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기능
이성의 기능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이성의 기능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 1861 - 1947)
번 역 : 김용옥
출판사 : 통나무
과학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진리 규정은 과학을 경유해서 재가를 얻는 것으로 신빙성을 보장받을 지경이다. 과연 여타의 학문들이 이런 과학과 기술 통치에 들러리 구실만을 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도리어 이런 과학 맹신주의로 말미암아 사장된 소중한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강력히 견제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와 역자는 현대 과학 맹신주의의 이면에 왜곡된 이성적 노선이 닿아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낸다.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독단적 폐쇄성과 자연이 보여주는 개방성은 서로 화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잘못 읽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주 스스로가 방출하는 목적성과 진화성을 과학이라는 이름만으로 닫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에 있어 절대 종교를 대신하여 과학자들이 사이비한 예언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 실정이다. 과학자들을 더 이상 편협하고 완고한 중세 성직자로 삼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근간 150년 동안 이룩된 과학, 기술력의 증가는 기실 그 동안 인류 역사 보여진 이성의 두 가지 기능이 서로 합쳐져서 생성된 결과일 뿐이다. 그 두 가지 기능이란 바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다.
실천이성이란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방법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 비해 사변이성이란 모든 현상과 물질의 본성을 함유하는 일반 원리를 파악하려는 이성이다. 인류사적으로 볼 때 실천이성의 역사는 인류가 동물로부터 분화되는 그 시점부터 몇 백 만년이 된다. 그러나 사변이성의 역사는 기껏해야 약 6000년 전부터이고 그것도 희랍식 방식으로 정립된 것도 약 2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이 그리스의 사변이성은 로마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서 그 이후에 제 자리를 얻지 못했다.
의료 기술의 경우 18세기까지만 해도 3800년 전의 애굽의 의료 기술 정도의 수준이었다. 로마시대 이 후, 중세에 들어와서 기술 발달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너무 한정적으로 습득된 지식만을 가지고 지적인 체계의 틀만 짜는데 안주했기 때문이다. 자기 문명의 한계를 스스로 안다는 것이야말로 이성의 진정한 기능이다. 단순히 환경에 대한 순응이나 적응성만으로 자연 세계의 비약적인 진화성을 설명할 수 없다. 생존의 의지 안에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이성적 작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에 따라 증가하는 혼란도(엔트로피)에 불구하고 역으로 그것을 거스려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생명이며 바로 이러한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변이성이다. 그냥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만족도를 더해 가면서 생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성의 기능이야말로 현 우주를 설명하는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목적인적 원리이다. 모든 생명에는 생리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의도성'은 독단적 학문 방법론이 등장하는 경우 늘 제거되는 위기를 겪었다. 하나의 유용한 방법론이 출현하면 그 방법론은 스스로 범위를 단단하게 축소해서는 곧장 확정 짓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자기 방법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진리만을 챙기려는 보수적 성향을 띤다. 이것이 생리적으로 피곤하게 만든다. 피곤은 이성의 반(反)이다. 생체는 리듬을 타고 산다. 원초적인 욕망이 그러하다. 이성이란 곧 욕망 중의 욕망임을 의미한다. 이성의 역기능이 작용한다.
역기능이란 위로 향하여 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뜻한다. 역기능의 주체는 실천적 이성이다. 사변이성으로 정체되었던 중세가 지나고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변이성은 한계를 맞이했다. 관심의 범주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범주도 사실상 중세의 사변이성이 제공한 토대 안에서 형성된 것들이었다. 그 사변이성 뒷 켠에 몰래 숨어 있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관찰하는 습관이었다. 그리고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실천이성이 사변이성을 대체하였다. 그 결과로 인해 실천적 이성 안에서 목적론적 원인론은 제거되고 오직 동력적 원인론만 인정받았다. 이제 수학이 그 동안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이 누리던 독단과 권위를 독차지하며 행세하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변신하기 위한 충동들이 실천이란 방법론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그 대신 철저하게 목적적 원인론을 삭제시켜 버렸다.
