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략 론
전 략 론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전 략 론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바실 헨리 리델 하트
번 역 : 주은식
출판사 : 책세상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회사를 운영하든 교회를 목회하든 국가를 경영하든지 간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양식은 대부분 유사하다. 이윤의 극대화와 영토의 확장과 교인 확보를 위한 모략과 지혜의 창출은 같은 입장에서 펼쳐지기 일 수 있다. 즉 "남의 것을 뺏아오지 아니하면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대원칙 하에서 동일한 일률적 행동이 나온다. 지도자란 민중들을 대표해서 악역(惡役)을 맡겠다고 나선 자들이다. 대신 전쟁을 치러주고, 대신 이윤을 극대화 시켜주고, 대 교회 부흥시켜 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섬으로써 자기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신적인 존경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두 가지 종류의 전쟁이 나온다. 이방민족들이 벌리는 전쟁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벌리시는 전쟁이 있다. 이방민족은 나름대로의 전쟁관을 확보되어 있고 하나님도 또한 나름대로의 전쟁을 벌리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런데 진행하는 방식이 상호 다르다. 이방민족의 전쟁은, 조직의 힘을 축적하고 그 비축된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으로 진행되는 반면에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의 존재 여부를 놓고 처벌하고 멸망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하신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방민족 식의 목회 전쟁을 실시한다면 이는 곧 악마 사단에 편성되어 있는 종교 여단의 한 일부에 불과하다. 과연 그런지 본 책에서 나오는 원리와 현 교회의 목회 원리와 비교하면 금방 밝혀질 것이다.
전쟁에는 상대가 있다. 상대의 태도에 따라 전략이 달라진다. 전쟁의 기본 바탕은 거짓과 기만이다. 속임수에서 시작해서 속임수로 끝나야 한다. 가진 힘으로 막무가내 밀어붙이는 것은 비록 승리를 했다할지라도 전혀 이득이 없이 상처만 얻어질 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승리는 적이 저절로 무너지게 하는 방식이다. 즉 적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힘으로 헛되게 사용하도록 유도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전략에 대한 불신감 속에 좌절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으로 하여금 헛된 망상과 자만심에 도취되도록 미끼를 던져주어 삼키게 한다. 그러다가 예상치도 않는 낭패를 주므로서 가진 힘을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한다. 인류의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항상 직접 접근 방식에 의한 것보다는 간접 접근 방식에 의해서 얻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전쟁사를 보면, 지휘관들이 간접 접근 방식보다는 직접 접근 방식으로 화를 자초한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현상이 빈번한 것은, 전쟁하는 와중에서 원래 정해놓은 목적보다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오기와 자존심을 쏟아 붓는 착오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착안해 볼 때 전쟁이란 결국 물리적 힘의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싸움이다. "전쟁에서의 정신은 물질의 3배의 가치를 지닌다"고 나폴레옹이 말했다.
