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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성경신학미가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번 역 : 박여성
출판사 : 까치 출판사

인간은 자기가 도전하고 싶은 대상까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한' 개념이다. 유한한 것으로부터 무한한 것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자아' 유한성에 대해서 그 한계를 파악하려는 자기 도전성 때문이다. 즉 인간의 창조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쳐 나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유한에서 시작하는 무한은 끝없이 자기 쪽으로의 회귀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유한 안에서의 무한이므로 무한은 곧 유한이었던 것이다.

옛적부터 무한에 도전하는 수학과 철학과 과학과 예술은, 무의미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자연 세계에서의 변화의 과정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시도된다. 혼돈과 질서 사이를 형성하고 있는 경계 지점을 무한히 분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전이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우연의 창조력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소위 기존 논리상 '역설'이 일어나버리는 것이다. 역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한히 되먹임 되는 현상이 바라보는 직관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와 거기에 따른 변화에 대한 직관은 기존의 논리와는 모순된다. 곧 수학 자체가 한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수학을 당황시킨 혼돈적 질서가 예술의 세계에서는 도리어 새로운 미의 체계로 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가 에셔가 이것을 보여주었고 음악가 바흐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혼돈에서 새 질서로 변화되는 현상을 해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수학 체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 동안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해 왔던 그 '증명 체제' 자체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수학계에서 사용해 왔던 증명 방식을 대상으로 삼고 무한히 되먹임 되는 역설 체제 속으로 집어넣어 수학적 제기능의 근원적 진리성 자체를 점검해 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것이 수학자 괴델이 시도한 방법이다. 수학의 예술화인 동시에 새로운 진리 체계의 수립을 위한 도전이다. 저자는 괴델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주목하는가?

그동안의 수학은 공리를 연속적으로 증명해서 누적시키므로 확고부동한 진리가 구축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증명의 정당성은 무한으로 이어지는 역설의 고리로 인해 무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는 공리를 증명하여 무모순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기보다는 모든게 '생성' 된다는 현실적 관점을 지니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1920년에 고안된 '형식 체계'라는 제안이 이점을 지향하는데, 체계가 지닌 자체 내에 고안된 규칙에 따라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즉 현실과 대응관계에 있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에 따라 새로운 현실로 내비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성'이라는 인식으로 파악된 현실이다. 이 현실이 참 현실인지는 수학적 증명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괴델의 생각이다. 어떤 형식 체계가 일관성을 가지는 것은 다른 체계가 전제되는 한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물에 관한 그림을 볼 때 전경(주목받는 그림)과 배경의 관계에서 배경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어느새 '전경의 전경'으로 변해져 있다. 즉 배경이라고 알려진 것에도 전경과 동일한 정보가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전경과 배경 사이에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관계에서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교환을 재귀-준거와 재귀- 증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재귀 순환적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저자는 우선 두문자행렬(頭文字行列) 대위(對位)법을 도입한다. 두문자행렬 대위법이란 서로 차이나는 층위들 사이에서 동형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작곡가 바흐가 대위법을 사용해서 조 옮김과 층위 순환을 통해 의미 있는 칸타타를 작곡해 내는 것과 같다. (판화가 에셔는, 점차 위로, 그런데 그것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으로 끝없이 순환되는 계단을 묘사해 내므로 하나의 절대 관점을 지켜 줄 층위가 존재하기란 전적 불가능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추론과 기계적 추론 사이에는 실제로 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공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동형관계 때문이다. 이 동형관계는 정보 저장체와 정보 발현체 사이의 관계인데 재귀순환적 과정을 나타낸다. 재귀순환적 관계란 무한역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생성될 때까지 자꾸만 다른 층위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시행이 연기되는 관계이다. 스스로 정보가 확장되는 사슬을 이룬다. 여기서 복제가 일어난다. 상이성 속에서 동일성이 발생되는 것이다. 우연이며 기적이며 의미의 창출이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이 띤다. 이 예측 불가능성을 가지고 현 우주 질서를 구성하는 낮은 물리적 층위와 높은 층위인 정신과 의식적 차원까지 모두를 해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형식 체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체계는 정보의 재귀순환적인 속성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활자형 수론으로 나타낸다. 이렇게 함으로서 수와 동형관계를 가지는 연쇄체를 다룰 수 있다. 소위 명제화 시키는 것이다. 이 명제는 참도 진리값을 보여주지 못하는 개방된 것이기에 이 명제를 양화사(Quantifier) 시켜 묶어 둔다. 그래서 양화사된 명제는 보편적인 진리로서 행세할 수 있는가 여부를 자체적인 규칙의 저촉을 받으면서 자기 존재성의 진위를 점검 받게 되는데 결국에는 부메랑처럼 자기 존재 부정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자기보다 높은 명제(메타 명제)의 연쇄체에 의해 재규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델의 정리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재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적 재귀론은 현실적으로 인간 두뇌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 조직에 적용시킬 수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에는 약 25조개의 세포가 있다. 이들 속에는 많은 층위들이 있다. 물리법칙에 위배되는 정신적인 연속체마저 지니고 있는 층위들이다. 세포를 이루는 단백질 구성에 있어 DNA가 정보 전달체로서 작용을 하는데 이 DNA 복제에 있어 정보 발현체로 이미 만들어진 단백질이 도리어 재귀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괴델의 정리에 의해서 자연수의 세계와 실재 세계가 서로 동형관계에 놓여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봉쇄하는 결정체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자연의 세계나 생물의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실들을 인공지능이나 생각하는 컴퓨터 제조에 응용될 수 있다. 불합리성까지 유발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되먹임 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기계는 마치 바흐나 에셔가 그려낸 예술 작품과 같다. 주체와 객체의 혼재,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생시키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자연에서의 모방이라는 옛 과학의 틀을 벗어나는 인식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친히 창조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과학마저 창조적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다. 독보적인 진리라든지 유일무이한 정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전의 과학이란 도덕적, 윤리적 인식이 없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이제는 무엇이 진리냐 하는 물음조차 성립조차 안 된다.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안(公案)과 같다. 저자는 실제로 선불교를 언급하고 있다.(pp. 229-318)

