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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이기적 유전자 :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성경신학-

이기적 유전자 :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이기적 유전자 :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번 역 : 홍영남
출판사 : 을유문화사

진정한 인간 해방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다른 확실한 바탕을 근거 삼아 그 위에 자아를 재조립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부인 못할 명백한 토대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DNA이다. 인간이란 유전자가 조립해 놓은 생존기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을 가지고 인간성의 토대를 삼을 때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달 수 없는 법이다. 인간에 대한 어설픈 기대성 같은 것은 도리어 인간성을 정립하는데 혼란만 가중시킨다.

사실 그동안 인류 역사는 반복적으로 인간의 우월성과 그 인간다움을 강요해 왔는데 이러한 식의 모든 후천적 교육과 학습이란 그저 무리한 덧씌움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유전학적으로 볼 때 그 어떤 획득 형질도 이미 있는 유전자에 변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조작된 인위적 환경에도 유전자는 끄덕도 하지 않고 견디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고수한다. 이는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자아를 은폐하고 자기의 진정성을 위장하려는 방편으로 도덕 문화를 형성시켜 왔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성스러움과 선함의 영역으로 따로 마련해 놓기 위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로 차별화 시켜 보기도 하고 또한 '죽은' 사물과 '살아 있는' 사물로 임의로 구획지어 보지만 유전학적으로 볼 때 참으로 엉뚱한 관심사를 부적절하게 개입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전자의 자기 생산과 복제는 너무나 맹목적이다. 유전자는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미리 짜여진 계획이라는 것도 없다. 유전자는 그저 있을 뿐이다. 괜히 인간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남기기 위해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상상일 뿐이다.

'인류라는 종을 위해서',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무익한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DNA에게는 행복이라는 것도 없다. '보편적 사랑'이라든지 '전체의 번영'이라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저 각개인은 각자의 유전자가 스스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외형물에 불과하다. 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하기를, 이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저 안정성 그 자체를 지향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오직 '안정성 유지'이다. 원자 차원이든 분자 차원이든, 무질서한 사물이 스스로 복잡한 형태를 이루어 나가는 원리는 이 '안정성 유지'라는 원리에 준해서만 진행된다. 외부에서 어떤 설계나 지시를 제시할 필요조차 없다.

원자는 안정된 패턴이 되면 스스로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한다. DNA는 철저하게 이 원리에 따르고 있고 인간이라는 개체도 결국 이 DNA의 정보대로 자생된 외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안정적 조직 내부에서도 오류가 발생할 수가 있다. 여기서부터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오류가 유발시킨 새로운 조직은 기존의 조직과 더불어 '안정성'을 놓고 경쟁관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속도가 관건이다. '복제의 속도' 즉 '다산성'을 경쟁 하는 것이다.

결국 개체의 분자가 장기간 존속하거나 또는 복제 속도가 빠르거나 또는 복제의 정확도가 높은 안정된 분자에 의해서 상황은 점유 당하게 되어 있다. 숱한 유전자 조각들은 세대마다 중간 중간 없어져도 전체 [그]유전자는 영원하다.

한 유전자가 100만년을 살았다고 해서 100년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버릴 때만 스스로 버리게 되고 그 뒤 후대를 거치면서 다른 몸으로 이전되어 가는 것이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아무리 혼합되고 혼성되어도 영원히 살아남는 쪽으로 움직인다. 유전자의 진정한 목적은 스스로 살아남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저 유전자에 편승한 무해하고 무익한 길손(나그네)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동안 생물계는 이러한 유전자의 특성을 외면하고 생물의 세계에 대해서 각 생물들이 각자의 종과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잘못 가정한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비과학적인 선입견 때문에 정치적 사고의 압력을 꾸준히 받아 왔기에 현실을 왜곡한 결과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공박하는 의미에서 '이기적'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것이다. -실상 유전자에게는 적절치 않는 것이지만- 즉, 생물계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있을지라도 결코 이타적인 희생이나 사랑이 아니라 유전자의 안정적인 자기 확보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 예가 근친도 계산을 통해서 명백해진다. 즉 유전자가 유전자 풀(pool)속에서 수를 늘리기 위해 마치 대단히 이타주의로 보여지는 행위를 남기는 데 이 수행과정을 통한 확률적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근친도'란 2인의 친족이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게 되는 경우를 확률로 나타낸 것으로 한 계산에 의하면, 5인의 사촌을 구조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가 개체군 속에 증가하는 일은 없으나 5인의 형제나 10인의 사촌 때문에 생명을 버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유전자 수는 증가된다. 즉 유전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수가 증가되는 방향으로 개체를 움직이도록 정보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자가 성공하는 최소의 필요조건은 그 유전자가 2인 이상의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나 4인 이상의 배다른 형제(또는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 손자) 또는 8인 이상의 사촌 등을 구하고 죽는 것이다.