그 이유는, 공허한 물체적 속성을 정신적인 영역까지 확대시켜 최종적인 현 실태로 확장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몸을 이루는 무기질에 적용되는 물리, 화학적 법칙 이외는 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칸트에 와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은 철저하게 갈라선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을 단순히 "나타남"의 체계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자연은 그저 현상적이다. 이로서 형이상학에 접근할 방도가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 자연이란, 단지 인간이라는 주체가 감각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의 자연에 불과하다. 이성의 기능이 실천 이성화로 보다 철저화 된 것이다. 그러나 고차원적인 이성은 가만있지 않는다. 이성이 새로운 주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스로를 발현시킨다. 무정부적인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생시키게 하는 것이다.
최초의 세심한 관찰만으로 특정 과학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관찰이란 그저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다. 여기에 '귀납적 일반화'가 필히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귀납적 일반화' 작업 조차 그 당시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거쳐 검증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수학공식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단순한 수학 공식에서 모든 파생되는 체험을 다 함유한다고 볼 수 없다. 마치 마술사가 상투적인 주문을 외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식으로 과학 공식을 활용시켜서는 아니 된다. 과학은 어떤 경우이든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모든 진리를 다 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위치에서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을 지향했는지 그 고유한 성격에 준해서 나름대로 지적 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과학의 추상화이며 사변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도식의 생산이야말로 사변이성의 가장 중요한 업무에 속한다. 도식은 상상력을 포용한다. 연역적 논리를 구성하고 그 확대를 허용한다. 이 사변 이성적 성격은 이미 그리스인들에 의해 실시되고 있었다. 사변이성은 그 어떤 초월조차도 구속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과학 맹신주의는, 교만스럽게도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은 그 어떤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과학의 이성적 측면에서 반드시 플라톤의 이성과 율리씨즈의 이성이 공존한다.
율리씨즈의 이성이란 실용성과 유용성 증가를 위한 즉각적 방법론을 유발하는 이성이라면 플라톤의 이성이란 완벽한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이성을 뜻한다. 그런데 율리씨즈 이성만으로 완벽하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편협한 과학의 오류이다. 범우주론에 있어 상향이란 하향을 전제로 하고, 질서란 혼돈을 전제로 하여 생성되어 나가는 법이다. 이런 목적론을 배제하고서는 도무지 생명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성의 본질이란 늘 맹목적 욕구를 이기고 새로움을 제공하는데 있다. 이런 이성을 본질을 토대로 해야지 만 제대로 된 과학과 우주관이 형성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평 가
저자는 다음의 두 가지면에 있어 무리한 이성적 전략을 강요하고 있다.
첫째, 생명의 가치성과 존엄성을 순수한 우주의 창발적 상향 욕망에다 전적으로 떠맡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삶의 증진을 위한 욕망 분출을 그대로 정당화하고 절대화하게 되면, 소멸되고 사멸되는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했기에 도태되는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저자가 애써 구분 지은 양적 진화와 질적 진화 사이의 구별 자체가 의미 없게 되어 버렸다.