평 가

저자는, '해명될 수 없는 것'을 신의 개념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인간으로부터 도출된 신개념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신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재창조하려고 구상하고 있다. 즉 나를 닮은 신과 그 신으로부터 닮은 나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인간보다 더욱 신과 유사한 인간으로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저자 본인의 노력뿐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노력의 결실이다 는 점이다. "알 수 없다"는 푸념은 참으로 무한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인 태도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에 있어 이미 무한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의 발로이다. 참된 무한, 참된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투명하게 서 있을 때만 알게 될 뿐이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첨부파일 : 괴델에셔바흐.hwp (32.0K), Down:14

관리자(IP:124.♡.84.82)

09-02-24 20:07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번 역 : 박여성
출판사 : 까치 출판사

인간은 자기가 도전하고 싶은 대상까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한' 개념이다. 유한한 것으로부터 무한한 것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자아' 유한성에 대해서 그 한계를 파악하려는 자기 도전성 때문이다. 즉 인간의 창조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쳐 나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유한에서 시작하는 무한은 끝없이 자기 쪽으로의 회귀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유한 안에서의 무한이므로 무한은 곧 유한이었던 것이다.

옛적부터 무한에 도전하는 수학과 철학과 과학과 예술은, 무의미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자연 세계에서의 변화의 과정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시도된다. 혼돈과 질서 사이를 형성하고 있는 경계 지점을 무한히 분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전이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우연의 창조력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소위 기존 논리상 '역설'이 일어나버리는 것이다. 역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한히 되먹임 되는 현상이 바라보는 직관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와 거기에 따른 변화에 대한 직관은 기존의 논리와는 모순된다. 곧 수학 자체가 한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수학을 당황시킨 혼돈적 질서가 예술의 세계에서는 도리어 새로운 미의 체계로 승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가 에셔가 이것을 보여주었고 음악가 바흐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혼돈에서 새 질서로 변화되는 현상을 해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수학 체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 동안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해 왔던 그 '증명 체제' 자체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수학계에서 사용해 왔던 증명 방식을 대상으로 삼고 무한히 되먹임 되는 역설 체제 속으로 집어넣어 수학적 제기능의 근원적 진리성 자체를 점검해 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것이 수학자 괴델이 시도한 방법이다. 수학의 예술화인 동시에 새로운 진리 체계의 수립을 위한 도전이다. 저자는 괴델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주목하는가?

