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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와 절대무성경신학골로새서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와 절대무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와 절대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니시타니 게이이치
번 역 : 정병조
출판사 : 대원정사

예수님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철저히 규명하게 되면 결국에는 종교에 이르게 되는데, 본 책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가지고 서양 철학과 과학과 기독교 사상마저 극복하고 인류에게 합당한 진리의 빛과 터전을 마련해 주고자 제시된 책이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은 과학 이외의 그 어떤 입장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는 절대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생물의 경우에 그 자연 법칙이 생물이 고유적으로 지닌 본능적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본능은 그 생물체에 있어 자체적으로 목적적인 성격의 장을 형성한다. 이 목적성이 생물로 하여금 자연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이 법칙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 목적성은 기계의 등장으로 대변될 수 있는데 하지만 철저한 기계화 문명이 도리어 인간 스스로를 무관심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기계적 작용이 자연 가운데로 삽입되면서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행세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만 것이다. 만약 여기서 인간들이 이 기계적 자연 법칙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면 먼저 주체 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본래의 자기를 되찾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체의 근거가 보편적 존재에 탐구 문제는 이미 '자아'라는 하나의 문제로 바뀌어져 있는 상태이다.

주제 문제는 더 이상 객체화가 불가능한 입장에 놓여 있다. 주체의 존재 가능 근거가 결코 주체 속에 존재할 수 없었고 경건되고 고상한 인격이라도 자신의 자각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 문제가 자신에게는 벌써 '허무'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참된 '리얼리티'(실재, 實在)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억매여 있다.

이러한 허무 속에서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게 된다. 인간들의 보편적 허무를 악으로 규정하고서는 그 악을 해결 함으로서 허무로부터 해방되려는 기독교적 노력이 그 일환이다. 즉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그 허무성 자체가 신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 것을 창조했다. 동시에 완전성 속에는 신이 '자기를 비운다는 정신'도 함께 들어가 있다. 이로서 신은 자신의 큰 리얼리티를 인간에게 불어넣게 된다. 물이 흘러내려오자 자연적으로 도랑이 생기는 격이다. 그런데 이 리얼리티는 인간의 자아 중심적인 자기, 근원적인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부정시키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사랑이다. 절대 부정이면서 절대 긍정으로써 인간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 사상은 인간들로 하여금 진정한 주체성을 회복시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지 보여질 뿐인 자유, 가상적인 자립성에 불과한 자유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에 의존하고 사는 자립적인 존재자라든지, 신의 의지에 속하는 허무가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한 인간은 진정한 리얼리티를 이룰 수 없다.

신의 의존해서 허무를 극복하려는 것에 대든 철학자가 있었다. 니체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죽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허무화의 극한을 통해 신이 없는 채 시간과 역사를 극단적으로 세속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지금'이라는 한 순간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여기서부터 초월적인 '유'의 영원성이 아니라 초월적 '무(無)'의 영원성이 활짝 열린다.

이 시간의 현재성 안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인 '권력에의 의지'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티 없는 유희'. '목적 없는 활동'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불교의 공 사상으로 볼 때, 니체의 권력 의지라는 주장도 근원적인 실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권력 의지가 어떤 사물로 간주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타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유'와 '시간' 무한한 짐으로 다가 온다. 유와 시간으로 형성된 인간은 결국 '시간 -내 -존재'이다. 시간 내에서 존재하는 유(being)는 시간 속에서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뭔가 '됨(becoming)'을 성사시키는 행(doing)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부단히 부채를 증가시킨다. 무언가 하면서 존재해야 된다는 유위적(有爲的) 존재방식은 존재의 짐이라고 볼 수 있는 무한한 부담을 상쇄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러한 부채 삭감 작업 자체가 새로운 부채를 발생시킨다. '부채'를 발생시키는 근본은 부채를 없애는 작업의 근본, 그 자체에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현 존재는 끝없이 자가 자신을 벗어나지만, 그렇게 벗어남으로써 끝없이 자신의 속에 갇히게 되어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게 된다. 언제나 자신인 것이다.

이처럼 '자승자박'적 형태의 자기 모순적인 역동성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다. 더 나아가서 이처럼 무엇인가 '한다'는 행위는 세계 연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란 늘 타인과의 상호 한정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이것이 업의 세계이며 인연의 관계이다. 종래의 서양 존재론에서는 이 '세계-내-존재'라는 '유(有)'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성과 감성의 대상으로만 간주해서 풀이했다. '사물' 자체는 그 자신에게 중심이 있는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이 귀일 하는 중심은 어디까지나 '유'의 체제 내부에서만 사유되어 있고, 세계 내재적으로만 생각했었다. 모든 사물들이 절대 독자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자기- 내(內)- 폐쇄성'이 너무나 허무한 모습을 띤다. 결코 여기서는 다수와 차별을 없앨 수가 없다. 자기 '안'에서 '밖'을 보는 한 그 사물의 근본을 실재적으로 접하는 것은 의식 자체의 거리성 때문에 늘 불가능하다. 의식의 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중심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유'는 허무 위에서 안주하려 한다. 그곳은 의지할 곳 없어 끊임없이 '무화(無化)' 속에 있으면서 허물어지는 위태로움을 포함함으로서만 성립한다. 이로써 업에 속한 존재는 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지만 결코 자기 그 자체의 근본으로는 돌아 갈 수 없다. 시간 속에서 계속 유만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의 입장은 어떠한가?