둘째, 저자의 기본 사상이 오로지 "있음"에서만 "있음"이 발생되는 가능성만을 인정하는데 문제점이 있다. 즉 "있음"에서 "있게" 만드는 원리까지 알아 낼 수 있고 도출할 수 있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견해는 "없음"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일방적으로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우주 존재에 대한 가치성을 자체적으로 절대화시키는 작업의 일종이다. 과연 무한정으로 이어지는 목적 지향성 자체를 정당한 우주의 존재 의의, 존재 가치라고 당연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우주의 의미는 우주 밖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우주 없었음"이라는 상황에서 "우주 있음" 상황을 유발하는 동기가 비로소 우주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 아닐까? 그 첫 번째 목적성 ― 동시에 최종적인 목적성 ―이 목적성을 저자는 일방적으로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첨부파일 : 이성의기능.hwp (48.0K), Down:17
관리자(IP:124.♡.84.82)
09-02-24 15:40
이성의 기능
이 근 호 목사
저 자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 1861 - 1947)
번 역 : 김용옥
출판사 : 통나무
과학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진리 규정은 과학을 경유해서 재가를 얻는 것으로 신빙성을 보장받을 지경이다. 과연 여타의 학문들이 이런 과학과 기술 통치에 들러리 구실만을 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도리어 이런 과학 맹신주의로 말미암아 사장된 소중한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강력히 견제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와 역자는 현대 과학 맹신주의의 이면에 왜곡된 이성적 노선이 닿아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낸다.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독단적 폐쇄성과 자연이 보여주는 개방성은 서로 화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잘못 읽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주 스스로가 방출하는 목적성과 진화성을 과학이라는 이름만으로 닫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에 있어 절대 종교를 대신하여 과학자들이 사이비한 예언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 실정이다. 과학자들을 더 이상 편협하고 완고한 중세 성직자로 삼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근간 150년 동안 이룩된 과학, 기술력의 증가는 기실 그 동안 인류 역사 보여진 이성의 두 가지 기능이 서로 합쳐져서 생성된 결과일 뿐이다. 그 두 가지 기능이란 바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다.
실천이성이란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방법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 비해 사변이성이란 모든 현상과 물질의 본성을 함유하는 일반 원리를 파악하려는 이성이다. 인류사적으로 볼 때 실천이성의 역사는 인류가 동물로부터 분화되는 그 시점부터 몇 백 만년이 된다. 그러나 사변이성의 역사는 기껏해야 약 6000년 전부터이고 그것도 희랍식 방식으로 정립된 것도 약 2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이 그리스의 사변이성은 로마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서 그 이후에 제 자리를 얻지 못했다.
의료 기술의 경우 18세기까지만 해도 3800년 전의 애굽의 의료 기술 정도의 수준이었다. 로마시대 이 후, 중세에 들어와서 기술 발달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너무 한정적으로 습득된 지식만을 가지고 지적인 체계의 틀만 짜는데 안주했기 때문이다. 자기 문명의 한계를 스스로 안다는 것이야말로 이성의 진정한 기능이다. 단순히 환경에 대한 순응이나 적응성만으로 자연 세계의 비약적인 진화성을 설명할 수 없다. 생존의 의지 안에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이성적 작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에 따라 증가하는 혼란도(엔트로피)에 불구하고 역으로 그것을 거스려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생명이며 바로 이러한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변이성이다. 그냥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만족도를 더해 가면서 생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성의 기능이야말로 현 우주를 설명하는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목적인적 원리이다. 모든 생명에는 생리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의도성'은 독단적 학문 방법론이 등장하는 경우 늘 제거되는 위기를 겪었다. 하나의 유용한 방법론이 출현하면 그 방법론은 스스로 범위를 단단하게 축소해서는 곧장 확정 짓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자기 방법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진리만을 챙기려는 보수적 성향을 띤다. 이것이 생리적으로 피곤하게 만든다. 피곤은 이성의 반(反)이다. 생체는 리듬을 타고 산다. 원초적인 욕망이 그러하다. 이성이란 곧 욕망 중의 욕망임을 의미한다. 이성의 역기능이 작용한다.
역기능이란 위로 향하여 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뜻한다. 역기능의 주체는 실천적 이성이다. 사변이성으로 정체되었던 중세가 지나고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변이성은 한계를 맞이했다. 관심의 범주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범주도 사실상 중세의 사변이성이 제공한 토대 안에서 형성된 것들이었다. 그 사변이성 뒷 켠에 몰래 숨어 있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관찰하는 습관이었다. 그리고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실천이성이 사변이성을 대체하였다. 그 결과로 인해 실천적 이성 안에서 목적론적 원인론은 제거되고 오직 동력적 원인론만 인정받았다. 이제 수학이 그 동안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이 누리던 독단과 권위를 독차지하며 행세하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변신하기 위한 충동들이 실천이란 방법론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그 대신 철저하게 목적적 원인론을 삭제시켜 버렸다.
