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知覺)의 현상학
지각(知覺)의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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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知覺)의 현상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모리스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번 역 : 류의근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2)
성경을 해석하면서 평소의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해석하는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다른 사건이나 다른 사물 해석에 있어 오류를 드러나게 경향이 크면 클수록 이점은 곧 그 사람의 평소의 행하는 성경 해석에서도 심각한 오류가 담길 개연성이 높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늘 반성하면서 진리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려는 사유가 철학에서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특히 요즈음 시대같이 모든 것이 과학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진리를 과학적 성과에다 모두 일임할 수 있는 것인지 근원적으로 반성해 봐야 한다. 그 반성은 의식의 반성, 지각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든 인식과 경험이 주체자의 의식(意識)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솔직하게 의식하는 것과 다른 주장을 늘어놓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자기 신체가 하는 기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신체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추궁해 들어가게 되면 소위 경험에만 매달려서 세상을 보는 과학의 허점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항상 따로 설정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主知主義的인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신체를 도외시하고 진리를 찾을 수는 없다. 이 점을 저자는 간파한 것이다. 우선 경험주의의 토대가 되는 감각에 대해서 반성해 들어간다. 순수한 감각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네의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의미의 총체 형성에 기여하도록 수정 적용될 뿐이다.
예를 들면, 상자가 무겁다고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있어 기여하기 위한 감각이다. 감각보다 판단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감각에 전제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생리학적 감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상급 법원에 호소하듯 생리학에 호소할 때 생리학은 심리학과 동일한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기껏 존재론적 가치를 포기하고 방법론적 가치만을 선전한다. 신체는 사물이 아니다. 마치 자연이 기하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은 우리 신체에 의해서 현상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지 결코 기계적 법칙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와 접촉된 경험은 즉시 응고된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세상을 향해 對自的(대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의 전망을 넓히는 것이다. 심리학자가 벌리는 실험의 허점은, 실험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접촉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자의 행동에 맹목적이게 복속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신체의 고유의 기능을 포기하는 듯한 위장에 불과하다. 이것인 신체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이다. 이 변형으로 인해 인간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함축해낸다. 객관적 사고는 지각의 주체를 무시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과적 관계, 즉 과학적 법칙마저 반성할 수 있는 신체의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격이 된다. 바깥 경험을 인식하고 분석하기 위해 신체 고유의 존재성을 멈추는 것은, "내가 나의 눈으로 본다거나 나의 귀로 듣는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그저 보여짐과 들려짐을 수집, 저장해 놓은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감각과 더불어 탄생해야 할 성질이다. 따라서 감각을 대상의 세계로 내쫓으면 아니 된다. 이런 모습은 주체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 탈선이다. 인간의 지각이란 신체의 내적 가능성과 만나지 아나하면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남녀 간의 정사 장면이 아동에게 가능하게 되는 성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장면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체의 지각성은 사물뿐만 아니라 타자(타인)에 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어가 담당한다. 신체를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한다. 나의 주체성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주체성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 신체 대 신체로서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주지주의의 문제점은 감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은 없고 의식만 있다. 의식이 구성하거나 구축하는 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인간에게는 아예 내적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 주지주의가 얻고자 한 것은 실재적 통일성이 아니라 추상적인 통일성이다. 데카르트는, 관념과 사물이 탄생하는 원초적 층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것은 곧 신(神)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라는 신체를 세계 속으로 던졌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신체를 탐구하는 것이 실재적 통일성을 갖추는 방식이다. 신체가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은 공간과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이다. 공간에는 운동이 흐르고 있다. 여기서 신체는 정박치(碇泊地)를 고수하게 된다. 