그동안의 수학은 공리를 연속적으로 증명해서 누적시키므로 확고부동한 진리가 구축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증명의 정당성은 무한으로 이어지는 역설의 고리로 인해 무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는 공리를 증명하여 무모순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기보다는 모든게 '생성' 된다는 현실적 관점을 지니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1920년에 고안된 '형식 체계'라는 제안이 이점을 지향하는데, 체계가 지닌 자체 내에 고안된 규칙에 따라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즉 현실과 대응관계에 있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에 따라 새로운 현실로 내비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성'이라는 인식으로 파악된 현실이다. 이 현실이 참 현실인지는 수학적 증명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괴델의 생각이다. 어떤 형식 체계가 일관성을 가지는 것은 다른 체계가 전제되는 한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물에 관한 그림을 볼 때 전경(주목받는 그림)과 배경의 관계에서 배경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어느새 '전경의 전경'으로 변해져 있다. 즉 배경이라고 알려진 것에도 전경과 동일한 정보가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전경과 배경 사이에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관계에서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교환을 재귀-준거와 재귀- 증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재귀 순환적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저자는 우선 두문자행렬(頭文字行列) 대위(對位)법을 도입한다. 두문자행렬 대위법이란 서로 차이나는 층위들 사이에서 동형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작곡가 바흐가 대위법을 사용해서 조 옮김과 층위 순환을 통해 의미 있는 칸타타를 작곡해 내는 것과 같다. (판화가 에셔는, 점차 위로, 그런데 그것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으로 끝없이 순환되는 계단을 묘사해 내므로 하나의 절대 관점을 지켜 줄 층위가 존재하기란 전적 불가능한 일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추론과 기계적 추론 사이에는 실제로 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공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동형관계 때문이다. 이 동형관계는 정보 저장체와 정보 발현체 사이의 관계인데 재귀순환적 과정을 나타낸다. 재귀순환적 관계란 무한역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생성될 때까지 자꾸만 다른 층위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시행이 연기되는 관계이다. 스스로 정보가 확장되는 사슬을 이룬다. 여기서 복제가 일어난다. 상이성 속에서 동일성이 발생되는 것이다. 우연이며 기적이며 의미의 창출이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이 띤다. 이 예측 불가능성을 가지고 현 우주 질서를 구성하는 낮은 물리적 층위와 높은 층위인 정신과 의식적 차원까지 모두를 해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형식 체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체계는 정보의 재귀순환적인 속성을 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활자형 수론으로 나타낸다. 이렇게 함으로서 수와 동형관계를 가지는 연쇄체를 다룰 수 있다. 소위 명제화 시키는 것이다. 이 명제는 참도 진리값을 보여주지 못하는 개방된 것이기에 이 명제를 양화사(Quantifier) 시켜 묶어 둔다. 그래서 양화사된 명제는 보편적인 진리로서 행세할 수 있는가 여부를 자체적인 규칙의 저촉을 받으면서 자기 존재성의 진위를 점검 받게 되는데 결국에는 부메랑처럼 자기 존재 부정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자기보다 높은 명제(메타 명제)의 연쇄체에 의해 재규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델의 정리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재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적 재귀론은 현실적으로 인간 두뇌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 조직에 적용시킬 수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에는 약 25조개의 세포가 있다. 이들 속에는 많은 층위들이 있다. 물리법칙에 위배되는 정신적인 연속체마저 지니고 있는 층위들이다. 세포를 이루는 단백질 구성에 있어 DNA가 정보 전달체로서 작용을 하는데 이 DNA 복제에 있어 정보 발현체로 이미 만들어진 단백질이 도리어 재귀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괴델의 정리에 의해서 자연수의 세계와 실재 세계가 서로 동형관계에 놓여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봉쇄하는 결정체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자연의 세계나 생물의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실들을 인공지능이나 생각하는 컴퓨터 제조에 응용될 수 있다. 불합리성까지 유발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되먹임 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기계는 마치 바흐나 에셔가 그려낸 예술 작품과 같다. 주체와 객체의 혼재,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생시키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자연에서의 모방이라는 옛 과학의 틀을 벗어나는 인식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서 친히 창조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과학마저 창조적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다. 독보적인 진리라든지 유일무이한 정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전의 과학이란 도덕적, 윤리적 인식이 없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이제는 무엇이 진리냐 하는 물음조차 성립조차 안 된다.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안(公案)과 같다. 저자는 실제로 선불교를 언급하고 있다.(pp. 229-318)

평 가

저자는, '해명될 수 없는 것'을 신의 개념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인간으로부터 도출된 신개념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신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재창조하려고 구상하고 있다. 즉 나를 닮은 신과 그 신으로부터 닮은 나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인간보다 더욱 신과 유사한 인간으로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저자 본인의 노력뿐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노력의 결실이다 는 점이다. "알 수 없다"는 푸념은 참으로 무한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인 태도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에 있어 이미 무한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의 발로이다. 참된 무한, 참된 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투명하게 서 있을 때만 알게 될 뿐이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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