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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성경신학[철학]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강영안
출판사 : 소나무 (서울 : 2000)

왜 사람은 착하고 싶어 하는가? 착하고 싶은 본성은 메시아(예수님)가 하신 일까지 변질시켜 버렸다. 인간의 착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사이비 기독교가 복음까지 교회에서 쫓아내고 있다. 남는 것은 인간의 위대한 착함의 가능성뿐이다. 과연 이러한 사이비한 기독교는 어떤 철학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들은, ‘존재와 선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는 신념에 동의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서술할 수 있으면 그것은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은 존재에 대해 새로운 내용이나 성질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존재와 선의 상호 교환성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 속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속한 속성이고 '존재 자체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선은 누구나 ‘바랄 수 있는 것’, 누구나 목적 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바랄 수 있는 것’, 즉 누구나 ‘욕구함직 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확인한다. 하나의 사물이 그것이 완전할 경우에만 바랄(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완전성을 바라기(욕구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아무것도 더 보탤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충족적인 것이다. 세 번째로, ‘완전함’의 관념을 ‘현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의 현실태에 도달하기 전에는 완전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현실적인 한 완전하다. 네 번째로 이 ‘현실성’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현실성은 곧 존재이고, 존재는 현실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네 단계의 논의를 거쳐 ‘존재’와 ‘선’을 같은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볼 때, 선하지 않는 것은 ‘존재’라는 술어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존재의 결여이고 가능성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존재의 결여, 또는 선의 결여가 다름 아닌 악이다. 악은 단순한 선의 부정이 아니라 사물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선의 결핍 혹은 결함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하다”라고 했다. 즉 모든 존재자는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기에 선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 근대적 철학자들은 반대한다. ‘존재의 질서’와 ‘당위(當爲)의 질서’를 혼동한 ‘범주 오류’로 보고 있다. 철학자 칸트는 바로 이 ‘당위의 질서’에서 도덕을 새로 규정하려 한다.

도덕이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원천은 보편적 인간성은 순수이성에 있다고 본다. 그래야지만 스스로 거룩해지도록 부여되는 자율성의 토대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자신을 넘어서 그 의지의 어떤 대상의 속성에서 도덕 법칙을 찾는다면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은 언제나 타율이다. 마태복음 11:30의 말씀처럼 도덕이 ‘쉽게 가벼운 멍에’가 되려면 스스로 원하는 식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파생된 신적 이성이 인간 속에 순수이성을 생기게 했는데, 이로서 순수이성은, 자유와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도덕 법칙을 개인적인 사유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도덕법칙에 따라 마땅히 해야 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할 의미가 있다면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또한 그렇게 결론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해야 한다”는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은, “너는 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한 의식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도덕은 곧 요청이요 부름이다. 이 자율적인 도덕성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임이 확인된다. 인간에게만 이런 도덕적 의무가 부과된 까닭이 무엇일까? 도덕적 의무란, 인간이 절대적으로 거룩한 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 욕구와 경향에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에 부과된 것이다. 신과 짐승은 오직 이성적 존재 만이거나 또한 감각적 존재 만이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법칙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으면서 도 동시에 그것을 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법칙을 따라 행위 하려면 스스로 강제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것이 도덕적 의무로 된다. 이런 도덕적 행위는 동기는, 오직 하나, 도덕 법칙 그 자체에 대한 존경심이다.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이기에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질 행복을 위하여 착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감각적이고 동시에 악한 것이 된다. 인간이 마땅히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경험적 현상계의 원인과 결과의 고리에 전혀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상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인간에게 있는데 이러한 면을 칸트는 ‘예지적 성격’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적 성격’과 대비된다. 예지적 주체에는 시간의 선후(先後), 생성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지적 능력으로서의 순수이성은 시간 형식과 시간 연속의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다. 예지적 주체는 말하자면 무시간적 주체이다. 인간이 도덕적 기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시간 중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예지적 주체론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시간성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하이데거의 전기(前期) 철학이나, 인간 이해의 역사성과 언어성을 주장하는 가다머나 리꾀르의 해석학적 철학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주체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서는 초시간적, 초월적 존재는 인간 자유를 위한 가능 조건이다. 이로서 도덕 법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빚어낸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의 왕국’이다. 목적의 왕국은 감성계에 초감성계의 형식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목적의 왕국은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적 결속체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가 이성에 따라 실천 법칙을 스스로 수립할 때 형성되는 공동체이다. 목적의 왕국에서의 인간의 인격은 모든 교환 가치를 초월한 존엄성을 가진다. 인간 말고 다른 사물들은 목적도 의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 가치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물론 인간들은 나름대로 주관적 목적으로 따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복 추구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한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결코 주관적 목적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에 해당된다. 목적의 왕국은 행복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덕(德)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덕은 바로 이 도덕적 갈등 상황과 관련이 있다. 칸트가 이해한 덕은 감성의 저항에 대항하여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힘 또는 용기를 말한다.