고정된 지점을 통해서 운동과 정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미래에 대해 미리 반응하는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느낀다는 말이다. 객관적 대상으로서 세계는 너무 꽉 차 있어서 시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 시간이 성립하려면 항상 결여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물에는 시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의식에서 시간은 없다. 시간이란 신체가 세상과의 갖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늘 변한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한 의미에 있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객관적 사고가 시간 이해에 실패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간화해서 시간을 세계 진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시간이란, 늘 솟아올라오는 세상의 과거 그림자에 대해 반응하는 신체의 기능이다. 신체를 시간을 통해서 세상과 교류하는데 이것이 신체의 역사성이다. 하이덱거는 주장하기를, 현존재는 미래를 미리 가지고 존재의 흩어짐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스스로 탈자성(脫自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시간 안에서 그 탈자성을 모아 시간을 영속성으로 이해한다. 이로서 우리의 신체는 시간의 용출이다. 인간이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 알려진 시간은 신체를 통해서만 파악되는데 그것은 지난 존재가 현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현재 신체의 시간화 운동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이것은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해명한 것이 된다. 이로서 인간의 본질은 신체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존재를 사고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수동성과 능동성은 그대로 세계 안에서도 통용된다.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세계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세계와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의식은 언제나 이미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세계는 과학이 보는 자연 세계가 아니라 신체에게 빛을 비추는 자연 그 그대로의 세상이다. 과학은 신체의 해체를 용납한다. 그러나 신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존재한다. 세계로 열려 있는 것이다. 객관적 사고로 인해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신체는 더 이상 신체라고 말 할 수 없다. 세계를 바라 볼 때, 사물의 총합으로서만 본다면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만을 가지며, 거부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 진리만을 가진다. 초월성이 막혀 있다면 이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란 세계와의 공존이 불가능하다. 이렇듯 인간을 경험의 조각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경험 과학은 죽음을 지향하는 사고 양식이다.
평 가
진리는, 세계와 신체의 만남의 현상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의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신체의 자율성 자체가 곧 진리의 원천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無)를 거부해야 한다는 적극적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인간이란 인간 쪽으로 봐서 무(無)로 보이는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무에서 유가 되는데는 나름대로 원리와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점을 상실했기에 근본적으로 몸의 기능과 가치를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나사렛 예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 따라서 예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몸(신체)을 정립하는 것이 곧 올바른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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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3-04 02:02
지각(知覺)의 현상학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모리스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번 역 : 류의근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2)
성경을 해석하면서 평소의 다른 사물이나 사건을 해석하는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다른 사건이나 다른 사물 해석에 있어 오류를 드러나게 경향이 크면 클수록 이점은 곧 그 사람의 평소의 행하는 성경 해석에서도 심각한 오류가 담길 개연성이 높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늘 반성하면서 진리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려는 사유가 철학에서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특히 요즈음 시대같이 모든 것이 과학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진리를 과학적 성과에다 모두 일임할 수 있는 것인지 근원적으로 반성해 봐야 한다. 그 반성은 의식의 반성, 지각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든 인식과 경험이 주체자의 의식(意識)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솔직하게 의식하는 것과 다른 주장을 늘어놓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자기 신체가 하는 기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신체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추궁해 들어가게 되면 소위 경험에만 매달려서 세상을 보는 과학의 허점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항상 따로 설정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主知主義的인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신체를 도외시하고 진리를 찾을 수는 없다. 이 점을 저자는 간파한 것이다. 우선 경험주의의 토대가 되는 감각에 대해서 반성해 들어간다. 순수한 감각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네의 신체는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의미의 총체 형성에 기여하도록 수정 적용될 뿐이다.