공은,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으로부터 선택된 자 내지는 예정된 자라는 종교적 자기중심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비하가 또다시 다른 인간에 대한 우월감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공은, 모든 종류의 의지의 입장을 절대 부정으로 넘어선 바닥이 없는 곳에서 모든 사물을 각자 존재하게 하는 힘의 장이다. 비대상적인 사물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주인이자 종이 되는 회호(回互)의 세계이다. "왜"라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삶,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으로서의 실존이다. 마치 '한번 크게 죽으니 하늘과 땅이 새롭도다'라는 경지를 말한다.

깨달음은,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달음을 여는 동시에 '자기가'라는 존재 방식을 탈락시킨다. 결국 자기와 사물이 전체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공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기를 무화해서 타자를 자기의 주체로 삼는다. 스스로 모든 사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부채를 새로 짊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짐 짊어짐은 노동이 아니라 유희이다. 즉 "온종일 일했는데 하나도 한 일이 없다"는 식의 無爲적 행위이다. 어쨌든 '공'사상은, 자력이냐 타력이냐, 혹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는 종교적 교리 입장을 떠나서 '리얼리티'를 탐구한다는 사실을 근본적인 원리로 여긴다. 늘 '큰 죽음'을 통해서 존재로부터 초월하여 무한한 열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공은 '유' 밖에 있는 별도의 것이 아니라(허무가 아니라) 유와 하나인 자기 동일체로서 시간 속에 투사된다. 공은 무(無)마저 초월하는 것이다.

성경적 평가

저자가 기독교 사상을 거론하면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정말 십자가 복음을 안다면 오직 구체적 인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차별적인 찬미와 영광을 돌릴 뿐이다. 다른 이름과 차이나는 오직 그 분의 이름만을! 성령이라는 분은 결코 개인에게 영생 주입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근거로 세상을 정죄하려 오신 분이다. 따라서 성령 받은 자도 이러한 성령의 기능에 참여될 뿐이다. 예수님만이 만물의 으뜸이다.(골 1:18)

첨부파일 : 종교란무엇인가.hwp (48.0K), Down:19

관리자(IP:124.♡.84.82)

09-02-24 12:20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와 절대무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니시타니 게이이치
번 역 : 정병조
출판사 : 대원정사

예수님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철저히 규명하게 되면 결국에는 종교에 이르게 되는데, 본 책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가지고 서양 철학과 과학과 기독교 사상마저 극복하고 인류에게 합당한 진리의 빛과 터전을 마련해 주고자 제시된 책이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은 과학 이외의 그 어떤 입장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는 절대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생물의 경우에 그 자연 법칙이 생물이 고유적으로 지닌 본능적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본능은 그 생물체에 있어 자체적으로 목적적인 성격의 장을 형성한다. 이 목적성이 생물로 하여금 자연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이 법칙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 목적성은 기계의 등장으로 대변될 수 있는데 하지만 철저한 기계화 문명이 도리어 인간 스스로를 무관심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기계적 작용이 자연 가운데로 삽입되면서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행세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만 것이다. 만약 여기서 인간들이 이 기계적 자연 법칙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면 먼저 주체 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본래의 자기를 되찾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체의 근거가 보편적 존재에 탐구 문제는 이미 '자아'라는 하나의 문제로 바뀌어져 있는 상태이다.

주제 문제는 더 이상 객체화가 불가능한 입장에 놓여 있다. 주체의 존재 가능 근거가 결코 주체 속에 존재할 수 없었고 경건되고 고상한 인격이라도 자신의 자각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 문제가 자신에게는 벌써 '허무'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참된 '리얼리티'(실재, 實在)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억매여 있다.

이러한 허무 속에서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게 된다. 인간들의 보편적 허무를 악으로 규정하고서는 그 악을 해결 함으로서 허무로부터 해방되려는 기독교적 노력이 그 일환이다. 즉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그 허무성 자체가 신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 것을 창조했다. 동시에 완전성 속에는 신이 '자기를 비운다는 정신'도 함께 들어가 있다. 이로서 신은 자신의 큰 리얼리티를 인간에게 불어넣게 된다. 물이 흘러내려오자 자연적으로 도랑이 생기는 격이다. 그런데 이 리얼리티는 인간의 자아 중심적인 자기, 근원적인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부정시키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사랑이다. 절대 부정이면서 절대 긍정으로써 인간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 사상은 인간들로 하여금 진정한 주체성을 회복시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지 보여질 뿐인 자유, 가상적인 자립성에 불과한 자유만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에 의존하고 사는 자립적인 존재자라든지, 신의 의지에 속하는 허무가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한 인간은 진정한 리얼리티를 이룰 수 없다.

