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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성경신학미가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가라나티 고진
번 역 : 김재희
출판사 : 한나래 출판사

사람이 자기 부재(不在)를 뿌리치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 자아를 표출해 낼까? 세상 학문과 철학은 결코 유아(唯我)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마치 수학자 괴델이 결정 불가능성의 원리(불완전성 정리)를 통해서 수학의 한계를 노출시키고자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그동안 서양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온 신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위적 직위를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찬탈하고자 하는 과정을 거쳐다가 보니 이제는 합리적인 형식주의가 그 신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눈치 것이다. 제목 자체에 '건축'이라는 용어가 등장되는데 이는 크리시토퍼 알렉산더의 '자연 도시론'을 전 철학 분야에다 확대 적용시키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도시론'이란 도시 계획 설계자들이 인위적으로 디자인해서 건설하는 '인공 도시'와 완전히 구별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으로서 도시의 본질적인 요소를 '반격자(反格子)구조'에 있다는 보는 것이다. 이 구조는 다양한 작은 체계들이 복잡함을 더할 때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개념화하기 위한 모델이다. 처음에 변할 것 같지 않던 작은 요소들이 다른 요소와 겹치게 되면 거기서 우연찮게 새로운 인지 단위가 나온다. 그냥 단순한 나무 구조에 의해 요소가 결합되면, 예를 들어, 20개의 기본 요소에 19개의 부분 집합만이 성립되지만 반격자 구조는 100만개 이상의 서로 다른 부분집합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복잡한 반격자 구조를 간편한 나무 구조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순화로의 지향은 최상위에 위치하는 오직 하나의 지배적인 단위 중심으로 모든 형식을 예속시키려는 신학적이고 성격을 모든 서양 철학이 이어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 최고의 중립지대를 데카르트 때부터 시작해서 '초월적 자아'에게 위임했다. 형식적 구조주의 안에는 이런 자유자재로 모든 것에 중립적으로 관여하는 요소가 필수적인데 이는 마치 수학에서 '0'의 역할에 해당된다. 수학에서의 '0'은 형식이 아니라 기능이다. 변형의 규칙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와 수 사이를 차이 나게 만든다.(예를 들면, 25와 205 사이) 이러한 아이디어는 형식주의적 언어학에서 그대로 도입된다. 로만 야곱슨은 음소마다 구별되게 들여지는 그 소리의 차이성은, 언어로서 쓰여지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단순한 물리적인 음성의 차이만으로 의미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사용하는 주체자가 더 높은 메타차원을 상정하고 나서야 특정 체계가 갖추어진 채로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조란 음소들의 집합 자체가 아니라 사이와 사이의 대립된 관계를 묶어주는 묶음이다. 그래서 늘 목적론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자 자체를 제거시켜 버리고 부정(否定)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 제거 작업 또한 다른 구조나 메타 차원을 도입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끊임없이 새로운 초월적 자아를 대입하는 식으로 줄줄이 연기시켜 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도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곧 '0' 뿐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전을 특권화된 현전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비현전 뿐이라는 것이다. 현전을 등장시켜 놓으면 그 현전은 곧장 오로지 자기만을 지시하게 된다. 즉 메타 언어→ 자연 언어 →형식 언어로 유발하는 폐쇄된 자기 순환 충동에 빠져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기 지시적인 그 현전을 밀어내고 또 다시 차이 나게 만드는 다른 현전을 올려놓기를 텍스트 자체가 요구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견해이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에 해당된다고 비트겐스타인은 주장한다. 하나의 요소가 등장하면 그 때까지 통용되던 법칙은 변하게 된다. 그 요소에 의해서 그 체제는 새로운 게임의 률에 요구하면서 재편성된다. 마치 장기판의 말의 움직임에 따라 기존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빈 자리'는 모든 구조에 형식과 구조에 있어 필수적이다. 노자가 표현한 '쓸모 있는 무(無)'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요 신(神)이라는 것도 이런 형식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작적 개념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무한의 '빈 자리'을 화폐로 보았다. 화폐가 무조건으로 교환이 가능한 희한한 상품 자체가 된 것에 주목한다. 원래 상품의 가치란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법이고 여기서 화폐의 기능이란 그 가치를 표시하는 메타 차원에 해당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 화폐가 대상 차원으로 내려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동안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과욕이 -저자는 도착(倒錯)이라고 표현한다 - 이 화폐라는 상품, 즉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상품과 화폐의 관계는 이러하다. 유통 과정인 C-M-C(상품-화폐-상품)에서 C-M(판매)과 M-C(구매)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생산물의 직접적인 교환인 C-C(상품-상품)에서는 와는 달리, 교환의 영역이 시공간 양면에서 무한히 팽창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 보면 M-C-M(화폐-상품-화폐)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판매와 구매가 왜곡된다. 즉 많은 상품을 얻고자 하는 탐욕이 곧 사재기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 축적으로 형태로 대신해서 나타난다. 이는 원래의 유통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구두쇠는 '많이 팔고 적게 사기' 하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상품 축적에 나서는 자라면 자본가는 이 형태가 M-C-M(화폐-상품-화폐) 식으로 뒤바뀐 체제로 이해하고서는 뛰어든다. 이로서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라고 볼 수 있다. 이 구두쇠는 개개의 상품들 속에 담겨 있는 노동의 가치를 지워버렸다. 나의 노동과 상대의 노동으로 교환되어야 될 것이 내가 지닌 화폐로서 교환된다는 것이 화폐가 이 시대의 보편적 신으로 행세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이 시대를 지탱해지는 보편적 매개물로서 사용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면서도 대상 차원인 보편적 인간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온 것과 같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보통 사람으로 오신 그 그리스도를 절대적 신으로 인정하는 정신적 도약이 필요한 것처럼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절대적 신을 만나기 위한 도약을 발휘하면서 돈의 흔적 찾기에 열중한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이다. 환상이다. 그러나 무슨 가상이든 가상 없이는 못사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저자는 천명한다.