어쨌든 어떤 개체든지 자신에 대한 '근친도'는 1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에 대한 위험 대처와 이익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근친상간 금지는 주관적 문화개념에 불과하지 결코 유전자 이익성과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이다. 유전자 선택 작용은 지금도 오직 자신의 순 이익만을 지향하면서 발휘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 이익이란 다름 아닌 '자기 안정성'이다.

흔히들 사회가 우선인지 개인이 우선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해야 하며 이러한 제한이 전체적으로 각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최대치의 이익이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서 까다로운 지혜가 요구되기도 한다.

즉, '사회'라는 개념만 상정하면 항상 '협력심' '협동심'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인간과 자연 세계의 현실을 알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엄밀한 과학에 의해서 재평가 받기를 저자는 요구하고 있다. 인간을 쥐고 있는 사회적 권위나 힘이 아니다. 각개체를 궁극적으로 쥐고 있는 것은 유전자의 그 비정한 자기 이기성 뿐이다. 이 이기성이야말로 유전자의 안정성에 부합되는 불변의 우주적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안정성에 심한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회'라는 환상이며 이 체제 유지를 위해 따라오는 인간의 품격과 품위 유지이다. 이러한 전체를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는 이타적 희생정신은 각 개체가 지닌 유전자의 안정적 원칙에 위배된다.

즉 DNA는 우연에 지배를 받는 괴물이므로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통제되지도 않는 괴물을 억지로 통제하려는데서 문명과 문화가 발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안에서는 학습과 교육과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유전학이라는 엄밀 과학을 막아내지 못하는 비실제적 엄포에 불과하다. 더 이상 [나]가 없기는 도킨스의 유전학이나 아니면 일반 사회학문이나 어느 쪽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사랑을 원한다.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를 원한다.

평 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3:3). 하나님은 인간의 육됨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그 육은, 육 그 자체를 위한 육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무관한 육은 인간 소관을 벗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남기셨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이 본문의 말씀처럼, 성도가 영광의 몸이 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능력문제이다.

첨부파일 : 이기적유전자.hwp (31.5K), Down:13

관리자(IP:124.♡.84.82)

09-03-05 00:32

이기적 유전자 : 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번 역 : 홍영남
출판사 : 을유문화사

진정한 인간 해방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다른 확실한 바탕을 근거 삼아 그 위에 자아를 재조립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부인 못할 명백한 토대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DNA이다. 인간이란 유전자가 조립해 놓은 생존기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을 가지고 인간성의 토대를 삼을 때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달 수 없는 법이다. 인간에 대한 어설픈 기대성 같은 것은 도리어 인간성을 정립하는데 혼란만 가중시킨다.

사실 그동안 인류 역사는 반복적으로 인간의 우월성과 그 인간다움을 강요해 왔는데 이러한 식의 모든 후천적 교육과 학습이란 그저 무리한 덧씌움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유전학적으로 볼 때 그 어떤 획득 형질도 이미 있는 유전자에 변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 어떤 조작된 인위적 환경에도 유전자는 끄덕도 하지 않고 견디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고수한다. 이는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자아를 은폐하고 자기의 진정성을 위장하려는 방편으로 도덕 문화를 형성시켜 왔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성스러움과 선함의 영역으로 따로 마련해 놓기 위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로 차별화 시켜 보기도 하고 또한 '죽은' 사물과 '살아 있는' 사물로 임의로 구획지어 보지만 유전학적으로 볼 때 참으로 엉뚱한 관심사를 부적절하게 개입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전자의 자기 생산과 복제는 너무나 맹목적이다. 유전자는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미리 짜여진 계획이라는 것도 없다. 유전자는 그저 있을 뿐이다. 괜히 인간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남기기 위해 유전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상상일 뿐이다.

'인류라는 종을 위해서',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무익한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DNA에게는 행복이라는 것도 없다. '보편적 사랑'이라든지 '전체의 번영'이라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저 각개인은 각자의 유전자가 스스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외형물에 불과하다. 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하기를, 이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저 안정성 그 자체를 지향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오직 '안정성 유지'이다. 원자 차원이든 분자 차원이든, 무질서한 사물이 스스로 복잡한 형태를 이루어 나가는 원리는 이 '안정성 유지'라는 원리에 준해서만 진행된다. 외부에서 어떤 설계나 지시를 제시할 필요조차 없다.