그리스 시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강대국인 페르샤 왕에게 "그리스 함대는 명령을 거역하고 항복할 예정"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도 간접 접근의 한 형태이다. 페르샤 함대를 해협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간접적인 육로를 택하여 로마를 공격한 것은 북쪽 이탈리아의 켈트족을 반(反) 로마 연맹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것도 로마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간접 접근 방식의 전략이다. 동로마와 페르샤의 전쟁에 있어서도 동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적이 보낸 사절을 맞이했는데 사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로마의 병력과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따라서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이 술책을 역이용하여 군사적 '연극'을 꾸몄는데 페르샤 사절단의 예상 접근로에 작은 숫자의 군사들을 넓은 지역에 활발하게 뛰어다니게 만들어 사절단으로 하여금 로마의 병력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 보이게 했다. 이로서 페르샤 군대로 서둘러 철수했는데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중세 때 징기스칸의 예하 장수인 사부타이는 헝가리 전투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일부로 퇴각을 조금씩 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신속한 야간 기동과 기습으로 헝가리 군을 섬멸했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17세기 영국 내전에 있어서도 의회파 장군인 크롬웰은 간접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왕당파인 스코틀랜드 군대는 사제들의 성화를 받고 있었다. '신'의 징계가 '죄인'(크롬웰)들에게 집행되는 것은 하루 빨리 보고 싶어 했다. 따라서 용감하게 선제공격을 나섰지만 크롬웰은 직접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자제하고 적들을 나쁜 자연 지형 쪽으로 유인해서 공격에 나섰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말버러라는 잉글랜드 장군은 바바리아- 프랑스 동맹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는데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행군을 실시하므로서 단계별로 대용 목표(다수의 공격 목표)로서 위협하여 적들이 진짜 목표를 결정하는데 혼란케 했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식으로 부대 체계를 가볍고 하고 기동성을 높였다. 따라서 빠른 기동력으로 보급품 조달을 위해 적군의 후방 지역을 습격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장군인 셔만은 그전까지 전략인 적의 부대를 공격 목표로 삼은 것과는 달리 전략적 거점을 위협하는 방법을 사용, 적으로 하여금 그 지점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노출시키도록 한다든지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적 지점을 포기하도록 했는데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행군을 통해 적을 파괴했다" 셔만의 후방 공격은 적의 군인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심한 고민과 갈등을 유발시키게 만들었다. 사실 인간이란 국가와 가족이라는 두 가지 대상에 충성하는데 그 중의 하나 인 가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족이 안정할 때만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국가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셔만은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세계 1차 대전 때, 영국군은 증동 지역 원정에 나서는데 이는 독일-오스트리아-터어키의 동맹군을 간접 접근으로 공격하기 위해 터어키의 예속 하에 있는 아랍인들을 반란케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영국군의 로랑은 터어키 군대의 보급을 차단하여 적을 그 자리에게 떠나도록 하는 것 대신 항상 약간의 보급품을 남겨놓아 적의 부대로 하여금 그대로 잔류케 해서 잔류 기간이 연장하면서 그 자리를 집착하도록 만드는 전술을 펼쳤다. 고정된 지점에 군대를 묶어 놓는 이것도 또한 간접 접근 방식이다. 세계 2차 전쟁에서 연합군은 이집트 사막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독일의 로멜 전차 군단의 맥을 끊기 위해 지중해를 통해 수송 중인 보급선을 공격해서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러시아 군대가 몰락해 가는 독일군들을 몰아붙일 때 두 곳의 부대 중심을 다 공격하는 것처럼 하다가 그 어느 쪽도 아니고 부대와 부대의 중간 지점을 돌파함으로서 적의 배후 깊숙이 진출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것도 또한 간접 접근 방식이다. 이처럼 전략이란 어디까지나 지휘자의 심리를 지향해야지 군대라는 실체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진리로서 제시해 준다. 그런데 왜 인류 전쟁사를 통해서 여러 지휘관들은 직접 접근 방식으로 고집해서 패배를 자초하는가? 히틀러의 예를 들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채워질 수 없는 탐욕과 위신의 실추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위신을 회복하는 길은 정면 공격 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다지게 된다. 본 책의 저자가 결론 삼아 말해주는 전쟁 패배의 원인은, 지휘관이 기습을 받았을 때 그로 인해 충격 때문에 전쟁의 최종 목표를 잊고서는 자신이 결심한 수단 그 자체에다 끝까지 집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진리가 하나님의 전쟁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평 가