그래서 그는 덕을 ‘투쟁 중의 있는 도덕적 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덕(도덕적 용기, 도덕적 강인성)은 개인의 도덕적 삶의 진보에 따라 자랄 수 있다고 칸트는 보고 있다. 덕의 자람에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 즉 ‘마음의 변화’ 또는 예수께서 촉구한 바와 같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처럼 단번에, 갑자기 일어나는 혁명, 즉 사람의 예지적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혁명이다. 예지적 성격의 변화는 시간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심성에서 발생한 변화이기 때문에 현상 중에서 변화가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준칙과 행위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덕적 습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돈오 뒤에 점수(漸修)가 뒤따르듯이 마음의 변화, 즉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은 다음 점진적으로 삶의 개선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실제로 단번에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덕의 수행은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함께 시작되나 그것은 거룩함에 도달할 때까지 끝없이 계속되어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평 가

칸트의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의 비복음적인 구원론의 원조처럼 들려온다. 칸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어둡고, 그 언약의 위력에 어둡다. 단지 현상을 살펴서, 신의 흔적으로 인간에서 찾아내어서 그것을 믿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서 인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거절당한다. 성령님의 선물에 의해 믿어진 참된 믿음은, 믿는다는 행위뿐만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할지, 그리고 그분의 어떤 공로를 남기셨는가 하는 점까지 함께 믿도록 해 주셨다.

첨부파일 : 도덕은무엇으로부터오는가.hwp (32.0K), Down:28

관리자(IP:124.♡.84.82)

09-03-04 22:06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강영안
출판사 : 소나무 (서울 : 2000)

왜 사람은 착하고 싶어 하는가? 착하고 싶은 본성은 메시아(예수님)가 하신 일까지 변질시켜 버렸다. 인간의 착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사이비 기독교가 복음까지 교회에서 쫓아내고 있다. 남는 것은 인간의 위대한 착함의 가능성뿐이다. 과연 이러한 사이비한 기독교는 어떤 철학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들은, ‘존재와 선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는 신념에 동의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서술할 수 있으면 그것은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은 존재에 대해 새로운 내용이나 성질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존재와 선의 상호 교환성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 속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속한 속성이고 '존재 자체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선은 누구나 ‘바랄 수 있는 것’, 누구나 목적 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바랄 수 있는 것’, 즉 누구나 ‘욕구함직 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확인한다. 하나의 사물이 그것이 완전할 경우에만 바랄(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완전성을 바라기(욕구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아무것도 더 보탤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충족적인 것이다. 세 번째로, ‘완전함’의 관념을 ‘현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의 현실태에 도달하기 전에는 완전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현실적인 한 완전하다. 네 번째로 이 ‘현실성’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현실성은 곧 존재이고, 존재는 현실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같은 네 단계의 논의를 거쳐 ‘존재’와 ‘선’을 같은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볼 때, 선하지 않는 것은 ‘존재’라는 술어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존재의 결여이고 가능성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존재의 결여, 또는 선의 결여가 다름 아닌 악이다. 악은 단순한 선의 부정이 아니라 사물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선의 결핍 혹은 결함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하다”라고 했다. 즉 모든 존재자는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기에 선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 근대적 철학자들은 반대한다. ‘존재의 질서’와 ‘당위(當爲)의 질서’를 혼동한 ‘범주 오류’로 보고 있다. 철학자 칸트는 바로 이 ‘당위의 질서’에서 도덕을 새로 규정하려 한다.