데카르트는 다른 자아들과 관계가 끊어진 단독적인 자아성을 구축하려 했다. 오직 신 앞에서만 확인되는 자아상이다. 이 자아성으로 사회는 비대칭적이고 불균형적인 형태를 이룬다. 서로 평등한 상태에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가르치고 다른 하나는 배워야한다는 관계로 엮어지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그 사회의 규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다. 모든 신비롭고 보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철학도 사실은 인간 사회 안에서는 오로지 세속적인 경제적 관계로 환원된다는 점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의 절대적 자아란 존재할 수 없고 그저 경제 관계에 묶여 사는 상대적 세속인뿐이라는 것이다.

평 가

인간 속에는 자아만 남기고 타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본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누구인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기에 확인할 길이 없기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타인의 모습을 가져다가 자기 대신 모셔놓게 된다. 그러면서도 싫증이 나면 그 타인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다른 타인으로 대체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신봉하면서도 늘 마음속에는 종교처럼 모시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신의 존재를 지적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방어에 나서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신을 내가 과연 신봉할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기에 우선 자기 점검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자신이 지켜 낼 자신이 있으면 일단 신을 믿기로 하고 만약 자신이 서지 아니하면 신을 잠시 멀리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 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고발하시는 말씀이다. 참된 성도는, 자기 힘으로 산다든지 신앙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아니다. 그냥 그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만사가 진행될 뿐임을 믿는 자이다.

첨부파일 : 은유로서의건축.hwp (48.0K), Down:16

관리자(IP:124.♡.84.82)

09-02-24 20:33

은유로서의 건축 : 언어, 수, 화폐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가라나티 고진
번 역 : 김재희
출판사 : 한나래 출판사

