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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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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 호 목사

저 자 :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
번 역 : 홍승용
출판사 : 한길사

사도 바울은 '행함'을 내세우는 인간들을 그냥 용납하지 않았다.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믿음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다.(롬 1:17 참조)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곧 저주받은 자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믿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아야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자라면 필연적으로 무엇을 내세우게 될까? 그것은 '행함'이다. 자신이 행동했다는 그 '행함'이다. 이들이 믿는 것도 이 행함 뿐이다. 이 행함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믿음이라는 것도 행함으로 풀어내어 놓기도 하고 복음도 인간의 행함으로 설명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까지 모두 인간의 행함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 속에는 뭔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뭘까? 본 책은 인간의 행함 속을 샅샅이 살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왠지 현상태로부터의 구제(구원)되기를 원하는 욕구에 쉴 새 없이 시달리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현상태로부터의 자아를 구원시키는데 모두 동원된다. 구원의 목표점은 타인과의 결합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보편적 동질성으로 확인될 수 있는데 그 동질성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매개가 필요하다. 존재와 존재를 매개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낯선 제 3의 매개체를 끌고 와야 한다.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正→反→合 이라는 변증법을 가지고 그 최종 단계인 합을 매개체로 삼았다. 절대정신, 곧 스스로 소외되므로서 도리어 화해자로 나설 수 있는 절대 이성이 곧 인간을 하나의 동질성으로 묶어주는 영원한 구원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대해 반박한다. 합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단지 否定의 否定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모순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것은 동일자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비동일자로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절대정신 안에서의 화해가 인간이라는 주체자에게는 화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다수의 적수만 유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잘못은 이러한 절대정신의 갭을 그대로 인간 역사에 적용하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역사 안에서 개인은 여전히 다수의 적수만을 양산하게 된다. 후설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지닌 인식론의 한계를 고려해서 사물 자체에 대해 간접적 의도보다 직접적 의도를 가지고 지향하려 한다. 그렇게해서 나타나는 것은 우발적이고 비개념적인 것들이다. 후설을 이것을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하이데거는 이 형상을 가지고 실존 범주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이 실존 개념을 가지고 사유와 사유 된 것 사이의 괴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우선 감각적 질료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만 남는데 이 사유조차 다시 사유로 환원되는 것이 방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과 존재자는 계속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이는 존재론에 있어 가장 바라지 않는 바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사유는 어떤 현상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이로서 하이데거는 관념론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존재론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후설이 말하는 본질 직관이란 사물과 그 개념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양자의 단절이다. 그래서 사물들을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의식에 불과하지만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고 존재를 개념 범주에서 이탈시켜 모든 정신적인 계기들을 매개하는 사유로 삼았다. 그런데 이 존재는 모든 사유 규정으로부터 스스로 차단되어 있기에 이로서 존재는 개념 없는 사유가 되고 말았고 따라서 존재에 대해서 사유하라는 호소조차도 공허해져 버렸다. 고대 철학에 있어 존재론 논의는 이단으로 취급해서 금지시켰는데 이는 사물과 분리된 존재론 그 자체에는 그 어떤 매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존재로서만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매개되지 않는 상태를 부활시킨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사유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존재의 형이상학적 위엄을 추가로 이끌어낸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 어떠한 존재도 존재자 없이는 사유될 수 없으며, 어떠한 존재자도 매개 없이는 사유될 수 없고 또한 존재자도 역시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숨긴 채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단일한 것을 등장시켜 그 단일한 것을 긍정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는 논리이다. 이로서 존재는 긍정되었다. 하이데거는 인간 역사의 궁핍 상태와 불안과 고통을 현존재로부터 이끌어내면서 그래도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 기조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실존은 그 보다 앞선 긍정적인 존재로 인하여 긍정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전혀 내용이 결여된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의 기능인일 뿐이며 부자유롭다.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겪어온 손상들을 현대의 인간들은 사회적 유산으로 끌고 다닌다. 흔히 자유라고 부르짖는 것도 사실은 공간적․시간적 현존재의 우연성에 내맡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그의 책 [실천이성비판]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자유를 위하여 명령법과 인간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할 개념들의 전체, 즉 율법․강요․존경․의무 등의 개념은 억압적이다"고 했다. 자유에 근거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자유를 도리어 복종으로 변조시킨다. 칸트는 이처럼 강압 없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 도덕성은 단기적으로 물질적 가치윤리에 종속되어 있어 충분치 못하다. 어느 한 쪽의 호소에 귀 기울이면 상대편에 불의가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탈대상화 하여 무정부주의나 정치적 무관심으로 게 되면 이것은 비합리적인 태도로 비난 받을 것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도 이미 정신이 행동의 대용품으로 복무한다. 이때의 행동이란 순수한 정신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는 자유에 대한 사보타주다.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자유에는 타율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말썽이 생긴다. 문제는 자유와 우연의 절대적 구분이다. 이 구분은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도 이성과 합리의 주체자로 나서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개별적인 변명거리로서만 성립된다. 즉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보편성이 없다는 말은 '진리'로서 타인에게 내세울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상실되었다는 말이다. 비사회적일 때 인간은 고립을 느낀다. 고립은 곧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받아드린다. 그래서 주위 사람과 화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이다. 헤겔이 보기에 개인이 자랑하는 자유는 모순되는 것으로서 진정한 자유에 대한 조소이다. 즉 각 개인의 사회적인 운명이 기껏 우발적임을 표현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우발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 자기 자랑의 침전물이 역사적으로 모아져서 성립된 것이 바로 현대 시민 사회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가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억압하는 바는 쭉 이어져 내려오는 지난 역사의 산물이다. 이렇게 되니 개인의 자유가 모여서 비자유로운 사회가 된 것이다. 이로서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결정론과 자유에 대한 의미는 일치한다. 보편과 개인이 계속 화해되지 않는 상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도덕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도덕이란 모순 속에 있다. 원인과 결과가 일치 되지 않는 상태로 나타난다. 개별적인 행위들이 벌리는 정의로움이 사회적으로 봐서 도덕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로서 개인적인 행위는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저자가 볼 때에 인류의 역사는 계속 속박 아래로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화적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숙명이다. 인간이기에 이 세계만큼은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보존하려고 자진해서 속박에 봉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한 행동인 것이다. 마치 동물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 가