도덕이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원천은 보편적 인간성은 순수이성에 있다고 본다. 그래야지만 스스로 거룩해지도록 부여되는 자율성의 토대가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자신을 넘어서 그 의지의 어떤 대상의 속성에서 도덕 법칙을 찾는다면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은 언제나 타율이다. 마태복음 11:30의 말씀처럼 도덕이 ‘쉽게 가벼운 멍에’가 되려면 스스로 원하는 식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파생된 신적 이성이 인간 속에 순수이성을 생기게 했는데, 이로서 순수이성은, 자유와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이라는 속성을 통해서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도덕 법칙을 개인적인 사유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도덕법칙에 따라 마땅히 해야 될 의무만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할 의미가 있다면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또한 그렇게 결론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해야 한다”는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은, “너는 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한 의식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도덕은 곧 요청이요 부름이다. 이 자율적인 도덕성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임이 확인된다. 인간에게만 이런 도덕적 의무가 부과된 까닭이 무엇일까? 도덕적 의무란, 인간이 절대적으로 거룩한 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 욕구와 경향에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에 부과된 것이다. 신과 짐승은 오직 이성적 존재 만이거나 또한 감각적 존재 만이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법칙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으면서 도 동시에 그것을 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법칙을 따라 행위 하려면 스스로 강제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것이 도덕적 의무로 된다. 이런 도덕적 행위는 동기는, 오직 하나, 도덕 법칙 그 자체에 대한 존경심이다.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이기에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질 행복을 위하여 착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감각적이고 동시에 악한 것이 된다. 인간이 마땅히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경험적 현상계의 원인과 결과의 고리에 전혀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상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인간에게 있는데 이러한 면을 칸트는 ‘예지적 성격’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적 성격’과 대비된다. 예지적 주체에는 시간의 선후(先後), 생성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지적 능력으로서의 순수이성은 시간 형식과 시간 연속의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다. 예지적 주체는 말하자면 무시간적 주체이다. 인간이 도덕적 기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시간 중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예지적 주체론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시간성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하이데거의 전기(前期) 철학이나, 인간 이해의 역사성과 언어성을 주장하는 가다머나 리꾀르의 해석학적 철학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주체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서는 초시간적, 초월적 존재는 인간 자유를 위한 가능 조건이다. 이로서 도덕 법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빚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빚어낸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의 왕국’이다. 목적의 왕국은 감성계에 초감성계의 형식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목적의 왕국은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적 결속체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가 이성에 따라 실천 법칙을 스스로 수립할 때 형성되는 공동체이다. 목적의 왕국에서의 인간의 인격은 모든 교환 가치를 초월한 존엄성을 가진다. 인간 말고 다른 사물들은 목적도 의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목적을 위한 수단적 가치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다. 물론 인간들은 나름대로 주관적 목적으로 따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복 추구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한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결코 주관적 목적이 아니라 객관적 목적에 해당된다. 목적의 왕국은 행복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덕(德)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덕은 바로 이 도덕적 갈등 상황과 관련이 있다. 칸트가 이해한 덕은 감성의 저항에 대항하여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힘 또는 용기를 말한다.

그래서 그는 덕을 ‘투쟁 중의 있는 도덕적 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덕(도덕적 용기, 도덕적 강인성)은 개인의 도덕적 삶의 진보에 따라 자랄 수 있다고 칸트는 보고 있다. 덕의 자람에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 즉 ‘마음의 변화’ 또는 예수께서 촉구한 바와 같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천천히,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처럼 단번에, 갑자기 일어나는 혁명, 즉 사람의 예지적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혁명이다. 예지적 성격의 변화는 시간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심성에서 발생한 변화이기 때문에 현상 중에서 변화가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준칙과 행위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덕적 습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돈오 뒤에 점수(漸修)가 뒤따르듯이 마음의 변화, 즉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은 다음 점진적으로 삶의 개선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실제로 단번에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덕의 수행은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함께 시작되나 그것은 거룩함에 도달할 때까지 끝없이 계속되어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평 가

칸트의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의 비복음적인 구원론의 원조처럼 들려온다. 칸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어둡고, 그 언약의 위력에 어둡다. 단지 현상을 살펴서, 신의 흔적으로 인간에서 찾아내어서 그것을 믿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서 인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거절당한다. 성령님의 선물에 의해 믿어진 참된 믿음은, 믿는다는 행위뿐만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할지, 그리고 그분의 어떤 공로를 남기셨는가 하는 점까지 함께 믿도록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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