세속 전쟁과 하나님 전쟁의 차이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라"로 판별된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승리이다.(골 3:1-4) 성도라 자처하는 직업 군인이나, 성도라 자처하는 기업가나, 성도라 자처하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군대나 기업이나 교회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상 그 어떤 영적 전쟁을 치룬다 할지라도 세속 전쟁에 불과하다. 자존심 전쟁이며 오기의 전쟁이며 체면이나 위신이나 자기 권위와 관련된 추악한 생존 전쟁에 불과하다. 진정한 성도의 전쟁은 스데반 집사처럼(행 7장)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과감하게 증거 하는 전쟁이다. 악마는 복음만이 증거 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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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2-25 11:06
전 략 론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바실 헨리 리델 하트
번 역 : 주은식
출판사 : 책세상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회사를 운영하든 교회를 목회하든 국가를 경영하든지 간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양식은 대부분 유사하다. 이윤의 극대화와 영토의 확장과 교인 확보를 위한 모략과 지혜의 창출은 같은 입장에서 펼쳐지기 일 수 있다. 즉 "남의 것을 뺏아오지 아니하면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대원칙 하에서 동일한 일률적 행동이 나온다. 지도자란 민중들을 대표해서 악역(惡役)을 맡겠다고 나선 자들이다. 대신 전쟁을 치러주고, 대신 이윤을 극대화 시켜주고, 대 교회 부흥시켜 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섬으로써 자기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신적인 존경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두 가지 종류의 전쟁이 나온다. 이방민족들이 벌리는 전쟁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벌리시는 전쟁이 있다. 이방민족은 나름대로의 전쟁관을 확보되어 있고 하나님도 또한 나름대로의 전쟁을 벌리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런데 진행하는 방식이 상호 다르다. 이방민족의 전쟁은, 조직의 힘을 축적하고 그 비축된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으로 진행되는 반면에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의(義)와 거룩의 존재 여부를 놓고 처벌하고 멸망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하신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방민족 식의 목회 전쟁을 실시한다면 이는 곧 악마 사단에 편성되어 있는 종교 여단의 한 일부에 불과하다. 과연 그런지 본 책에서 나오는 원리와 현 교회의 목회 원리와 비교하면 금방 밝혀질 것이다.
전쟁에는 상대가 있다. 상대의 태도에 따라 전략이 달라진다. 전쟁의 기본 바탕은 거짓과 기만이다. 속임수에서 시작해서 속임수로 끝나야 한다. 가진 힘으로 막무가내 밀어붙이는 것은 비록 승리를 했다할지라도 전혀 이득이 없이 상처만 얻어질 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승리는 적이 저절로 무너지게 하는 방식이다. 즉 적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힘으로 헛되게 사용하도록 유도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전략에 대한 불신감 속에 좌절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으로 하여금 헛된 망상과 자만심에 도취되도록 미끼를 던져주어 삼키게 한다. 그러다가 예상치도 않는 낭패를 주므로서 가진 힘을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한다. 인류의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항상 직접 접근 방식에 의한 것보다는 간접 접근 방식에 의해서 얻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전쟁사를 보면, 지휘관들이 간접 접근 방식보다는 직접 접근 방식으로 화를 자초한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현상이 빈번한 것은, 전쟁하는 와중에서 원래 정해놓은 목적보다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오기와 자존심을 쏟아 붓는 착오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착안해 볼 때 전쟁이란 결국 물리적 힘의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싸움이다. "전쟁에서의 정신은 물질의 3배의 가치를 지닌다"고 나폴레옹이 말했다.