신의 의존해서 허무를 극복하려는 것에 대든 철학자가 있었다. 니체이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죽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허무화의 극한을 통해 신이 없는 채 시간과 역사를 극단적으로 세속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지금'이라는 한 순간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여기서부터 초월적인 '유'의 영원성이 아니라 초월적 '무(無)'의 영원성이 활짝 열린다.

이 시간의 현재성 안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인 '권력에의 의지'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티 없는 유희'. '목적 없는 활동'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불교의 공 사상으로 볼 때, 니체의 권력 의지라는 주장도 근원적인 실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권력 의지가 어떤 사물로 간주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타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유'와 '시간' 무한한 짐으로 다가 온다. 유와 시간으로 형성된 인간은 결국 '시간 -내 -존재'이다. 시간 내에서 존재하는 유(being)는 시간 속에서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뭔가 '됨(becoming)'을 성사시키는 행(doing)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부단히 부채를 증가시킨다. 무언가 하면서 존재해야 된다는 유위적(有爲的) 존재방식은 존재의 짐이라고 볼 수 있는 무한한 부담을 상쇄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러한 부채 삭감 작업 자체가 새로운 부채를 발생시킨다. '부채'를 발생시키는 근본은 부채를 없애는 작업의 근본, 그 자체에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현 존재는 끝없이 자가 자신을 벗어나지만, 그렇게 벗어남으로써 끝없이 자신의 속에 갇히게 되어 자신의 '근본'을 잃지 않게 된다. 언제나 자신인 것이다.

이처럼 '자승자박'적 형태의 자기 모순적인 역동성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다. 더 나아가서 이처럼 무엇인가 '한다'는 행위는 세계 연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란 늘 타인과의 상호 한정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이것이 업의 세계이며 인연의 관계이다. 종래의 서양 존재론에서는 이 '세계-내-존재'라는 '유(有)'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성과 감성의 대상으로만 간주해서 풀이했다. '사물' 자체는 그 자신에게 중심이 있는 존재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이 귀일 하는 중심은 어디까지나 '유'의 체제 내부에서만 사유되어 있고, 세계 내재적으로만 생각했었다. 모든 사물들이 절대 독자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자기- 내(內)- 폐쇄성'이 너무나 허무한 모습을 띤다. 결코 여기서는 다수와 차별을 없앨 수가 없다. 자기 '안'에서 '밖'을 보는 한 그 사물의 근본을 실재적으로 접하는 것은 의식 자체의 거리성 때문에 늘 불가능하다. 의식의 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중심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유'는 허무 위에서 안주하려 한다. 그곳은 의지할 곳 없어 끊임없이 '무화(無化)' 속에 있으면서 허물어지는 위태로움을 포함함으로서만 성립한다. 이로써 업에 속한 존재는 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지만 결코 자기 그 자체의 근본으로는 돌아 갈 수 없다. 시간 속에서 계속 유만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의 입장은 어떠한가?

공은,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으로부터 선택된 자 내지는 예정된 자라는 종교적 자기중심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완전한 비하가 또다시 다른 인간에 대한 우월감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공은, 모든 종류의 의지의 입장을 절대 부정으로 넘어선 바닥이 없는 곳에서 모든 사물을 각자 존재하게 하는 힘의 장이다. 비대상적인 사물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주인이자 종이 되는 회호(回互)의 세계이다. "왜"라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삶,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으로서의 실존이다. 마치 '한번 크게 죽으니 하늘과 땅이 새롭도다'라는 경지를 말한다.

깨달음은,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달음을 여는 동시에 '자기가'라는 존재 방식을 탈락시킨다. 결국 자기와 사물이 전체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공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기를 무화해서 타자를 자기의 주체로 삼는다. 스스로 모든 사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부채를 새로 짊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짐 짊어짐은 노동이 아니라 유희이다. 즉 "온종일 일했는데 하나도 한 일이 없다"는 식의 無爲적 행위이다. 어쨌든 '공'사상은, 자력이냐 타력이냐, 혹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는 종교적 교리 입장을 떠나서 '리얼리티'를 탐구한다는 사실을 근본적인 원리로 여긴다. 늘 '큰 죽음'을 통해서 존재로부터 초월하여 무한한 열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공은 '유' 밖에 있는 별도의 것이 아니라(허무가 아니라) 유와 하나인 자기 동일체로서 시간 속에 투사된다. 공은 무(無)마저 초월하는 것이다.

성경적 평가

저자가 기독교 사상을 거론하면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정말 십자가 복음을 안다면 오직 구체적 인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차별적인 찬미와 영광을 돌릴 뿐이다. 다른 이름과 차이나는 오직 그 분의 이름만을! 성령이라는 분은 결코 개인에게 영생 주입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근거로 세상을 정죄하려 오신 분이다. 따라서 성령 받은 자도 이러한 성령의 기능에 참여될 뿐이다. 예수님만이 만물의 으뜸이다.(골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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