예를 들면, 상자가 무겁다고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있어 기여하기 위한 감각이다. 감각보다 판단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감각에 전제를 제공할 수 있는 어떠한 생리학적 감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상급 법원에 호소하듯 생리학에 호소할 때 생리학은 심리학과 동일한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기껏 존재론적 가치를 포기하고 방법론적 가치만을 선전한다. 신체는 사물이 아니다. 마치 자연이 기하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은 우리 신체에 의해서 현상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지 결코 기계적 법칙으로 이해되고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와 접촉된 경험은 즉시 응고된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세상을 향해 對自的(대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기 존재의 전망을 넓히는 것이다. 심리학자가 벌리는 실험의 허점은, 실험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접촉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자의 행동에 맹목적이게 복속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신체의 고유의 기능을 포기하는 듯한 위장에 불과하다. 이것인 신체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형이다. 이 변형으로 인해 인간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함축해낸다. 객관적 사고는 지각의 주체를 무시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과적 관계, 즉 과학적 법칙마저 반성할 수 있는 신체의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격이 된다. 바깥 경험을 인식하고 분석하기 위해 신체 고유의 존재성을 멈추는 것은, "내가 나의 눈으로 본다거나 나의 귀로 듣는다"는 말은 불합리하다. 그저 보여짐과 들려짐을 수집, 저장해 놓은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감각과 더불어 탄생해야 할 성질이다. 따라서 감각을 대상의 세계로 내쫓으면 아니 된다. 이런 모습은 주체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 탈선이다. 인간의 지각이란 신체의 내적 가능성과 만나지 아나하면 성립되지 아니한다. 마치 남녀 간의 정사 장면이 아동에게 가능하게 되는 성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장면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체의 지각성은 사물뿐만 아니라 타자(타인)에 관한 이해에도 적용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어가 담당한다. 신체를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한다. 나의 주체성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주체성과 분리될 수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 신체 대 신체로서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주지주의의 문제점은 감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은 없고 의식만 있다. 의식이 구성하거나 구축하는 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인간에게는 아예 내적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 주지주의가 얻고자 한 것은 실재적 통일성이 아니라 추상적인 통일성이다. 데카르트는, 관념과 사물이 탄생하는 원초적 층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것은 곧 신(神)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라는 신체를 세계 속으로 던졌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신체를 탐구하는 것이 실재적 통일성을 갖추는 방식이다. 신체가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은 공간과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는 말이다. 공간에는 운동이 흐르고 있다. 여기서 신체는 정박치(碇泊地)를 고수하게 된다. 고정된 지점을 통해서 운동과 정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미래에 대해 미리 반응하는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느낀다는 말이다. 객관적 대상으로서 세계는 너무 꽉 차 있어서 시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 시간이 성립하려면 항상 결여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물에는 시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의식에서 시간은 없다. 시간이란 신체가 세상과의 갖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늘 변한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한 의미에 있지 않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객관적 사고가 시간 이해에 실패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간화해서 시간을 세계 진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시간이란, 늘 솟아올라오는 세상의 과거 그림자에 대해 반응하는 신체의 기능이다. 신체를 시간을 통해서 세상과 교류하는데 이것이 신체의 역사성이다. 하이덱거는 주장하기를, 현존재는 미래를 미리 가지고 존재의 흩어짐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스스로 탈자성(脫自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시간 안에서 그 탈자성을 모아 시간을 영속성으로 이해한다. 이로서 우리의 신체는 시간의 용출이다. 인간이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 알려진 시간은 신체를 통해서만 파악되는데 그것은 지난 존재가 현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현재 신체의 시간화 운동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이것은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해명한 것이 된다. 이로서 인간의 본질은 신체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존재를 사고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수동성과 능동성은 그대로 세계 안에서도 통용된다.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세계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세계와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의식은 언제나 이미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세계는 과학이 보는 자연 세계가 아니라 신체에게 빛을 비추는 자연 그 그대로의 세상이다. 과학은 신체의 해체를 용납한다. 그러나 신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존재한다. 세계로 열려 있는 것이다. 객관적 사고로 인해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는 신체는 더 이상 신체라고 말 할 수 없다. 세계를 바라 볼 때, 사물의 총합으로서만 본다면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만을 가지며, 거부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 진리만을 가진다. 초월성이 막혀 있다면 이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란 세계와의 공존이 불가능하다. 이렇듯 인간을 경험의 조각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경험 과학은 죽음을 지향하는 사고 양식이다.
평 가
진리는, 세계와 신체의 만남의 현상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의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신체의 자율성 자체가 곧 진리의 원천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無)를 거부해야 한다는 적극적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인간이란 인간 쪽으로 봐서 무(無)로 보이는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무에서 유가 되는데는 나름대로 원리와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점을 상실했기에 근본적으로 몸의 기능과 가치를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나사렛 예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 따라서 예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몸(신체)을 정립하는 것이 곧 올바른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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