사람이 자기 부재(不在)를 뿌리치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 자아를 표출해 낼까? 세상 학문과 철학은 결코 유아(唯我)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마치 수학자 괴델이 결정 불가능성의 원리(불완전성 정리)를 통해서 수학의 한계를 노출시키고자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그동안 서양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온 신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위적 직위를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찬탈하고자 하는 과정을 거쳐다가 보니 이제는 합리적인 형식주의가 그 신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눈치 것이다. 제목 자체에 '건축'이라는 용어가 등장되는데 이는 크리시토퍼 알렉산더의 '자연 도시론'을 전 철학 분야에다 확대 적용시키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도시론'이란 도시 계획 설계자들이 인위적으로 디자인해서 건설하는 '인공 도시'와 완전히 구별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으로서 도시의 본질적인 요소를 '반격자(反格子)구조'에 있다는 보는 것이다. 이 구조는 다양한 작은 체계들이 복잡함을 더할 때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개념화하기 위한 모델이다. 처음에 변할 것 같지 않던 작은 요소들이 다른 요소와 겹치게 되면 거기서 우연찮게 새로운 인지 단위가 나온다. 그냥 단순한 나무 구조에 의해 요소가 결합되면, 예를 들어, 20개의 기본 요소에 19개의 부분 집합만이 성립되지만 반격자 구조는 100만개 이상의 서로 다른 부분집합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복잡한 반격자 구조를 간편한 나무 구조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순화로의 지향은 최상위에 위치하는 오직 하나의 지배적인 단위 중심으로 모든 형식을 예속시키려는 신학적이고 성격을 모든 서양 철학이 이어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 최고의 중립지대를 데카르트 때부터 시작해서 '초월적 자아'에게 위임했다. 형식적 구조주의 안에는 이런 자유자재로 모든 것에 중립적으로 관여하는 요소가 필수적인데 이는 마치 수학에서 '0'의 역할에 해당된다. 수학에서의 '0'은 형식이 아니라 기능이다. 변형의 규칙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와 수 사이를 차이 나게 만든다.(예를 들면, 25와 205 사이) 이러한 아이디어는 형식주의적 언어학에서 그대로 도입된다. 로만 야곱슨은 음소마다 구별되게 들여지는 그 소리의 차이성은, 언어로서 쓰여지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단순한 물리적인 음성의 차이만으로 의미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사용하는 주체자가 더 높은 메타차원을 상정하고 나서야 특정 체계가 갖추어진 채로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조란 음소들의 집합 자체가 아니라 사이와 사이의 대립된 관계를 묶어주는 묶음이다. 그래서 늘 목적론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자 자체를 제거시켜 버리고 부정(否定)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 제거 작업 또한 다른 구조나 메타 차원을 도입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끊임없이 새로운 초월적 자아를 대입하는 식으로 줄줄이 연기시켜 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도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곧 '0' 뿐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전을 특권화된 현전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비현전 뿐이라는 것이다. 현전을 등장시켜 놓으면 그 현전은 곧장 오로지 자기만을 지시하게 된다. 즉 메타 언어→ 자연 언어 →형식 언어로 유발하는 폐쇄된 자기 순환 충동에 빠져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기 지시적인 그 현전을 밀어내고 또 다시 차이 나게 만드는 다른 현전을 올려놓기를 텍스트 자체가 요구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견해이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에 해당된다고 비트겐스타인은 주장한다. 하나의 요소가 등장하면 그 때까지 통용되던 법칙은 변하게 된다. 그 요소에 의해서 그 체제는 새로운 게임의 률에 요구하면서 재편성된다. 마치 장기판의 말의 움직임에 따라 기존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빈 자리'는 모든 구조에 형식과 구조에 있어 필수적이다. 노자가 표현한 '쓸모 있는 무(無)'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요 신(神)이라는 것도 이런 형식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작적 개념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무한의 '빈 자리'을 화폐로 보았다. 화폐가 무조건으로 교환이 가능한 희한한 상품 자체가 된 것에 주목한다. 원래 상품의 가치란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법이고 여기서 화폐의 기능이란 그 가치를 표시하는 메타 차원에 해당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 화폐가 대상 차원으로 내려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동안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과욕이 -저자는 도착(倒錯)이라고 표현한다 - 이 화폐라는 상품, 즉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상품과 화폐의 관계는 이러하다. 유통 과정인 C-M-C(상품-화폐-상품)에서 C-M(판매)과 M-C(구매)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생산물의 직접적인 교환인 C-C(상품-상품)에서는 와는 달리, 교환의 영역이 시공간 양면에서 무한히 팽창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 보면 M-C-M(화폐-상품-화폐)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판매와 구매가 왜곡된다. 즉 많은 상품을 얻고자 하는 탐욕이 곧 사재기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 축적으로 형태로 대신해서 나타난다. 이는 원래의 유통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구두쇠는 '많이 팔고 적게 사기' 하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상품 축적에 나서는 자라면 자본가는 이 형태가 M-C-M(화폐-상품-화폐) 식으로 뒤바뀐 체제로 이해하고서는 뛰어든다. 이로서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라고 볼 수 있다. 이 구두쇠는 개개의 상품들 속에 담겨 있는 노동의 가치를 지워버렸다. 나의 노동과 상대의 노동으로 교환되어야 될 것이 내가 지닌 화폐로서 교환된다는 것이 화폐가 이 시대의 보편적 신으로 행세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이 시대를 지탱해지는 보편적 매개물로서 사용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면서도 대상 차원인 보편적 인간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온 것과 같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보통 사람으로 오신 그 그리스도를 절대적 신으로 인정하는 정신적 도약이 필요한 것처럼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절대적 신을 만나기 위한 도약을 발휘하면서 돈의 흔적 찾기에 열중한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이다. 환상이다. 그러나 무슨 가상이든 가상 없이는 못사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저자는 천명한다.

데카르트는 다른 자아들과 관계가 끊어진 단독적인 자아성을 구축하려 했다. 오직 신 앞에서만 확인되는 자아상이다. 이 자아성으로 사회는 비대칭적이고 불균형적인 형태를 이룬다. 서로 평등한 상태에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가르치고 다른 하나는 배워야한다는 관계로 엮어지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그 사회의 규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거래이다. 모든 신비롭고 보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철학도 사실은 인간 사회 안에서는 오로지 세속적인 경제적 관계로 환원된다는 점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의 절대적 자아란 존재할 수 없고 그저 경제 관계에 묶여 사는 상대적 세속인뿐이라는 것이다.

평 가

인간 속에는 자아만 남기고 타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본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누구인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기에 확인할 길이 없기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타인의 모습을 가져다가 자기 대신 모셔놓게 된다. 그러면서도 싫증이 나면 그 타인의 모습을 제거해 버리고 다른 타인으로 대체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신봉하면서도 늘 마음속에는 종교처럼 모시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신의 존재를 지적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방어에 나서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신을 내가 과연 신봉할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기에 우선 자기 점검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자신이 지켜 낼 자신이 있으면 일단 신을 믿기로 하고 만약 자신이 서지 아니하면 신을 잠시 멀리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 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고발하시는 말씀이다. 참된 성도는, 자기 힘으로 산다든지 신앙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아니다. 그냥 그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만사가 진행될 뿐임을 믿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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