성경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는 내용대로 동생을 죽인 살인자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자기를 구원해야 되었기에 그들은 행함의 구원의지를 발동시켰다. 도시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가정 내에 강압적인 질서로서 약자를 종속시켰다. 따라서 인간들의 부지런한 행동과 행위들은 비사회성이 주는 비동일성과 불안과 외로움을 자기에게서 걷어치우고 사회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의 산물이다. 남들로부터 같은 동일성으로 확고하고 인정받고 그 진리 안에서 존재의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왜 교계가 행함을 강조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결과로 자기 존재를 자기가 구원해야겠기에 '행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첨부파일 : 부정변증법.hwp (32.0K), Down:7

관리자(IP:124.♡.84.82)

09-02-2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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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 호 목사

저 자 :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
번 역 : 홍승용
출판사 : 한길사

사도 바울은 '행함'을 내세우는 인간들을 그냥 용납하지 않았다. 구원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믿음으로 마무리된다고 했다.(롬 1:17 참조)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곧 저주받은 자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믿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아야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자라면 필연적으로 무엇을 내세우게 될까? 그것은 '행함'이다. 자신이 행동했다는 그 '행함'이다. 이들이 믿는 것도 이 행함 뿐이다. 이 행함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믿음이라는 것도 행함으로 풀어내어 놓기도 하고 복음도 인간의 행함으로 설명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까지 모두 인간의 행함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 속에는 뭔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뭘까? 본 책은 인간의 행함 속을 샅샅이 살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왠지 현상태로부터의 구제(구원)되기를 원하는 욕구에 쉴 새 없이 시달리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현상태로부터의 자아를 구원시키는데 모두 동원된다. 구원의 목표점은 타인과의 결합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보편적 동질성으로 확인될 수 있는데 그 동질성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매개가 필요하다. 존재와 존재를 매개하기 위해서 어디선가 낯선 제 3의 매개체를 끌고 와야 한다. 헤겔이라는 철학자는, 正→反→合 이라는 변증법을 가지고 그 최종 단계인 합을 매개체로 삼았다. 절대정신, 곧 스스로 소외되므로서 도리어 화해자로 나설 수 있는 절대 이성이 곧 인간을 하나의 동질성으로 묶어주는 영원한 구원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대해 반박한다. 합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단지 否定의 否定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모순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것은 동일자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비동일자로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절대정신 안에서의 화해가 인간이라는 주체자에게는 화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다수의 적수만 유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잘못은 이러한 절대정신의 갭을 그대로 인간 역사에 적용하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역사 안에서 개인은 여전히 다수의 적수만을 양산하게 된다. 후설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지닌 인식론의 한계를 고려해서 사물 자체에 대해 간접적 의도보다 직접적 의도를 가지고 지향하려 한다. 그렇게해서 나타나는 것은 우발적이고 비개념적인 것들이다. 후설을 이것을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하이데거는 이 형상을 가지고 실존 범주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이 실존 개념을 가지고 사유와 사유 된 것 사이의 괴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우선 감각적 질료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만 남는데 이 사유조차 다시 사유로 환원되는 것이 방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과 존재자는 계속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이는 존재론에 있어 가장 바라지 않는 바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사유는 어떤 현상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데 이로서 하이데거는 관념론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존재론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후설이 말하는 본질 직관이란 사물과 그 개념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양자의 단절이다. 그래서 사물들을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의식에 불과하지만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고 존재를 개념 범주에서 이탈시켜 모든 정신적인 계기들을 매개하는 사유로 삼았다. 그런데 이 존재는 모든 사유 규정으로부터 스스로 차단되어 있기에 이로서 존재는 개념 없는 사유가 되고 말았고 따라서 존재에 대해서 사유하라는 호소조차도 공허해져 버렸다. 