원자는 안정된 패턴이 되면 스스로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한다. DNA는 철저하게 이 원리에 따르고 있고 인간이라는 개체도 결국 이 DNA의 정보대로 자생된 외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안정적 조직 내부에서도 오류가 발생할 수가 있다. 여기서부터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오류가 유발시킨 새로운 조직은 기존의 조직과 더불어 '안정성'을 놓고 경쟁관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속도가 관건이다. '복제의 속도' 즉 '다산성'을 경쟁 하는 것이다.

결국 개체의 분자가 장기간 존속하거나 또는 복제 속도가 빠르거나 또는 복제의 정확도가 높은 안정된 분자에 의해서 상황은 점유 당하게 되어 있다. 숱한 유전자 조각들은 세대마다 중간 중간 없어져도 전체 [그]유전자는 영원하다.

한 유전자가 100만년을 살았다고 해서 100년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버릴 때만 스스로 버리게 되고 그 뒤 후대를 거치면서 다른 몸으로 이전되어 가는 것이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아무리 혼합되고 혼성되어도 영원히 살아남는 쪽으로 움직인다. 유전자의 진정한 목적은 스스로 살아남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저 유전자에 편승한 무해하고 무익한 길손(나그네)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동안 생물계는 이러한 유전자의 특성을 외면하고 생물의 세계에 대해서 각 생물들이 각자의 종과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잘못 가정한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비과학적인 선입견 때문에 정치적 사고의 압력을 꾸준히 받아 왔기에 현실을 왜곡한 결과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견해에 공박하는 의미에서 '이기적'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것이다. -실상 유전자에게는 적절치 않는 것이지만- 즉, 생물계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있을지라도 결코 이타적인 희생이나 사랑이 아니라 유전자의 안정적인 자기 확보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 예가 근친도 계산을 통해서 명백해진다. 즉 유전자가 유전자 풀(pool)속에서 수를 늘리기 위해 마치 대단히 이타주의로 보여지는 행위를 남기는 데 이 수행과정을 통한 확률적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근친도'란 2인의 친족이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게 되는 경우를 확률로 나타낸 것으로 한 계산에 의하면, 5인의 사촌을 구조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가 개체군 속에 증가하는 일은 없으나 5인의 형제나 10인의 사촌 때문에 생명을 버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유전자 수는 증가된다. 즉 유전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수가 증가되는 방향으로 개체를 움직이도록 정보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자가 성공하는 최소의 필요조건은 그 유전자가 2인 이상의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나 4인 이상의 배다른 형제(또는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 손자) 또는 8인 이상의 사촌 등을 구하고 죽는 것이다.

어쨌든 어떤 개체든지 자신에 대한 '근친도'는 1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에 대한 위험 대처와 이익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근친상간 금지는 주관적 문화개념에 불과하지 결코 유전자 이익성과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이다. 유전자 선택 작용은 지금도 오직 자신의 순 이익만을 지향하면서 발휘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 이익이란 다름 아닌 '자기 안정성'이다.

흔히들 사회가 우선인지 개인이 우선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해야 하며 이러한 제한이 전체적으로 각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최대치의 이익이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서 까다로운 지혜가 요구되기도 한다.

즉, '사회'라는 개념만 상정하면 항상 '협력심' '협동심'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인간과 자연 세계의 현실을 알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엄밀한 과학에 의해서 재평가 받기를 저자는 요구하고 있다. 인간을 쥐고 있는 사회적 권위나 힘이 아니다. 각개체를 궁극적으로 쥐고 있는 것은 유전자의 그 비정한 자기 이기성 뿐이다. 이 이기성이야말로 유전자의 안정성에 부합되는 불변의 우주적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안정성에 심한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회'라는 환상이며 이 체제 유지를 위해 따라오는 인간의 품격과 품위 유지이다. 이러한 전체를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는 이타적 희생정신은 각 개체가 지닌 유전자의 안정적 원칙에 위배된다.

즉 DNA는 우연에 지배를 받는 괴물이므로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통제되지도 않는 괴물을 억지로 통제하려는데서 문명과 문화가 발생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안에서는 학습과 교육과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유전학이라는 엄밀 과학을 막아내지 못하는 비실제적 엄포에 불과하다. 더 이상 [나]가 없기는 도킨스의 유전학이나 아니면 일반 사회학문이나 어느 쪽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사랑을 원한다.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를 원한다.

평 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3:3). 하나님은 인간의 육됨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문제는 그 육은, 육 그 자체를 위한 육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무관한 육은 인간 소관을 벗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남기셨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이 본문의 말씀처럼, 성도가 영광의 몸이 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능력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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