만 미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유한적으로 존재하면서 불멸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는 어떤 식으로 불멸을 얻는가? 그것은 미(美)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태와 생식이다. 중간자인 에로스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이 에로스의 모습은 곧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통해 불멸에 오르려는 그리스인들의 욕망의 의인화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살이나 색처럼 썩어 없어질 것들과 뒤섞인 세속의 아름다움들, 그리고 그런 무가치한 물질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 색깔도 살 냄새도 없는 단 하나의 신적인 아름다움, 즉 미의 이데아이다. 이것에 비하면 앞의 것들은 그저 아름다움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진리란 바로 이런 목적에 동원된다. '질서와 미'의 원리로 자신을 지배하여 쾌락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능력과 수완이다.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를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 수완, 기술을 체득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이것이 '존재 미학'이다.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을 시도하는 미학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은 생활 그 자체로서 예술 행위를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마법의 시대에서의 예술은 없는 것을 가상으로 만든 창작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현실에 대한 모방이었다. 실물을 닮으려는 욕망은 도리어 인간의 상상력이 합리적 사유에 억눌리는 시대, 그리하여 '가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시대의 산물이다. 가장자리 현실에서 분리될수록 둘을 다시 연결하고픈 인간의 욕망도 그만큼 강해지고, 그럴수록 화가들은 더욱더 눈속임에 집착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대해서 침대를 비유를 들면서 비평하고 있다. 침대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완전한 현실성 속에 존재하는 침대. 아마 이것은 신이 창조한 침대이다. 두 번째는, 목수들이 만든 침대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가가 완벽하게 재현해낸 침대이다. 신이 창조한 침대란 이데아 계에 있는 이성적 설계도에 의한 단 하나의 침대이다. 신께서 침대의 이데아(개념)를 만들면, 목수는 이 설계도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크기의 침대 '들'을 만들고, 화가는 다시 이 침대들을 베낀 무상을 만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목수는 세계 제작자를 모방하고, 화가는 이 모방자를 모방한다. 따라서 예술이란 이중모방이다.
이렇게 원상을 두 번 복사한 것이므로 예술은 그림자의 그림자,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진 허위라는 것이다. 이 곤란함에서 예술을 예술답게 구원방법이 없을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술품 속의 미인은 현실의 미인보다 더 아름답다. 이는 현실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에 현실보다 미의 이데아에 더 가깝다는 플라톤의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인데, 예술은 허구이나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말한다고 한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방해내는 예술은 이미 일어난 개개의 사건을 기록한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그림 예술보다 이 점에 있어 더 분명하다. 플라톤은 시의 창조는 합리적인 머리론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뜨거운 영감과 열광은 차갑고 냉정한 '이성'과 양립될 수 없는 법이다. 열광에 사로잡히면 시인은 차분한 이성을 읽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신적인 힘은 경계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 힘을 합리적 지식의 체계인 기술과 대비시킨다. 아름다운 시들은 인간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작품도 아니며 신적이자 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란 신들의 통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학사에서 수천 년 간 '모방론'과 대립해 온 '영감론'의 가장 오래된 표현을 본다. 합리적 이성을 초월한 이 힘은 위험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검열'과 '추방론'으로 맞서서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너무나 여유 있게 처리한다. '카타르시스', 즉 격렬한 감정을 배설할 때 심지어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가끔 그렇게 하는 게 영혼의 건강에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인간을 미치게 하는 병원균이 아니라 면역을 키우는 유익한 백신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적'인 영감 다루기는 데카르트 시대에 와서 더욱 틀이 잡힌다. 근대에 와서 해부학이 발달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진리의 근원은 주체자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정신이 기계나 물질보다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시각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이른바, '기회원인론'이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를 매개하는 건, '인과관계'가 아니라 신이 설정한 '예정조화'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육체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는 '정념론'을 통해서 각종 감정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것도 규칙에 합한 경우에만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왈로의 주장에 따르면, 글쓰기의 규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요구한 시학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리고 내용이 점잖아야 하고, 그리고 진리에 충실해야 예술답다는 것이다. 기괴한 것, 창조적인 것, 추한 것, 잔인 한 것, 충격적인 것, 에로틱 한 것은 예술로서 가치가 없이 정신을 혼란케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이나 자연도 모두 수학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저 혼자만의 주관적인 사고방식, 저만의 개인적인 행동 방식을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저항에 부딪친다. 뭔가 알 수 없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성의 빛으로 밝힐 수 없는 뭔가 어두운 것을 표현하면서 고전시대의 예술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것은 상상력의 부활이다. 즐거운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 예술이란 인간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자연은 외화(外化)된 정신이다. 즉 로고스(세계 설계자)가 자기 밖으로 나와 자기가 아닌 타자가 된 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다. 로고스는 왜 자신을 타자로 만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자신을 인식하게 위해서란다. 하지만 자연물 중에서 무기물은 자연의 이념에 부적합하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하다. 외화를 거쳐 다시 자기 내면으로 돌아옴이 없이 단지 내면에만 머무는 것은 진정한 현실적 존재라 볼 수 없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외화했다가 다시 안으로 귀환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자의 이념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자연물이기에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인간이 보기에 자연미도 본질적인 결함이 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미로 눈을 돌린다. 이 이상미(理想美)는 자연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곧 인간화된 자연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한 사고방식이 이런 인간 중심의 인식이 아닌가? 따라서 이런 예술관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예술이라고 보고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 즉 ‘신천사(新天使)’는 파울 클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의 이름이다. 이 시대의 환경 훼손과 인간성 파괴로 인해 슬픔과 고통을 품고 있으면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세상을 살피고 있는 천사이다. 이 천사의 존재에 저자는 희망을 건다. 이런 천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예술관이야말로 현 세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평 가
인간의 순수한 숭고함조차 죄악인 것으로 간주하고 계신 분 앞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추구가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누가복음 23:27-29에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죄를 처벌하는 날이 얼마나 혹독했으며 차라리 출생된 자식이 없는 부모가 행복하다고 말씀했겠는가. 미에 대한 감수성을 극도로 발췌해 낸다할지라도 그것마저 또 다시 마주치는 '통곡의 벽'일 뿐이다. 괜히 세상이나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 차라리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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