그리스 시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강대국인 페르샤 왕에게 "그리스 함대는 명령을 거역하고 항복할 예정"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도 간접 접근의 한 형태이다. 페르샤 함대를 해협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간접적인 육로를 택하여 로마를 공격한 것은 북쪽 이탈리아의 켈트족을 반(反) 로마 연맹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것도 로마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간접 접근 방식의 전략이다. 동로마와 페르샤의 전쟁에 있어서도 동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적이 보낸 사절을 맞이했는데 사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로마의 병력과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따라서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이 술책을 역이용하여 군사적 '연극'을 꾸몄는데 페르샤 사절단의 예상 접근로에 작은 숫자의 군사들을 넓은 지역에 활발하게 뛰어다니게 만들어 사절단으로 하여금 로마의 병력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 보이게 했다. 이로서 페르샤 군대로 서둘러 철수했는데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중세 때 징기스칸의 예하 장수인 사부타이는 헝가리 전투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일부로 퇴각을 조금씩 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신속한 야간 기동과 기습으로 헝가리 군을 섬멸했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17세기 영국 내전에 있어서도 의회파 장군인 크롬웰은 간접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왕당파인 스코틀랜드 군대는 사제들의 성화를 받고 있었다. '신'의 징계가 '죄인'(크롬웰)들에게 집행되는 것은 하루 빨리 보고 싶어 했다. 따라서 용감하게 선제공격을 나섰지만 크롬웰은 직접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자제하고 적들을 나쁜 자연 지형 쪽으로 유인해서 공격에 나섰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말버러라는 잉글랜드 장군은 바바리아- 프랑스 동맹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는데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행군을 실시하므로서 단계별로 대용 목표(다수의 공격 목표)로서 위협하여 적들이 진짜 목표를 결정하는데 혼란케 했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식으로 부대 체계를 가볍고 하고 기동성을 높였다. 따라서 빠른 기동력으로 보급품 조달을 위해 적군의 후방 지역을 습격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의 장군인 셔만은 그전까지 전략인 적의 부대를 공격 목표로 삼은 것과는 달리 전략적 거점을 위협하는 방법을 사용, 적으로 하여금 그 지점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노출시키도록 한다든지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전략적 지점을 포기하도록 했는데 이것도 간접 접근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행군을 통해 적을 파괴했다" 셔만의 후방 공격은 적의 군인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가족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심한 고민과 갈등을 유발시키게 만들었다. 사실 인간이란 국가와 가족이라는 두 가지 대상에 충성하는데 그 중의 하나 인 가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족이 안정할 때만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국가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셔만은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세계 1차 대전 때, 영국군은 증동 지역 원정에 나서는데 이는 독일-오스트리아-터어키의 동맹군을 간접 접근으로 공격하기 위해 터어키의 예속 하에 있는 아랍인들을 반란케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영국군의 로랑은 터어키 군대의 보급을 차단하여 적을 그 자리에게 떠나도록 하는 것 대신 항상 약간의 보급품을 남겨놓아 적의 부대로 하여금 그대로 잔류케 해서 잔류 기간이 연장하면서 그 자리를 집착하도록 만드는 전술을 펼쳤다. 고정된 지점에 군대를 묶어 놓는 이것도 또한 간접 접근 방식이다. 세계 2차 전쟁에서 연합군은 이집트 사막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독일의 로멜 전차 군단의 맥을 끊기 위해 지중해를 통해 수송 중인 보급선을 공격해서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러시아 군대가 몰락해 가는 독일군들을 몰아붙일 때 두 곳의 부대 중심을 다 공격하는 것처럼 하다가 그 어느 쪽도 아니고 부대와 부대의 중간 지점을 돌파함으로서 적의 배후 깊숙이 진출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것도 또한 간접 접근 방식이다. 이처럼 전략이란 어디까지나 지휘자의 심리를 지향해야지 군대라는 실체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진리로서 제시해 준다. 그런데 왜 인류 전쟁사를 통해서 여러 지휘관들은 직접 접근 방식으로 고집해서 패배를 자초하는가? 히틀러의 예를 들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채워질 수 없는 탐욕과 위신의 실추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위신을 회복하는 길은 정면 공격 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다지게 된다. 본 책의 저자가 결론 삼아 말해주는 전쟁 패배의 원인은, 지휘관이 기습을 받았을 때 그로 인해 충격 때문에 전쟁의 최종 목표를 잊고서는 자신이 결심한 수단 그 자체에다 끝까지 집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진리가 하나님의 전쟁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평 가
세속 전쟁과 하나님 전쟁의 차이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라"로 판별된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승리이다.(골 3:1-4) 성도라 자처하는 직업 군인이나, 성도라 자처하는 기업가나, 성도라 자처하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군대나 기업이나 교회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상 그 어떤 영적 전쟁을 치룬다 할지라도 세속 전쟁에 불과하다. 자존심 전쟁이며 오기의 전쟁이며 체면이나 위신이나 자기 권위와 관련된 추악한 생존 전쟁에 불과하다. 진정한 성도의 전쟁은 스데반 집사처럼(행 7장)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과감하게 증거 하는 전쟁이다. 악마는 복음만이 증거 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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