고대 철학에 있어 존재론 논의는 이단으로 취급해서 금지시켰는데 이는 사물과 분리된 존재론 그 자체에는 그 어떤 매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존재로서만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매개되지 않는 상태를 부활시킨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사유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존재의 형이상학적 위엄을 추가로 이끌어낸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 어떠한 존재도 존재자 없이는 사유될 수 없으며, 어떠한 존재자도 매개 없이는 사유될 수 없고 또한 존재자도 역시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숨긴 채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단일한 것을 등장시켜 그 단일한 것을 긍정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는 논리이다. 이로서 존재는 긍정되었다. 하이데거는 인간 역사의 궁핍 상태와 불안과 고통을 현존재로부터 이끌어내면서 그래도 인간을 긍정할 수 있는 기조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실존은 그 보다 앞선 긍정적인 존재로 인하여 긍정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전혀 내용이 결여된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의 기능인일 뿐이며 부자유롭다.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겪어온 손상들을 현대의 인간들은 사회적 유산으로 끌고 다닌다. 흔히 자유라고 부르짖는 것도 사실은 공간적․시간적 현존재의 우연성에 내맡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그의 책 [실천이성비판]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자유를 위하여 명령법과 인간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할 개념들의 전체, 즉 율법․강요․존경․의무 등의 개념은 억압적이다"고 했다. 자유에 근거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자유를 도리어 복종으로 변조시킨다. 칸트는 이처럼 강압 없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 도덕성은 단기적으로 물질적 가치윤리에 종속되어 있어 충분치 못하다. 어느 한 쪽의 호소에 귀 기울이면 상대편에 불의가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탈대상화 하여 무정부주의나 정치적 무관심으로 게 되면 이것은 비합리적인 태도로 비난 받을 것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도 이미 정신이 행동의 대용품으로 복무한다. 이때의 행동이란 순수한 정신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는 자유에 대한 사보타주다.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자유에는 타율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말썽이 생긴다. 문제는 자유와 우연의 절대적 구분이다. 이 구분은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도 이성과 합리의 주체자로 나서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개별적인 변명거리로서만 성립된다. 즉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보편성이 없다는 말은 '진리'로서 타인에게 내세울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상실되었다는 말이다. 비사회적일 때 인간은 고립을 느낀다. 고립은 곧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받아드린다. 그래서 주위 사람과 화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이다. 헤겔이 보기에 개인이 자랑하는 자유는 모순되는 것으로서 진정한 자유에 대한 조소이다. 즉 각 개인의 사회적인 운명이 기껏 우발적임을 표현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우발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 자기 자랑의 침전물이 역사적으로 모아져서 성립된 것이 바로 현대 시민 사회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가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억압하는 바는 쭉 이어져 내려오는 지난 역사의 산물이다. 이렇게 되니 개인의 자유가 모여서 비자유로운 사회가 된 것이다. 이로서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결정론과 자유에 대한 의미는 일치한다. 보편과 개인이 계속 화해되지 않는 상태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도덕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도덕이란 모순 속에 있다. 원인과 결과가 일치 되지 않는 상태로 나타난다. 개별적인 행위들이 벌리는 정의로움이 사회적으로 봐서 도덕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로서 개인적인 행위는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저자가 볼 때에 인류의 역사는 계속 속박 아래로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화적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숙명이다. 인간이기에 이 세계만큼은 어떻게든 자체적으로 보존하려고 자진해서 속박에 봉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한 행동인 것이다. 마치 동물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 가

성경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는 내용대로 동생을 죽인 살인자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자기를 구원해야 되었기에 그들은 행함의 구원의지를 발동시켰다. 도시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가정 내에 강압적인 질서로서 약자를 종속시켰다. 따라서 인간들의 부지런한 행동과 행위들은 비사회성이 주는 비동일성과 불안과 외로움을 자기에게서 걷어치우고 사회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의 산물이다. 남들로부터 같은 동일성으로 확고하고 인정받고 그 진리 안에서 존재의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왜 교계가 행함을 강조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결과로 자기 존재를 자기가 구원해야겠기에 '행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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