그 이유는, 공허한 물체적 속성을 정신적인 영역까지 확대시켜 최종적인 현 실태로 확장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몸을 이루는 무기질에 적용되는 물리, 화학적 법칙 이외는 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칸트에 와서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은 철저하게 갈라선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을 단순히 "나타남"의 체계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자연은 그저 현상적이다. 이로서 형이상학에 접근할 방도가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 자연이란, 단지 인간이라는 주체가 감각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의 자연에 불과하다. 이성의 기능이 실천 이성화로 보다 철저화 된 것이다. 그러나 고차원적인 이성은 가만있지 않는다. 이성이 새로운 주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스로를 발현시킨다. 무정부적인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생시키게 하는 것이다.
최초의 세심한 관찰만으로 특정 과학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관찰이란 그저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다. 여기에 '귀납적 일반화'가 필히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귀납적 일반화' 작업 조차 그 당시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거쳐 검증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수학공식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단순한 수학 공식에서 모든 파생되는 체험을 다 함유한다고 볼 수 없다. 마치 마술사가 상투적인 주문을 외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식으로 과학 공식을 활용시켜서는 아니 된다. 과학은 어떤 경우이든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모든 진리를 다 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위치에서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을 지향했는지 그 고유한 성격에 준해서 나름대로 지적 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과학의 추상화이며 사변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도식의 생산이야말로 사변이성의 가장 중요한 업무에 속한다. 도식은 상상력을 포용한다. 연역적 논리를 구성하고 그 확대를 허용한다. 이 사변 이성적 성격은 이미 그리스인들에 의해 실시되고 있었다. 사변이성은 그 어떤 초월조차도 구속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과학 맹신주의는, 교만스럽게도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은 그 어떤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과학의 이성적 측면에서 반드시 플라톤의 이성과 율리씨즈의 이성이 공존한다.
율리씨즈의 이성이란 실용성과 유용성 증가를 위한 즉각적 방법론을 유발하는 이성이라면 플라톤의 이성이란 완벽한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이성을 뜻한다. 그런데 율리씨즈 이성만으로 완벽하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편협한 과학의 오류이다. 범우주론에 있어 상향이란 하향을 전제로 하고, 질서란 혼돈을 전제로 하여 생성되어 나가는 법이다. 이런 목적론을 배제하고서는 도무지 생명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성의 본질이란 늘 맹목적 욕구를 이기고 새로움을 제공하는데 있다. 이런 이성을 본질을 토대로 해야지 만 제대로 된 과학과 우주관이 형성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평 가
저자는 다음의 두 가지면에 있어 무리한 이성적 전략을 강요하고 있다.
첫째, 생명의 가치성과 존엄성을 순수한 우주의 창발적 상향 욕망에다 전적으로 떠맡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삶의 증진을 위한 욕망 분출을 그대로 정당화하고 절대화하게 되면, 소멸되고 사멸되는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했기에 도태되는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저자가 애써 구분 지은 양적 진화와 질적 진화 사이의 구별 자체가 의미 없게 되어 버렸다.
둘째, 저자의 기본 사상이 오로지 "있음"에서만 "있음"이 발생되는 가능성만을 인정하는데 문제점이 있다. 즉 "있음"에서 "있게" 만드는 원리까지 알아 낼 수 있고 도출할 수 있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견해는 "없음"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일방적으로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우주 존재에 대한 가치성을 자체적으로 절대화시키는 작업의 일종이다. 과연 무한정으로 이어지는 목적 지향성 자체를 정당한 우주의 존재 의의, 존재 가치라고 당연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우주의 의미는 우주 밖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우주 없었음"이라는 상황에서 "우주 있음" 상황을 유발하는 동기가 비로소 우주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 아닐까? 그 첫 번째 목적성 ― 동시에 최종적인 목적성 ―이 목적성을 저자는 일방적으로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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